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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6화 (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6화>

6화. 되도 않는

조각 미녀.

데뷔 이후 오랜 시간 한나래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따라붙었던 별명이다.

이 별명은 그녀의 외모가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뜻과 워낙 연기를 못해 사람이 아니라 조각 같다는 중의적인 뜻을 내포했다.

그랬다.

한나래는 데뷔 이후 10년 가까이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배우다. 모델 출신 배우인 데다 10년 가까이 좀처럼 연기력이 늘지 않은 탓이었다.

얼굴이 예쁘면 연기를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속설일 뿐이다. 천상의 외모를 지니고도 수준급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는 제법 있다.

심지어 연기력 논란에 줄곧 시달린 한나래마저도 훗날 수준급 연기를 보여 주며 속설이 그릇됐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였다.

막장 드라마로 유명한 『아내가 가출했다』에서 신들린 악역 연기를 선보인 게 그 시작이었다.

이후에도 한나래는 연기력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악역 연기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연기력 차이가 눈에 띈다는 평가가 있긴 해도, 이전처럼 발연기 논란이 따를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악역을 맡을 때의 연기력은 명불허전.

그래서 붙은 별명이 광녀였다. 악역을 연기할 때의 모습이 흡사 미친 여자 같다나 뭐라나.

『아내가 가출했다』 출연으로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한나래는 인터뷰를 통해 연기력이 일취월장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아내가 가출했다 대본을 보자마자 오지은 역에 팍 꽂혔어요. 이 배역을 연기하고 싶다, 이 배역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근데 문제는 제 실력으로는 오지은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아시잖아요. 발연기. 그래서 소속사 대표님이랑 매니저 언니랑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어요.”

“그 답이 무엇이었나요?”

“연기법을 바꾸는 거였어요.”

“연기법이요?”

“네. 모델 일을 하다가 20살에 스크린 데뷔를 한 이후,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늘 뭔가가 아쉬웠어요. 맞지 않은 옷을 입고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는 느낌이랄까요. 늘 어색하고 늘 불편했죠. 그게 연기력으로 드러났고요.”

“연기법을 바꾸고 나서 그 어색함과 불편함이 사라진 거고요?”

“네. 사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얻어걸린 거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잘된 거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제게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찾게 된 거니까요.”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2009년을 기점으로 한나래의 잠재력이 터진다.

『아내가 가출했다』의 오지은 역을 맡은 이후 더 이상 발연기 논란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안시현이 참견하지 않더라도 한나래는 좋은 배우가 될 거다. 현실감 넘치는 악역 연기로 승승장구할 거다.

안시현은 연기대상을 수상하게 될 배우에게 연기로 조언을 해 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혹시나 자신의 조언이 나비효과가 되어 한나래가 연기대상을 받는 미래가 바뀔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딱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회귀 전 안시현과 한나래의 인연은 딱 한 번.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배우 특집 토크쇼에 게스트로 함께 출연한 거였다.

당시 안시현은 명품 조연이란 별명을 막 얻기 시작하던 차였고, 한나래는 『아내가 가출했다』 이후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

방송국 복도에서 만난 안시현이 먼저 인사를 건네며 아는 척을 했건만, 한나래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는 걸로 인사를 한 게 다였다.

그래 놓고 정작 촬영에 들어가서는 시종일관 웃으며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물론 친해지는 일은 없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쌩 하고 사라졌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엮일 일이 없었다.

방송에서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른 연예인이야 차고 넘친다. 한나래가 당시 보여 준 모습 또한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단, 좋은 기억이 아닌 건 분명했다.

고민 끝에 안시현이 결단을 내렸다.

“단시간에 연기력이 일취월장할 방법은 없어.”

“하지만 선배님은…….”

“나 같은 경우는 중학교 때부터 연극부 활동을 하며 경험이 쌓여 있었고, 방학 내내 죽어라 연습하며 오디션에만 올 인했어.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삭발하고 며칠 굶은 다음 오디션을 갈 정도로 간절했거든. 연기 수업은 받고 있는 거야?”

“네. 3개월 정도 됐어요. 단역이긴 한데 그래도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죽어라 노력해 봐. 정말 재능이 없는 경우가 아니면 노력은 배신하지 않거든. 기대했을 텐데 대답이 시원치 않아서 미안.”

정석적인 조언.

안시현은 딱 그 선을 지켰다.

솔직히 한나래와 그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나, 지금의 안시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이었으니까.

괜한 오지랖을 부릴 여유는 없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한나래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선배! 제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요. 선배 말대로 죽어라 노력해 볼게요. 원 없이 노력해 후회하지 않도록!”

한나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회귀 전에 만났을 땐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제 겨우 20살이라 그런지 귀엽고 순수해 보였다.

안시현은 한나래의 새로운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다.

‘인연이 되면 도와줄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   *   *

한나래와의 만남은 안시현의 머릿속에서 빠른 속도로 잊혀져 갔다. 회귀 전의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굳이 신경 쓸 정도로 안시현은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첫 대본 리딩 날짜가 3월 18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식힐 겸 극단과 학교, 혹은 오락실을 갈 때를 제외하면 연습에 몰두했다.

김진모와 안시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공원을 몇 바퀴 뛰고, 땀이 식기 전에 한적한 공원에서 발성 연습을 했다. 때때로는 사람이 없는 공원에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러닝과 발성 연습.

이는 김진모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 온 루틴이자, 안시현에게 늘 함께하자고 한 루틴이기도 했다. 혹독한 촬영 스케줄을 버티기 위한 체력과 좋은 연기를 위한 발성 연습은 필수적이니까.

흠뻑 땀을 흘린 김진모가 챙겨온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안시현과 함께 하는 아침 운동은 즐거웠다.

“아, 이렇게 같이 땀 흘리니까 좋다. 진즉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허억, 허억. 그러게. 진작 좀 할걸. 넌 쌩쌩한데 난 죽겠다. 더럽게 힘들어.”

“쯧쯧. 크랭크인 전에 체력 좀 기르자. 촬영 시작하고 나면 체력이 필수래. 연극이랑은 또 다를 거야.”

“후우. 그래야지.”

두 사람은 중․고등학교 때 연극부였고, 대학을 와서는 동아리 활동과 극단 활동을 병행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연극부와 동아리에서 주연을 독차지했던 김진모와 달리, 안시현은 항상 조연이었다. 때론 경쟁에서 밀려 단역을 맡은 적도 있다.

때문에 체력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했다. 체력이 연기에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계기가 없었다.

조연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낸 이후에야 체력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되며 꾸준히 운동을 했다.

이번 생은 그 시기가 좀 앞당겨지게 됐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수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도 무조건 운동은 해야 하고.’

회귀 전의 연기 내공은 남아 있지만 발성까지 그대로인 건 아니다. 제대 이후 훈련한 발성법과 20대 초반인 지금의 발성법은 전혀 다르다.

게다가 안면 근육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 또한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상태다.

실제로 『나는 간첩입니다』 오디션을 준비하며 안시현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도 안면 근육의 사용과 개발되지 않은 발성법이었다.

훈련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보니 20년 동안 쌓인 경험을 쥐어짜서 연기해야만 했다.

만약 발성과 안면 근육의 사용이 회귀 전에 이뤄 놓은 것들과 동일했다면?

송명현과의 승부는 첫 지정연기에서 갈렸을 거다.

두 가지 모두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다.

최소한 크랭크인 전까지 기본 틀 정도는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래야 해석한 대로 리수철 역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충분해. 두 달이면 차고 넘치지.’

어차피 시간은 많다.

데뷔작에 집중하겠다는 명목으로 휴학을 했고, 극단에 가서 일을 도와주면 연습이나 열심히 하라며 최정수에게 구박받다가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쫓겨났다.

학교를 가도 새 학기이다 보니 술자리 아니면 딱히 놀 사람이 없다.

남는 시간에 연습이나 해야지 뭘 하겠는가.

“오늘도 노래방 콜?”

“콜.”

안시현과 김진모가 노래방으로 향했다.

영화이다 보니 극단에서 연습을 하기도, 휴학했다 보니 학교에서 연습을 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집에서 하면 성량을 조절해야 하니 마음껏 연습을 하기에는 애로 사항이 존재했다.

그래서 집에서 어느 정도 연습을 하고 노래방에서의 전력투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연습실 때문이라도 이번 촬영이 끝나고 나면 계약을 해야겠어.’

안시현은 벌써부터 연예기획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스케줄 관리부터 시작해 메이크업과 정산 문제 및 작품 선택까지.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연예기획사와의 계약은 필수다.

그는 이미 몸을 담을 연예기획사는 정해 놓은 상태였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몸을 담을 연예기획사는 오로지 한 곳뿐이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회귀 전처럼 계약하고 싶지는 않아.’

회귀 전의 안시현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김진모의 후광에 힘입어, 김진모의 친구가 아닌 배우 안시현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다.

훗날 배우로서의 입지를 견고히 다지긴 했지만 말 그대로 훗날의 일이다. 김진모 덕분에 무명 시절을 보다 쉽게 버틸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에는 김진모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좋은 계약 조건을 따내고 싶었다.

리수철 역의 완벽한 소화.

그것이 안시현이 원하는 계약 조건을 만들어 주리라.

그때까진 불편함을 감수할 생각이었다.

*   *   *

3월 18일.

삭발했던 안시현의 머리카락 약간이나마 자라났을 무렵, 『나는 간첩입니다』의 첫 대본 리딩일이 됐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일찌감치 영화사로 향할 준비를 했다. 루틴대로 운동을 하고 돌아와, 씻고 면도를 한 뒤 말끔한 셔츠 차림으로 차려입었다.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영화사 ‘혜인원’.

영화사 대표 어머니의 이름을 거꾸로 딴 이 영화사는, 대한민국 3대 영화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4층짜리 건물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본 리딩 때문에 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진모, 그리고 안시현입니다.”

“김진모 배우님, 안시현 배우님. 확인됐습니다.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데스크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향했다.

대본 리딩까지 30분이 남아서인지 아직 회의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가 제일 먼저 왔나 보네?”

“30분이나 일찍 왔으니까. 선배님들이랑 제작진 오기 전에 연습 좀 하고 있을까?”

“좋지. 신 25?”

“오케이. 신 25로 가자고.”

신 25.

남파공작원을 찾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강석우가 리수철과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서 강석우는 사소한 습관을 계기로 리수철이 남파공작원일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다. 이는 훗날 리수철을 향한 포위망을 좁혀나가는 동기를 만들어준다.

신 25는 두 사람이 합을 맞춰 연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였다.

대본 리딩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은 신 25의 대사를 주고받았다. 데뷔작의 첫 대본 리딩을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동시에 안시현과 김진모가 벌떡 일어나 사내를 향해 폴더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강석우 역을 맡은 신인 배우 김진모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리수철 역을 맡은 신인 배우 안시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하며 안시현은 조심스러웠다.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데뷔 5년 차 선배 배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부탁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됐으니까 발목 잡지나 마라. 쯧. 어떻게 이런 되도 않는 풋내기들이 캐스팅된 건지 모르겠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훗날 천만 관객을 두 번이나 동원할 배우이자, 그로부터 몇 년 후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춘 배우.

류성웅.

영화판 최고의 인성 쓰레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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