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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5화 (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5화>

5화. 발연기 때문이구나

“다들 무대 준비 빨리 끝내자! 저녁에 축하 파티 하려면 시간 없어!”

“네잉!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 동틀 때까지 집에 못 가는 거야!”

“크으! 오늘 한번 제대로 죽어 봅시다!”

광대들 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시현과 김진모의 오디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무대 준비를 끝내고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

회식을 가기 전, 안시현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또 동네 잔치하시려나?’

회귀 전의 안시현이 긴 무명 시절을 견딘 끝에 조연배우로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모두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고향에서 목장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은 안시현에게 돈 걱정 하지 말라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고 항상 말하셨다.

뒤에서 늘 묵묵히 자식을 응원해 주셨다.

사소한 단역이라도, TV에 단 1초만 나오더라도 늘 찾아보시고 녹화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자랑할 정도로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에 단역으로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부모님은 소 몇 마리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고 안시현의 데뷔를 자축했었다.

이번에는 단역이 아니라 조연이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안시현이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어머니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어, 아들. 무슨 일이야? 고기 다 떨어졌어? 아님 내일 개강이라 돈 필요해? 어제 돈 부쳤는데?

“고기 아직 많이 남았고, 돈도 충분해요. 필요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좋은 소식? 여자 친구라도 생겼어?

“엄마 혹시 곽상필 감독이라고 들어봤어요?”

-TV에 몇 번 나온 양반이잖아. 그 사람이 왜?

“제가 그분의 영화에 오디션 보고 합격했어요. 단역이나 엑스트라가 아니라, 조연 네 명 중 한 명으로요.”

-…….

“엄마? 엄마?”

안시현이 계속해서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올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미 전화 앞에 앉아 있지 않았으니까.

-여보! 소 잡아! 한 열 마리 잡아!

-이 여편네가 미쳤나! 뭔 소를 열 마리나 잡아?

-시현이가 오디션 합격했다는데 소가 중요해?

-오디션? 드라마에 단역으로라도 나온대?

-단역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조연이란다, 조연! 그것도 곽상필 감독! TV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이라고, 이 인간아!

-칼 가져와! 내일 점심에 마을 사람들 다 불러 모아! 김 씨한테 막걸리도 받아 오고!

어렴풋이 들리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외동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서른까지 용돈을 받았다. 다른 길은 거들떠도 안 봤다. 자신감을 가장한 허세로 똘똘 뭉쳐 있었다.

어설픈 연기를 하면서 꼴에 배우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귓불까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30대 초반.

첫 조연 발탁 이후 명품 조연이란 별명을 얻으며 배우로서 자리매김했지만, 그 기쁨을 즐겨야 할 부모님은 계시지 않았다.

조연 발탁 1년 전에 사고사로 돌아가셨으니까.

조금 더 일찍 성공할걸, 조금 더 노력할걸,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나 뼈에 사무치던지.

이번에는 후회할 일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단역이 아니라 조연으로 시작한다. 나만 잘하면 입대 전에 주연으로 발돋움할 수 있어.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거야.’

자신의 연기를 보는 걸 낙으로 삼는, 아들 자랑이 최고의 행복인 부모님께 배우로서의 성공이라는 효도를 하고 싶었다.

‘사고도 막을 거고.’

부모님의 사고.

군 입대와 더불어 연기에 깊이가 생기는 계기였지만,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일어날지 알고 있기에 웬만하면 막고 싶었다.

안시현은 바랐다.

부모님의 사인이 자연사이길.

*   *   *

광대들 극단원들이 단골 식당을 가득 채웠다. 김진모와 안시현의 오디션 합격을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축하하며 잔뜩 들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식당 주인, 욕쟁이 할머니가 인상을 팍 쓴 채 물었다.

“니들 다 낮술 처마시고 왔냐? 왜 이렇게들 신나 있어?”

“오늘 저희 막내 두 명이 오디션 합격했거든요.”

“오디션?”

“4월 말에 크랭크인 예정인 곽상필 감독님의 신작이에요. 단역 아니고 조연이고요.”

“이노무 시키들이! 그렇게 큰 배역 따냈으면 사인부터 해야 될 거 아냐!”

김진모와 안시현이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구석에 있는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식당이라 배우들이 많이 오다 보니, 원하면 사인을 할 수 있도록 아예 자리를 하나 만들어 둔 것이다.

배우의 유명세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배우가 누구건 욕쟁이 할머니는 사인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었다. 할머니의 건강 문제로 식당이 문을 닫기 전 즈음에는 벽 전체를 액자가 뒤덮었을 정도다.

그 액자에 김진모와 안시현의 것이 더해졌다.

김진모와 안시현이 사인을 하고 나니 테이블 위에 밑반찬과 김치찌개가 세팅됐다.

메뉴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단 두 개, 밑반찬은 단골 한정 무제한 제공, 거기에 오디션 합격을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단원들까지.

‘아, 좋다.’

안시현은 행복감을 느꼈다.

극단 활동을 하며 느꼈던 정이, 그 시절의 시간이 그리웠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배우로서의 성공으로는 채울 수 없던 무언가가 안시현의 가슴 한쪽에 가득 찼다. 이 시기로 회귀하게 해 준 신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잠시 후 허겁지겁 허기를 달랜 뒤, 최정수가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물었다.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

“휴학할 거 같아요. 학업과 병행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하지만, 데뷔작이니만큼 온전히 영화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학교야 나중에 다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회귀 전의 안시현은 『나는 간첩입니다』 오디션에 합격하자마자 김진모와 함께 휴학을 했다.

그리고 결국 복학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친놈이었다.

연기에 미쳐 오로지 앞만 보고 20대 시절을 전력으로 내달렸다. 단역과 엑스트라를 전전한 십여 년의 시간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텼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깜깜하기만 했던 터널에는 제대를 한 뒤에야 비로소 빛이 들어왔다.

부모님의 지원과 진심으로 연기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면 진즉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지. 학력이 필요한 직업도 아니고.’

이번 생에도 안시현은 휴학을 택했다.

당연히 복학은 없을 거다. 회귀 전이나 후나 연기에 미쳐 있는 건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단 하나.

20년 동안 맛깔나게 숙성된 연기 내공이었다.

*   *   *

개강 당일.

안시현과 김진모는 휴학계를 내고 담당 교수인 임진섭 교수와 면담을 가졌다.

임진섭 교수.

최정수의 5학번 선배이자, 8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배우.

최근에는 배우 활동보단 후진 양성에 집중하고 있지만, 97년도 안식년에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 ‘꿈의 도시’는 최고 시청률 44.1%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교수이자, 배우 선배인 임진섭은 안시현과 김진모의 오디션 합격 소식에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다 조연으로 합격했다고? 경사 났네. 신입생 환영회에서 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겼어.”

“4월 말에 크랭크인 예정이라서 휴학계를 제출하고 오는 길이에요. 데뷔작이니만큼 작품에 전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래도 크랭크인 전까지는 학교 놀러 와. 다른 건 못 해 줘도 술이랑 밥은 얼마든지 사 줄 테니까. 후배들한테 조언도 많이 해 주고.”

“네. 그럴게요.”

“말 많이 해 봐야 잔소리니 이쯤 하고, 저녁에 신입생 환영회 참석해서 자랑 좀 해라. 이만 나가 봐.”

“저녁에 뵐게요, 교수님.”

안시현과 김진모가 연구실에서 나간 뒤, 임진섭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현이까지 합격했다니……. 이상하다. 지금으로선 단역까지가 한계라고 봤는데, 어떻게 된 거지?”

김진모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이 더해진 천재다. 본인이 좀 더 경험을 쌓고 싶다 해서 데뷔를 안 한 거지, 언제든지 데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안시현은 아니었다.

좋은 재능을 지녔지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경험이 쌓여야 만개할 수 있는 재목이라고 봤다.

그런데 조연 합격이라니?

심지어 배우 선별이 깐깐하기로 유명한 곽상필 감독의 차기작이다. 같이 작품을 해 본 적이 있는 임진섭 교수이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설프게 해선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한다는 걸.

방학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떻게 해서 두어 달 사이 극적이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

“만약 재능이 만개한 거라면……. 진모랑 더불어 20대에 주연급으로 성장할지도 모르겠는데?”

*   *   *

“오락실 고?”

“콜.”

신입생 환영회 전까지 뭘 할까?

안시현과 김진모의 결정은 오락실이었다.

IMF의 여파와 PC방의 전국적인 확산으로 오락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지만, 아직까지는 동네에서 오락실을 더러 볼 수 있는 시절이다.

게다가 대학교 앞이니 오락실은 없을 리 만무.

안시현과 김진모는 펌프로 점심 내기를 했고, 당연하게도 김진모가 승리했다. 근 15년 만에 펌프를 해 본 안시현이 불과 며칠 전에 펌프를 한 김진모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오늘 컨디션 별로냐? 왜 이렇게 못해.”

“몸이 좀 무겁네. 기다려 봐. 금방 이겨 줄게.”

“혹시 그 금방이 내일을 말하는 건 아니지?”

“올해 안에 못할지도?”

“크흐흐. 좀 더 분발해 봐, 인마.”

그래도 몇 번 하다 감을 잡았고, 나중에는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물론 내기에서 이긴 건 김진모였지만.

그날 저녁, 안시현과 김진모는 임진섭 교수가 말한 대로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임진섭 교수는 안시현과 김진모의 오디션 합격 소식을 알렸고, 두 사람은 선배와 후배와 동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박수갈채를 받았다.

오디션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려는 이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은 건 보너스였다.

좋은 분위기 속에 신입생 환영회가 진행됐다.

안시현은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맥주 몇 잔에 대부분은 얼음물, 안주도 마른안주와 견과류 위주로 허기를 달랠 정도만 먹었다.

기적처럼 얻게 된 새 삶이다.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몸을 갉아먹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연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관리는 필수였다.

그래서 술보다는 술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향했다.

뒤따라 나온 선배 한 명이 담배를 건넸다.

“담배 타임?”

“아, 저 담배 끊었어요.”

“캬. 시현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독종이다? 난 담배 못 끊겠던데.”

“선배도 담배 끊어요. 몸에 안 좋대요.”

“봐서. 난 담배나 한 대 태우련다. 오디션 합격 축하하고, 꼭 성공해서 국민배우 돼라.”

“고마워요, 선배.”

안시현은 담배 대신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온 직후.

“저…… 선배님.”

한 여성이 안시현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본 안시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왜 나한테 말을 걸지?’

회귀 전 그녀는 안시현과는 같은 과라는 걸 제외하면 눈곱만큼의 접점도 없는 배우였으니까.

“99학번 신입 한나래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조언을 좀 구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수많은 배우들을 배출했다.

소위 발하는 국민배우의 반열에 오른 배우도 다수이다. 오죽하면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배우만 모아 놓아도 대박 드라마 몇 개는 여유롭게 찍을 거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가 출신 3대 미녀 배우가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눈앞에 있는 한나래다.

동양미의 완성이라 평가받는 청순한 외모,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글래머러스한 몸매 덕분에 모델로 데뷔했을 때부터 뭇 남성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배우다.

그런 그녀가 안시현에게 무슨 조언을 구하려고 말을 건 것일까?

“고민 있으면 말해 봐. 그리고 극존칭은 좀 그러네. 그냥 요 정도만 붙이자.”

“아, 네. 교수님껜 말씀드렸지만 제가 입학 전에 영화에 캐스팅됐거든요. 근데 제가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요. 아까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시현 선배가 방학 사이 연기가 부쩍 늘어 곽상필 감독님의 차기작에 조연으로 오디션 합격했다고요. 혹시 단기간에 연기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는 연습법이 있나 해서…….”

그제야 안시현은 한나래가 자신에게 구하려고 하는 조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발연기 때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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