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썸머 타임 (12/12)

썸머 타임

쏟아지는 햇빛에 눈부터 비볐다. 익숙한 몸을 끌어안으려다 비어 있는 옆 자리를 깨닫고 시트를 더듬었다. 어디 간 거지. 자리를 벗어난 지 꽤 시간이 흐른 듯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꿈질꿈질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여덟 시 반. 평소 정진우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세 시간은 빨랐다. 한 달간의 연이은 야근에, 장시간의 비행까지 소화한 몸이 무거웠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젖혀놨는지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방 안에 한껏 드리웠다.

피곤이 쌓인 몸을 이끌고 샤워를 마친 뒤, 출출해진 배를 붙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 사이사이에 부엌과 침실, 화장실, 욕실, 작업실, 거실이 미로처럼 놓인 집은 베를린을 떠날 때가 되어도 쉽게 적응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은 지도 오래되어 보이는 집은, 하얀 벽에 천장이 아주 높고, 나무 바닥 위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바람에 그게 그거 같은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다가 부엌을 발견했다.

먼저 스테인리스 재질의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셨다. 어제 오면서 간단히 장을 봐 놓은 게……. 찬장을 뒤적여 토스트용 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테이블 매트가 깔려 있는 식탁 위의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Lieber Johann,

저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요.

점심 전에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급하게 나갔는지 글씨가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휘갈겨 놓은 쪽지를 떼어내 팔뚝에 붙여놓았다. 팔뚝에서 포스트잇이 팔랑거리는 걸 잠시 보다가 슬쩍 웃었다.

정진우는 꽤 아날로그적인 인간이었다. 메시지보단 전화를 선호했고, 전자메일보단 종이 편지를 선호했다. 가끔 급한 볼일이 생겨 나가야 할 때 집 안 여기저기에 쪽지를 붙여놓고 외출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며 새로 생긴 정진우의 버릇 중 하나였다.

어느 때는 Lieber(Dear), 어느 때는 Süsse(Sweet)로 시작하는 쪽지는, 일 년 사이에 하나둘씩 늘어 어느새 상자 하나를 다 채울 정도가 되었다. 팔뚝에 붙어 팔랑거리는 쪽지를 손으로 한 번 더 꾹 누른 뒤 갓 구워진 식빵을 입에 물고 부엌을 나섰다.

정진우를 기다리며 나는, 어지러운 공간의 구석구석을 탐방해보기로 한다. 정진우가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집. 일 년에 한, 두 달은 베를린에 있어야 하는 일정 때문에 정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 집은 오랜 기간 사람이 없었음에도 생활감이 넘쳐났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와서 집을 돌보는지 복도와 방 곳곳에 놓인 식물들이 푸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이국적인 문양의 태피스트리를 괜히 한 번 쓰다듬고 부엌과 현관 사이의 문을 열었다.

“…….”

물고 있던 식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멍하니 문고리를 잡은 채로 굳어 있던 나는, 조용히 열었던 문을 굳게 닫았다. 바닥에 떨어진 식빵을 주워 탈탈 털고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쓰레기통에 대충 식빵을 던져놓으며 생각했다. 베를린에 있는 정진우와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사정없이 어질러진 작업실을 볼 때마다 매번 하는 고민이었다. 얘는 대체, 베를린에서 어떻게 살았던 거지.

창고로 쓰이는 듯 어둡고 어지러운 방에는, 32년을 살아오며 본 적도 없는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른 건 다 제쳐놓고, 일단 중세 어딘가의 중갑주로 보이는 갑옷과 투구가 방바닥을 왜 뒹굴고 있는 것인지를 가장 알 수 없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가져 온 거야. ……. 혹시 사 온 건 아니겠지. 설마.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몸을 구겨 넣고 앉아서 방금 본 방 안의 풍경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말이지 나는, 정진우의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가끔 접하곤 하는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나긴 논쟁 끝에 올해 겨울, 결국 침대 헤드 위쪽 벽면을 장식한 요란한 무늬의 태피스트리까지 생각하니 입맛이 뚝 떨어지고 담배가 당겼다. 부엌을 나서 침실로 향했다. 좁은 복도 끝에 자리한 침실만은 단박에 찾을 수 있었다. 나오면서 문을 열어놨기 때문에. 침실로 들어서며 활짝 열려 있는 방문을 약간 오므려 놓고, 커피테이블 아래 던져 놓은 배낭을 들었다. 앞주머니를 열어 정진우의 쪽지를 잘 집어넣은 뒤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며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예 밖으로 나가서 피워야 하나. 어떻게 하지.

굉장히 오랜만인 고민을 하며 침실에 딸린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 밖으로, 역시 식물과 가랜드, 전구가 널려있는 발코니를 들여다봤다. 난간 근처에 놓인 까맣고 동그란 것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덜컹. 덜컹, 덜컹.

나는 잠시 당황해 문고리를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돌려서… 아니 이게, 맞는데.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거의 없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내가 독일에 아예 처음 와본 것도 아니고.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어도 창문 여는 방법 정도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맞는 것 같은… 데. 왜, 안 열려.

한참을 밀었다가 당겼다가 창문과 씨름했다. 잠시, 이러다 문고리 빠지는 거 아니겠지, 하는 두려움에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서 엄한 창문을 노려보기도 했다.

십여 분을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창문을 열 수 있었다. 틀과 창문이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게 문제였다. 기름칠이라도 좀 해 놨으면 덜 뻑뻑했을 텐데, 집 주인은 도무지 이런 쪽으로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손님인 나는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터는 수밖엔 없었다. 괜히 창문을 주먹으로 툭 쳤다. 유리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쨍쨍하게 주변 사물을 비추는 해는, 같은 지구인데도 한국에서 봐 왔던 해보다 훨씬 그 빛이 강렬했다. 도로가에 울창하게 늘어선 나무와 그 너머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집들이 죄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내리쬐는 햇발을 잠시 구경하다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별거 하지도 않았는데,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얘는 언제 오려나. 점심 전에 온다고 했으니까, 한 시간 정도만 더 있으면 올까. 어제 왔는데 대체 무슨 볼일이 생겼다는 거지. 담배를 피우며 하는 생각이라는 게 그랬다.

사실 나는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정진우의 생각을 하는 데 소비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정진우에 대한 생각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재미있었다.

하루 하고 반나절을 꼬박 금연했더니, 담배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짧게 타들어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두 개비가 빈 담뱃갑을 흔들어 보다가 결국 한 개비를 더 꺼냈다. 하루 안 피웠으니까.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불을 붙였다. 양팔을 난간에 괴고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같은 모양을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나 있는 창문. 창문 밖으로 비죽비죽 삐져나온 철제 혹은 콘크리트 재질의 발코니. 발코니 안에 가득한 화분과 전구, 다양한 천 장식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 비로소 나는, 아, 내가 정말 외국에 와 있구나. 실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그런 건지, 아직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 건지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차도 없었고. 간간이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치는 사람들과, 산책이라도 가는 듯 유모차와 커다란 가방을 든 무리 정도가 지나다녔다. 하나같이 가벼운 차림에, 여유로운 기색들이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비행기를 타기 전과 후가 180도 달랐다. 내일부터 9월 말까지 진행되는 미술관 리모델링 일정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던 게 정말 꿈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리쬐는 햇빛에 뜨끈뜨끈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더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뜨거운 얼굴을 확인하니 갑자기 더워졌다. 더위와 동시에 피곤이 밀려왔다. 이것만 피우고 들어가서 한숨 자야지. 담배를 물고 다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려 고개를 아래로 빼는데,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걸렸다.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거의 동시인 것 같았다.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부터 자전거를 타고 단숨에 집 앞까지 다가온 흰 얼굴이 나를 보고 함께 미소 짓는다. 한쪽 손을 들어 올려 흔드는데, 우리가 한 일주일 만에 보는 것처럼 엄청나게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귀여웠다.

까만 무지 티셔츠에, 무릎이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등 뒤로 웨이스트백을 걸친 정진우는, 차림 때문인지 유독 대학생 같았다. 손질하지 않은 머리가 여름 바람에 휘날린다. 모든 것이 찬란한 햇살 아래 선명했다. 나는 잠시 평범하게 좋았던 내 시력이 순식간에 2.0이 된 건 아닌지 고민하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얼른 와. 너 기다렸어.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자전거를 끈 정진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뒤뜰로 통하는 자동문이 요란스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로 끌어놓았던 재떨이를 원위치에 복귀시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닫을까, 했지만 닫다가 또 한참을 씨름할 것 같아서 그냥 놔뒀다.

자전거 때문인지 정진우는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다. 문 열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가면서 나는, 내가 주인님 오기를 기다리는 똥개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우리가 함께 살고부터 상대를 기다리는 건 한국에 있을 땐 거의 일이 없는 정진우의 몫이었기 때문에 새삼 이 상황이 낯설었다. 햇빛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고 와 뜨끈뜨끈한 몸이 단숨에 다가왔다. 내 얼굴을 붙들고 대뜸 입 맞춰 온다. 입 안으로 한여름의 열기가 끼쳤다.

“잘 잤어요? 일찍 일어났네?”

“응. 자다가 너 없어서 잠이 깼어. 어디 갔다 왔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침실로 나를 잡아끄는 정진우가 대답했다.

“나 타고 온 자전거 있잖아. 그거 사러.”

“자전거? 아까 그거 방금 산거야?”

“응. 형 거.”

침실에 들어와 웨이스트 백에서 물병을 꺼낸 정진우가 한 손으로 티셔츠를 잡고 흔들었다. 창문 열어놨네? 잘했어. 더워 죽겠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 거?”

“응. 물 마실래?”

물이 반쯤 비워진 채로 찰랑거리고 있는 500ml 크기의 병을 건네받았다.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더운지 벌떡 일어나 티셔츠를 벗어던진 정진우가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아침 먹었어요?”

“아니. 너는?”

“나도. 나 빨리 씻고 나올 테니까 밥 먹으러 가자.”

“밥 먹으러… 나가자고?”

“응. 집에 먹을 것도 없잖아. 조금만 기다려요.”

별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한차례 폭풍이 쓸고 지나간 기분이 되었다. ……. 나는 오늘까진 집에서 좀 쉴까, 했는데. 물병을 쥐고 침대에 걸터앉아 반쯤 열린 채로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잠시 바라보았다. 쟤는 많이 들뜬 것 같으니까, 하자는 대로 해 볼까.

금방 나오겠다던 정진우는 물 맞는 게 좋았는지 꽤 오래 걸렸다.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조금 편하게 눕히고, 진짜로 날이 좀 덥네. 얘네 집엔 왜 에어컨이 없지. 선풍기도 없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물소리가 조금 멀어졌나, 싶더니 안 그래도 무거웠던 머리가 물속에 잠긴 것 같이 멍해지고,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정신없이 졸다가 목 뒤로 차가운 것이 들어오는 감각에 깜짝 놀라서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번쩍 떴다. 정진우가 덜 마른 머리를 하고 코앞에서 웃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요?”

“……그런가. 이제 좀 시원해?”

그새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내 옆으로 파고들어 와 함께 누운 정진우가 속삭였다.

“응. …많이 피곤하면 그냥 집에 있을까?”

“……. 아니야. 너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자.”

“내가 가고 싶은 것보단, 형이 그랬잖아.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고. 힘들면 다음 주에 가도 되고.”

담담한 말에 나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차적응이라는 게 없는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귀여워서 픽 웃었다.

“그래. 오늘 가자. 근데 웬 자전거야?”

“밥 먹으러 가려는 데가 공원이라, 같이 자전거 타고 갈까 해서.”

“……. 그래? 네 건?”

“내 건 있지. 보니까 멀쩡해서 형 것만 사 왔어.”

아주 당연하게 말하는 투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다음 날, 자전거를 사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나. 아주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나랑 같이 엄청 타고 다니고 싶은가보지, 했다. 무거운 몸도 깨울 겸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서 팔을 쭉 뻗었다. 어깨가 뭉친 것 같이 뻐근했다. 몸을 돌릴 때마다 온몸에서 뚝, 뚝 소리가 났다. 침대에 누워 몸을 푸는 나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보는 코를 한 번 잡아당겨준 뒤 말했다.

“갈까? 어디로 가?”

기다란 몸이 가뿐히 일어나며 우리가 갈 곳을 설명했다.

“타이 파크라고, 여름에는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푸드 마켓이 열려. 뭐 많으니까 몇 가지 사서 그거 먹고, 뒹굴뒹굴하다 바로 오자.”

“그래. 네 자전거는 어디 있어? 여기에 있어?”

“응. …자전거 진짜 괜찮겠어?”

“그러려고 사온 거라며.”

“그건 그런데…….”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를 벗어서 개는 동안 맨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은 정진우가 중얼거렸다. 다리가 너무 가는데. 정진우를 따라 나도 반바지를 입을까. 생각하는 와중 울컥했다. 지는 얼마나 두껍다고. 흘깃 내려다본 희고 곧은 종아리는 나와 다를 바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괜찮아. 너나 나나.”

“그래……?”

“어. 괜찮아.”

“그래, 그렇다면 뭐. 피곤할 것 같아서 차 렌트하려고 했는데. 자전거 타고 가자.”

“…….”

신나서 제 가방을 뒤적거리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렌트하자고 할까. 고민하다가 내 허벅지를 슬쩍 쓸어보았다. 옛날보다 근육이 조금, 빠진 것도 같고. 괜한 오기로 자전거를 타자고 했나, 싶다가도 내가 얘랑 다를 게 뭐야. 하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요즘 들어 한 살 차이인데 입는 옷이나 직장, 가지고 다니는 것들로 인해 내가 한참 어린애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부쩍 들었기 때문에 더 오기가 생겼다. ……. 이러는 게 더 늙은이 같아 보이는 건 아닐까. 얘는 왜 서른이 넘어도 20대 초반 같은 거지. 나는 왜……. 잠시 서글픈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털었다.

열쇠와 지갑, 담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정진우가 채비를 마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밀어 침대에 주저앉혔다.

“그냥 나가게?”

“응. …왜?”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제 가방을 뒤진다. 선크림을 듬뿍 짜서 나에게 다가오는 얼굴이 그러고 보니 조금 번들거리는 것 같다.

“여기 햇빛 세서 그냥 나가면 얼굴 다 까져. 피부도 약하면서.”

얼굴을 문지르는 손이 좋아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구석구석 선크림을 바르던 정진우가 양 볼을 꽉 짓눌렀다. 감았던 눈을 떴다. 짓궂게 변한 얼굴이 씩 웃으며 얌전히 제 손길을 받는 와중인 나를 놀렸다.

“우리 이쁜 요한이, 팔이랑 다리도 형이 발라줄까, 응?”

“…….”

대답 없이 손을 뻗었다. 그거나 줘.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며 선크림을 내민다. 팔뚝에 바르고 남은 선크림을 잠시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에 갖다 발랐다. 차가운 감촉에 놀랐는지 허공에 두고 있던 눈이 조금 커지고, 나를 돌아본다. 슬쩍 웃었다. 제 뺨에 묻은 크림을 문질러 닦아 내더니, 내 목에 바른다. 간지러워서 소리 내어 웃었다. 손가락이 지나는 곳마다 끈적끈적한 크림이 흔적을 남겼다. 하지 마. 간지러워. 몸을 틀며 이야기하는데, 어느새 장난기만 가득 묻어났던 손길이 크림보다 끈적거리는 것으로 변했다. 목을 따라 올라오던 손가락이 턱 선을 짙게 쓸고, 이내 얼굴을 꽉 잡아온다. 순식간에 가깝게 붙은 몸이 나에게 더욱 밀착한다. 짙은 숨결이 내 입술을 덮고, 거친 손바닥이 맨 허리를 잡아왔다.

“…….”

“……. 그냥 집에 있을까.”

한 시간 전 나가자고 한 게 대체 누구였냐는 듯 단정적인 물음을 던지는 얼굴은 진지했다. 잠시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다 대답 대신 사슴 같은 목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옷을 벗기며 작게 투덜댔다. 선크림 바르지 말걸. 끈적거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겹치고, 나란히 달아오른 성기를 한 번에 쥔 정진우가 선크림 범벅이 된 내 뺨을 한가득 물며 신음과도 같은 웃음을 흘렸다.

결국 우리는 한 달간의 휴가 중 일주일을 집에서 보냈다. 한 달여간 지속되었던 내 야근 탓에 억누르고 있던 성욕이 사이좋게 터져버린 탓이 컸다. 가끔 장을 보러 나가거나, 동네를 산책하는 것 정도가 그나마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였다. 베를린에 도착한 첫 날 정진우가 무려 790유로를 주고 사왔다던 자전거는 한 번 타보지도 못했다. 뒤늦게 가격을 알고는 언제 저거 한번 타봐야 하는데, 하며 바깥에 나갈 때마다 돌바닥 위 잘 주차된 하얀 몸체의 자전거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790유로면 한화로… 아무리 봐도 별 특징 없이 생겼는데.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반 정도 섞인 시선을 하고.

일주일 동안 충실하게 알몸을 유지한 채로 짐승이 따로 없는 생활을 했더니 이제 슬슬 나가서 돌아다니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비비며 벌써 일어나 내 옆에서 무언가를 하는 정진우의 등을 쓸었다. 도드라진 날개 뼈가 내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진우야…….”

“응. 잘 잤어?”

“어……. 너 왜 이렇게 부지런해.”

흐린 시야에 정진우가 급하게 몸을 돌리는 모습이 비쳤다. 뭐야…, 물어보려는데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나를 껴안아서 타이밍을 놓쳤다. 이미 까치집이 되어 있을 뒷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이 제멋대로 비볐다.

“내가 언젠 안 부지런했나.”

“…….”

저건 거짓말이다. 한국에서의 정진우는 절대 부지런함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진우는 요 며칠 신기하도록 부지런을 떨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일어났고, 부지런히 만사를 귀찮아하는 내 수발을 들었다. 베를린에 오자마자 나와 정진우의 영혼이 일부 뒤바뀐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 이렇게 긴 휴식기를 처음 가져보는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계를 모르는 무기력함과 게으름에 빠졌고, 정진우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함과 활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진우가 일주일 내내 입버릇처럼 노래하던 말이 떠올랐다.

‘형이랑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 너무 오래 바쁘게 살아서 이 느낌을 잊고 있었어. 천국 같아.’

……. 여기가 천국이라면 대체 어떤 천국인걸까. 하루가 지날수록 생기를 더해가는 정진우와 달리 나는 점점 피곤해졌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어영부영 먹고 자고만 하며 보냈던 지난날을 되새기다가,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베를린까지 와서. 뭐라도 봐야지.

더욱이 한 달이나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베를린에만 있을 생각도 없었다. 너무 바빠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채로 부랴부랴 짐만 챙겨서 왔지만, 시간을 정해 사흘 정도는 다른 도시에도 놀러 가고. …일단 베를린 여행부터 해 볼까.

5년 전 새겼다는, 나뭇가지가 울창한 쇄골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오늘은, 아침 먹고 어디든 나가 볼까.”

“나가자고? 어디?”

아는 게 없었다. 너무 아무것도 안 찾아보고 왔나. 잠깐 고민하다가 정진우의 눈을 들여다봤다.

“베를린 어디가 좋아?”

“…….”

“…….”

내 단순한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한동안 침묵의 바다에서 헤엄쳐야 했다. 뭐지.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나. 얘가 저번에 어디 가자고 했지. 무슨 공원……. 거기는 일요일에만 연다고 했나. 고민하다 손을 더듬어 협탁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뻘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검색 좀 해볼까…….”

인터넷에 베를린 여행을 치고 있는데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지. 눈을 들어 머리 위에 놓인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옅게 쌍꺼풀진 눈이 나를 지그시 보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왜 웃어.”

대꾸 없이 가만 나를 들여다보며 웃음 짓던 정진우가 내 앞머리를 쓸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닿은 입술이 간지럽게 움직였다.

“아니, 우리 여행 온 거지.”

“그치. 우리 여행 왔는데, 계속, 이러고…….”

“……. 싫었어?”

“……. 아니. 싫은 건 아니고… 베를린 돔 가볼까.”

가까이 다가온 어깨를 밀어내고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돌려 가장 첫 번째에 뜬 사진을 보여주었다. 눈을 들어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을 잠시 응시하던 정진우가 좋아요. 하며 긍정했다. 그 근처에 먹을 데 많으니까 식사도 하고, 돔 안도 들어가 보고 할까? 제안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를 벗어나니 비로소 여행하는 기분이 들면서, 조금씩 기대감이 생겼다.

나는 일주일 만에 드디어 정진우가 사 온 자전거를 사용했다. 새 거라 그런지, 비싼 값을 하는 건지 자전거는 정말 잘 나갔다. 베를린 돔이 정진우의 집과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기분 좋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비슷비슷하게 늘어서 있는 건물들, 발코니를 장식하고 있는 각종 식물들, 주인과 함께 거리를 걷는 개들을 관찰했다. 갑자기 기분이 들떴다. 중학생 때 이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곳과 전혀 다른 양식의 건물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건물 사이를 앞서 나가는 잘빠진 등과 다리, 흩날리는 머리가 나를 더욱 들뜨게 했다.

자전거를 타고 생소한 거리 사이를 십오 분 정도 달리자, 끄트머리만 보이던 회청색 지붕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강 건너 웅장하게 자리한 베를린 돔과, 그 앞 잔디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외국인들이 쏟아지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돔으로 건너는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멈춘 정진우를 따라 자전거를 멈췄다. 흰 피부에 약간 달라붙은 까만 티셔츠를 쭉 잡아당겼다. 햇빛을 받아 더욱 환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채로 나를 흘낏 돌아본다.

“나 진짜 외국 온 기분이야!”

정진우가 꽃처럼 웃었다. 아무렇게나 내뱉고 보니 잠시 창피해져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애도 아니고, 흥분해서는. 하지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해가 쨍쨍했지만 하늘은 맑았고, 길가에 울창한 나무는 푸르렀다. 사람이 꽤 많았음에도 거리는 조용했고, 자전거는 비싼 값을 했다. 피곤했던 몸에 점차 활기가 솟았다. 진작 나올걸. 몇 번이나 생각하며 자전거를 끌고 돔까지 천천히 걸었다.

조금 앞서 걷던 정진우가 횡단보도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늦췄다. 까만색 자전거와 하얗고 새것 티가 나는 자전거가 나란히 굴러갔다. 약간 땀에 젖은 옆머리를 슬쩍 쓸어주는 손길이 뜨겁다.

“기분 좋아?”

잠시 달아오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나도 오랜만에 중심지 오니까 좋다. …형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 내가 그렇게 많이 좋아했어?”

“응. 질투 나게.”

“……. 무슨 질투야.”

괜히 화끈거리는 이마를 훔쳤다. 그렇게 더운 줄은 몰랐는데, 덥긴 더운 것 같았다. 그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것 말고는 아직 보송보송한 얼굴을 유지 중인 정진우를 보다가, 한 번 더 이마를 훔쳤다. 쟤는 왜 땀이 안 나지. 더운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끌고 잔디 안으로 들어섰다.

돔 앞에 자리한 잔디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누워서, 앉아서 대화를 즐기는 중이기도 했고,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윗도리를 벗고 나란히 드러누워 등을 태우는 중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주변으로는 비눗방울이 날아다녔다. 커다랗고 작은 비눗방울을 멍하니 눈으로 쫓다가 옆에 앉은 정진우에게 말했다.

“저거 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탓에 어딜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뻗은 내 손가락을 따라 얼굴이 움직인다. 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애들이 뛰어노는 사이사이 자리한, 오색으로 빛나는, 애들 몸만큼 커다란 비눗방울을 보고 나는 또다시 감탄사를 터뜨렸다.

“봐봐, 너 저런 거 본 적 있어?”

“아니, 처음이야.”

“진짜?”

휙 고개를 돌려 정진우를 마주봤다. 정진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나 돔 온 것도 두 번째야. 안에 들어가 본 적은 없고.”

“진짜?”

“응, 진짜. 올 일이 없었지.”

정진우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여기가 혹시 관광객들만 오는 그런 덴가. 의문이 들었다. 고민하지 않고 물어봤다.

“현지인들은 이런 데 안 와?”

“아니, 올걸.”

“그럼 너는?”

“나는…….”

잠시 말을 끌던 정진우가 턱을 문질렀다. 매끈한 턱을 군데군데 문신으로 채워진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다.

“여기 살았을 때는 어딘가 가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였던 것 같고.”

“…….”

“잠깐잠깐 들렀을 때는 굳이 이런 데 올 필요를 못 느껴서, 였나.”

빨리 일정 소화하고 형한테 가야지. 말을 마친 정진우가 개구지게 웃었다. 나는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갑작스레 가슴 한가운데가 턱 막히는 느낌에 심호흡을 했다.

정진우는, 베를린에서 생각보다 심각하게 7년여를 보냈다. 나는 정진우와 함께 살면서 정진우가 얼마나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약한 인간이었는지 하나씩 배워갔다. 주로 부모님을 보고 올 때나, 불안정한 시기의 나와 크게 싸울 때. 괜찮은 척했지만, 그의 스트레스는 몸의 이상으로 즉각 나타나곤 했다. 멀쩡히 식사를 하다가도 다 토하고, 잠을 못 자는 단순한 증상에서, 제 몸을 마구 긁는 심각한 증세까지 다양한 현상이 발작적으로 나타났다. 괜히 온몸에 문신이며 상처가 빼곡 들어찼던 게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고통을 분산해야, 정진우는 살 수 있었던 거였다.

언제 또 올지 장담할 수 없는 한 달간의 휴가 기간 동안 베를린 여행을 제안하며, 너 살았던 데, 너 다녔던 학교, 너 자주 갔던 곳들 다 가 보고 싶어. 너랑 같이.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휴가 일자가 정해지자마자 저를 붙잡고 신나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나를 응시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베를린에서 되게 재미없게 살았는데. 별로 추억할 만한 것도 없어서 형은 재미없을 거야. 나야 편하겠지만. 네가 왜 그런 식으로 얘기했는지 나는 이제야 눈치를 챘다. 나는 이제야 너에게 배려 없었던 나를 깨닫는다.

잠시 어린 정진우를 생각하다가, 성숙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서른하나의 정진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끼고 있는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얼굴이 아니라 내 얼굴이 더 잘 보였지만.

내 진득한 시선에 왜? 하고 묻는 팔을 잡아 일으켰다. 여기 이렇게 앉아 빈둥빈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는 그럼 여기서 가고 싶은 데 없어?”

“나?”

“응. 이 기회에 너 안 가봤던 데도 다 가보자. 어디 가고 싶었던 데 없어?”

잠시 생각하던 정진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클럽?”

“……. 야, 장난치지 말고. 나 진지해.”

“왜, 베를린 클럽이 얼마나 유명한데.”

“……. 1절만 해라.”

응. 얌전히 대답한 정진우가 내 손을 살짝 잡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베를린에 게이가 얼마나 많은데요, 코디님.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손등과 팔목 사이를 잡은 채로 끌어내리는 힘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안. 중얼거리는 말에 정진우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몇 년간 많이 나아졌다 해도 아주 가시지는 않는 두려움을 들킬 때마다 매번 창피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뜨끈뜨끈한 뒷목을 쓸어내리며 잔디를 짚고 있던 손을 돌려 마르고 버석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조심스럽게 침투했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반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살이 약간 빠진 탓에 손가락 위를 돌아다니는 반지를 쓰다듬다가 직각으로 뻗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상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너무 벗고 있는 거 아니야? 왜, 형도 벗고 싶어? 아니… 살 아플 것 같아. 뭐 이런 종류의.

잠시 그러고 있다 보니 본격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진지한 상의를 거쳐 우리는 돔 앞에 주저앉은 채로 대강의 여행 일정을 정할 수 있었다. 일단 다음 주까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 다음으로 어디를 갈지는 정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남부지역……. 나는 지중해를 가보고 싶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를 가야 할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쉽게 고를 수 없었고, 정진우는 그런 휴양지에 감흥이 없었다. 너야 그럴 만도 하겠지……. 의논하는 도중 다른 도시 얘기에 급격히 시큰둥해진 얼굴을 잠시 아니꼽게 바라보다가, 가볍게 투닥거렸다.

그래, 너는 많이 가 봤겠지. 그래도 같이 하는 여행인데, 관심 좀 가져봐.

아니, 내가 그랬잖아. 유럽은 진짜 어디 가나 다 똑같다니깐? 지중해 그냥 바다야, 바다. 어디 가서 고생하느니 베를린이 그나마 편할 수도 있어. 다른 데 가봐, 불친절하고, 말 안 통하고, ……. 아 형 영어 잘하지.

영어 못 해도 여행은 할 수 있어. 그냥 바다라도 나는 보고 싶고. 너 애가 왜 그렇게 도전정신이 없냐.

아. 내가 도전정신이 없어서 지금 여기서 형 좋다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나보다?

……. 야, 그거랑 그건 다른 경우고.

…….

…….

한참 이어진, 조용하고 빠른 말싸움 끝에 어깨를 크게 들썩인 정진우가 말했다.

“어디 갈지 정하면 비행기 표는 그때 끊어도 안 늦으니까, 쉽게 생각해요. 유럽이면 어딜 가든 두 시간 전후라 얼마 안 걸리기도 하고. 일단 우리는 여기서 잘 지내는 것부터 해야겠어.”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가고 싶은 데 열심히 찾아보고 말해줄게. …그럼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정진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라서 웃고 말았다. 약간 벌어져 있던 입술이 씰룩거리더니 함께 픽 웃는다. 고른 이가 짠하고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색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가 새삼 예뻐서, 나도 더 웃었다.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을 싱겁게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등과 머리가 느껴졌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잔디에 앉아 햇빛을 받은 지 두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뜨끈뜨끈해진 정수리를 한 번 눌러보고, 옆에 놓인 까만 정수리를 눌렀다. 역시 타들어 갈 것 같이 뜨거웠다. 잡은 뒤 한 번도 놓지 않은 손은 이미 땀이 맺혀 미끌미끌해진 지 오래였다.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땀이 맺힌 손바닥을 흔들었다. 여름 바람이 축축한 손바닥을 조금씩 말려 주었다.

“여기 이제 너무 뜨거워. 어디 들어가서 맥주 한잔하자.”

무릎을 짚고 벌떡 일어난 정진우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잔디를 털고, 자전거를 끌며 슬슬 걸었다. 정진우가 알고 있다는 맥주집으로 향하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근데 맥주 마시고 자전거 타면 음주운전이지?”

“응.”

“그래…….”

바로 튀어나온 긍정적인 대답에 대꾸하며 나는 또다시 고민했다. 얘는 대체 왜 굳이 자전거를 사온 거지. 술 좋아하는 거 알면서……. 아무래도 첫날 너무 들뜬 바람에 헛돈을 쓴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한 번 탔으니까. 페달 몇 번 안 밟아도 잘 나가긴 했으니까. 애써 자위하며 맥주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근처의 양조장에서 직접 맥주를 조달한다는 술집은, 정진우의 장담 이상으로 맥주가 정말 맛있었다. 독일 하면 맥주라더니, 정말이었다. 성인이 되고 다시 한 번 방문한 독일은 맥주의 천국이었다. 결국 오늘 가기로 했던 알테 네셔널 갤러리나, 브란덴부르크 토어 같은 곳은 발도 못 디뎠다. 종류별로 맥주를 마시다가 안주도 하나 시키고, 안주가 남으면 또 맥주를 시키고, 맥주가 남으면 안주를, 안주가 남으면 맥주를… 끊임없는 맥주와 안주의 굴레 속에 미술관 폐관 시간까지 앉은 자리를 지킨 우리는 훌쩍 지나버린 시간을 깨닫고 허탈하게 웃어야 했다. 여덟 시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날이 밝아서 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다. 언제 이렇게 먹었나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온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진우가 불쑥 말했다.

“아까 왜 그렇게 열심히 계획 짠 거야.”

“……. 그러게.”

“이렇게 된 거 그냥 베를린에 있는 동안은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맥주나 마시러 다닐까?”

오늘은 여기, 내일은 다른 데. 나 맥주 맛있는 데는 많이 알아. 날 더우니까 그냥 집에서 사다 마셔도 되고. 여상하게 말하는 얼굴에 홀려 나도 잠시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여행 와서 맥주만 마시고 다닐 수는 없어.”

“…….”

“내가 언제 또 여기 와볼 줄 알고 술집만 다녀.”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손가락이 순간 뚝 멎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눈이 옆으로 또르르 굴러가더니, 푹, 하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치. 란 리모델링 끝나면 선배 또 엄청 바쁘겠지.”

“……. 그렇겠지.”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너도 다음 달에 미국 가잖아…….”

“그렇지…….”

따지고 보면 같이 살면서도 거의 처음이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적은. 그렇게 생각하니 집에만 박혀 있던 일주일이 너무 아까웠다. 이것저것 함께 많은 걸 해봤어야 했는데. 후회하는데 정진우가 나보다 더욱 후회하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렇게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줄 알았으면 오늘도 그냥 집에 있는 건데.”

“…….”

“오늘 아침까지가 꿈같다. 그죠.”

“…….”

나와 상당히 다른 포인트에서 아쉬워하고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일찍 집에 갈까.”

“지금?”

“응. 너 아쉽다며. 술도 깰 겸, 주변 구경하면서 걸어가자.”

잠시간의 고민 끝에 찾아낸, 정진우도 좋고, 나도 좋은 방법을 제시했다. 수심에 잠겼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그럼 카트린이랑 약속도 다 취소하고 오늘부터 둘이 집에만 있을까?”

“……. 그건 아니야.”

다음 주 수요일, 우리는 카트린의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가족이면, 독일어를 해야 하나. 얘한테 속성 과외라도 받아야 하나.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 다들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식사 자리에는 정진우와 나, 카트린, 카트린의 남편, 그들의 아이가 함께 할 예정이었다. 카트린은 몰라도 파울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 좋아하더니, 기다렸다는 듯 약속 취소를 운운하는 게 웃겨서 픽 웃었다. 저도 좀 민망했는지 슬며시 웃는다. 멋쩍은 얼굴이 귀여워서 가만있지 못하고 결 좋은 머리를 마구잡이로 흩트렸다.

집까지 걸으면서는 주변 거리 관광을 했다. 집 주변이라 그런지 정진우는 이 동네에 대해서 꽤 아는 것이 많았다. 이 길에는 갤러리가 많고, 이 길에는 일본 음식점이 많아요. 이쪽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한식집도 있고, 나 자주 갔던 베트남 음식점도 있어. 이 길 따라서 쭉 가면 예술 서적 파는 데가 있는데, 작지만 괜찮아. 한번 가보자. 이쪽 길로 가면 공원이 있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폼이 가이드를 해도 잘할 것 같았다.

정진우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하늘에도 노을이 졌다. 파란 하늘의 반절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푸른색에서 분홍색으로 그라데이션된 하늘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넓었나, 할 정도로 길을 걷는 우리의 머리 위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이쪽 길은… 하며 설명하던 정진우가 말을 멈췄다. 정신없이 하늘을 들여다보다가 말을 멈춘 정진우에게 고개를 틀었다. 그와 동시에 찰칵, 하고 나에게 들이댄 핸드폰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나왔어?”

“응.”

“진짜? 봐봐.”

보여줄 것처럼 굴더니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반팔 티셔츠의 소매를 쭉 잡아당겼다. 왜, 봐봐. 대답은 않고 휘파람만 휘휘 불어서 금방 포기했다. 어차피 정진우의 핸드폰엔 내가 모르는 내 사진투성이였다.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다를 것도 없고. 잘 나왔다니까, 뭐. 휘파람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익숙하다 싶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최근에 히트 친 유행가를 불고 있었다. 정진우는 휘파람도 잘 불었다.

끊길 듯 끊이지 않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노을 지는 베를린 한복판을 걷다 보니, 문득 내가 오늘 담배를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베를린은 길거리에서 흡연이 자유로운 도시였다. 담배연기 속을 지나면서도, 술을 그렇게 마시면서도 나는 오늘 한 번도 담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햇빛 때문인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기했다. 생각해 보면 베를린에 오고 나서는 하루에 두 개비를 피울까 말까긴 했다. 휘파람을 멈추고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정진우를 툭 건드렸다.

“진우야.”

“응?”

“나 오늘 담배 한 대도 안 피웠어.”

정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진짜네?”

“그치. 너도.”

“응, 나는 안 피웠지.”

“되게 신기하다, 그치.”

“그러게, 나는 몰라도 형은 하루에 한 대는 꼭 피웠는데.”

턱을 쓸며 곰곰이 생각하던 정진우가 불쑥 말했다.

“선배 오늘 되게 신났나보다.”

“응?”

“다른 거는 생각도 안 날 만큼 신나고, 여유롭고.”

정면을 향하던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본 정진우가 웃었다.

“선배랑 있어서 나도 그렇고.”

멍해진 내게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몰랐어요? 나 형이랑 있으면 웬만해선 담배 잘 안 피워.”

“…그러게.”

나와 있을 때 정진우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건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함께 피우자고 권하지 않는 한 정진우가 혼자 담배를 피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먼저 나에게 권한 적도 없었고.

다른 거는 생각도 안 날 만큼 신나고, 여유롭고. 정진우가 건넨 말을 생각했다. 녹초가 된 몸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어갔다. 울컥 벅차오른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가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구석에서 정진우의 마음을 발견한다. 그럴 때마다, 넘쳐흐르는 마음을 어쩔 줄 모른다.

잡고 있던 자전거 핸들을 쥐고 힘을 줬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집에 도착해, 뒤뜰에 자전거를 나란히 세워 놓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에 열쇠를 꽂아 넣자 웅, 소리를 내며 작동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길고 마른 손을 급하게 붙잡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더운 공기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나에게 꼭 맞는 촉촉한 입술을 찾아 얼굴을 움직였다. 잡은 손을 더욱 꽉 쥐고, 육감적인 아랫입술을 물었다. 당황하지 않고 바로 반응해오는 입술의 움직임이 사랑스러워서, 조금 웃었다.

엘리베이터부터 시작된 스킨십은, 집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나를 감싼 채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던 정진우가 작게 욕을 읊조렸다. 평소 욕을 입에도 담지 않는 애가 살벌하게 구니까, 약간 쫄아버린 나는 어쩐 일인지 나보다 배는 흥분해버린 것 같은 정진우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향했다. 옷 벗는 시간도 급한지 티셔츠와 바지를 휙휙 벗으며 걷던 정진우가 잠시 멈춰 얼떨떨한 나를 보고 말했다.

“벗겨줘?”

“……어?”

멍청한 나를 두고 혀를 찬 정진우가 다짜고짜 티셔츠를 벗겨버린다. 맨몸이 맞닿자 익숙한 체향이 나를 감쌌다. 허리에 손을 올린 정진우가 턱부터 목까지 키스했다. 끈적거리는 살이 맞닿자 한여름의 더위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 한여름…….

“…씻고 하자.”

“…뭐?”

“땀, 너무 많이 흘렸고…….”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았다.

“못 기다려.”

“미안한데 내가 너무 찝찝해서,”

“씻으면서 해.”

침실에 딸린 욕실이 아닌, 미로 같은 복도 어딘가의 문을 열어젖힌 정진우가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 똑같은 문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나는 팬티까지 모두 벗은 알몸이 되었다. 팬티 차림인 정진우가 욕조에 들어와 나를 끌었다. 급하게 닫히는 샤워커튼 사이로, 욕실 끝에 난 창문 밖 노을 지는 하늘이 보였다. 뭐라 뭐라 입 안으로 중얼대던 정진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찝찝하다며, 자.”

마주선 흰 얼굴이 물을 틀었다. 머리 위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흰 얼굴 위로 까맣게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줬다. 물줄기 사이로 눈이 맞고, 동시에 입술과, 가슴, 반쯤 선 성기가 맞닿았다. 정말로 나를 씻기기라도 하려는 듯 등이며 허리, 엉덩이를 커다란 손이 물과 함께 쓸고 지나갔다. 질 새라 문신이 가득 찬 어깨와 등,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몇 번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던 손이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아래를 벌리고 손가락이 거칠게 삽입했다. 일주일 내내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이물감이 덜하긴 했지만, 거칠게 쑤셔대는 손가락에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신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맞닿은 입 안에 거친 숨을 쏟아냈다.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코끝에 입 맞춘 정진우가 속삭였다.

“오늘 새벽까지 하길 잘했다, 그치.”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아, …….”

나를 휙 돌린 정진우가 허리를 단단히 잡아왔다. 좀만 참아요. 매번 하는 말과 함께할 때마다 더 커지는 것 같은 성기가 아래를 가르고 단숨에 침입했다. 등에 닿는 세찬 물줄기와 금세 철벅거리며 아래를 찔러오는 성기, 허리를 부러뜨릴 것같이 쥔 뜨거운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정신이 날아갔다. 지탱할 곳이 없는 욕실 벽에 기댄 손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아, … 아― 아윽!”

고꾸라지려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나를 고정한 정진우가 어깨에 입을 맞춰왔다. 어깨선을 따라 쪽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입술이 뒷목을 물었다. 울퉁불퉁한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엉덩이가 절로 조여들었다. 수많은 섹스를 했어도 이런 자세는 또 처음이라 어쩔 줄을 모르고 몸을 떨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와 있는 손이 가슴을 더듬더니 어느새 성기와 함께 곧게 서 있는 유두를 아프게 쥐었다. 세게 꼬집고, 부드럽게 문지른다. 이미 익숙해진, 거친 손바닥의 움직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느새 내 성기는 배꼽까지 일어선 채로 번들거렸다. 뒤에서 끊임없이 박아오는 성기의 움직임에 맞춰 내 것을 잡고 흔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빠르게 쳐올리다 예민한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짙게 문질렀다. 바로 어제, 체모를 깨끗이 밀린 탓에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울렸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배를 타고 내려와 민둥한 살을 쓸어내린 뒤 내 손 위로 두근거리는 성기를 함께 쥐고 흔들었다.

“아…, …진우야, 흐―”

사정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정진우의 손에 갇혀 움직이던 손짓에 박차를 가했다. 어느 순간, 내 손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곧 터질 것 같은 귀두 끝을 꾹 막았다.

“아, ㅇ… 나, 쌀 것,”

“좀만 참아… 같이, 가.”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터질 것 같은 아래를 잡고 놔주지 않는 손이 원망스러웠다. 눈꼬리에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철퍽거리는 소리와 숨소리가 샤워커튼 안을 울렸다. 얼마간 성기를 사정없이 박아대던 정진우가 꾹 쥐고 있던 내 것을 크게 훑었다. 해소되지 못했던 쾌감이 날뛰었다. 동시에 아래로 따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겹쳐 쥐고 있던 정진우의 손등에 손톱을 박았다.

“……하, 아으―”

사정 직후의 성기를 쥐고 느리게 주무른다. 몸을 떨며 숨을 고르던 나는 손을 뒤로 돌려 정진우를 조금 밀어냈다. 힘없는 손짓에 언제 사정했냐는 듯 쌩쌩함을 되찾은 성기가 찌걱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돌려 욕실 벽에 등을 기댄 채 또다시 성기를 맞닿아 오는 정진우의 볼을 쥐었다.

“……. 내가 씻자고 했지, 언제…….”

“씻었잖아, 지금까지.”

뻔뻔하게 말하는 까만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은 채로 나를 담았다. 곧이어 닿아오는 입술과 내 입술을 가르고 움직이는 혀를 힘껏 빨아들였다.

불이 붙은 섹스는 해가 지고, 동이 틀 때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이어졌다. 욕실에서 거실, 거실에서 침실로 이동하며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술이 취한 것도 아니었는데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었다. 창피한 나머지 기억까지 지워 버렸나.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눈을 억지로 떠올리며 한 생각은 하나였다. ……. 똑같은 것들끼리 만난다더니.

섹스 하는 내내 빼지도 못하고 차고 있던 시계 때문인지, 손목이 쓰라렸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꿈뻑이며 시계 주변을 살펴보았다. 빨갛게 생채기가 나고 부어 있었다. 이거 며칠 빼야겠는데. 오른손에 찰까. 고민하며 은색 스트랩을 만지작거렸다. 정진우는 깊게 잠들었는지 옆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를 향한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흘깃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

세 시. 이게 새벽 세 시가 아니라 낮 세 시가 맞겠지. 우리 아까 왜 그렇게 열심히 계획 짠 거야. 어제 정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러게……. 이럴 거 왜 우리는 어제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짰을까. 잠시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오늘은 원래 갤러리 몇 군데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가고, 슈프레 강을 보며 맥주를 한잔할 계획이었다. 실내 갤러리는 나중에 가고, 천천히 준비한 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만 가면 되는 거다. 눈을 비비며 계획을 정리한 나는 정진우의 어깨를 흔들었다.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진. ……. 진우야.”

내 목소리에 내가 깜짝 놀라 말을 잠시 멈췄다. 원래도 내 목소리는 걸핏하면 갔지만, 오늘은 심각했다. 쇳소리가 가득 섞여 나온, 듣기 싫은 목소리에도 정진우는 눈가만 찌푸릴 뿐 미동이 없었다. 어깨를 잡고 조금 더 세게 흔들었다.

“일어나. 세 시가 넘었어.”

“왜, 더 자자…….”

“안 돼. 준비하고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가야지. 우리 베를린 장벽 보고 강변에서 맥주 마시기로 했잖아.”

“그런 거 안 봐도 돼……. 어제 그랬잖아… 오늘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내가 언제. 울면서 정진우가 재촉하는 말에 뭐라고 한 것 같긴 한데, 기억나지 않았다. 밖에서 어영부영 돌아다니느니 그냥 집에 있어……. 우리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같이 영화도 보고, 맥주도 한잔하고…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있자는 논지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웅얼거린 정진우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집에 있자, 그냥.

서울이었으면 하자는 대로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는 베를린이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베를린. 거기다가 나에게는 베를린에 7년을 살면서 제대로 된 베를린 관광을 못 해봤다는 베를리너에게 관광을 시켜줘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생겨난 상태였다. 나는 물러지려는 마음을 단호히 먹고 허리에 감긴 손을 풀어냈다.

“일어나. 나 혼자 나갈까?”

“……. 아니.”

꾸물꾸물 눈을 뜬 착한 정진우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잡아온 손이 힘없이 늘어진다.

“…진짜 가게? 안 힘들어?”

“힘들긴 한데, 못 갈 정도는 아니야.”

“……. 그래요.”

체념한 듯 저도 몸을 일으킨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욕실로 향했다. 불을 켜고 거울을 보는데, 조금 흠칫했다. 목부터 가슴까지는 울긋불긋했고, 하도 울어서 그런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 이래서 밖에 어떻게 나가지.”

거울을 붙잡고 진짜 한여름에 목도리를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다 하나 마나 한 다짐을 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안 해야지.

역시 나의 다짐은 항상 이뤄지지 않았다. 카트린과의 저녁 약속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조금 이상한 여행을 지속해나갔다. 내가 끊임없이 뭉그적거리는 정진우를 슈프레 강으로 억지로 끌고 간 게 처음이었는지, 그 전의 섹스가 처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 느지막이 집을 나가 관광을 하고, 역시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와 동이 틀 때까지 섹스를 했다. 앞으론 신나는 관광을 즐겨야지, 하고 생각했던 내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렇다고 관광을 완전히 포기할 순 없었다.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나는, 이유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다급해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관광과 섹스를 사나흘간 지속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정진우가 섹스에 집착하는지는 몰랐지만, 화요일까지는 버틸 만한 것도 같았다. 아니었다. 수요일이 되자 나는 입 안이 다 헐어서 묽은 음식밖에 못 먹는 상태가 되었고,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정진우는 눈 밑에 그늘이 내려앉아 간신히 사람의 몰골을 유지하게 되었다.

역시나 네 시경에 눈을 떠 점심인지 저녁인지 애매한 식사를 하던 중, 나는 문득 지난 시간동안 우리가 애매한 기 싸움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한지도 모르고,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기 싸움을.

“진우야.”

“…응?”

눈이 반쯤 감긴 채 스프를 떠먹던 정진우가 대답했다. 그래, 너도 피곤하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카트린네만 갔다가, 바로 집에 와서 잘까.”

“……. 응?”

감겨가는 눈이 느리게 꿈뻑였다. 헛웃음이 터졌다. 미친 것처럼 실실 웃으니 정진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입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냥 푹, 자자고.”

“……그냥?”

“응. 내일도.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그냥, 푹 쉬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시 말이 없던 정진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좋아요.”

당연히 좋겠지 너도. 사람인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사흘 동안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진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입매가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스프를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트린이랑 약속은 몇 시라고?”

“일곱 시.”

“거기까진 어떻게 가?”

“원래는 렌트하려고 했는데…….”

말을 끌며 시간을 확인한 정진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택시 불러야겠네.”

그래.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내 얼굴을 흘깃대던 정진우가 작게 말했다.

“형 어제 지하철 타보고 싶다고 했지. 지하철 타고 갈까.”

……. 잠시 넋을 잃고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도 웃긴 게, 문득 지하철 타고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온 지가 언젠데 한 번도 지하철이며 버스를 안 타봤다. 입매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겠다. 나 먼저 일어날게.”

“진짜?”

“응.”

“……. 안 힘들겠어?”

……. 좋게 가려고 하면 꼭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에 오늘 새벽부터 불쑥 끓어오르던 속이 또다시 부글댔다.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웃었다.

“괜찮아. 나 씻는다.”

오만 데서 섹스를 한 탓에 완벽하게 익숙해진 복도를 지나며 중얼거렸다. 싸우지 말자. 이렇게 오래 둘이 같이 있을 날이 또 언제 있다고.

그러나 이번에도 나의 다짐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루지 않기 위해 다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카트린의 집에서 나온 뒤,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몇 달 만에 냉랭해진 분위기에 나는 속으로 연거푸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발단은 카트린의 여덟 살 난 아들인 닐이었다. 한창 기나긴 여름방학을 즐기는 중이었던 닐은, 한 번씩 봐오던 정진우의 옆에 새롭게 자리한 내가 신기했던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 엄마의 뒤에 숨어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식사를 시작할 때쯤엔 나에게 완전히 적응했는지 내 곁에 붙어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나는 애를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닐은 카트린과 파울을 적절히 닮아서 천사같이 예뻤고, 예쁜 애가 예쁘게 웃으며 내 곁에 붙어 나를 좋다고 하는데, 그게 싫을 리 없었다. 그래서 식사 내내 나는 닐에게 홀려 내 옆의 정진우를 잠시 잊고 말았다.

이번엔 내가 잘못했다. 정진우는 나보다도 더 애에게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애를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닐은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냥 오랜만에 보는 아는 애, 그 정도인 것 같았다. 설마 애한테 질투할까, 싶었지만 정진우는 애에게 질투했다. 내가 정진우의 마음을 너무나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를 챘을 때 적당히 거리를 뒀어야 하는데, 그것도 못 했다.

거기다가, 내일 점심 약속을 덜컥 잡아버린 것이 이 얼음장 같은 분위기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하늘 아래 길 건너 파랗게 빛나는 U-Bahn(지하철) 표시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정진우의 팔을 슬쩍 잡았다. 나를 흘깃 바라보는 시선이 냉랭하다.

……. 약간 울컥했지만 참고 말했다. 내가 잘못한 점이 있으니까.

“진우야, 화났어?”

“…아니요.”

정진우는 나 화났어.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시금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닐은 앞으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애고, 걔가 그렇게 원하는데, 내일 반나절 정도는…….”

“반나절?”

초록불로 바뀐 신호에 앞으로 나가려던 정진우가 멈춰선 채로 나를 돌아봤다.

“반나절이나 걔랑 놀아줄 생각을 했어요?”

“…….”

“그럼 나는?”

“그야 너도 같이…….”

정진우가 코웃음을 쳤다.

“선배가 오늘 어떻게 했는데? 식사하는 동안 내 쪽은 한 번이라도 봤어요? 닐만 보고, 닐만 안고 있고…… 아주 남이 보면 선배 자식인 줄 알겠어.”

빈정거리는 말투에 다시금 속이 끓어올랐지만 속으로 되뇌었다. 싸우지 말자. 잘 지내자. 사실 서울에 있으면서 정진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정진우가 애같이 구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해외 전시를 제외하면 작품을 하거나, 놀거나 하며 거의 집에 있는 정진우는, 한 달에 며칠을 제외하곤 항상 바빴던 나를 지금까지 군말 없이 기다려줬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와 함께 살며 정진우는 많은 것을 희생했다. 정진우가 하나씩 희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정진우의 마음을 확인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내가 더 사랑한다고 했을 것도, 지금은 누가 더인지 바로 말하지 못하고 고민하게 될 정도로 정진우는 나에게 지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쏟았다.

베를린에 와서도 나를 계속 집에 잡아두려 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진우의 강압적인 섹스에 화가 나도 참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선배는 내 생각은 안 해요? 나 다음 달에 미국 가면 또 3주는 못 올 거고, 다시 와봤자 선배는 출근해서 란에 처박혀 일하느라 자기 전에나 겨우 얼굴 볼 거고, 그런 건 생각 안 해? 왜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애한테 그렇게 시간을 쏟아야 돼?”

“그게 아니라,”

“뭐가 그게 아니라야.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선배는 틈만 나면 나가자, 나가서 뭐 하자. 나가서 여기 가보자, 몸 힘들어도 꾸역꾸역 나가고,”

“그러는 너는.”

“뭐?”

결국 나는 끓어올랐던 화를 참지 못했다. 어제 새벽부터, 불쑥 치밀곤 했던 화가 다시금 솟아올랐다.

“나는, 그냥 너랑 둘이 여기저기 다녀 보고, 너 여기 살았는데도 못 봤던 게 많았다길래 그런 것도 같이 보고, 그러고 싶었어. 그게 많이 잘못됐던 거면 미안하다. 근데 너는.”

“…….”

“너는 내가 네 뜻대로 안 된다고, 집에만 가면 붙잡고 섹스하고, 내가 이제 그만하자는 데도 진 빠질 때까지 붙잡고 안 놔주고, 그게 서른하나 먹고 할 짓이야?”

“…서른하나 먹고 할 짓?”

“그래. 닐도 그렇게 안 해. 걔는 내가 아쉽다, 안 되겠다, 하면 조금 떼는 써도 금방 포기하겠지. 근데 넌.”

“……선배, 말 좀,”

정진우가 기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만했어야 했다. 하지만 한번 터진 입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나도 미처 모르고 있던 서운함이 쌓이고 쌓이다 한 번에 터져 나와 입 밖으로 줄줄 흘렀다.

“첫날부터 시차적응도 제대로 안 됐는데, 다짜고짜 자전거를 사오지 않나, 무슨 공원 가자고 먼저 신나했을 때는 언제고 어디 가자하면 시큰둥. 너는 자주 다니지만, 나는 더 나이 먹기 전에 한 번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여행이야. 내가 너랑 지중해도 가고 싶고, 이탈리아도 가고 싶고, 그런 게 너는 지겨울 수도 있지만, 네가 계속 관심 없다는 식으로 굴 때마다 나는 어땠을 것 같냐.”

“…….”

“넌 요 며칠간 나 생각하긴 했어?”

창백하게 질린 정진우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나야말로 서른두 살 먹고 할 짓은 아니었다. 거리에서 애만도 못한 싸움을 하며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속이 답답했다. 무슨 얘기라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상처받은 얼굴을 한 정진우가 말했다.

“……내가 선배 생각을 왜 안 해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아니, 그건 미안하다. 그런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계속해서 싸울 것 같았다.

“집에는 따로 가는 게 좋겠다.”

“서요한.”

언성이 높아진 정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지금 서로 너무 예민해져 있어서. …너랑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

“알지?”

“모르겠어요.”

짓씹듯 말한 정진우가 휙 몸을 돌렸다. 빠르게 역사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가슴을 쳤다. 맛있게 먹었던 저녁이 가득 얹힌 채 내려가지 않았다.

조금 피곤했어도 좋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랜만의 싸움도 그랬지만, 정진우의 상처받은 눈빛이 무서웠다. 그럼 그때 그냥 끝장을 볼 때까지 싸웠어야 되는 건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정진우와 나 사이에 생기는 일들은 항상 어려웠다. 가슴이 답답해 집 근처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시끄러운 음악에,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피곤한 머리가 멍해지며 생각이 둔해졌다.

내가 잘못했지. 우리 둘이 보내는 시간에 닐이랑 약속까지 잡아버리고. 카트린이랑 약속한 것도 취소한다고 하는 애 앞에서. ……. 그럼 걔는 뭐 잘한 거 있나. 내가 지 뜻대로 안 한다고 애처럼 군 게 누군데.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생각이 휙휙 바뀌었다. 다섯 잔을 넘겼을 때는, 그냥 정진우가 보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담배가 당겨서 주머니를 뒤졌다. ……. 요 며칠 안 피웠더니 가방 안에 뒀다는 걸 잊고 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데 신호음이 끊기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Hallo.

왜 갑자기 할로야. 잠시 당황했다가 정진우가 내 유심 번호를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유심을 산 후, 집에 가서 알려 줄게. 내일 아침에 알려 줄게. 하고 미루다가 여태까지 안 알려주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애매하게 풀어졌다. …뭐가 바빠서 아직 내 번호도 안 알려줬지. 어이가 없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정진우를 불렀다.

“진우야.”

-……요한이야?

“응. 나야.”

사람들을 헤치며 전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 대었다. 가방만 가지고 빨리 나가야지. 아, 일단 계산부터…….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보고 싶었다. 잠시 말이 없던 정진우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어디야? 너무 안 와서 걱정했잖아. 형 번호도 모르는데…….

“여기, ……너네 집 근처 바.”

-뭐? 술 마셨어?

“……. 응. 좀 답답해서.”

수화기 너머로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면목이 없었다. 빨리 가방을 찾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테이블 밑에 두었던 가방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 여기다가 뒀는데, 어디……. 익스큐즈 미, 쏘리를 반복하며 내가 앉았던 테이블을 샅샅이 뒤졌다.

“…….”

-서요한. 전화 걸어놓고 말도 없이 뭐 해.

“진우야.”

-왜.

“나 가방이 없어. 분명히 여기다가 뒀는데……. 왜… 없지.”

긴 침묵 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에 쫄아서 가게 이름을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톡톡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으름장을 놨다.

-10분 안에 가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응.”

-아니다, 밖에 나와 있어.

“……어, 미안하다.”

대답 없이 뚝 끊긴 전화를 붙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지금 가방을… 잃어버린 게 맞지. 전화 받으러 나갔다 온 그사이에. 항상 정진우와 있고, 뭘 두고 다녔던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여기는 한국보다 치안이 좋지 않은 도시라는 걸. 그나마 가방에 현금 몇 유로와 담배 정도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정진우를 기다렸다.

10분 안에 온다던 정진우는 엄청 밟았는지 5분을 조금 넘겨서 도착했다.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기대 놓고 나에게 다가오는 얼굴이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정진우는 화가 난 얼굴도 잘생겼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서운했던 마음은 모두 날려버리고 정진우가 보고 싶은 마음만 남겨뒀기 때문에 얌전히 서서 화난 얼굴이 내 앞에 당도할 때까지 기다렸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내려다보던 정진우가 말했다.

“가방에 뭐 있었어?”

“별거 없었어. 담배랑, 한 20유로 정도…….”

“…….”

“맥주 값만 있었어도 너 오라고 안 했을 텐데. 미안.”

“됐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까칠한 정진우가 맥주 값을 계산하는 동안, 나는 정진우의 자전거를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진우가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그사이에 조금 진정한 모양인지 표정이 나아져 있었다. 옆으로 다가와 자전거를 내 손에서 받아든 정진우가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우습게도 나는 그 간단한 동작에 우리가 방금 싸웠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속상하다고 혼자 술이나 마신 내가 정신이 나갔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진우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정진우가 나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피울래?”

“…아니.”

그래.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고 슬슬 자전거를 끈다. 자리에 멈춰 있는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담배연기로 인해 정진우가 뿌옇게 보였다.

“가자, 집에.”

“…미안하다.”

“선배 가방은, 얘기해놓긴 했는데 아마 못 찾을 거야. 여기 한눈팔면 바로 가방 가져가는 애들 수두룩해서.”

“그게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파랗게 핏줄이 돋아난 팔뚝을 잡았다.

“아까. 닐하고 약속은 내가 취소할게. 카트린 번호만 알려주면…, 미안해. 내가 말이 심했지.”

“…….”

“미안해, 정말. 너 걱정할 거 뻔한데 그것도 생각 못하고… 많이 화났지.”

“아니야. 애초에 별로 화도 안 났는데 애가 뭐라고, 아까는 나도 심했어. 피곤하긴 했나봐. 진짜 괜히 예민해져서…….”

“나도야. 괜히 피곤해서 예민하게 굴었어.”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를 걸으며 김빠진 사과를 했다. 말하다 보니 정말 둘 다 피곤해서 별것도 아닌데 화가 났던 것 같았다. 사나흘을 그렇게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굴렀으니, 없던 화도 쌓이는 일정이긴 했다.

우리는 얼마간 서로 질세라 자기반성을 한 뒤, 헤어져서 뭐 했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술을 마셨고, 정진우는 집에 가서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더 미안해졌다. 그 와중에 내가 다섯 잔을 마신 게 사실이라고 하니 정진우가 약간 질린 눈을 했다. 할 말이 없어서 괜히 얼굴 앞을 기웃대며 예쁜 척을 했다. 보통 정진우가 화가 난 나를 달랠 때 하는 짓이었다. 예쁜 얼굴이 싱글싱글 웃으며 잘할게. 잘할게. 하면 들끓던 화도 금세 가라앉곤 했다. 다행히 예쁜 짓은 정진우에게도 통하는지 표정을 굳혔던 정진우가 픽 웃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담배냄새가 풍겼다. 불쑥 질문부터 나왔다.

“담배 언제 샀어?”

“아까. 속상해서.”

“…….”

“왜 그런 표정을 해. 형 때문에 속상하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잠시 말을 멈춘 정진우가 내 손목을 잡고 빨리 올라가자, 재촉했다. 정진우의 자전거를 내 자전거 옆에 파킹하고 집에 올라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들여다봤다. 열한 시 오십오 분. 이제 씻고 자면, 오늘은 베를린에 도착한 후 거의 처음으로 자정 전후에 자게 되는 것일 테다. 붙어서 잠시 잡담을 하다 씻으러 들어가려는데 정진우가 일어나는 내 팔을 잡았다.

“왜?”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뭘.”

“오늘 며칠이야?”

뜬금없이 날짜를 묻는 정진우를 멍하니 보다가 생각했다. 오늘 며칠이더라.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8월 16일. 11시 58분.

“8월 16일. 아, 어제 광복절이었네.”

멍하니 중얼거리다 깨달았다. 내일이 내 생일이네. 그사이 전자시계의 숫자가 59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던 정진우가 급하게 일어났다.

“괜히 싸워서 지금까지 같이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속상했어. 잠깐 기다려.”

중얼중얼거리며 부리나케 거실을 떠나는 등이 좀, 할아버지 같아서 웃겼다. 금세 말랑말랑해진 마음으로 소리 죽여 웃고 있다가 8월 17일로 변한 날짜를 보고 크게 말했다.

“진우야.”

“기다려! 형이 맥주를 다섯 잔이나 안 마셨으면 맞춰서 줄 수 있었잖아!”

또 내 잘못이었다.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뭔가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선 정진우가 내 옆에 앉으며 내 볼에 키스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베를린 와서 한 거라곤 밥 먹고, 섹스하고, 싸우고, 화해한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생일이 다가와 있었다. 나를 한참 지분거리던 정진우가 들고 온 것들을 내밀었다. 하나는 자주 보던 정진우의 드로잉 북이었고, 하나는 4등분으로 접혀 있는 A4용지였다.

“펴 봐도 돼?”

“응.”

드로잉 북부터 펼쳐 보았다.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까만 드로잉 북 안의 하얀 종이 안에는 온통 내가 있었다. 연필 스케치에 수채화로 채색된, 베개에 얼굴이 눌린 채 자는 나, 멍하니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나, 웃는 나. ……. 알몸으로 누워 있는 나. 왜 그렇게 요새 들어 내 사진을 찍어댔는지 알 것 같았다. 창피해져서 화끈거리는 귀를 잠시 감쌌다. 정진우가 재촉했다. 끝까지 봐봐, 얼른.

수십 장의 내가 그려진 종이를 넘기고, 끝 장을 펼쳤다. 정진우의 작품에서 항상 봐왔던 JUNG이라는 싸인과 함께 이 책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 정진우를 바라보았다.

“<고난>이 아니라고?”

“이제 <고난>은, 그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서.”

“…….”

“오늘 발표한 새로운 내 작품이야.”

한여름처럼 더운 숨이 내 귀를 간질였다.

“제목은, 요한.”

잠시 망설이듯 제 입술을 핥은 정진우가 말했다. 그것도 봐. 다른 손에 쥐인 종이쪽지 쪽으로 눈짓한다. 드로잉 북을 덮고 4등분으로 접힌 종이를 펼쳐보았다.

“…….”

팔레르모행 비즈니스 티켓이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지 잠시 얼떨떨한 머리로 생각했다. 옆얼굴에 정진우의 시선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종이를 한 번 더 보고, 고개를 돌려 정진우를 마주봤다.

“너 이거, 언제…….”

“아까. 형 이탈리아 가보고 싶다며. 지중해도 있고. 여기가 딱 맞는 것 같아서.”

“…….”

“베를린에서 못 한 것도 마저 하고, 시칠리아 가서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오자. 어린애처럼 굴어서 미안해.”

귓불을 문 정진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옅게 웃는다.

“섹스는… 관광하기 안 힘들 정도로만 하자.”

“힘들어도 돼…….”

사실 나도 대부분은 좋았어. 중얼거렸다. 귓가의 웃음소리가 조금 커졌다. 팔과 다리를 모두 뻗어 나를 가둔 정진우에게 물었다.

“이건 다 언제 그렸어…….”

“틈틈이. 몰래 그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 이제 대놓고 그려야겠다. 포즈 잡아줘.”

“……. 계속 그릴 거야, 나를?”

“당연하지. 형이 꼬부랑 할아버지 될 때까지 그릴거야. 그때 되면 제목도 바꿔야지. Opa Johann(할아버지 요한).”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주책인 것 같아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귀신같이 알고 깜빡이는 눈가를 핥은 정진우가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뜨거운 정진우의 목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고마워. 말없이 나를 더욱 꽉 안아온다. 이렇게 예쁜 짓만 하는 애를 두고 왜 나는 계속 서운한 것만 찾고 있었지. 오늘 저녁까지의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붉게 달아오른 귓가에 입 맞추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장 손쉽게 표현해주는 단어를 발음했다.

“진우야.”

정진우가 말했다.

“응, 요한아.”

감은 눈 안으로 열두 점의 <고난>과 한 점의 <요한>이 차례로 지났다. 이번에는, <요한>이 30점, 40점이 됐을 때의 우리를 그려보았다. 그때에도 우리는 잦은 싸움을 반복할 것이고, 너는 여전히 예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고, 너 또한 나를 사랑할 것이다.

뜨끈한 열기가 우리 사이에 고였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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