가을의 길목에서
시곗바늘이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자정쯤 공항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한 시간이 지나자 지치는 마음이 들었다. 전광판에 떠 있는 연착 소식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두 시간이나 연착이라니. 현대 사회에 이런 일이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비행 편을 제대로 안 알아보고 온 내 잘못이 컸지만, 그래도 짜증이 일었다. 미술관에서 바로 달려오는 길이라 다소 피곤하기도 했고. 목을 죄이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은 런던에서 전시를 마친 정진우가 입국하는 날이었다. 자정이 지났으니 정진우의 생일이기도 했다. 괜히 옆 좌석에 내려놓은 가방을 한 번 쓰다듬고, 손목에서 돌아다니는 시계를 돌렸다. 평소 나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시계를 비롯한 액세서리를 일절 하지 않았지만, 올해 여름 이후 이 시계는 내 손목에서 하루도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시계를 채워주던 손의 감촉이 절로 떠올랐다. 우수수 소름이 돋는 손목을 조금 매만지다, 커피라도 마실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밤에도 25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이어지는 야근에 지쳐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뻗어버린 내 옆에 앉은 정진우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요.’
으응. 고마워. 이게 뭐야……. 시계네. 예쁘다…….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지쳐 있던 내 손목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고, 아차 싶어서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떴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입술을 약간 벌리고 미간을 찌푸린 정진우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반응이……. 왜지?’
혼잣말도, 뭣도 아닌 걸 중얼거리며, 서운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서른의 정진우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덜 뜬 눈을 하고도 웃음이 터져 버렸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더욱 삐진 정진우를 달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시계를 찬 채로 실실 웃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버려 열한 번째의 <고난>을 보지 못한 이유로 정진우의 화를 더하기도 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기분을 풀어줬다. 출근하는 나를 붙들고 한참 동안 외로이 벽에 기대있는 <고난>을 가리키며 훈계했던 정진우를 생각하다가, 물고 있던 커피를 넘기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귀여울 것이 분명한 정진우 덕에, 머릿속에서 부글부글한 짜증이 좀 풀리는 것도 같았다. 콧노래를 슬슬 부르며 앉아서 아침부터 뭘 하지, 생각했다. 아마 해가 중천에 떠야 눈을 뜰 것이 분명한 정진우와 뭐 대단한 걸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참 정진우와 할 만한 일들을 생각하다가 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정진우의 집에 있어요. 한마디면 모든 계획이 도루묵이 될 미래가 그려져서.
아마 정진우는 십중팔구 뭘 할까? 하고 물으면 오늘도 ‘집에 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올해 1월, 내가 계약 기간이 끝난 집을 정리하고 정진우의 집으로 들어온 이후, 야심차게 세웠던 정진우의 동거 계획이 이 주도 지나지 않아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진우의 계획대로 집에서 둘이 붙어 하루 종일 뒹굴며 영화도 보고, 섹스도 하고, 식사도 하기엔 우리는 너무 바빴다. 내년 여름, 두 달간 미술관 리모델링 계획이 잡힌 덕분에 올해 내도록 전시 러시에 시달린 나도 나였지만, 정진우 또한 시간을 쪼개는 삶을 살아야 했다. 언제부터 언제까진 베를린에, 언제부터 언제까진 바젤에, 언제부터 언제까진 블라디보스토크에……. 많이 줄었다는 일정이 이 정도였다. 해외 전시가 잦은 정진우는, 젊은 작가이기 때문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자리는 모두 내밀어야 했다. 예정되어 있는 해외 전시만 따져도 그 기간은 내년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막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이 되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는, 우리의 비극적인 운명을 비로소 깨달은 정진우가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출국장에 서서 선언하기도 했다.
‘이제 겹치는 휴일엔 무조건 집이야. 약속 금지. 중요한 일 금지.’
우리 집에서 입김이 가장 센 자는 정진우였다. 정진우의 선언 이후 우리는 겹치는 휴일이 되면 집에 찰싹 붙어서 영화도 보고, 섹스도 하고, 식사도 하고, 청소도 했다. 주로 식사는 정진우가 준비했고, 청소는 내가 했다. 서로가 별로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일할 때 한 사람은 집 안의 마스코트를 했다. 마스코트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방긋방긋 웃기, 예쁜 척하기, 얌전하기.
나는 얌전하기를 가장 잘했고, 정진우는 다 잘했다. 바닥에 어질러진 물건을 치우는 내 뒤에서 한껏 예쁜 척을 하고 있던 정진우를 떠올리다 이번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손을 들어 입가를 문질렀다. 앞에 있던 무리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정진우를 생각하면 시간은 항상 빨리 갔다. 전광판에 랜딩 표시가 반짝 빛났다. 빈 커피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주 만이다.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했지만, 당연히 실재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웰컴 보드라도 들고 있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입국 게이트 앞에서 서성였다.
빨리 와. 안전 바를 쓰다듬으며 괜히 중얼거렸다.
정진우는 정말 빨리 나왔다. 거의 일등으로 나왔다. 후드 티에 폭이 좁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면서 나오는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도 자지 못하는 정진우는, 장기간의 비행이 끝난 뒤에는 항상 저런 얼굴을 하곤 했다. 무표정한 낯으로 걸어 나오다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흰 얼굴에 웃음기가 살짝 맺혔다.
“너무 늦었죠. 이렇게까지 연착할 줄 알았으면 집에서 만나는 건데. 피곤하지?”
피곤이 듬뿍 묻은 목소리가 들리자, 정진우가 한국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내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 온다. 강아지같이 복실거리는 머리를 조금 매만지다가 떨어지지 않는 손을 떼어냈다.
“괜찮아. 어차피 내일 쉬는데, 뭐. 너는? 많이 피곤하지? 빨리 집부터 가자.”
새벽임에도 입국장은 입국하는 사람들과, 가족, 친구,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정진우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고 팔을 잡아끌었다. 얌전히 끌려오며 웅얼대는데, 뭐라고? 반문하자 입을 다문다. 아니에요. 하는 목소리가 까칠했다. 진짜 엄청 피곤하구나, 생각하며 자동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차가워진 공기가 몸을 감쌌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고 물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갈래?”
잠시간 나를 지긋이 쳐다보던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흡연구역을 찾아 나란히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마른 볼이 더욱 홀쭉하게 변한다. 무심결에 정진우의 옆모습을 훑었다. 익숙한 얼굴임에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흰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정진우가 연기를 뱉는다.
…….
나는 정진우의 옆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문 색소 옅은 입술과 내리깐 눈. 마른 턱선. 담배 연기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점. 선정적인 입술에 물린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간다.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퍼뜩 어떻게 두었는지도 모르던 다리를 모았다. 내 급한 몸짓에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레 허둥대는 나를 슬쩍 본 정진우가 담배를 끄고 팔에 걸려 있는 가방을 가져갔다.
“왜 그래? 괜찮아요?”
“아, 응.”
평소보다 표정이 없는 얼굴이 나를 훑었다. 괜스레 민망해져서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워들며 중얼거렸다.
“……내가 피곤한가.”
열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어느새 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캐리어를 잡은 정진우가 나를 끌었다.
“그러네. 오늘도 야근했죠? 빨리 가서 자자.”
별것도 아닌 말인데,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 나 왜 이러지. 정진우의 뒤통수를 흘끔거리며 자유로운 손으로 볼을 비볐다. 나는 평소보다 배는 심각하게 정진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원래도 종종 정진우에게 넋을 놓곤 하는 일이 있었으나 오늘처럼 찌릿한 성감이 함께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정진우에 의해 도출되는, 생경한 나의 모습이 당황스럽다. 언제나. 언제까지 너를 보아야 나는 온전히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 까만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뒤통수를 쫓으며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뜨끈한 볼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버석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캐리어부터 실었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제외하면 빈손인 정진우는 트렁크의 문을 닫으며 눈에 띄게 가뿐한 얼굴을 했다. 눈앞에 짐이 안 보이니 일단 좋은 것 같았다. 등 뒤로 돌려 맨 웨이스트백 끈을 매만지는 게 이것도 집어넣어 버릴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두 손에 무언가 있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매번 신기했다. 나는 항상 가방을 무겁게 하고 다니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주 다녀오는데, 그거 가지고 가는 것도 귀찮아하고. 옷 몇 벌과 노트북, 드로잉 북 정도가 들어 있는 캐리어의 무게는 그 크기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속이 시원하다는 태도가 더욱 재미있게 느껴졌다. 슬쩍 웃으며 하는 양을 보고 있으니 운전석의 문을 열던 정진우가 왜 그래요? 하고 물어왔다. 아니야. 고개를 젓고 보조석 문을 열었다.
집까지 운전은 정진우가 하기로 했다. 정진우는 저도 장기간의 비행에 지쳐 있으면서 선배 피곤하잖아. 하며 자연스레 운전석에 올라탔다. 잠시간, 아직 내가 운전하는 게 불안한가. 싶었지만 배려 받는 느낌이 좋기도 했다. 보조석에 올라타자 안전벨트를 매던 정진우가 내 손을 대뜸 잡아왔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더듬다가, 슬슬 손바닥을 간질이던 손가락이 천천히 깍지를 껴 왔다. 이 주 만에 하는 스킨십에 또다시 가슴이 조여 오고,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마주 닿은 손바닥 하나에, 갑작스레 이 주 내내 수화기를 타고 귓가에 흐르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20대에도 겪은 적 없는, 생소한 성욕이 온몸을 돌았다. 깍지 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언제부터인지 내 쪽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정진우와 눈을 맞추고 다리를 꼬았다. 한창 때도 아니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오랜만에 봤다고 뜬금없이 거기를 세우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어린애처럼, 시도 때도 없이 성기를 세우고,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아까부터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해 완전히 발기해버린 아랫도리를 가리기 위해 어색하게 꼬고 있는 다리를 깊은 시선이 훑었다.
잡은 내 손등을 톡, 톡, 두드리던 정진우가 말했다.
“선배……. 흥분했어?”
“…….”
잠깐의 침묵 후, 맑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깍지 낀 손을 풀어내고 양 볼을 감쌌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 말했다.
“빨리 가자. ……집에.”
나름대로 성적인 뉘앙스를 듬뿍 담아 이야기했으나, 정진우는 웬일인지 미동이 없었다. 볼과 입가를 연신 쓸어내리던 손을 내리고 옆을 흘끗 쳐다봤다. 핸들을 잡은 손이 보이고, 내 쪽을 향하는 얼굴과 시선이 맞았다. 붉은 혀가 연분홍빛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입 안을 자꾸만 빠르게 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 놓인 정적이 부담스러웠다. 입 안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집에… 가자니까.”
대답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진우의 시선에, 나는 어이없이 더욱 흥분하고 말았다. 괜히 바빠진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정진우의 볼을 밀었다. 왜. 뭐야 진짜. 빨리 가자니까. 바지 속이 답답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 깜깜한 밤하늘에 가로등이 빛나는 걸 잠시 보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사이에 은밀한 분위기라고는 전혀 없었음에도 뜬금없이 흥분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도,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듯 살피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불을 질러놓고 정작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에도 울컥했다. 저절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야. 뭐 해. 빨리,”
딱 방귀 뀐 놈이 성 내는 모양을 하고 짜증 내는 내 말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정진우의 입술이 막았다. 빨리 가― 하는 말끝이 맞닿은 정진우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육감적인 입술이 내 입술을 마구잡이로 짓이겼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끝이 이를 툭, 건드린다. 행하는 자가 정진우일 경우엔, 아주 작은 두드림에도 나는 어느 때나 쉽게 열렸다.
입 안으로 깊게 침입한 혀의 감각에 빠르게 깜빡이던 눈을 질끈 감았다. 시원한 머리칼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익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볼을 커다란 손바닥이 감싸온다. 손가락 끝이 귓가에 닿아 귓불을 매만진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거친 손의 감각이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통제를 잃고 들썩거리는 허리를 정진우의 손이 꽉 움켜잡았다. 그 손길에 더욱 자제를 잃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주 닿은 입술을 타고 웃음소리가 들어왔다.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웃지 말라는 의미였으나, 소용없었다.
시계를 찬 손목을 쥐고 매만지던 정진우가 맞닿았던 입술을 떼어냈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거미줄 같은 침이 늘어졌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진우가 촉촉해진 내 입술을 엄지로 짓누르고, 시계와 손목 사이에 키스했다. 나는 또다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정진우는 나에게 진정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조수석으로 넘어온 정진우가 무릎으로 허벅지를 꽉 눌렀다. 평소였으면 아프기만 했을 몸짓에도 나는 거친 숨소리를 터뜨렸다. 좁은 차 안에서 더욱 꽉 붙은 몸이 익숙한 냄새를 풍겼다. 아기 분 냄새 같기도, 봄 꽃 냄새 같기도 한 정진우의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급한 숨을 내뱉으며 후드 티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귓불을 잘근잘근 씹던 입술이 턱 선을 타고 목으로 내려가 목젖 부근을 콱 물어 온다. 신경을 짜르르 울리는 아픔에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아, 아파…….”
이런 상황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정진우는, 허벅지를 누르고 있던 무릎을 움직여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와 동시에 등받이가 쑥 내려갔다. 순식간에 시야가 천장으로 넘어갔다. 내 위를 완전히 타고 오른 정진우가 눈가에 입 맞추고 슬쩍 웃었다.
“……. 나도, 하고 싶었어. 비행기 탈 때부터.”
“…뭘.”
하나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 귓가에 붙은 입술이 움직였다. 집에 갈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자극적인 목소리와 함께 귓구멍으로 뜨거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부들거리는 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던 손가락이 아무렇게나 상의 안으로 손을 넣고 맨살을 쓸어내렸다. 한껏 벌려진 채로 정진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다리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완전히 벌어진 셔츠를 지나 벨트를 푸르고 지퍼를 내린 정진우가 팬티 위로 끄트머리가 젖은 채 고개를 내민 성기를 매만졌다. 귀를 집요하게 건드리는 입술과 젖은 천 사이로 만져지는 감각에 도리질을 치며 손에 닿은 후드 모자를 꽉 쥐었다. 억눌린 신음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아, 으…….”
긴 손가락이 젖은 천위로 모양이 드러난 귀두 부근을 둥글게 쓴다. 배 주변을 매만지던 다른 손이 어느새 위로 올라와 꼿꼿하게 서 있는 돌기를 꽉 꼬집었다. 약하게 떨리던 허리가 찌르르한 고통에 퍼뜩 들렸다. 언제 꼬집었냐는 듯 손바닥을 넓게 펴 가슴을 토닥거리는 손길에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뚝,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핥아 먹은 정진우가 육욕적인 얼굴을 하고 웃었다.
“맛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으…….”
드러난 성기의 윤곽을 따라 느리게 만지작거리던 손을 들어 팬티를 젖히고, 고무줄 위로 퉁겨 오르는 것을 잡아 챈 정진우가 중얼거린다. 여기서 나오는 건… 더 맛있고.
더 이상한 소리와 동시에 빠르게 쳐올리는 손길에 눈앞이 번쩍 튀었다. 촉촉하게 젖은 손바닥과 성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치솟아 오르는 성감과 함께 정진우의 호흡이 거칠어갔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둥을 잡고 빠르게 흔들던 손이 귀두 부근을 타고 올라와 요도 구를 거칠게 문질렀다. 타의에 의해 벌어진 채로 오므릴 수 없는 다리를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거렸다.
“아,… 나, 진우야. 나, 쌀 것, …아― 아!”
울컥 튀어 오르는 정액과 함께 힘이 한껏 들어간 허벅지가 경련했다.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한 폰 섹스 덕에 아주 묽은 정액이 가슴까지 튀어 올라 있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정진우가 가슴께에 묻은 정액부터 천천히 쓸어내려 날이 갈수록 체모가 줄어드는 성기 주변을 문질렀다. 더 이상 달아오를 수도 없을 것 같았던 볼이 더욱 화끈거렸다.
“하지 마….”
“왜……? 귀엽잖아.”
섹스를 할 때면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내 얼굴만 뚫어질 것처럼 쳐다보는 정진우는, 사람을 아주 민망하게 만들 줄 알았다. 이 주 전, 정진우의 손에 의해 깔끔하게 밀렸던 성기 주변이 내가 흩뿌린 정액으로 인해 질척하게 젖어갔다. 잠시 꿈쩍 않는 손을 밀어내려 팔뚝을 쥐고 흔들다가, 탈력감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 시도하지 않고 시트 위에 늘어졌다. 내가 하는 양을 보며 짧게 웃은 정진우가 허리를 두드렸다.
“잠깐 엉덩이 들어 볼래요?”
“……어?”
반문과 함께 자동으로 들린 엉덩이에 잘했어요, 중얼거린 정진우가 엉성하게 걸려 있던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잡아 내렸다. 엉덩이 밑으로 가죽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지체하지 않고 곧장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둔덕 사이를 느리게 매만졌다. 선뜩한 감각과 함께, 흥분감에 잘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이 보였다. 영 힘이 들어가지 않던 손아귀로 잡고 있던 팔뚝을 더욱 꽉 쥐고 흔들었다.
“잠깐, 잠깐만. 여기…, 집에 가서…….”
“……뭐야. 혼자만 빼고 이대로 가자고?”
“아니… 그건 아닌데, 야. 여기 밖이고, 차고… 사람이 언제.”
피곤한 몸에 사정까지 한 데다가, 앞뒤 가리지 않고 차 안에서 아랫도리를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집에 도착해서 자기 전에 할 것들을 나름대로 계획해 놨는데, 초장부터 다 뒤집어질 것 같아서 급하기도 했다. 허벅지에 닿는 정진우의 성기가 달아올라 있는 것이 느껴져서, 더욱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정리되지 않는 말을 뱉다가 포기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씨. 고등학생도 아니고… 그거 못 참아서 왜 이렇게……. 집도 아니고 차, 바깥, 아으… 잠시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아래에 침투한 손가락이 내벽을 이리저리 건드렸다. 설탕을 뿌린 것 같은 목소리가 감언이설을 뱉었다.
“괜찮아. 지금 시간에는 아무도 안 와.”
이어지던 생각은 하나이던 손가락이 두 개가 될 때부터 드문드문 끊기더니, 세 개로 넘어갈 때부터는 백지가 되었다. 사정 직후 머물던 감각이 예민함을 점점 키워갔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래를 쑤시던 손가락이 급하게 빠져나오고 내 위를 덮고 있던 몸이 조금 기울어졌다.
“……. 좁아서 다 못 풀겠어. 좀만 참아요.”
“…응?”
조금 아플 거야. 귓가에 대고 속삭인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느새 한쪽 다리가 들려 정진우의 어깨에 걸쳐졌다. 아래가 찢어지는 듯 강렬하게 찾아온 고통에 고개를 젖히고 입만 벌렸다. 채 나오지 못한 소리가 목 안에서 맴돌았다. 순식간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득 차 떨어지는 눈물을 핥아 마신 정진우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미안. …너무 급해서.”
“…아 …나, 아파! 좀, 어떻게, …아으, 악―”
어깨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원래도 첫 삽입 때는 항상 아팠지만, 이번엔 정말 손에 꼽히게 아팠다. 런던에 다녀오는 동안 더 커져서 온 건지, 진짜로 아래가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뱉으며 다가오는 몸을 밀어냈다.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며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던 정진우가 연결되어 있는 부위를 한 손으로 쓸었다.
“괜찮아. 안 찢어졌어. 진짜야. 숨 좀 쉬어봐.”
“……. 나 죽는 거 아니야……? 진짜 아파…….”
안 찢어졌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제 말을 들은 척도 안 하자 정진우가 혀를 찼다. 손을 잡아 연결 부위로 이끈다. 정진우의 말대로 정말 아래는 찢어지지 않았다. 놀라웠다. 함께 더듬거리던 접합부의 굵은 성기가 만져졌다. 무심결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나온, 울퉁불퉁한 기둥을 더듬었다. 내 손길에 더욱 흥분했는지 귓가에 닿은 호흡이 거칠어졌다.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던 성기가 느리게 빠져나가더니, 퍽 소리를 내며 빠르게 들어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허리 짓을 따라갈 수 없었다. 정진우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정진우와 나 사이에 끼인 손등에 고환이 부딪혔다. 눈물이 고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찾아온 열기가 고통과 섞여 머리를 지배해 갔다. 신음이 제멋대로 터졌다. 듣기 싫은 내 목소리와 정진우의 억눌린 신음이 섞였다. 아직 시동도 걸지 않은 차 안이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 아― 으, 너무 빠, 빨라…….”
이러다 정말 찢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과, 빠른 속도로 내벽을 건드리는 성기, 눈물이 가득 차 흐릿한 눈에 드문드문 보이는 바깥 풍경에 대한 공포가 엉망으로 엉켜 신경을 지배했다. 쾌감을 느끼고 있는 줄도 모르는 도중 다시 꼿꼿하게 일어선 성기가 정진우의 후드 티에 아무렇게나 쓸렸다. 정진우의 허리 짓에 조금씩 장단을 맞춰가며 후드에 쓸리는 성기를 조금 더, 거칠게 문질렀다. 난잡하게 움직이는 아래와 달리,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어, 엉망으로 엉킨 신경 사이로 창피함까지 파고들었다.
“보지… 마, 아, 흑…….”
어린애 같은 흐느낌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흥분으로 낮아진 목소리가 뭐라고 속삭였다. 머리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호흡이 닿은 귓가에 소름이 곤두서고 손가락에 짓눌린 유두가 더욱 바짝 솟아올랐다. 귓구멍에 훅, 숨을 불어넣은 정진우가 웃었다. 끊임없이 아래를 쳐올리는 허리와는 다르게 느린 목소리가 음담패설을 쏟아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오자 귀를 막고 싶었다.
“…이제 차에선 하지 말자. 여기 너무 좁고, 너 그렇게 우는 건 좋은데……. 구멍도 충분히 못 빨아주고,”
“으, ―제발, 입, 좀, …아!”
“불편해. 네가 내 거 얼마나 잘 삼키고, 있는지… 다 봐야 되, 는… 데.”
“…아, 으―”
“요한아, …아파? 계속 아파?”
묻는 목소리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얄미웠다. 노려보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프고, 힘들었다. 정진우의 어깨에 걸쳐진 한쪽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 와중에 꼿꼿하게 선 성기와 유두가 서글펐다. 차창 밖을 흘끔거리는 내 얼굴을 한 손으로 쥔 정진우가 입 맞췄다. 육감적인 입술이 입술 위에서 달싹거렸다.
“밖에 보, 지 말고 나 봐야지. 아무도 안, 온다니까.”
“으… 으우…….”
입술에 짓눌린 입에선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대고 좌우로 비비던 정진우가 잠시 느릿하던 움직임을 빠르게 했다. 거친 천에 계속해서 쓸린 성기가 따끔거렸다. 발기해 두근거리는 성기를 쥐고 정진우의 움직임에 맞춰 손을 흔들었다. 마른 손이 내 손 위를 덮고, 사정을 유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체에 힘이 들어가며 더욱 묽어진 정액이 픽, 튀었다. 저절로 엉덩이가 조여들었다. 잠시 앓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성기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굵은 귀두가 구멍을 긁으며 마저 빠지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내 정액을 손가락으로 훑은 정진우가 제 것을 매만졌다. 열렬한 시선이 내 몸을 훑는 동시에, 제 것을 쥔 손가락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멍하니 시선을 맞추다 손을 더듬어 정진우의 것을 함께 쥐었다.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눈이 질끈 감기고, 어깨에 반듯한 이마가 닿았다.
“아…, 요한, …….”
요한아. 내 이름과 함께 맨살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그새 습기가 찼는지 뿌옇게 변한 창밖으로 빛나는 가로등을 흘깃 보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고인 채 미처 떨어지지 않은 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오롯한 피로감이 전신을 감쌌다. 나와 함께 구겨져 있던 정진우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정액을 배에 문지르는 손길을 느끼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많이 피곤하고 지치긴 했던 것 같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숙면했다. 덜컹거리는 감각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진우가 주차를 마치고 캐리어를 꺼낸 뒤였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몸을 더듬었다. 가슴 근처까지 잠겨있는 셔츠가 볼썽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멍한 눈을 꿈뻑이고 있으니 조수석 문을 연 정진우가 내 볼을 쓸었다. 찬 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찼다.
“잘 잤어요?”
“응. 미안, 너도 피곤한데…….”
“괜찮아.”
슬쩍 웃으며 일어날 수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럼, 일어나야지……. 허리에 힘을 주니 아래가 빠질 것같이 아팠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한 손에 캐리어를 쥔 정진우가 허리를 잡아 제게 끌어당겼다. 머리에 닿는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지금 몇 시야?”
“몰라. 네 시 좀 안 됐을걸.”
“어어. ……. 네 시?”
“응.”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진우는 태연히 왜요? 하고 묻는다. ……. 아니야.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집안에 들어섰다. 냉장고에 케이크……. 아니 그보다, 가방……. 가방이 어디에.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캐리어를 거실 한가운데 내팽개친 정진우의 어깨가 걸렸다. 어깨에 얌전히 메고 있는 가방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소파에 내 가방을 마저 던지고, 제 가방까지 던져 놓은 정진우가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많이 피곤하지. 같이 씻을까?”
“……. 아니. 먼저 씻어. 나 잠깐, 옷부터 벗어놓고.”
“……. 그래요?”
“응. 너 여기서 씻을 거야? 나 그럼 방으로 가서 씻고 있을게. 올라와.”
체력왕 정진우가 퍽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훑었다. 또 할 속셈이었구나. 나는 도무지 정진우의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욕실로 사라지는 등을 보다가 소파로 다가가 가방을 뒤졌다. 손에 걸리는 상자를 꾹 쥐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정진우가 더 피곤할 걸 알아서 참았다.
정진우는 오늘 귀국하기 위해 런던 일정을 미친 듯이 소화해야 했다. 원래는 한 달인 일정을 이 주로 줄이는 바람에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을 해야 했던 걸 알았다. 나 때문이었다. 특히 정진우의 생일에 불안증이 도지는 나를 알아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진우는 작년 자신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에 내 불안증을 처음 접했다. 나는, 정진우가 떠난 이후 정진우의 생일만 되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몽유병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자다 벌떡 일어나 바깥을 돌아다니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정진우가 곁에 있고 나서는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작년에도, 악몽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때 정진우가 지었던 표정을 잊지 못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고, 질린 동시에, 깊은 좌절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던 창백한 얼굴을.
그 이후 우리의 관계는 조금 달라졌다. 치부를 드러내자 편해졌고, 동시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불편해졌다. 몇 달을 고민하던 정진우가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서로의 생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그것부터 시작하자고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나도 내가 놀라웠다. 정진우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는 정진우가 다시 떠날까봐 두렵거나 불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은, 이미 8년의 시간 동안 나의 곳곳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 공포감은 또한, 일종의 학습이었다. 나는 학습된 대로 불쑥불쑥 정진우를 찾았다. 정진우가 곁에 있었음에도. 본능에 새겨진 버릇은 아무리 고치려 해봐도, 그 근원이 되는 것들이 사라졌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저곳에 남아 의식하지 못할 때 나를, 우리를 급습했다. 나는 그 미련함이 새삼 놀라우면서 답답했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정진우는 뭘 하는지 아직 방이 비어 있었다. 올해는 안 그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막상 잠을 청하려니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샤워가운 주머니에 넣어놓은 것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안 그럴 거야. 애도 아니고. 지나간 일 가지고 몇 년을 그래. 마음을 다잡았다. 로션을 바르고, 시계를 찬 뒤 서랍에 주머니에 든 것을 숨겼다. 자리에 누워 천장을 조금 바라보고 있으니 방문이 열렸다. 맨몸에 잠옷 바지만 걸친 정진우가 이불에 파고들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막 씻고 나온 몸에서 바디워시 냄새가 풍겼다. 목 근처에서 쪽, 쪽 입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스러운 감각이 온몸을 간질였다. 불안한 마음이 금세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까맣고 가는 머리카락을 쥐고 이리저리 잡아당기다가 답이 빤한 질문을 던졌다.
“일어나면, 뭐 할까? 뭐 하고 싶어?”
“뭐 하긴… 집에 있자.”
……. 그럴 줄 알았어. 그냥 한번 물어봤어. 중얼거렸더니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머리카락에 키스하고 등을 토닥였다. 고르게 변해가는 숨을 느끼다 머리에 묻은 입술을 움직였다.
“생일 축하해, 진우야. 오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자.”
“고마워요…….”
몇 번 웅얼거리더니 금방 잠이 든 듯 조용하다. 이렇게 죽은 듯이 자도 내가 자리를 벗어나면 귀신같이 알고 눈을 번쩍 뜰 것이다. 잠귀 밝은 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갔다. 사실 대부분은 좋았다. 정진우 또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서.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눈을 감고 정진우의 냄새를 들이켰다.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곧 동이 터오는 시간이기도 하고. 안심이 되자, 더욱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감은 눈을 뜨고 푸르게 변해가는 창밖의 하늘을 살피다가, 정진우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정신이 드는 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났다. 눈을 떠 보니 나는 정진우를 꽉 끌어안고 어느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환한 햇살에 문신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흰 몸을 온통 덮고 있는 문신을 잠시 만지다가 품에서 벗어났다. 귀신같이 알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린다. 어느새 손목을 잡아 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리저리 갈라진 채로 흘러나왔다.
“왜 벌써 일어나……. 더 자요…….”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눌러 펴주고 등을 토닥였다. 나 잠 깼어. 너 더 자. 웅얼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완전히 잠에 빠질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다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정진우의 생일이라고 내가 엄청난 걸 할 건 아니었다. 그냥 미역국 끓이고, 가사도우미에게 부탁해놓았던 불고기며 전을 데우는 것이 전부였다. 점심이 되어버린 식사는 금방 완성이 되었다. 서랍에서 빼내 온 것을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밥 먹고, 케이크 자르면서 줄까. 선물을 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게 아직도 어색했다. 이마를 문지르며 슬쩍 웃었다.
정진우는 작년 내 생일엔 열 번째 <고난>을, 올해 생일엔 열한 번째 <고난>과 함께 시계를 선물했다. 나는, 정진우에게 적어도 내가 받은 정도의 값어치를 지닌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작년에는 실패했지만. 아마 올해도 실패할 것 같지만. 정진우의 그림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은 많지 않았다. 집이나, 차 정도면 넘을 수 있을까.
나는 작년에 정진우에게 자전거와 내가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그림은 서툴러서 선물을 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전거는 만족스러웠다. 당연히 정진우도 좋아했다. 베를린에서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던 정진우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가끔 도시 자전거를 이용했다. 자전거 타는 모습이 퍽 어울리기도 해서 내가 선물한 자전거를 탄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번에는, 그림이 아닌 시계에 걸맞은 선물이 뭘까 고민했다. 나는 직업상 각종 브랜드를 또래의 남자보다 잘 알았다. 정진우가 나에게 선물한 시계는 상당한 고가의 시계였다. 미술관에서 들켜 몇 번이나 소란이 일 정도로는 고가였다. 나는 정진우보다 가진 재산이 없고, 물질적인 면에서 많이 처졌지만, 그렇다고 선물까지 처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한참 고민하다가 내 사리사욕도 채울 수 있고 시계 정도의 값어치를 지닌 선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주머니를 불룩 채우고 돌아다니는 작은 상자를 꽉 쥐었다.
올해 내가 준비한 생일 선물은 반지였다. 나와 같이 아무런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정진우에게 어울릴 만한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커플링도 아니었고 정진우 혼자 끼라고 주는 거였지만, 그래도 반지를 찾으면서는 꼭 결혼반지를 사는 것같이 마음이 설렜다. 마음에 드는 반지를 찾기 위해 나는 백화점을 몇 번이나 찾아야 했다. 결국 내가 고른 반지를 사기 위해선 네 달치 월급을 쏟아야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정진우에게 쓰려고 모은 돈이니 아깝지도 않았다. 그냥, 이 선물을 어떻게 줘야 잘 줬다고 소문이 날지, 그것이 가장 고민이었다.
내가 뭔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면 상황이 오히려 웃겨질 것 같아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결국 그냥 케이크와 함께 커피 한잔하며 줘야지. 결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진우를 깨우려 침실로 올라가는데, 문소리가 들렸다. 용케 일어난 정진우가 계단을 내려와 입 맞췄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 우리 한 일곱 시간은 잔 것 같은데.”
“……. 아 그래요.”
멋쩍게 웃더니 손을 잡아끈다. 내 손목에 걸린 시계를 매만지는 것은, 몇 달 사이 정진우의 습관이 되었다. 반지를 선물하려 생각하고 보니 시계를 선물한 정진우의 생각이 짐작되어 숨죽여 웃었다. 너도, 나를 구속하고 싶었던 거였구나. 귀여운 자식.
정진우는 아주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자다 일어나서 바로 먹는 건데도 입맛이 도는지 미역국을 깨끗이 비웠다. 밥은 밥솥이, 반찬은 남이 했지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커피 내려 줄까요? 묻는 정진우에게 손짓했다. 소파에 가 있어. 너 생일이니까 오늘은 다 내가 해줄게. 케이크 조금만 먹을래? 하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배를 문지르며 부엌을 나서는 뒤통수가 귀여웠다.
최대한 예쁘게 자른 케이크와 커피를 트레이에 얹어 거실로 나왔다. 정진우는 창밖을 보고 서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정진우의 뒷모습을 은은하게 밝혔다. 반듯한 자세를 하고 정원을 구경 중인 정진우를 나도 잠시 구경하다가, 커피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정진우가 뒤돌아 나를 향했다.
“우리 밖에 나가서 마실까?”
“바깥에?”
“응. 날씨 좋잖아. 걸칠 거라도 하나 가지고 나올래?”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가지고 나가 있을게. 말하며 트레이를 들어 올린다.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정진우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의자에 걸쳐 있던 후드 집업을 걸치고 서랍에서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테라스 벤치에 앉은 정진우가 신발을 신는 나를 발견하고 이리 와. 말했다.
“그거 입고 안 춥겠어요?”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뭐. ……. 오래 있을 거야?”
정진우가 웃었다.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니요. 이것만 마시고 들어가자.”
삐뚤게 걸쳐진 후드 모자를 정리해준 정진우가 케이크를 한 입 떠먹었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입맛을 맞추기 위해 여러 번 검색해서 찾은 케이크였다. 입에 맞는지 한 번 먹고 놓지 않고 커피와 함께 여러 번 떠먹는 모습에 안심하며 나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서로 아무렇게나 나무가 자라 있는 정면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나무 근처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저거 언제 사람 불러서 청소해야겠다.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든 반지에 생각이 멈췄다. 정진우를 흘깃거렸다. 태평한 낯이 햇빛을 받아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화창하고 높은 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살짝 감은 정진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정면에는 비록 나무가 아무렇게나 가지를 뻗고 있고, 정리되지 않은 잡초들이 사방에 번식했지만 울긋불긋 나뭇잎이 색을 예쁘게 물들인 정원이 있고, 옆에는 우리 둘의 보금자리가 자리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밖으로 간간이 지나다니는 차 소리가 그에 맞물린다. 오롯이 둘만이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가 눈에 하나하나 시리도록 박혀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모래알처럼 남아 있던 우울하고 어두운 감정이 밝은 햇살에 조금씩 씻겨나갔다. 텅 비어버린 자리를 좋은 풍경과, 너의 눈 감은 모습이 채웠다. 잠시 숨을 멈추고 모든 것을 둘러본 나는, 눈을 비볐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일상이, 갑작스레 엄청나게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너의 생일날 온전히 너 자체에 집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는 이렇게 좋은 날에 태어났구나. 이렇게 좋은 시간에.
하늘을 한 번 더 느리게 훑었다. 햇빛에 눈가를 조금 찌푸리다가, 정진우를 보았다.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감은 눈을 촘촘하게 장식한 정진우의 속눈썹을 천천히 세며 말했다. 바보 같은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진우야.”
“응?”
“…….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눈을 감은 정진우가 웃었다.
나는 도무지 이 감정을 표현할 말이 없어 고민했다. 문득, 손가락 끝에 불룩한 주머니가 걸렸다.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여 상자를 꺼내 열었다. 음각으로 세공이 들어간 반지를 한 번 매만지고, 마르고 흰 손에서 커피 잔을 빼앗아 들었다. 눈을 뜨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고, 한 손으로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 반지는 정진우에게 맞춘 것처럼 어울렸다. 얼굴을 덮은 손을 내려 볼을 감싸고, 입가의 점에 입 맞추고, 도톰한 입술을 깊게 물었다. 반지를 끼워준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싶더니, 그 위에 얹힌 내 손을 잡아왔다. 약지에 반지의 감각이 느껴졌다. 물었던 입술을 놔 주고 코앞에서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진우야.”
정진우가 웃었다. 푸른 하늘을 닮은 미소가 흰 얼굴에 번졌다. 우리가 함께하는 여덟 번째 계절이, 바람에 날리는 단풍과 함께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