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외전)
1.
9월 초입, 유독 더웠던 여름도 끝물이었지만 아직도 한낮의 열기는 후끈했다. 그러나 가실 줄 모르는 늦더위로 푹푹 찌는 바깥과는 다르게 서진이 있는 공간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느지막한 점심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서진의 시야에 테이블 위 진동하는 핸드폰이 들어왔다.
[자?]
액정에 뜨는 짧은 메시지에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서진의 눈이 반짝였다. 서진은 크게 제 흥미를 끌지 못했던 책을 미련 없이 덮고 냉큼 핸드폰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메시지는 연달아 왔다.
[밥은?]
[밥이랑 간식이랑 다 먹고 자야 되는데]
애정이 담뿍 담긴 메시지를 본 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서진은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 다 먹고 서재에서 책 보고 있어]
정혁이 넌 점심……까지 쓰고 있는데 손안의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 영상 통화를 요청하는 문구에 서진은 반사적으로 수락을 눌렀다.
-서진아.
“어…… 지금 통화해도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면 가득 들어오는 제 남편의 모습에 서진의 얼굴에 반가움이 들어찼다. 비록 상반신뿐이기는 했지만,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딱 떨어지는 슈트를 갖춰 입은 정혁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누구 남편이 이렇게 근사한지 모르겠네.’
서진은 차마 하지 못한 그 말은 속으로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사람 마음 사르르 녹게 하는 그 예쁜 미소에 정혁의 눈빛이 순간 묘해졌다.
-그럼, 그냥 지금 집에 가도 돼.
“또, 또. 그런 소리 한다. 맡은 일은 다 끝내고 와야지.”
부드럽게 타박하면서도 서진의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사실 내내 기다렸던 통화였다. 회사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정혁과 몇 번 심각하게 얘기를 나눈 끝에 결국 메시지는 최대한 자제, 전화는 이렇게 점심 먹고 한 번으로 제한을 걸어 놓았던 서진이었다. 정혁과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픈 마음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일에 집중해야 하는 정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가 정혁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진짠데. 참, 점심은 다 먹었어?
“음…… 응.”
-대답이 애매한데.
“아냐, 진짜 많이 먹었어. 여사님이 별식이라고 닭칼국수를 너무 맛있게 해 주셔 가지고. 한 그릇 거의 다 비웠다니까.”
어쩌다 보니 변명하듯 되어 버렸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에는 절대 져 주지 않는 정혁을 알아 피치 못 할 일이었다. 흐음, 못 미덥다는 추임새와 함께 저를 탐색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정혁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하며 서진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마냥 유난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유독 더웠던 이번 여름을 제대로 탔던 서진이었다. 정혁이 걱정하는 것을 알았지만 워낙 입맛이 없어 끼니마다 미국에서 지내며 먹었던 양의 반의반도 못 먹고 남기기 일쑤였다.
딱히 어디가 콕 집어 아픈 것은 아니었으나 몇 달 전까지 정혁과 둘만의 세상에서 지낼 때와는 몸 상태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힘겹게 조금 붙었던 살도 또다시 내렸던지라 정혁은 최근 더더욱 이런 쪽으로는 예민했다.
“이거 봐. 지금은 과일도 먹고 있어.”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화면 속 남자에게 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청포도 한 알을 떼어 흔들어 보였다. 입 안에 쏙 넣고 부러 과장되게 오물오물 씹는 제스처를 취하니 결국 정혁이 피식 웃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 귀엽냐. 미치겠다, 진짜.
“…….”
-보고 싶다.
아침에 뽀뽀도 못 받고 갔는데. 덧붙이는 말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아…….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낮지만 은근한 목소리에 서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평소에도 예쁘다,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사는 정혁이지만 이렇게 통화할 때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남자를 보고 있자면 매번 마음 한쪽이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사실 서진이 늘 하는 정혁의 배웅도 제대로 못 하고 잠에 빠져 있던 이유는 새벽까지 침대 위에서 저를 몰아붙였던 그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거기에 굳이 뭐라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제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눈만 깜빡이는 서진을 보던 정혁이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들어갈 때 사 갈게.
“없어.”
-왜, 아직 시간 있으니까 생각해 봐. 응?
어린애 달래듯 나긋하게 말을 잇던 정혁은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늘은 정시에 퇴근해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늘 칼 퇴근을 한 정혁과 같이 저녁을 먹는 것은 일상이었지만, 요 며칠은 때아닌 야근에 정혁의 퇴근이 늦어져 그러지 못했다.
-아님 오랜만에 나가서 먹을까? 바람도 쐴 겸?
“아니…….”
잠시 망설이던 서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냥 아무 것도 안 사 와도 되니까 네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
-…….
“음…… 그렇다고 일이 있는데 무리해서 오라는 소리는 아니고.”
알지? 그냥 나도 보고 싶다는 뜻인 거, 제 말에 잠시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표정에 서진이 황급히 말을 덧붙이자 정혁이 흐음, 소리와 함께 한쪽 눈썹을 슬쩍 찡그렸다.
‘아.’
분명 희미한 불만이 섞여 있는 얼굴인데, 그게 또 색정적으로 보이는 탓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간밤의 정사 때 제 위를 타고 올라간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를 마음껏 탐하며 무섭게 집중할 때 그는 꼭 지금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서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정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일 다 하고 오라면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
“…….”
-진짜 박서진, 나 갖고 논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혁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서진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정혁이 별안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건 여기 놔둬요.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정하던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냉정할 정도로 사무적인 음성이었다. 예, 저만치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는 정혁의 곁에서 늘 그를 보좌하는 임 비서가 틀림없었고.
“정혁아. 바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끊을까? 나도 책 마저 읽게.”
물론 정혁이 이어폰을 끼고 있어 제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았겠지만, 조금 민망해진 서진이 통화를 마무리하려 하자 칼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안 바빠.
“……내가 바빠.”
-…….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서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퇴근 때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있게 생겼다.
“일 열심히 하고, 이따가 봐…… 여보.”
마지막 말을 덧붙일 때는 아직도 조금 쑥스러웠다. 실제로 그래서 입에 잘 올리지 않는 단어이기도 했다.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중얼거린 단어 하나의 위력은 굉장해 불퉁했던 정혁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여하튼 서정혁은 박서진 한정으로는 참 알기 쉬운 남자였다. 알았어, 여보. 입이 귀에 걸릴 듯 싱글거리며 대답한 정혁은 목소리를 낮춰 나긋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매번 듣는 말인데도 심장이 속절없이 뛰어 곤란했다.
* * *
그렇게 전화를 끊은 서진은 서재에서 나와 1층 안방으로 향했다. 도중 부엌에서 나오신 도우미 이모님께서 쉬면서 먹으라고 쿠키와 시원한 에이드를 들려 주셨다.
‘어, 직접 구우신 거예요?’
‘네. 사모님 이거 잘 드셨던 기억이 나서요. 왜, 저 여기서 일한 지 며칠 안 됐을 때 만들어 드렸었잖아요.’
‘네. 기억나요, 근데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해요. 같이 드시겠어요?’
‘아유, 아니에요, 전 아까 사모님이랑 점심 많이 먹어서 아직도 배가 부른걸요. 혹시 또 따로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직접 안방까지 갖다주신다는 것을 만류해 서진이 트레이를 받아 왔다. 정혁이 수소문해 집안의 전반적인 가사를 총괄하게 된 이모님은 재벌가에서 잔뼈가 굵어 눈치도 빠르고 요리 솜씨도 좋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섬에 들어가 몇 년 일을 쉬고 있던 그녀였지만, 파격적인 조건에 뭍 밖으로 나와 정혁을 따라왔던 참이었다.
집 안팎을 완벽하게 경호하고 있는 수행원들의 규모만 해도 상당했으나 정작 저택 안은 낯도 가리고 최대한 누군가와 맞부딪치고 싶어 하지 않는 서진 때문에 인원이 제한적이었다. 첫날 일을 시작할 때부터 서진에 대한 정혁의 과보호와 깊은 애정을 눈치챈 그녀는 이 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막히게 알아차렸다.
‘전화를 안 받아서, 서진이 지금 자고 있습니까?’
‘혹시 서재에서 잠들었는지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쪽 소파에서 자꾸 자는 습관 들면 안 되거든요. 감기 걸릴 수도 있고.’
‘일 때문에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저녁 식사 혼자 하는 거 적적하지 않게 옆에 있어 주시면 좋겠는데요. 물론 추가 수당은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한 번씩 통화를 할 때마다 고용주가 제게 묻는 것은 오직 이 집의 안주인인 서진에 대한 것뿐이었다. 몸이 약하니 특별히 신경 써 달라는 당부를 듣긴 했으나 그래도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이 정도로 섬세하게 아내를 챙기는 남편은 처음이라 처음에는 살짝 의아한 마음도 들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얼마 전 건너 건너 둘의 사연을 접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물론 높으신 분들 사정이야 다 알 수는 없는 거지만…… 서진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정혁의 당부에서 오는 책임감을 차치하고라도, 그간 기 센 여주인만 보다가 순진하게 생각될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착한 서진을 보니,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드는 마음이었다.
트레이를 들고 습관처럼 침대로 향하던 서진이 문득 든 생각에 눈을 슴벅였다. 침대 위에서 먹으면 안 되는데…….
‘근데 맛있겠다.’
점심을 먹고 노곤해지면 잠깐씩 짧게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는 서진이었지만, 달콤한 간식의 유혹에 잠시 눕는 것을 뒤로 하고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모님이 정성스럽게 만든 쿠키를 입 안에 넣으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시원한 방 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노닥이니 이런 호사가 따로 없었다.
‘정혁이는 힘들게 일하는데 나만 노네.’
그 와중에도 또 떠오르는 정혁의 얼굴이었다. 서진은 쿠키를 우물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같았던 반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 들어온 지 석 달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퇴원 직후에는 정혁의 오피스텔에서 지냈었던 둘이었으나 정혁은 사실 진작부터 그들만의 신혼집을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정혁은 5년 내내 집 안에 틀어박혀 살았던 서진에 대한 사무치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답답해하지 않게 도심이 아니라 외곽 부근에 최대한 미국에서 지냈던 저택과 비슷하게 집을 짓고 살려 했었지만, 결국 회사에서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살게 되었다. 거기에는 서진의 의사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난 사실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는데, 진짜 상관없어.’
‘어떻게 그래. 그래도 우리 신혼집인데.’
정혁은 의아해했지만 사실 서진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혁이 퇴근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에 왔으면, 하는 단순하지만 간절한 생각에서였다.
정혁과 매일같이 함께하다 한국에 들어와 정혁이 출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지라 헛헛한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었으나 그래도 요즘은 꽤 적응한 편이었다.
약속한 기간이 다 끝나 갈 즈음 정혁은 한국에 들어오는 문제로 막판에 결국 서 회장과 트러블이 나기까지 했었다. 서진이 워낙 미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약도 끊고 잘 지내니 한국에 들어와서 혹시나 좋지 못한 영향이 갈까 걱정했던 탓이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아챈 서진의 중재로 원래 계획대로 입국하게 되었지만, 혹시나 서진이 자신 모르게 우울해하기라도 할까 봐 한동안 더더욱 기민하게 서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던 정혁이었다.
‘나는 정혁이 너랑 있으면 어디든 좋다니까. 정말이야.’
서 회장과 통화를 마친 후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야겠다고 씩씩대는 정혁 앞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둘만의 성과 같았던 곳을 떠날 때에는 조금 생각이 많아졌던 것도 맞았다. 아무래도 아무도 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사람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 사는 것에 대한 홀가분함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서진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고 나니 아련한 꿈과도 같았던 그들만의 세상에서의 나날들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지만 지금 정혁과 지내고 있는 날들 역시 그녀에게는 환상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정혁이 없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지금 몇 시간 정혁을 못 본다고 아쉬워하는 일 자체가 사치라는 것을 서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지.’
핸드폰 갤러리 안 사진들을 하나하나씩 넘겨 보던 서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폴더 안 모든 사진에 한겨울부터 늦은 봄까지의 추억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정혁이 저를 데리고 곳곳을 누볐던 덕에 바깥에서 찍은 사진들도 많았지만 집 안에서 찍었던 사진들도 그만큼 많았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했던 서진이 습관처럼 그 모든 것들을 남겨 두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진 중에서도 정혁이 오롯이 저를 위해 만들었던 그 공간 안의 풍경들에 더더욱 눈길이 가는 서진이었다.
눈이 유독 많이 왔던 날 다이닝 룸에서 함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찍었던, 겨울을 흠뻑 머금은 창밖의 풍경, 몇 번이나 재탕한 로맨스 영화를 보다 정혁의 어깨에 기대 찍은 어둑한 배경의 셀카, 새순이 움트는 푸르른 정원에서 소매를 걷어 붙이고 뚝딱뚝딱 뭔가를 만드는 정혁의 옆모습을 먼발치에서 몰래 찍은 사진, 그리고 그네 의자 위 환하게 웃고 있는 제 모습까지…….
‘…….’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며 그네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지나치는 제 한 마디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제가 잠든 때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정혁이 만들었던 그 예쁜 흔들 그네가.
‘진짜 잘 만들었었는데.’
엄청 튼튼하고 정원과도 잘 어울렸었고. 목공 일을 쉰 지 꽤 되었는데도 손재주가 워낙 좋아 그렇게 잘 만들었나 보다.
‘정혁이처럼 이렇게 만드는 사람도 많나?’
서진은 의식의 흐름대로 검색창에 관련 항목을 서치해 보았다. 생각보다 글이 많았는데, 물론 사적인 감상이 들어가긴 했지만 정혁이 만든 그네만큼 잘 만든 것은 없어 보였다.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서진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한두 개 집어먹고 만 과자를 그대로 놓고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점심을 평소보다 많이 먹은 노곤함이 이제 밀려오는 듯했다. 얇은 이불을 습관처럼 목 끝까지 올리니 정혁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안정되던 찰나.
‘맞다.’
가물가물 감기던 서진의 눈이 퍼뜩 뜨였다. 진짜 오늘은 꼭 결정하기로 했는데.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잘 때가 아니었다.
사실 서진은 불과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정혁의 생일 선물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봄이었던 서진의 생일은 정혁이 근사하게 치러 줬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기억에 남을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같이 산 지도 4년 차, 처음 1, 2년은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졌던 서진이 정혁의 곁에서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도 나름대로 챙긴다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차게 신경 써 주지도 못했고, 그나마 벼르고 별렀던 작년 생일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결혼 준비와 겹쳐 어설프게 넘어가 버렸었다.
사실 혼인 신고는 더 일찍 했던 둘이지만 서진은 그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정혁과 이렇게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너무 꿈같은 일이었기에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아도 할 건 해야지 않으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식은 치르고 싶다는 정혁의 의사와 그래도 인륜지대사니 형식은 갖춰야 한다는 서 회장의 의사가 처음으로 맞물린 게 둘의 결혼식이었다.
결국 상의 끝에 미국에서 정말 최소한의 인원과 증인만 두고 규모는 작지만 경건한 식을 올렸던 그들이었는데, 날을 잡다 보니 정혁의 생일과는 일주일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아 그렇게 어설프게 흘러갔었다.
그런고로 이번에는 꼭, 제게 차고 넘치게 애정을 쏟는 정혁에게 뭔가 기억에 남는 선물을 주고 싶어 얼마 전부터 고민하던 서진이었다.
‘뭐 특별한 거 없을까.’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등을 대고 앉은 서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가 주는 거라면 그게 뭐라도 좋아할 남자라는 것을 알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실 물질적인 것을 선물한다는 것은 더는 정혁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의 본질은 그대로였으나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공사판을 전전하던 그때와 지금의 정혁은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서진이 뭘 사 준다고 해도 정혁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부부 사이에 이런저런 것을 따지는 건 아니었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알면 정혁이 서운해할 것도 알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뭔가 씁쓸했다. 작게라도 좋으니 온전히 제힘으로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윤지훈과 결혼할 때도 빈 몸으로 들어갔던 서진은 이혼 후에도 빈 몸으로 나왔다. 아주 예전, 처음 만나 연애할 때는 제가 정혁에게 가끔 뭘 사 줬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먹는 거, 입는 거 하나하나 다 정혁이 살펴 주고 있었다.
정혁이 알면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기함할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이럴 때면 가끔은 정말 놀고먹기만 하는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그게 맞기도 하고.
‘아무튼 빨리 결정해야 되는데.’
핸드폰을 다시 들어 하릴없이 아까 검색했던 것들을 다시 둘러보던 서진의 시선을 잡아끈 무언가가 있었다. 어……. 찰나 생각에 빠진 서진이었지만 의외로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평소에는 생각이 많은 그녀지만 가끔 이렇게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네, 공방입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경쾌한 톤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 꿀꺽 마른침을 삼킨 서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블로그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원데이 클래스 때문에…….”
-아, 네! 예약하시려고요?
“어, 그게……. 네, 그런데 블로그에 나와 있는 시간이 오전이던데, 그 시간대만 가능한 걸까요?”
-네! 저희가 방학 동안에는 오후 타임도 오픈했었는데, 저번 주부터는 매일 10시부터 12시까지로 오전만 예약을 받고 있어요. 최소 하루 전까지는 예약을 받고 있는데 이번 주는 다 찼고요.
사장으로 생각되는 여자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서진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주마다 주제를 잡고 하고 있는데 다음 주 주제는 우든 펜이라고 했다. 시간은 앞서 말한 대로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 생각하면 되고, 레이저로 펜에 각인까지 새길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선물하실 거면 더 좋죠, 저희가 포장 상자나 리본 같은 것도 다 준비해 드리거든요? 그래서 다 만들고 그 자리에서 예쁘게 포장해서 가시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원래는 이번 주 수업으로 예정된 우드 키 링을 보고 전화한 거였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펜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다정하게 휘몰아치는 여자의 말을 홀린 듯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은 결국 다음 주 금요일 오전으로 예약을 잡았다.
“혹시 못 가게 되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네, 그럼 그때 뵐게요, 감사합니다!
결국 예약까지 마친 서진은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들고 잠시 멍해 있었다. 잘한 걸까? 끊고 나니 괜한 일을 벌였나, 싶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물론 서진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일 때는 강사를 집으로 불러 개인 강습을 받는 편이 더 나을 거였다. 그러면 굳이 시간을 맞추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필요한 장비나 공간 같은 것은 이쪽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이 커지면 정혁이 알게 될 확률이 컸다. 서진의 입장에서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서진은 정혁이 진심으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오전 중이면 이모님하고만 잘 말을 맞추면 정혁 몰래 다녀오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좀 더 생각해 보자, 결론을 내린 서진은 그제야 다시 푹신한 시트 위에 몸을 눕혔다.
‘정혁이만 좋아해 주면 되는 거지, 뭐.’
물론 소탈함을 넘어 한없이 작은 선물이겠지만 서진은 정혁이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혁을 위해 무언가를 직접 만든다는 상상만으로 괜히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보니 아직 만들지도 않은 완성품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서진은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어느새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리고 일주일 후, 서진은 익숙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일부러 시간 맞춰 예약해 둔 택시까지 타는 나름의 치밀함을 발휘한 서진이었다. 공방이 위치한 2층으로 올라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진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호기롭게 예약해 놓았으면서 사실 서진은 그다음 날 공방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하려고 했었다. 정혁 몰래 외출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래도 걸렸기 때문이었다. 전후 사정 모르는 남들이 보면 애도 아니고 뭐냐며 타박할지 몰라도 서진에게는 나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일’ 이후 서진의 신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퇴원 절차를 밟고, 윤지훈과 이혼을 하고, 지나치게 약해진 몸을 정혁의 옆에서 회복하는 와중에도 서진은 정신과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었다. 우울감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기도 했지만 새롭게 불안증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제 부모에게서까지 버림받았다는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서진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저를 보면 수군거리는 것 같은 환영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저를 아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지만…… 어딜 갈 때마다 다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착각이라는 것을 아는데 떨칠 수가 없어요. 실제로 저를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을 테니까요.’
저를 상담해 주는 의사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사리 제 속내를 털어놓았던 서진이었다. 서진이 원했기에 상담에는 정혁 역시 동행한 상태였다.
지옥이나 다름없었던 5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저를 향해 독을 뱉는 사람들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도 그 과정에서 깊이 곪은 상처가 종국에는 상황과 맞물려 터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냥, 무서워요. 솔직히 없는 얘기도 아니고 다 사실이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제가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나약하게만 느껴지고요.’
정혁 측에서는 최대한 막으려 노력했으나 EM의 암묵적인 후계자였던 지훈의 비리와 불륜 끝 이혼, 서진의 자살 기도까지 그 모든 것들이 워낙에 다 자극적인 사실이었기에 한동안 세간이 떠들썩했다.
정혁은 서진의 귀를 막아 주려 고군분투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그들의 관계가 수면 위로 올라가 둘이 비밀리에 이미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얘기까지 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서진의 마음도 못내 시끄러웠다. 살겠다는 삶의 의지를 다지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시꺼먼 불안까지 완전히 지워 내는 것은 그 당시 서진에게는 버거웠다.
‘서진 님 마음 충분히 공감이 가고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게,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빨리 잊어요.’
의사의 말을 경청하며 잘게 떨리던 서진의 손을 꽉 잡아 주던 정혁의 커다란 손의 온기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니 아까 고민된다고 하셨던 외국 생활에 관해서도 그것을 현실에서 도망간다거나 피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본인이 가장 마음 편한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시면 훨씬 도움이 되실 거예요.’
상담의 횟수가 늘어나며 서진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켜켜이 쌓여 가는 소중한 일상에서 다쳤던 마음을 치료해 갔다는 게 맞았다.
사실 그 와중에도 미국행을 염두에 둔 정혁의 계획에 설레면서도 자신이 본질을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을 잠시 떠난다고 제 모든 과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도 했던 서진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정혁과 서진 본인의 의지로 서진은 자신을 오랫동안 잠식했던 우울감과 불안함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고 결국은 약을 끊고 그녀가 원했던 미국행에 오를 수 있었다.
‘어떻게 고른 게 딱 여기였을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지난주, 취소하려고 마음먹어 놓고서도 약간의 미련으로 다시금 공방 블로그를 뒤적거리다 주소를 발견한 서진이었다. 첫날은 충동적으로 전화를 건 거라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맨 밑에 공방 약도가 나와 있었다.
어, 익숙한 대학 이름에 눈을 크게 뜨던 서진은 공방이 정혁이 소유한 건물에 위치한 걸 보고 깜짝 놀라 잠시 멍해 있었다.
‘근데 나는 여기가 갖고 싶었어. 내내 절대 잊을 수 없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내가 계속 소유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한 제 말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정혁은 서진과 재회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이 건물의 주인이었다. 애초에 투자용으로 산 것도 아니었다. 철저히 본인과 서진의 추억만을 간직하기 위한, 세상에 둘만이 아는 그의 순정이었다.
이따금 서진 역시 이곳을 화두에 올리기도 했었고 미국행에 오르기 전에는 함께 한번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 공방은 없었으니 입점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제가 우연히 찾은 곳이 그 건물에 위치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괜히 혼자 반갑기도 한 마음에 결국 비밀리에 이곳을 찾았다.
‘여기구나.’
계단을 올라 맨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방 안으로 들어가자 딸랑, 청명한 종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혹시 원데이 클래스 예약하고 오셨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박서진이요.”
전화를 받은 사람과 동일 인물인 듯한 여자 앞에서 제 이름을 말할 때는 어색한 마음이 들었지만, 당연하게도 여자는 별다른 신경 쓰지 않고 명단을 확인한 후 그녀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서진이 조금 일찍 온 덕에 20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오늘은 좀 쌀쌀하던데, 차 한잔 드릴까요?”
사양하기도 전에 여자는 서진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놓고 갔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미리 온 커플 앞에도 예쁜 찻잔이 놓였다. 앞으로 두 명만 더 오면 수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서진은 차를 마시며 외투 속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 놓았다. 이모님에게는 혹시 정혁에게 연락이 오면 늦은 아침을 먹고 자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라 말을 맞춰 놓은 터였다.
‘진짜 잘 만들어야지.’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알콩달콩한 커플 앞, 서진은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전화로 상담할 때 간단한 작업이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으니 머리는 묶고 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어서, 집에서 나올 때부터 머리를 질끈 묶고 최대한 편한 옷을 골라 입고 온 그녀였다.
* * *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이쪽에 잠시 모여 주세요.”
잠시 후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모인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 간단히 장비와 용어 설명을 들었다. 호기롭게 다짐하던 종전과는 다르게 막상 익숙지 않은 장비 앞에 서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앞치마를 야무지게 착용한 서진은 맨 앞에 서서 매의 눈으로 선생님의 설명에 맞춰 기계들을 훑어보았다.
“말로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직접 해 보시는 게 더 이해가 잘 되실 거예요.”
그러고 나니 곧바로 실전이었다. 고작 펜 하나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정교한 작업이 이어지는지라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버벅댔던 서진은 이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잘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칼날을 목재에 대고, 가장 적당한 빠르기에 맞춰서…… 네, 좋아요.”
누구보다 진중한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 서진에게 지켜보던 선생님이 슬쩍 칭찬을 했다.
“처음 하는 거 맞으세요? 너무 잘하시는데.”
으레 하는 것이 분명할 말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감도 잠시, 서진은 옷에 나무 부스러기가 제멋대로 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작업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형태를 갖춰 가는 제 손안의 목재를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재미있다.’
반짝, 서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기분 좋게 가슴이 뛰는 느낌은 의도치 않게 만난 설렘과도 닮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억지로 아버지가 끼워 넣은 취미를 할 때에는 결코 느껴 보지 못했던 재미와 보람이 느껴졌다.
분명 정혁에게 선물하기 위해 어렵사리 온 곳이었는데 어째 어느 순간부터는 순수한 흥미가 주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이왕 만드는 거 잘 해야지, 욕심을 조금 부리자면 선생님이 샘플로 보여 주었던 펜처럼 깔끔한 모양을 내고 싶었다. 서진은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린 채 눈앞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에만 매달렸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정혁의 이니셜을 새긴 각인까지 마치고 나자 완전히 작업이 끝났다. 각인 새긴 곳에 오일링 처리까지 끝낸 펜을 케이스에 넣어 주던 선생님이 웃으며 물었다.
“너무 예쁘게 잘 만드셨어요. 남자 친구분께 선물하시려고요?”
“아, 아뇨. 남편한테 주려고요.”
“어머, 결혼하셨구나. 어쩐지 반지가 눈에 띄더라고요.”
과하거나 화려한 느낌이 아닌, 흰 피부와 잘 어울리는 깨끗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의 알이 박힌 결혼반지를 보며 선생님이 웃었다. 물론 이것은 같이 고른 데일리용이었고 정혁이 직접 골라 프러포즈할 때 준 반지는 귀하고 좋은 것을 많이 접했던 서진도 기함할 만한 것이었지만……. 포장은 시간상 서진이 집에 가서 하기로 해서 선생님이 따로 이것저것 종이봉투에 챙겨 주기까지 했다.
“남편분이 되게 좋아하실 거예요. 진짜로.”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다름 아닌 이 건물주의 부인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 그녀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던 서진 앞에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네,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뭘요, 처음에는 이렇게 취미로 몇 번 오시다가 점점 흥미 느껴져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그냥 드리는 말씀 아니고 워낙 손재주가 좋으신 거 같아서 저도 좀 욕심이 난다니까요. 아, 부담 드리는 건 아니고요, 혹시 모르니까 명함 한 장 드릴게요.”
얼결에 명함을 받은 서진은 눈을 깜빡이며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이게, 직접 뭔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성취감이라는 게 상당히 크거든요.”
그러고 보면 처음 펜을 만들 나무를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펜의 두께, 펜을 만들 나무를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각인할 문구와 글씨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가 결정하고 만든 거였다. 물론 처음이라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곳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짧은 담소를 나눈 후 서진은 꾸벅 인사를 한 후 공방을 나왔다.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오랜만에 허기가 지기도 했다. 하긴 원래라면 자고 있거나 늦은 아침을 먹을 시간이니까.
‘아, 맞다.’
택시를 미리 잡아 놓고 나올걸, 서진은 계단을 내려오며 외투 속 핸드폰을 꺼냈다. 줄곧 무음이던 모드를 소리 모드로 바꾸어 놓는데 역시나 정혁의 메시지와 함께 부재중 전화도 찍혀 있었다.
[자?]
[일이 좀 생겨서, 점심 먹고는 전화 못 할 것 같아서 미리 했는데]
[일어나면 밥부터 먹어 꼭]
[일찍 갈게]
매일같이 받는 연락이지만 그 안에 잔뜩 배인 애정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찡해졌다. 바로 답을 보내려던 서진은 멈칫했다. 아무래도 안전하게 집에 가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짧은 외출이 성공리에 끝나고 나니 갑자기 또 정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이럴 때면 또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다. 제가 생각해도 중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따 퇴근하고 오면 꽉 안고 뽀뽀부터 엄청 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을 빠져나오던 서진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
‘정혁인가?’
곧바로 액정을 확인하던 서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저장되어 있긴 하지만 단 한 번도 제게 먼저 전화를 걸어 온 일이 없는 상대의 연락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는 서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