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hort Story (21/21)

Short Story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내부 공사였기에 정혁은 비가 와도 일을 나온 참이었다. 체질적으로 몸이 더운 정혁은 자꾸 나는 땀을 작업복 소매로 쓱쓱 닦으면서 일했다. 언제나처럼 제 할 일을 야무지게 마무리한 그는 습관처럼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서진에게서 몇 분 전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혁은 곧바로 반색했지만 메시지의 내용은 그럴 것이 아니었다.

[정혁아 우리 오늘 못 만날 것 같아ㅠㅠ]

[집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지금 차 타고 집 가고 있어 자고 올 것 같아]

[미안해ㅠㅠ이따 또 문자할게]

잠시 멈칫하던 정혁은 이내 땀에 젖은 이마를 쓱 훔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커다란 손 위에 올려진 핸드폰은 마치 장난감 같이 보였다.

[알았어]

원래는 끝나고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었는데.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점점 살이 내리는 것 같은 서진에게 영양 보충을 좀 시켜 주고 싶었던 정혁이었다. 안 그래도 툭 치면 넘어가게 생겨 가지고 갈수록 얼굴이 작아지는 게 이대로 가다간 소멸할 것 같아서였다.

‘뭐라고 더 써야 하나?’

서진은 아직 메시지를 읽지 않은 채였지만 정혁은 살짝 고민했다. 사실은 뭐라도 더 쓰고 싶은 마음이긴 했다. 예를 들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보고 싶어 죽겠다는 솔직한 속마음이나…….

‘……뭐, 됐어.’

막 연애를 시작한 스물둘 정혁은 거칠었고, 서툰 면도 많았다. 그래도 괜한 아쉬움에 1이 없어지지 않는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쓱 쓰는데, 지나가던 현장 반장이 한 소리 했다.

“뭐야, 여친이냐?”

요즘 어린 애들은 밥 먹을 때도 핸드폰을 손에서 안 놓는다던데, 핸드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꾀 한 번 안 부리고 일만 두 세배 해내던 정혁이 요즘 일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보고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다. 반장의 말에 정혁이 홱 고개를 돌렸다.

“…….”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지만 정혁이 무표정으로 저렇게 쳐다볼 때면 괜히 좀…… 뭔가를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흠흠, 반장이 괜히 헛기침을 하는데 짧은 답이 돌아왔다.

“예.”

오, 딱 떨어지는 대답에 반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그랬구먼. 하긴 몸도 좋고 얼굴도 시원하니 잘생긴 게, 여자애들이 좋아할 것 같이 생기는 했다.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한 두어 달 됐는데요.”

“이야, 한창 좋을 때네.”

역시 돌아오는 즉답에 반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일은 잘하지만 사적인 얘기는 거의 안 하는 젊은 애랑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반장은 괜히 한 번 더 말을 붙여 보았다.

“어때, 예쁘냐?”

“…….”

정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확신을 담은 망설임 없는 몸짓에 반장은 혹시 사진 있냐는 말을 덧붙였다. 정혁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 실제로 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반장의 물음에 정혁은 다시 제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마침 액정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화면이 떴다. 웃음기를 띠고 있던 반장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정혁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대기 화면에 떡하니 환하게 웃고 있는 서진의 모습이 담겼는데도,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없는데요, 사진 같은 건.”

“…….”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정혁의 모습을 반장은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 * *

찝찝한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난 정혁은 언제나처럼 허름한 단칸방 안에 혼자 있었다. 조금 전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근처 국밥집에서 간단하게 혼자 한 끼를 해결하고 온 차였다.

‘비는 왜 이렇게 처오냐.’

안 그래도 서진을 보지 못해 꿀꿀했던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혁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살짝 열린 작은 창문 밖을 괜히 노려보았다. 조금 기세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창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기온도 부쩍 내려갔지만 정혁의 방은 차디찼다. 서진이 없으니 보일러를 틀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한겨울에도 정혁은 웬만하면 보일러를 틀지 않는 편이었다. 꼭 돈을 아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것들에 원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락도 없네.’

제가 보낸 알았어, 라는 답에 우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낸 후부터 서진에게서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정혁은 여기서 제가 더 뭐라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좀 그렇다 생각해 그냥 핸드폰을 덮었다. 막상 눈앞에서 보면 좋아 죽는 마음에 이것저것 낯간지러운 말도 많이 하는데, 이렇게 연락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어색했다.

그렇게 잠깐 누워 있었다. 낮은 천장만 하릴없이 응시하고 있는데 자꾸 그 허여멀건 얼굴이 떠올라 곤란했다.

원래 같으면 이렇게 마음이 시끄러울 때면 잡생각 지우게 소주 한 병 까고 그대로 자든가, 정 무료하면 민철이 하는 호프집에 가서 일이라도 돕든가 하면 될 터였다. 일급으로 꼬박꼬박 돈 잘 챙겨 주는 형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뭐 하나 당기는 것이 없었다.

매일같이 보던 그 예쁜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이렇게 무기력해지는 제 모습이 웃겨서 순간 헛웃음이 났다. 사실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고 서진과 사귄 건 고작 두 달 정도인데 말이다.

“…….”

그렇게 잠시 핸드폰만 앞에 두고 가만히 있던 정혁은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비가 내리는데도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집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백화점에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던 정혁은 별다른 위화감 없이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혁이라도 여성 속옷 매장 입구에서는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이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정혁을 발견한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대충 고개를 까딱한 정혁은 매장 안을 휘휘 훑었다. 갖가지 종류의 속옷들이 진열된 모습은 사뭇 휘황찬란하게까지 보였다.

“여자 친구분께 선물하시려고요?”

숙련된 직원이 친절하게 묻는 말에 정혁은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혹시 사이즈를 아냐는 질문에 정혁은 당당하게 서진의 사이즈를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깔끔한 스타일 원하시면 이 라인 추천드리고요, 여성스러운 거 좋아하시면 이번 신상으로 나온 이 제품도 되게 많이 나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가을이니까 색상도 조금 딥하게…….”

속옷 하나 사는데 뭔 설명이 이리 많은지, 이것저것 제 눈앞에 속옷을 디밀며 설명을 쏟아 대는 직원의 목소리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혁은 제 옆에서 열심히 고객 응대를 하는 직원의 말은 한 귀로 흘려보내며 서진의 취향에 맞을 만한 것을 눈대중으로 찾았다. 섹스는 안 했지만 유사 행위는 나름대로 많이 한 탓에 서진의 속옷을 볼 일은 많았다. 생각보다 서진은 화려하고 도발적인 것을 좋아하는 취향 같았다. 단정한 옷차림과 대비되는 그 자극에 안 그래도 한계치를 초과한 흥분이 더 올라와 곤란했던 적도 많았다.

“이거로 줘요.”

개중 가장 서진의 맘에 들 법한, 화려한 것을 콕 집어 말하니 직원이 알겠다며 웃었다. 정혁은 내친 김에 아까부터 제 맘에 들었던 속옷도 포함해 여러 개 더 샀다. 서진이 입는다면 뭐든 혼 빠지게 섹시하고 야하니 상관없지만 정혁은 서진에게는 오히려 별다른 장식 없는 화이트 톤도 어울릴 것 같았다. 옆에서 직원이 이 제품은 웨딩 라인으로 신혼여행 갈 때 많이 사 가신다는 얘기를 덧붙이자 더 선택을 잘했다는 확신이 섰다.

“혹시 이벤트 속옷 같은 거 원하시면 이런 것도 있어요.”

“이벤트요?”

“네, 요즘 20, 30대 고객님들께 제일 반응이 좋았어요.”

직원이 추천한 속옷은 정혁의 시선에서는 속옷이라기보다는 그냥 천 쪼가리로 보였다. 엉덩이 부분이 뻥 뚫린 끈 팬티와 가슴 부근이 엑스자로 교차 된 농염한 디자인의 브래지어를 보며 정혁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제 눈앞에서 입은 서진의 모습을 상상했다. 순간 아래로 피가 확 몰리는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정혁은 그것도 사겠다고 말했다. 뭐, 언젠가는 입겠지.

“……원입니다.”

계산대 앞 직원의 말에 정혁은 지갑에서 불쑥 현금을 내밀었다. 현금영수증이니 적립 카드니 뭐니 또 말이 많았지만 다 괜찮다고 말하자 직원은 웃으며 포장해 주겠다고 했다. 정혁은 말없이 직원이 하는 양만 바라보았다. 리본 끈을 매단 상자를 꺼내던 직원은 슬쩍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엄청 잘생겼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신이었지만 남자는 매장 안을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존재감 있는 훤칠한 미남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도 더 크고 몸도 더 좋았다. 딱히 비싼 것을 걸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프리한 차림이었으나 워낙 피지컬이 좋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시계 하나 차고 있지 않은 검소한 모습을 다 상쇄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인 법이었다.

‘몇 살일까?’

대학생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직장인 같지도 않았다. 대부분 카드로 계산하기 마련인데 지갑에서 빳빳한 현금 뭉치를 꺼낼 때는 직업이 뭔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거기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애인이 좋아 죽겠다는 것이 속옷을 고르는 내내 다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여자 친구가 부럽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직원은 이내 잡생각을 지우고 숙련된 미소와 함께 정혁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쇼핑백을 든 정혁은 그대로 돌아가려다 마음이 조금 바뀌어 옷 매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백화점에 갔던 이유는 얼마 전 서진과 함께 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속옷을 사 주는 장면을 본 게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어떡해. 다시 가서 바꿔야겠네.’

사이즈 미스로 쩔쩔매는 거를 보고 서진은 귀엽다며 웃는데 정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등신 같은 놈이 자기 여자 사이즈도 모르네.

어쨌든 충동적인 면이 다분한 정혁은 갑자기 제 애인 속옷을 사고 싶어져서 백화점에 직행했던 거였다.

정혁은 대충 발걸음 닿는 대로 여성복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제게 친절히 인사해 오는 직원을 내버려 두고 휘휘 안을 둘러보았다.

‘뭘 입어도 다 이쁘긴 한데.’

정혁은 사실 명품이나 브랜드에 관해서는 잘 몰랐다. 예전에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같이 술 마시던 중, 한가영이 두 달 꼬박 알바 해서 샀다는 명품 옷의 가격을 들어 대충 가격대만 짐작할 뿐. 그때도 돈지랄이 풍년이라고 했다가 가영의 눈총을 받았다.

그렇게 말해 놓고 정작 자신은 서진의 옷을 사 주려 생전 들러 본 적도 없는 매장에 들어와 있는 현실에 갑자기 또 헛웃음이 났다.

정혁은 제가 굳이 사 주지 않아도 서진에게는 비싸고 좋은 옷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진이 입고 다니는 옷들은 얼핏 심플해 보여도 제가 입고 있는 옷과는 원단부터가 달랐다.

하긴, 그래서 저번에 서진이 제게 옷을 선물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혁은 서진이 정말 순수한 의도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슬며시 고개를 드는 약간의 씁쓸함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그래도 한 벌 정도는 자신도 서진에게 좋은 옷을 사 주고 싶었다.

“…….”

손님이라기보다는 돈 받으러 온 수금업자 느낌으로 매장을 휘휘 둘러보던 정혁의 시야에 마네킹에 전시된 원피스가 들어왔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플레어 원피스였는데, 단아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발랄한 느낌도 있는 게 서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정혁은 더 살펴볼 것 없이 가격을 물었다.

“이거 예쁘죠, 이번 신상이라서요.”

환한 영업용 미소로 가격을 읊는 직원을 뒤로 하고 정혁은 흐음, 마뜩잖다는 소리를 내더니 다음에 오겠다고 했다. 아……? 더 볼 것도 없이 냉정하게 말하는 투에 직원이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띠는데 눈을 맞춘 정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옷은 예쁜데 돈이 모자라서. 근데 조만간 사러 올 겁니다.”

“아……네! 고객님, 그러세요.”

꾸밈없는 솔직함에 잠시 눈이 커졌던 직원이 얼른 대답했다. 돈이 없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데도 없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

깍듯한 직원의 배웅을 받는 둥 마는 둥 매장을 나서며 정혁은 쯧,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있는 현금 다 뽑아 올걸, 아무래도 차를 사느라 너무 무리를 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 옷 사 줄 돈은 있었다. 정혁은 생각난 김에 내일 일 끝나자마자 바로 올 요량이었다.

물론 서진이 알면 엄청나게 뭐라 하겠지만…….

제가 돈 쓰게 하는 게 싫다며 은근히 잔소리를 하는데 그것조차도 너무 좋았다. 제게는 이래라저래라 했던 사람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랍장에 대충 모으던 돈을 은행에 꼬박꼬박 넣고 오라고 했던 사람도,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라면 먹고 소주 마시고 자면 몸 축난다고 걱정해 주었던 사람도 서진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차를 대 둔 곳으로 향하던 정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얼른 꺼내 보니 서진의 이름이 깜빡이고 있었다.

“응.”

정혁은 제가 겉으로는 별다를 것 없는 어투로 전화를 받는데 입꼬리는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이내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혁아. 밥은 먹었어?

“응. 넌?”

-나도 방금 먹고 방이야.

방금 밥 먹고 방에 있다는, 그 사사롭기 그지없는 말도 이렇게 귀엽게 할 수 있는 건 정말 재주였다. 정혁은 사랑에 푹 빠진 남자 같은 생각을 하며 서진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듣기 위해 핸드폰을 귓가에 가까이 붙였다. 집에 갔을 때의 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아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서진은 이것저것 얘기를 했고 정혁은 간혹 추임새를 넣으며 걸었다. 과제 할 걸 챙겨 가서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하기 싫어져서 침대에 누웠다는 말까지 듣는데 자꾸 입꼬리가 씰룩였다.

-오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같이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괜찮아. 어쩔 수 없지.”

시무룩한 목소리에 마음이 짠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자 서진에게도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었다.

-밖이야?

“응. 뭐 좀 사느라.”

-……으음, 비 많이 오던데 차 갖고 나갔어?

“응.”

뭐 사러 나갔는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 했는데, 서진은 굳이 뭘 사러 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궁금해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물어봐도 되는데.’

정혁은 서진이 의식적으로 제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제게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예전에 사귀기 전에 별생각 없이 말 많은 애들은 딱 질색이라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서진과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일부러 정 떼려고 말을 막 했던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서진 빼고 다른 사람 다 포함한 얘기고 당연히 서진은 예외라는 것을 순진한 그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진이 저를 집착하고 구속한대도 엄청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여자를 질투하거나 저 없으면 안 된다며 시시각각 촉각을 곤두세우는 서진이라니. 생각만으로 머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황홀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것까지 말하면 미친놈으로 볼까 봐 정혁은 굳이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자신은 공부를 안 한 거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은…… 아, 네!

뭔가를 얘기하던 서진이 누군가에게 대답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췄다.

-정혁아, 나 아빠가 부르셔서 잠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응.”

-조심히 들어가. 이따 또 연락할게, 알았지?

응, 아쉬움을 느끼며 대답하는데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보고 싶어, 내일 봐?

“…….”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끊는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맥없이 끊어졌다. 정혁은 잠시 출발할 생각도 있고 끊겨 버린 핸드폰만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보고 싶다는 그 말을 듣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작 그 한 마디로 저를 이렇게 휘두르다니. 아무튼 박서진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여운을 즐기듯 잠깐 가만히 앉아 있던 정혁은 이내 느긋한 손길로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비가 쏟아졌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잔업을 좀 더 해야겠네.’

대학은 뭔 놈의 시험을 그렇게 많이 보는지, 어제 서진의 푸념으로는 좀 있으면 또 기말고사를 본다고 했다. 시험 기간에는 잘 못 만날 것 같으니 아무래도 그때 잔업을 좀 빡세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목돈 벌 수 있는 곳으로 잠시 떠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서진을 못 보니 절대 안 되었다.

아니,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저 혼자 벌어 먹고살 때는 상관없지만 서진이 있으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이미 제 모든 것을 서진에게 다 내 주면서도 정혁은 늘 서진에게 미안했다.

비싸고 좋은 것들, 귀하고 예쁜 것들이 잘 어울리는 서진이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 찢어진 벽지 앞에서 저를 보고 웃고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죄책감까지 들었다.

‘앞으로 존나 벌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혁의 마음속은 평소보다 훨씬 더 붕 떠 있었다. 지금처럼 옷 한 벌도 제대로 못 사 주고 뒤도는 게 아니라, 퇴근길에 시즌 나온 신상을 싹 사 와서 품 안에 가득 안겨 줄 생각을 하니 흐뭇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백화점을 통째로 안겨 주고 싶었다.

그간 어디서든 돈은 계속 벌면서도 밥과 술, 담배 빼고는 쓰는 데가 전무한 정혁이었다. 기본적인 옷이나 생필품 같은 것도 딱히 제 돈 주고 사는 법이 없어 가끔 민철이 챙겨 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돈 쓰는 재미를 알아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엄청나게 좋았다. 서진을 위해서 쓰는 거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깝기는커녕 이것밖에 못 해 주는 것 같아 속이 쓰릴 뿐.

‘근데 그런 날이 올까?’

익숙한 동네로 핸들을 돌리며 정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제 현실과 비교하니 아직은 크게 와닿지 않는 상상이었다. 어쨌든 아마도 그런 날이 올 때쯤이면 결혼하지 않았을까? 물론 먼일이기는 하겠지만, 정혁은 제가 만약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면 그 상대가 서진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렇게 정혁은 서진 생각만 했다.

어느새 집 근처에 도착한 정혁은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쇼핑백이 젖지 않게 잘 들고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서도 정혁은 계속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행복할 것이다. 옆에 네가 있다면. 그리고 정혁은 서진 역시 그러하리라 믿었다. 뻔뻔한 생각이라고 해도 어쩌겠는가, 거짓말을 못 하는 서진의 눈에서 정혁은 늘 자신을 향한 순수하고도 맹목적인 애정을 보았다.

그 예쁜 눈을 보면 모든 것이 보였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다시 차디찬 방 안이 눈앞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담배를 찾던 정혁은 이내 픽 웃고 담뱃갑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담배도 끊는 게 좋다고 서진이 말한 이유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편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온 정혁은 그대로 덜렁 이부자리 위에 누웠다. 내일도 새벽같이 나가려면 지금은 자 두는 게 좋았다. 그 와중에도 정혁은 혹시나 연락이 올까 머리맡에 핸드폰을 잘 놔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던 정혁은 또 서진과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한 달 후, 1년 뒤, 2년 뒤…… 그보다 한참 뒤.

앞으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나중에 같이 살 때도, 지금처럼 매일매일 팔베개 해 주고 자야지. 눈을 뜨고 일어나면 서진은 제 품에 안겨 있을 거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미치겠네.’

혼자 이러고 있는 게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놈 같았지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혁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 그랬더니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한 얼굴이 되었지만 어차피 볼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생각만으로도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 한 게 기분이 묘했다.

진짜 잘해 줘야지, 정혁은 또다시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많이 부족하고 턱없이 모자라니 정말 잘해 줄 거였다. 비단 경제적인 측면만 말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입도 걸고 수틀리면 손이 먼저 나가는 저와 비교하면 서진은 천사 그 자체였으니까.

정혁은 서진이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제가 저도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겠는가? 제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잘해 줄 거다. 저 같은 놈 만난 거 후회하지 않게, 정말 잘해 줄 거고 저도 역시 변할 거였다. 언제까지나 이런 데에서 구질구질한 거 보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거였다.

그렇게 서진과의 미래를 생각하다 보니 오지 않을 것 같은 잠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혁은 서진과 함께라면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날들을 그려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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