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화 (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화>

3화. 미친놈이 한 명 더

5분.

10명의 배우들에게 주어진 시간.

배우들이 제각각 지정연기를 시작했다. 9명의 경쟁자들 속에서 가장 돋보이기 위해 몸부림쳤다.

“후우우.”

안시현은 연기를 시작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속삭였다.

‘나는 리수철이다. 나는 리수철이다. 나는 리수철이다. 나는…….’

연기를 하기 전, 안시현만의 의식이었다.

눈을 떴을 때 안시현은 더 이상 안시현이 아니었다.

오디션장에 안시현은 없었다.

1988년 밀입국해 환경미화원 이수철로 위장해서 살아가고 있는 남파공작원 리수철이 대신 자리했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남파공작원은 어떤 기분일까? 버림받기 전과 후의 외모 차이는? 변절을 권유받았을 때의 반응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의 가슴팍을 칼로 찌를 때의 심정은?

분석하고, 상상하고, 몸으로 느꼈다.

회귀 전.

드라마에서 남파공작원 역을 연기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3일의 짧은 준비 시간에도 리수철 역에 몰입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오디션을 준비하는 배우들에게 전달된 대본 속 리수철 역의 등장 신은 총 3개.

“이, 이 간나 새끼들! 움직이지 말라우! 싹 다 죽여 버리갔어! 내래 리수철이야! 백두조장 리수철! 어디서 개수작이가!”

그중 안시현이 준비한 건 리수철이 국가안전기획부에 남파공작원임을 들켜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채 인질을 잡고 저항하는 영화 후반부.

인질 대신 준비해 온 곰인형을, 진짜 칼 대신 장난감 칼을 가지고 연기를 펼쳤다.

“큭…….”

“재밌는 친구네요.”

몇몇 심사위원들은 안시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소품을 준비해 온 것 자체는 가상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리수철 배역을 준비한 배우들 중 상당수가 소품을 준비해 왔다. 그중에는 커터칼이나 과도를, 심한 경우는 식칼을 들고 와서 연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여운 곰인형과 조잡한 장난감 칼은 오히려 연기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아니, 그래야 정상이다.

그게 맞는 건데…….

“……잘하는데?”

“아니, 이건 잘하는 수준이 아니지 않나? 엄청난데?”

“172번 나이가…… 21살? 정말 21살 맞아? 나이 속인 거 아냐? 저 나이에 저 연기력인데 필모그래피가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하나둘씩 심사위원들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사위원들은 안시현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아니, 과연 이것을 연기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조차 고민스러웠다.

가장 먼저 웃음을 터트렸던 심사위원은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리수철이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곰인형과 장난감 칼은 오히려 안시현의 연기를 돋보이게 해 줬다. 몰입을 깨는 요소를 안고도 심사위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닥치라우! 에미나이 죽는 거 보고 싶어? 어디서 개수작이가!”

안시현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독기를 품은 채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 댔고.

“더, 더러운 남조선 쌍간나 새끼들! 내래 공화국의 혁명 전사다! 자본주의의 개들에겐 굴복하지 않는다우!”

“증, 증거 있어? 증거 가지고 오라!”

조국에 대한 충성과 버림받은 공작원이란 현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며.

“김일성 장군…… 만세!”

마지막에는 칼로 자신의 가슴팍을 찔렀다.

안시현이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가 준비한 지정연기가 끝이 났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끝났어야 했다.

“공화국…… 만세…….”

애드리브 한 번.

출혈로 인해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쥐어짜듯이 읊조린 마지막 한마디.

힘없이 든 오른손, 살짝 올라간 입꼬리, 흐르는 눈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풀린 동공.

가진 수단을 총동원해서 최후의 감정을 표현했다.

고작 몇 초의 연기에서, 흡사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꿀꺽.

몇몇 심사위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 봐라?’

그리고 곽상필 감독.

안시현이 꺼내 든 곰인형과 장난감 칼을 보고도 웃지 않았던 유일한 심사위원인 그는, 애드리브까지 모두 보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 한 명 더 있었잖아?’

곽상필 감독의 독특한 오디션 방식은 대중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이야깃거리다.

오디션 지원 순서대로 10명씩 줄지어 입장시킨다. 프로필도, 배우도 안 본다. 지정연기를 시켜 놓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목소리만 듣는다.

배우라면 일단 목소리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고개를 든 이후에야 배우를 받아들인다.

고개를 못 들게 한 배우들에겐 자유연기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10명의 배우 중.

곽상필 감독의 고개를 들게 만든 건 송명현이었다.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고, 연기력도 수준급이다. 어떤 배역을 주어지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좋은 배우다.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몇 년 안에 주연급으로 발돋움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캐스팅 여부는 오디션이 끝나고 결정되겠지만, 171번부터 180번 참가자 중에서는 그가 가장 주목받을 거라 예상하는 건 당연했다.

기대대로 송명현은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환경미화원 리수철과 남파공작원 리수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단 몇 초.

몸을 돌릴 때마다 환경미화원과 남파공작원의 이미지가 전환되는 연기는 송명현이 좋은 배우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리수철 배역을 따낼 자격이 충분했다.

다만 상대가 너무 강력했다.

5분이 모두 끝났을 때, 곽상필 감독을 포함한 모든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송명현이 아닌 처음 보는 배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자유자재로 오가는 다양한 감정 표현과 마지막에 보여 준 애드리브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 자식 뭐야? 감정 표현이 미쳤는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극단 소속인가?’

송명현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연기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집중됐던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이젠 안시현이 독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주관적으로 봐도 안시현의 연기는 좋았다.

한 인격의 갈등과 절망을 5분 동안 표현해 낸 연기는 경이로웠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리수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마지막 애드리브는 화룡점정.

모든 걸 포기한 마지막 순간의 감정을, 리수철의 인생을 애드리브 한 번에 완벽히 표현해 냈다.

만약 내가 같은 장면을 연기한다면? 같은 조건에서 애드리브를 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안시현과 같은 감정 연기는 못할 것 같았다.

으드득.

송명현이 이를 갈았다.

대본을 처음 본 순간부터 리수철 역에 마음을 빼앗겼다. 생에 첫 주연 기회조차 버리고 리수철 역을 따내기 위해 몇 달간 오디션을 준비해 왔다.

리수철 역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훗날 후회할지라도, 지금은 리수철 역을 연기하고 싶었다.

짙은 패배감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뭐하다 온 놈인지 모르겠지만, 리수철 역은 내 거야. 절대로 뺏기지 않아.’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자유연기.

안시현과 송명현에게 주어질 두 번째 테스트.

송명현은 미친놈을 상대로 자신의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   *   *

171번부터 180번의 배우 10명 중, 심사위원들의 질문을 받고 자유연기의 기회를 얻은 건 두 명이었다.

172번과 179번.

송명현과 안시현.

두 사람은 리수철 배역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먼저 질문을 받은 건 송명현이었다.

“179번은 데뷔 후 좋은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가는 중이고, 최근에는 첫 주연을 맡을 기회 또한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 기회를 걷어차고 리수철 역에 지원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리수철 역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안 될 것 같았다라…….”

“대본을 보자마자 리수철 역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환경미화원과 남파공작원, 두 가지 상반된 연기를 보여 줘야 하는 리수철 배역을 제 손으로 맛깔나게 요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오늘을 위해 죽어라 연습했습니다.”

“준비한 걸 다 보여 준 것 같나요?”

“지정연기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질문이 끝났다.

“172번은 프로필 보니까 학생이던데, 정말 학생 맞아요? 나이 속인 거 아니죠? 연기 경력도 정말 없고?”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 2학년 되기까지 며칠 남았습니다. 연기 경험은 중학교 때부터 이어 온 동아리 활동 정도가 전부입니다. 아, 여름방학 때 극단 광대들에서 단역으로 무대에 서긴 했습니다. 대사 딱 한 마디 있었습니다. 불이야!”

“광대들? 최정수 배우가 운영하는 그 광대들?”

“네, 맞습니다.”

“아까 광대들 출신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요. 157번이었나? 혹시 아는 사이입니까?”

“동거남입니다.”

“하하하. 친구끼리 연기 잘하는 것도 닮았네. 하긴, 광대들 출신이 다들 연기 잘하긴 하죠. 머리 민 건 오디션 때문이에요?”

“네. 리수철 역에 최대한 어울리는 모습으로 오디션을 보고 싶었습니다.”

“준비 잘했네. 장난감 칼과 곰인형은 어떤 의도로 준비한 건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어울리지 않는 흉기와 인질로 연기를 하면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그것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줘 가산점을 받고 싶었습니다.”

“계획대로 된 것 같아요?”

“안 됐다면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에게 질문을 하며 몇 번이나 웃었다. 오디션 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로 유명한 철면 감독이 맞나 싶었다.

송명현에게 질문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그의 입장에서는 굴욕이었다.

데뷔 이후 승승장구했다. 맡는 배역마다 호평을 받았고, 온갖 제작사에서 시놉시스를 보내오곤 했다.

그랬던 송명현이, 지금은 필모그래피조차 없는 배우에게 철저하게 밀리고 있었다.

‘젠장. 고작 학생 따위한테…….’

송명현은 생채기가 난 감정을 애써 숨겼다.

오디션장에서 감정을 드러내 좋을 게 없다는 건,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 대신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유연기에서 되갚아 주겠다고 되새기며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몇 분 후.

“질문은 이 정도면 됐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리수철 역에 지원한 건 172번과 179번이 마지막입니다. 모든 참가자들 중 최종적으로 제 앞에 있는 두 배우 중 한 명을 캐스팅하려고 합니다.”

남파공작원 역할이다. 심지어 환경미화원과 남파공작원을 넘나드는 연기를 해야 한다.

1인 2역까진 아니지만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역은 아니다. 그렇다고 난이도에 비해서 작중 비중이 높은 것도 아니다. 연기 난이도로 치면 2, 3순위 정도인데 비중은 5, 6순위 정도다.

그래서일까?

오디션이 절반 남짓 진행됐는데 리수철 배역에 지원한 배우는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송명현과 안시현 중 한 명을 리수철 역에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두 배우와 다른 배우들 간의 연기력 차이가 워낙 컸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사람 중 누굴 리수철 역에 캐스팅 할 건지를 두고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 것.

“단, 두 배우 중 어느 쪽을 캐스팅할지는 자유연기를 보고 결정하려 합니다. 두 배우의 장점이 다르다 보니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네요.”

결국 판단은 자유연기에서 내려지게 됐다.

아쉬움이 남을 법도 하건만, 예상과 달리 안시현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지정연기 하나만 보고 결정을 내리긴 어려웠겠지.’

안시현은 지정연기만으로 배역이 확정되진 않으리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송명현은 탄탄한 필모그래피에 걸맞게 좋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고, 안시현은 지정연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필모그래피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들이 결정을 고민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안시현은 자신했다.

한 번 더 연기를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배역을 받아 낼 수 있으리라고, 그때는 심사위원들도 고민하지 않게 될 거라고.

“혹시 자유연기가 아닌 지정연기를 다시 한번 해도 되겠습니까?”

“지정연기를요?”

“172번 참가자가 방금 전 한 지정연기를 제 스타일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송명현 또한 똑같았다.

네가 연기한 리수철의 감정 연기? 애드리브?

뛰어난 건 맞지만 내 스타일이 더 우위에 있다. 네 신을 내가 연기해서 우위를 증명해 보이겠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발언이자, 도발이었다.

이에 안시현은…….

“허락해 주신다면 저 또한 179번 참가자가 했던 지정연기로 자유연기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흔쾌히 도발에 넘어가 줬다.

‘덕분에 더 쉽게 이기겠네.’

안시현은 확신했다. 자유연기를 하는 것보다 더 쉽게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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