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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화 (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화>

1화. 기적이 찾아왔다

인생 최고의 순간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기까지는 얼마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안시현에겐 고작 며칠이면 충분했다.

“하…… 시발. 인생이 뭐 이리 개 같냐. 이제 좀 잘 풀리려는데 암이 말이 되냐고.”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난리냐”

“안 울어, 새끼야. 병원이 건조해서 그래.”

“건조해서 그런 것치고는 폭포수인데?”

“아이, 씨. 여기 왜 이렇게 건조해? 눈 아파서 자꾸 눈물 나잖아! 가습기 좀 틀라고 해!”

안시현.

데뷔 20년 차 배우.

데뷔 20년 만에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인생에 꽃을 피우려는 찰나, 의례적으로 받은 건강검진을 통해 췌장암 3기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한 드라마 같은 인생의 주인공.

그는 병문안을 와서 서럽게 울어 대는 친구이자, 국민배우 김진모를 보며 웃었다.

물론 속마음마저 웃고 있진 않았다.

몇 개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못한 채 1년을 버텨 봤지만 건강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어느 순간 억지로나마 지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안시현은 지쳤다.

이대로 사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서 의학의 힘을 빌려 수명만 늘리는 게 과연 나를 위한 걸까?

그래. 그냥 다 내려놓자.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그냥 운명을 받아들이자. 전원주택 하나 사서 조용히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은 그 순간.

-건강할 때로 돌아가면, 국민배우가 될 수 있겠어?

안시현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   *   *

그날은 안시현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2019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은…… 축하한다, 친구야! 안! 시! 현!”

수십 대의 카메라가 일제히 안시현을 비췄다.

동료 배우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들으며, 시상자로 무대 위에 서 있는 25년 지기 친구를 바라보며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드디어 받는구나.’

감초 조연, 명장면 제조기, 악역 장인 등.

대중들은 안시현에게 많은 별명을 붙여 줬다.

몇몇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 덕분에 배우로서의 인지도 또한 높은 편에 속한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을 아는 경우도 제법 됐다.

하지만 그는 만년 조연 배우였다.

주연을 맡은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인지도가 오를 즈음 딱 한 번 주연을 맡아 봤지만 흥행 참패, 그 뒤로 오랜 시간 그에게는 주연 기회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조연으로서는 최고고 모든 감독들이 캐스팅하길 주저하지 않지만, 주연을 맡기에는 뭔가 아쉬운 배우.

그게 바로 안시현이었다.

물론 이제는 그 편견이 깨졌다.

두 번째로 맡은 코미디 영화 『위장취업』이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산업 스파이로서 위장취업을 했다가 승진을 거듭하는 주인공 ‘박철우’ 역을 맡은 안시현의 연기는, 틀에 박힌 영화를 수작으로 바꿔 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

그 보상이 바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이었다.

안시현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상을 건네받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20년.

정상에 서기까지 꼬박 20년이 걸렸다.

21살의 패기 넘치고 머릿속엔 오로지 연기뿐이었던 청년은, 어느새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하나둘 늘기 시작한 중년의 20년 차 배우가 됐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이야.

“축하한다, 인마. 진즉 받았어야 하는 걸 이제 받네. 너라면 결국 해낼 줄 알았다니까.”

“……고맙다, 진모야.”

“수상 소감 말하면서 질질 짜지 마. 흑역사 박제되기 싫으면.”

“후우. 노력해 볼게.”

안시현은 남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온 전년도 남우주연상 수상자 김진모와 격한 포옹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서 마침내 마이크 앞에 섰다.

“하…….”

수상 소감 대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이내 눈물이 흘러나왔다.

흑역사고 뭐고 눈물 연기를 할 때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 냈다.

짝짝짝!

동료 배우들은 그런 안시현의 눈물을 보고 기립 박수로 응원을 했다.

한참 눈물을 흘린 뒤에야 안시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

“중학교 연극부 활동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제 인생은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게 없을 겁니다. 죽는 순간까지 연기만 보고 사는, 연기로 보답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안시현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   *   *

누가 그러더라.

때론 현실이 더 드라마 같다고.

안시현은 자신의 인생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다. 대본을 쓴 사람이 있다면 잡아다가 드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췌장암 3기라고 했다.

암이 혈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 수술이 힘들 수도 있다고, 최대한 빨리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3일 만에, 의례적으로 받은 건강 검진에서 췌장암 3기라니.

심지어 수술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

의사는 안시현에게 휴식과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할 것을 권했다. 건강을 회복할 때까진 배우 생활을 중단하기는 게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안시현은 연기를 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항암 치료와 병행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시간이 될 거고, 완치를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 건강을 회복할 때까진 아무래도 관리에만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생각 좀 해 보겠다고 대답한 뒤, 안시현은 진료실을 나와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췌장암이라…… 하하.”

마흔 남짓이 되어서야 연기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경험과 깨달음이 더해지며 만개한 연기력이 좋은 기회를 만나 남우주연상으로 꽃을 피웠다.

이제 좀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연 배우로서 날개를 달 수 있을 것 같은데 암이라니.

심지어 완치 확률이 낮은 걸로 유명한 췌장암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담배가 다 타자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습관적으로 불을 붙이고 담배를 꺼내 물고, 같은 동작을 몇 번을 반복했지만…….

안시현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몸이 버텨 주지를 못한다는 게 괴로웠다.

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를 하고 싶었다.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맘껏 연기를 할 수 있는 건강한 몸뚱이뿐.

뚝. 뚝. 뚝.

하루 종일 화창할 거란 일기 예보와 달리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안시현도 마음도 무너졌다.

*   *   *

오진이었다거나, 건강이 호전된다거나 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는다고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지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항암 치료를 받으며 건강이 호전되길 빌고, 그도 안 되면 상태가 악화되지 않기라도 바라는 게 전부였다.

결국 안시현은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머리카락을 밀고, 식단 관리를 하고, 운동을 하며 꾸준한 항암 치료를 병행하며 몇 개월을 보냈다.

차도는 없었다. 암세포가 다른 장기에 전이되는 걸 막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어느 순간, 안시현의 입가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루의 대부분을 감정 없이 무기력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가끔 김진모와 지인들이 병문안을 올 때만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안시현에게 연기를 하지 못하는 하루하루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건강이 회복될 리가 없다는 걸.

항암 치료는 회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걸.

희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걸까?’

건강이 회복될 거란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못한 채 1년을 버텼지만 차도는 없다.

이대로 사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서 의학의 힘을 빌려 수명만 늘리는 게 과연 나를 위한 걸까?

그래. 그냥 다 내려놓자.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그냥 운명을 받아들이자. 전원주택 하나 사서 조용히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겠지.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은 그 순간.

안시현은 후회했다.

조금 더 노력할걸, 조금 더 잘할걸, 조금만 더 몸 생각할걸. 연기에 대한 아쉬움과 건강에 대한 아쉬움이 주마등마냥 스쳐 지나갔다.

그런 안시현에게…….

-건강할 때로 돌아가면, 국민배우가 될 수 있겠어?

난데없이 기적이 찾아왔다.

*   *   *

그는 자신을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게 취미인 신이라고 소개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좋아한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는 『위장취업』.

안시현이 주연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에서 간만에 대박이 난 코미디 영화.

그래서 안시현에게 말을 건 거란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안시현은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삶을 내려놓은 순간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신이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미쳤다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 주지.

잠시 후.

콰콰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전조조차 없이 떨어진 벼락.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현상임이 분명했다.

그제야 안시현은 신의 존재를 믿게 됐다.

동시에 물어보았다.

정말로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다시 연기를 하게 해 줄 수 있냐고.

신의 대답은 No였다.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건강한 시절로 회귀시켜 주는 거야. 과거로 돌아가는 거라고.

“회귀라…… 좋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절 과거로 돌려보내 주세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이미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상황, 설사 신이라는 자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손해 볼 건 전혀 없었다.

-접수 완료.

“혹시 대가 같은 게 필요합니까?”

-연기를 잘해서 날 만족시켜 주는 거.

“목표가 같아서 좋네요. 만약 회귀한다면 국민배우가 되는 게 제 목표거든요.”

-능력도 몇 개 줄까?

“아뇨.”

안시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신이 주겠다는 능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어떤 능력도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건강한 몸이면 충분합니다. 제 연기력만으로 대한민국 영화판이랑 브라운관 다 씹어 먹을 겁니다.”

건강한 몸.

그거면 충분했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만으로 국민배우가 되고 싶었다. 20년의 연기 내공이 더해진 건강한 몸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 순간, 안시현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췌장암으로 아플 일은 없을 거야. 돌아가면, 기회를 놓치지 마.

신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안시현은 잠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 있던 병실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곳인지 어디인지 깨닫는 것도 금방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옥탑방! 옥탑방이야!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어!’

대학 시절부터 배우로 데뷔하고 몇 년 후까지 김진모와 둘이서 자취했던 대학로의 옥탑방이었으니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온갖 벌레가 다 나오고, 비가 새고 곰팡이 잔뜩 끼는 값싼 옥탑방.

하지만 김진모와의 추억이 가득한 장소. 2009년에 건물이 철거되며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곳이었다.

그곳에 돌아왔다는 건 그가 정말로 회귀를 했다는 증거였다.

안시현은 버튼을 돌려 오래된 TV를 켰다. 회귀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1999년 2월 22일……. 잠깐, 2월 22일이라고?”

날짜를 확인한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1999년 2월 22일.

대학 2학년 1학기 개강을 앞둔 겨울방학, 안시현과 김진모가 인생 첫 오디션을 보기 3일 전.

그 시점으로 회귀했다.

그제야 안시현은 신이 돌아가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래서 그런 거였어?’

3일 후, 오디션을 통해 안시현과 김진모는 나란히 합격을 한다.

단, 김진모는 조연이고 안시현은 단역이었다. 그것도 대사라고는 고작 세 마디 있는.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르다.

아니, 다르게 만들고 말 거다.

‘이번에는 그 배역을 놓치지 않을 거야. 나를 위해서도,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도 반드시 합격하고 만다.’

오디션까지 남은 시간 3일.

안시현은 오디션에서 합격하고야 말겠다는 필살의 각오를 다졌다.

그러기 위해 안시현이 가장 먼저 한 건.

‘담배부터 끊자.’

머리맡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 죽기 전까지 연기를 하자.

그것이 안시현의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군 복무 전에, 서른이 되기 전에 연기대상이든 남우주연상이든 받아보자고. 국민배우가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김진모처럼, 20대에 최정상에 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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