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화>
4화. 마음에 듭니다
자유연기의 기회를 걷어차고 굳이 서로가 지정연기 했던 신을 바꿔 연기하겠다는 두 명의 배우를 앞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곽상필 감독을 바라보았다.
곽상필 감독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이고,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전권을 얻길 바라는 감독이다.
위험 부담이 크지만 늘 성과를 냈기에 이런 스타일의 제작이 가능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의 오디션도 곽상필 감독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덕이었다.
때문에 두 배우가 서로의 지정연기 신을 바꿔서 연기하는 걸로 자유연기를 대체하려면 곽상필 감독의 허락이 필수였다.
곽상필 감독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지정연기 한 신을 바꿔서 연기한다라…… 재밌겠네요. 그렇게 해 보죠.”
예정되어 있던 자유연기 대신, 상대 배우가 연기했던 지정연기 신을 서로 바꿔서 연기하는 것으로 평가를 대신하게 된 상황.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선 자유연기를 하는 것보다 판단이 더 쉬워졌다. 서로가 연기했던 신을 바꿔서 연기하면 우위가 확실하게 판단될 테니까.
그렇게 진검승부가 펼쳐지게 됐다.
“순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172번이 동의한다면 제가 먼저 하고 싶습니다.”
“전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179번이 먼저 하는 걸로 하죠.”
먼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건 송명현.
그는 연기를 시작하기 전, 안시현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준비해 온 소품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옷과 헤어스타일까진 아니더라도 최대한 조건을 맞추고 싶어서요.”
“물론입니다.”
송명현의 의도는 뻔했다.
안시현과 마찬가지로 장난감 칼과 곰인형이라는 페널티를 안고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이리라.
실제로 송명현의 연기는 좋았다.
송명현이 해석한 리수철의 세 번째 신은 안시현이 해석한 것과 다소 달랐다.
감정보다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남북 관계에서 오는 비극을, 낭떠러지로 몰릴 수밖에 없는 남파공작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에 초점을 줬다.
그리고 그 연기는 좋았다.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다들 나쁘지 않았다. 철면 곽상필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에 만족한다는 제스처.
안시현이라는 경쟁자가 아니었다면 손쉽게 리수철 배역을 따냈을 수준급 연기였다.
‘확실히 연기를 잘해.’
안시현 또한 송명현의 연기를 인정했다.
귀에 쏙 들어오는 허스키한 목소리, 큰 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어떤 캐릭터든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할 줄 아는 능력까지.
감정 표현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경력을 생각하면 기평균치를 상회하는 수준.
훗날 벌어질 ‘그 사건’만 아니라면 주연급으로 발돋움했을 배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질 생각은 없지만.’
송명현의 연기가 끝난 뒤, 안시현이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치렀다.
‘나는 리수철이다. 환경미화원이자 남파공작원이다. 왼손은 환경미화원, 오른손은 남파공작원.’
아무리 안시현이 연기 잘하고 경험이 많다고 한들, 3일 만에 오디션을 완벽하게 준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 몰라 세 가지 신을 모두 연습하긴 했지만, 무게 중심은 세 번째 신에 둔 건 사실이다.
때문에 첫 번째 신은 완성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그건 송명현의 세 번째 신 또한 마찬가지.
심사위원들의 판단 기준은 완벽한 연기가 아닌, 장면과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송명현이 세 번째 신을 다른 스타일로 해석했듯이, 안시현 또한 첫 번째 신을 다르게 해석했다. 자신의 해석이 송명현의 해석보다 좋을 거라 확신했다.
‘리수철 배역은, 이렇게 해석하는 게 정답이야.’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안시현은 다시 한번 다른 사람이 됐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르신. 마루도 안녕? 아저씨가 줄 건 없고, 소시지라도 먹을래?”
“못질이요? 네. 제가 이따 점심시간에 해 드릴게요.”
“새댁! 정육점에 오늘 고기 좋은 놈 들어왔어요! 주말에 남편이랑 같이 봉사 가기로 한 거 잊지 말고요!”
모두에게 친절하고, 주말마다 봉사 활동을 다니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미소로 화답하는 사람.
그게 바로 환경미화원 이수철이다.
왼손 엄지를 까딱거린 순간, 안시현의 눈빛과 표정과 자세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남자가 맞나 싶었다. 굳은 표정과 착 가라앉은 눈빛은 소름마저 돋을 정도였다.
“동무? 정신 나갔네? 남조선 아새끼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찾아와?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거야?”
오른손 엄지를 까딱거리자.
“많이 드세요, 할아버지. 부족하면 더 드릴게요. 식사하고 산책하신 다음에 저희랑 목욕하러 가요.”
다시 환경미화원 이수철로 돌아왔다.
안시현의 연기는 송명현의 연기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환경미화원과 남파공작원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건 같았다. 다만 두 가지 역할에 대한 해석이 두 배우의 연기가 달라지게 만들었다.
송명현은 두 역할을 하나의 인격으로 해석한 반면, 안시현은 전혀 다른 인격으로 해석하고 연기했다.
환경미화원으로 위장한 남파공작원이 아니라, 환경미화원 이수철과 남파공작원 리수철을 전혀 다른 인격으로 여겼다.
1인 2역이라 생각하고 연기를 한 것.
고작 몇 초. 그 찰나의 간격을 두고 안시현의 연기는 자유자재로 전환됐다. 짧은 시간 동안 아예 다른 사람이 됐다.
꿀꺽.
심사위원들이 숨을 죽였다.
앞서 보여 준 세 번째 신의 연기도 대단했다.
하지만 몇 초 사이에 인격이 오가는 연기는 수준이 달랐다. 연습한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경험 혹은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양 엄지를 까딱거리는 게 스위치인 건가? 완성도가 아쉽긴 하지만, 준비해 온 신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도 엄청난 거라고 봐야지.’
그랬다.
첫 번째 신을 연기하기 위해 안시현은 버튼을 만들었다. 왼손과 오른손 엄지를 까딱거리는 걸로 환경미화원과 남파공작원 연기를 바꿔 가며 선보인 것이다.
회귀 전, 연쇄살인마 역을 연기할 때 이중인격 연기를 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짧은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캐릭터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수준으로 완성도를 높이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연기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특히나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인격을 바꾸는 건 심사위원들의 머릿속에 공통된 한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 배우, 진짜 21살 맞아?’
세 번째 신을 연기할 때와 달리 존재감 자체는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목소리 톤이 낮아졌고, 남파공작원을 연기할 때는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사투리 정도로만 캐릭터를 드러냈다.
아까 전에 소름끼치는 감정 연기를 보여 줬던 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연기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의도한 건가?’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이 의도적으로 톤을 낮추고 감정을 절제했다고 판단했다. 첫 번째 신과 세 번째 신의 캐릭터를 다르게 해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곽상필 감독이 대본을 쓰며 상상한 리수철 캐릭터와 일맥상통했다.
안시현의 연기가 끝난 직후, 곽상필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여러 번 물어보셔도 됩니다.”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아요. 리수철을 첫 번째 신과 세 번째 신에서 전혀 다르게 해석한 이유가 있습니까? 인격을 다르게 표현한 걸 묻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낮춘 걸 묻는 겁니다.”
“환경미화원으로 위장해 살아가면서 혹시나 정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무의식적으로 북한 말이 튀어나올까 봐 몇 번을 생각한 다음 말하고,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 노력하고,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리수철입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낮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정체를 감추려는 사람이 존재감을 드러낼 리 없으니까요.”
“흐음. 네, 답변 잘 들었습니다.”
세 번째 신은 리수철이 정체를 들킨 상황에서 악에 받쳐 저항하는 게 핵심이고, 첫 번째 신은 환경미화원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는 남파공작원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핵심이다.
리수철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매일 아침 머리카락을 면도하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인적 사항을 모두 외웠으며, 항상 웃는 모습만을 보여 주며 모두에게 친절하다. 마을에서 가장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가장 늦게 하루를 끝낸다. 매주 봉사를 가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누구나 다 좋게 보는 착한 이웃.
그게 바로 리수철이 원하는 위장 신분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낮췄다.
애초에 대본상으로 봐도 리수철의 존재감은 세 번째 신에 몰려 있다. 주연이 아니고 조연이기에, 주인공보다 5년 먼저 남파된 공작원 역할이기에 영화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 자체가 많지 않다.
비중은 낮지만 임팩트는 확실하다.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 적절한 배역인 셈이다.
적당한 수준의 비중과 관객들에게 각인될 존재감, 곽상필 감독이라는 거물 감독의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했다는 필모그래피까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다.
안시현의 답을 들은 뒤, 곽상필 감독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좋은 해석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수고했어요.
그 한 마디에 안시현은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연기로 송명현을 찍어 눌렀다는 걸, 리수철 배역에 가까워졌다는 걸.
오디션장을 나온 직후, 송명현이 안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 정말 연기 경력 없어요?”
“네. 필모그래피에 쓸 만한 경력은 전무합니다.”
“더 일찍 데뷔했으면 지금쯤 필모그래피 좀 쌓았을 텐데 아쉽네요. 저랑 리수철 역 놓고 경쟁하게 된 것도 아쉽고요. 혹시 배역 못 따내더라도 아쉬워하지 마요. 그 연기력이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거니까.”
연기 잘했다. 하지만 리수철 역은 내 거다.
안시현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마 머리로는 이해했을 거다.
안시현의 연기가 자신의 연기보다 좋았다는 걸, 그가 심사위원들로부터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걸, 리수철 역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는 걸.
다만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 거였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부심이, 경력이 더 많다는 자존심이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말을 하고서 안시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친 송명현이 매니저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시현은 피식 웃었다.
“짜식, 귀엽네.”
* * *
411명이 참가한 『나는 간첩입니다』의 오디션이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젠 평가를 내릴 시간.
주연 둘에 조연 넷.
함께 영화를 만들어 나갈 배우들이 하나둘씩 정해졌다. 주연인 송강식을 제외한 모두를 뽑아야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연기를 잘한 배우와 못한 배우,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와 어울리지 않는 배우를 판가름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캐스팅이 빠르게 결정됐다.
마지막으로 남은 배역은 리수철.
“이제 리수철 역만 남았군요. 후보는…….”
“172번과 179번밖에 없지요.”
송명현과 안시현.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물망에 올랐다.
“179번은 저희가 대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오디션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습니다. 그에 맞게 좋은 연기를 보여 줬고요. 리수철 캐릭터에 대한 분석 또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커리어도 괜찮은 편이니 리수철 역을 맡으면 기대치를 충족시켜 줄 겁니다.”
“하지만 연기 자체만 놓고 보면, 172번이 179번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172번이 연기를 할 때는 숨죽이고 볼 정도였다니까요. 숨 쉬는 소리가 연기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눈물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아, 이중인격 연기도 최고였습니다.”
“흐음…… 감독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곽상필 감독에게로 쏠렸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캐스팅 권한은 곽상필 감독에게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은 곽상필 감독이 송명현과 안시현 중 누굴 선택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전 172번, 안시현 배우가 마음에 듭니다.”
첫 번째 연기 때는 고민을 했지만, 두 번째 연기를 보고 나니 고민이 사라졌다.
연기력도,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안시현 쪽이 더 좋았다. 송명현 또한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넉넉한 차이로 안시현의 완승이었다.
송명현이 기대치를 충족시킬 것 같다면, 안시현의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존재감이 엄청났어. 존재감을 죽이는 연기인데도 존재감이 넘쳐났다고. 마치 20년은 연기한 걸출한 배우의 연기를 보는 기분이랄까.
* * *
3월 1일 오전.
개강을 하루 앞두고 극단에서 무대 준비에 한창이던 김진모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후.
“우와아아아아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진모가 소리를 질러댔다.
“소리 지르지 마, 미친놈아!”
“선배, 선배, 선배! 저 오디션 합격했어요! 곽상필 감독님의 『나는 간첩입니다』 강석우 역 캐스팅 됐다고요!”
그 순간, 무대 준비에 한창이던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진모에게로 집중됐다. 그리고 단체로 김진모에게로 다가가 등과 머리를 퍽퍽 때려 댔다.
“짜식, 축하한다!”
“이 미친놈! 결국 사고 한번 거하게 치는구나!”
“와! 진모가 우리보다 먼저 데뷔를 하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아! 아파요! 아프다고요! 경찰에 신고할 거야!”
무려 곽상필 감독이다.
충무로의 대표적인 흥행 보증수표인 감독의 영화에 조연으로 캐스팅됐다. 하던 일을 걷어치우고 축하해 줄 만한 엄청난 성과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5분 뒤, 안시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로부터 걸려 온 전화인지 짐작한 김진모가 통화를 끝낸 안시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너도?”
“나도!”
“선배님들! 시현이도 리수철 역 합격했어요! 이 자식도 때려요! 나만 맞으니까 너무 억울해!”
김진모와 안시현.
두 사람은 영화 『나는 간첩입니다』에 국정원 직원 강석우 역과 남파공작원 리수철 역에 나란히 캐스팅됐다.
개강을 하루 남겨둔 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