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화>
2화. 칼 한 자루만
1999년의 늦겨울.
안시현이 대학로를 거닐었다.
집 안에 김진모는 없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 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이 시기의 김진모가 어디 있을지는 굳이 연락을 안 해 봐도 뻔한 그림이었으니까.
‘이렇게 보니까 진짜 오랜만에 오는 거 같네. 입원하기 전까지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들렀던 곳인데.’
대학로는 안시현과 김진모의 안식처였다.
배우로 데뷔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주기적으로 대학로를 방문하곤 했다.
꾸준히 무대에 서며 데뷔를 꿈꾸는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선후배들과 단골 식당에서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하며 추억을 나누기 위해.
안시현이 그 추억 속으로 들어왔다.
손수 페인트를 칠한 오래된 극장 간판들, 20년 후에도 단골이 될 식당들, 한창 유행하는 힙합 패션으로 차려입은 사람들까지.
‘하…… 좋다.’
안시현은 그 모든 것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1999년의 대학로를 걸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이란 말인가.
‘대답하라 시리즈 보면서 이때로 꼭 돌아오고 싶었는데 진짜 이뤄지게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신님. 국민배우가 되는 걸로 보답하겠습니다.’
10분 정도를 걸은 안시현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를 준비 중이던 한 남자가 안시현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썼다.
“인마! 오디션 끝날 때까지 오지 말라 했잖아!”
소리를 친 사내는 최정수.
극단 광대들의 단장이자, 80년대부터 연극판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국민배우.
그리고 안시현과 김진모의 같은 과 대선배.
최정수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안시현이 천연덕스럽게 망치와 못을 집어 들었다.
“에이, 오디션 준비를 하루 종일 해요?”
“하루 24시간을 해도 모자라! 3일 남았잖아!”
“전 집중력이 부족해서 하루 종일 못 해요. 머리 식힐 겸 무대 준비 좀 거들다 갈게요. 선배! 이거 못질하면 되는 거죠?”
안시현이 무대 장치를 만드는 걸 거드는 사이, 심부름을 다녀온 김진모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왔냐? 너무 잘 자서 안 깨우고 왔는데.”
“덕분에 푹 잤다. 땡큐.”
“일 도와주고 점심까지 먹고 가자. 이따가 선배님이 중국집 쏘신다고 했어.”
“중국집? 좋지!”
안시현과 김진모가 일을 거들며 담소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정수가 얼굴을 붉힌 채 소리쳤다.
“이 자식들이……. 둘 다 꺼져! 오디션 합격하기 전에는 얼신도 할 생각하지 마! 오면 둘 다 죽인다!”
엉덩이를 뻥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힘은 실리지 않았다. 진짜로 화가 나서 걷어찬 게 아니었으니까.
안시현과 김진모는 후다닥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런 두 사람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아, 점심까지 먹고 가려 했는데 아쉽네. 전단지나 붙여 놓고 집에 가자. 엄마가 반찬 가져다준다고 했어.”
“어머님 반찬 최고지. 내일 극장 갈 거야?”
“미쳤냐. 오늘 저녁에 가야지.”
“이하동문.”
눈을 마주친 안시현과 김진모가 키득키득 웃었다.
21살.
별거 아닌 대화조차 즐겁게 웃으며, 매일 매일이 추억으로 남았던 그 시간들.
안시현은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목표의식이 희미해진 건 아니었다.
김진모와 희희낙락거리면서도 국민배우가 되겠다는, 배우로서 첫 발을 성공적으로 내딛겠다는 목표 의식만큼은 확고했다.
“아, 맞다. 나 오디션 볼 배역 정했어.”
“오. 진짜로? 어제까지만 해도 둘 중 하나 놓고 고민 중이라던 놈이 무슨 일이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멀쩡하거든? 나 리수철 역으로 오디션 보려고.”
“괜찮겠어? 그 배역 송명현 선배가 점찍었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뭐 어때. 어차피 잃을 건 없잖아. 리수철 역 못 따내도 연기 잘하면 다른 배역 따낼 수 있겠지.”
송명현.
1991년 사극 『왕이시여』를 통해 데뷔한 후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배우다.
아직 주연급은 아니지만 연기력이 탄탄해 주요 배역을 맡길 수준이라는 현장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안시현과 김진모가 3일 후 오디션을 볼 영화에서 리수철 배역을 노리고 있단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하다.
‘소문에서 안 멈추고 진짜로 배역을 따내지. 그 후가 문제지만 말이야.’
결과적으로 송명현은 리수철 배역을 따내고,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만족할 만한 좋은 연기를 보여 주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 촬영을 끝낸다.
그 후에 대형 사고를 쳐서 문제지.
심지어 영화 개봉 5일 만에 사고를 쳐 버렸다.
방송 3사 뉴스에서 일주일 동안 빼놓지 않고 보도했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90년대 연예계 사건사고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임펙트가 컸다.
덕분에 그 사고는 영화의 흥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종적으로 영화는 서울 기준 25만 관객을 불러들이는 데에 그치며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훗날 비운의 영화 중 하나로 재조명받긴 하지만 말 그대로 훗날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주연 배우 송강식과 황영민의 수준급 연기와 신인 배우 김진모의 발견 정도를 제외하면, 상업적으로는 성과를 남기지 못한 영화가 되고 만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도, 내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서도 반드시 리수철 역을 따내야만 한다.’
아마 송명현이 사고를 치지만 않았더라면 영화는 손익 분기점을 넘었을 거다.
그만큼
손익 분기점을 넘은 영화에서 신인 배우가 조연을 맡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다. 필모그래피에 굵직한 이력 한 줄을 남길 수 있고, 다음 작품 오디션을 볼 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필모그래피가 곧 배우의 명함이니까.
“뭐…… 네 말대로 손해 볼 거 없고, 잘하면 다른 배역이라도 따낼 수 있을 테니 괜찮겠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있어.”
“말해 봐. 형이 다 들어줄 테니까.”
“나 칼 한 자루만 사 줘.”
* * *
안시현은 20대의 자신이 연기에 대한 열정만 차고 넘쳤던 바보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열정만 차고 넘쳤다.
배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분석도, 배역에 몰입하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노력한 시간과 자신감만을 믿고 호기롭게 오디션에 도전해 댔다.
그리고 죄다 단역만 따내는 데에 그쳤다.
키 크고 잘생겼지만 연기력이 아쉬운 배우, 그게 바로 20대 시절 배우 안시현에 대한 현장의 평가였다.
안시현이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낸 건 30살 이후, 정확히는 군대에서 연기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며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확립한 이후였다.
이 시점에서 김진모는 이미 유명 배우였다.
첫 영화에서부터 연기력을 인정받고 브라운관과 충무로를 넘나들며 다수의 흥행 작품을 남겼다.
주연을 맡은 드라마의 최고 시청률은 35.5%,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두 번째로 1000만 관객 돌파.
최고의 필모그래피를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안시현은?
제대 전까지는 배우가 아니라 동반 입대를 한 김진모의 친구로 더 유명세를 탔다.
‘국민배우 둘의 동반 입대. 그림 좀 나오겠는데?’
30대에 정립한 연기 스타일과, 40대에 얻은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모두 가지고 21살로 돌아왔다.
오랜 무명 생활은 이번 생엔 없을 거다.
첫 영화부터 핵심 조연 배역을 따내고 승승장구하며 국민배우의 반열에 올라설 계획이었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은 그다. 동년배의 그 어떤 배우와 경쟁한다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 물론 김진모는 논외였다.
평범한 동년배의 배우가 아닌, 연기 천재이고 스타일 또한 전혀 다르니까.
“진짜 이거면 되겠냐? 이걸 어디에 쓰려고?”
그날 저녁, 김진모가 안시현에게 칼을 선물했다.
문방구에 널리고 널린 장난감 칼이었다. 그나마 특이점이라면 칼집이 있다는 것 정도?
그 외에 마땅한 특이점은 없었다.
“이거면 충분해. 땡큐.”
솔직히 김진모는 안시현이 장난감 칼을 사 달라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흔쾌히 문방구에서 장난감 칼을 사다 줬다. 어련히 생각이 있겠거니 싶었다.
설사 별 필요도 없는데 사 달라고 했어도 괜찮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좀처럼 연습에 집중을 못 하더니, 이제는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연습할 때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심지어 그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 건강한 배우가 되고 싶다나 뭐라나.
하룻밤 사이 극적인 변화가 생긴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대학로의 아침을 바라보며 줄담배를 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긍정적인 변화였다.
김진모는 이 변화로 인해 친구와 함께 주요 배역을 따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 안시현은 김진모가 사다 준 장난감 칼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오디션에 합격하려면 이게 꼭 필요하지.’
성공적으로 리수철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는 이 장난감 칼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일단 소품은 준비됐다. 나머지 소품들도 오디션 전에 다 준비할 거다.
남은 건 오디션 때 최선의 연기를 보여 주는 것뿐.
다행히 그리 많은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 * *
오디션 당일.
“난 157번. 넌?”
“172번.”
“다다음 순번이네. 끝나고 정수 선배가 김치찌개에 소주 사 준다고 극장으로 오래.”
“아, 김치찌개 먹고 싶다.”
“크으. 큰길 이모 김치찌개는 데뷔하고도 잊지 못할 거야. 인간적으로 너무 맛있잖아. 소주 몇 병이 줄줄 들어가는 마법의 찌개야.”
“인정.”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며 안시현과 김진모는 대화를 나눴다.
수백 명의 배우가 모인 오디션 현장에서 긴장하지 않은 배우는 극소수다. 대부분은 연기를 할 때까지도 긴장감을 지우지 못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마저 넘쳐 보일 정도였다.
먼저 오디션을 본 건 157번을 배정받은 김진모였다.
151번부터 160번까지 10명이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마지막에 나온 건 김진모였다.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는 건 감독과 영화사 관계자들에게 10명 중 가장 많이 어필을 했다는, 지정연기에 이어 자유연기와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김진모는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따내게 될 거다.
“훗. 강석우 배역은 내 거다.”
“되면 한 턱 쏴라.”
“너도 되면 어떻게 하려고?”
“같이 쏘면 되지.”
“크흐흐. 두 번 먹고 좋네.”
김진모가 나오고 20분 뒤.
“171번부터 180번까지 들어가시면 됩니다.”
“잘 보고 와라, 빡빡아.”
“닥치라우, 동무.”
안시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간 그는 함께 오디션을 보게 된 10명의 배우들을 훑어보다가, 그중 한 명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역시나 같이 오디션 보네.’
안시현과 김진모가 배정받은 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이는 다른 사람들 또한 배정받은 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시현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송명현과 같은 조에서 오디션을 보게 됐다.
공교롭게도 같은 배역을 노리는 두 배우가 같은 조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10명의 배우가 5분 동안 준비해 온 지정연기를 보여 준다. 그중 심사위원들이 마음에 드는 몇몇 배우를 호명해서 인터뷰를 하고 추가로 자유연기를 요청한다.
캐스팅 여부는 당장에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오디션장에서 나오는 배우가 캐스팅 확률이 높은 건 당연지사.
안시현의 목표는 171번부터 180번까지의 참가자들 중 가장 늦게 오디션장에서 나가는 거였다.
연기를 시작하기 전, 그는 속으로 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건강한 몸으로 연기를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최정상에 서는 걸로 보답하겠다고 속삭였다.
연기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잘할 수 있어.’
짧은 시간이지만 철저하게 준비했다. 20년 연기 인생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전력을 다했다.
이제는, 보여 줄 일만 남았다.
“준비해 온 연기, 시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