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7화>
7화. 궁금하면 보여 줘야지
류성웅.
무대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이자, 훗날 두 편의 1000만 관객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그를 국민배우로 칭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혹자들은 류성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만약 인성과 연기력이 반비례한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는 류성웅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송명현처럼 사고를 친 건 아니다.
다만 인성이 영 별로였다.
제작진과의 마찰이 여려 번 있었으며, 선후배 가리지 않고 막말을 내뱉고 무시했다. 출연 작품의 성적과 별개로 현장에서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배우였다.
두 번의 1000만 관객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이후 세 작품이 내리 흥행에 실패하자, 류성웅은 소리 소문 없이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천만 배우를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인성 문제가 공공연히 대두되던 시기에 연기력이 발전하지 않았다. 비슷한 캐릭터만을 고집하며 정체되면서 자연스레 다른 배우들에게 자리를 뺏기고 만 것이다.
몇 년의 전성기 후 빠른 몰락.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간첩입니다』의 크랭크인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류성웅이 조연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배우지, 주연은 아니란 거다.
2005년은 되어야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그의 인성질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공하고 나서 인성이 안 좋아진 게 아니다.
원래도 안 좋았지만 만만해 보이는 후배들 앞에서만 본모습을 드러냈고, 선배들 앞에서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착한 후배의 모습을 연기한 거였다.
주연으로 도약하고 어깨에 뽕이 들어가면서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지.
따라서 지금의 류성웅이 전성기 때처럼 더러운 인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은 낮았다.
“이 새끼들 봐라? 귀먹었어? 선배가 말하는데 대답 안 해? 니들 지금 나 무시하냐?”
한다고 해 봐야 지금처럼 시비를 거는 정도?
그 정도면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 얼마든지 감내해 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안시현은 판단했다.
다만 김진모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웃는 모습을 보여 주며 팬들에게 ‘보살’이라 불린 김진모이지만, 훗날의 일이지 아직은 혈기왕성한 21살의 청년일 뿐이다.
선배라고 해 봐야 고작 4살 많다.
막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욱한 김진모가 류성웅에게 뭐라고 하려는 찰나, 안시현이 고개를 숙이며 선수를 쳤다.
“아닙니다, 선배님. 저희가 어떻게 선배님을 무시하겠습니까. 선배님 앞에서 어설픈 실력으로 무게 잡은 거 같아 민망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폐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잘하겠습니다.”
류성웅은 왜 시비를 건 걸까?
아무리 인성 쓰레기여도 이유 없이 시비를 걸진 않는다. 트집거리가 보이니까 시비를 거는 거다.
그 트집거리라는 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거라서 문제지만.
‘아니꼬운 거겠지. 일찍 와서 선배님들께 점수 좀 따 보려고 했더니만, 처음 보는 후배 두 명이 먼저 와서 연습하고 있으니까.’
안시현은 시비의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고, 류성웅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한 대답을 했다.
괜한 일로 드잡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다를까.
추측한 이유가 맞았는지, 굽히고 들어가자 류성웅은 언제 시비를 걸었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는 말이 좀 통하네. 그래, 그래.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라. 자꾸 NG 내서 촬영장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면 뒤질 줄 알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저희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갔다 와. 아, 올 때 디스 한 갑만 사 와라.”
“알겠습니다.”
안시현이 김진모를 데리고 회의실에서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김진모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치며 장난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진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의 표정이 풀린 건, 류성웅이 말한 담배를 사고 슈퍼에서 나온 직후였다.
“후우. 땡큐. 너 아니었으면 욱할 뻔했다.”
“참아.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우리 앞이니까 무게 잡는 거야. 감독님이랑 선배님들 앞에서 저러면 난리 날 걸?”
“쩝. 네 말이 맞아. 촬영 끝날 때까지 최대한 똥 피해 다녀야지 뭐 어쩌겠어. 어차피 나야 그 인간이랑 엮이는 신도 거의 없으니까.”
“그래 놓고 또 욱하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저 잘 참거든요?”
“크흐흐. 그럼 됐고.”
안시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류성웅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기를 말이다.
* * *
다행히 류성웅의 행동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곽상필 감독과 선배 배우들이 하나둘 회의실에 나타나자, 류성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바른 모습으로 일관했다.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하기 전까지 대외적으로 보여 줄 이미지를 모두의 앞에서 드러냈다.
덕분에 안시현과 김진모는 류성웅에게 담배를 사다 준 이후로 딱히 엮일 일은 없었다.
대본 리딩 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이장혁 역의 송강식입니다. 감독님이 좋게 봐 주셔서 분에 넘치는 배역을 맡게 됐는데, 촬영 끝나고 기분 좋게 술 한잔 같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파공작원 최철만 상위를 맡은 황영민입니다. 장래 희망은 곽 감독님 페르소나입니다. 하하하.”
“인마. 페르소나는 정수 선배 자리야. 넘볼 걸 넘봐라.”
“아따, 형님. 거 농담도 못합니까?”
주연인 송강식과 황영민을 시작으로 배우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절친하기로 유명한 송강식과 황영민은 자기소개를 하는 와중에도 티격태격했다.
안시현은 여섯 번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남파공작원 리수철 역을 맡게 된 신인 배우 안시현입니다.”
“크흐흐. 네가 그 미친놈이구나. 반갑다.”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선배님.”
송강식이 안시현에게 씨익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정작 안시현은 송강식이 자신을 반가워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 얼떨떨해하며 인사를 받았다.
회귀 전, 송강식과 몇 번 술자리를 가지긴 했지만 큰 인연은 아니었다. 최정수와 송강식이 친하기에 합석을 한 정도였고,『나는 간첩입니다』이후로 같이 작품을 한 일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이 시기의 송강식과는 초면인 상황.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너랑 저놈이 오디션 때 장난 아니었다는 이야기 들었다. 둘이 불알친구에 함께 산다며? 거기에 광대들 출신이고.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해 봐도 되겠지?”
“영광입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흐흐. 영광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이 차이 조금 나는 형이라 생각해, 이 자식아. 형 아직 안 늙었다.”
“형님, 요즘 서긴 합니까?”
“백두산이다, 새끼야.”
“아따. 우리 형님은 거시기로도 애국하시는구만~”
송강식과 황영민은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술자리에서 곽상필 감독이 안시현과 김진모에 대해 칭찬한 게 그 근원이었다.
그 순간.
안시현은 류성웅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류성웅은 굳은 얼굴로 안시현을 살짝 노려보았다. 딱 봐도 자신이 아닌 안시현과 김진모가 두 주연 배우와 곽상필 감독의 관심을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새였다.
회귀 전에는 김진모와 류성웅이 송강식과 황영민의 관심을 받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안시현이 류성웅에게 가야 할 관심을 뺏는 꼴이 됐다.
사실 그마저도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는 김진모가 관심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대본 리딩을 시작하기 전부터 본의 아니게 류성웅을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덕분에 안시현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따로 있는 자리는 무조건 피해야겠네.’
류성웅과 따로 있는 자리는 무조건 피하자고 말이다.
배우들의 자기소개가 모두 끝난 뒤, 곽상필 감독이 안시현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영민 배우와 송강식 배우에겐 미리 언급했지만, 대본 리딩 후 새 대본을 지급할 겁니다. 리수철 배역의 대사를 소폭 조정했습니다. 그 외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디션 때도, 합격 통보를 받을 때도, 대본을 지급받을 때도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배역과 관련해서 따로 피드백을 받은 바가 없었다.
때문에 대사 조정은 의외였다.
‘애드리브가 마음에 드셨나?’
리수철 역 외엔 변동 사항이 없다고 했다.
리수철의 대사가 변동이 생길 만한 계기는 오디션 지정연기 당시의 애드리브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곽상필 감독은 송강식과 황영민과의 술자리에서 안시현과 김진모에 대한 칭찬을 했다. 애드리브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 앞뒤가 딱 맞아떨어진다.
‘뭐, 대사 한 마디라도 늘어나면 좋은 거지.’
안시현이 리수철 배역을 원한 건 조연 중 가장 비중이 낮지만, 임팩트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대사가 늘어난다는 건 비중 또한 늘어난다는 뜻.
한 마디, 한 단어가 늘어나는 거라도 괜찮았다. 조금이라도 더 영화에 출연하는 거니 무조건 이득이다.
“그럼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첫날이니 주요 배역 위주로 장면 몇 개만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날 대본 리딩을 위해 정해진 장면은 총 6개.
그중 안시현의 대사가 포함된 장면은 하나.
환경미화원 이수철이 갑자기 찾아온 황시국 앞에서 자신이 남파공작원 리수철임을 드러내는 신 15, 오디션 때 송명현과 경쟁하며 자유연기를 대신해 지정연기를 보여 줬던 바로 그 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신 15를 가장 먼저 리딩하게 됐다.
안시현과 류성웅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이다.
류성웅은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을 바라보았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마치 네놈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한번 보자는 듯한 시선이었다.
‘궁금하면 보여 줘야지.’
류성웅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건 그의 인성이 개차반이기 때문이지, 그가 무섭거나 연기로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류성웅은 연기를 잘 하는 배우다.
그렇다고 지금의 류성웅에게 20년간의 연기 경험을 쌓고 회귀한 자신이 연기로 밀릴 것 같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신 15. 이른 아침. 나간동의 골목. 환경미화원 이수철이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신 15의 포문을 연 건 안시현.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의식을 치르고서 연기를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르신. 마루도 안녕? 아저씨가 줄 건 없고, 소시지라도 먹을래?”
그 순간, 곽상필 감독이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사이에 더 좋아졌어?’
그는 근 한 달 사이 안시현에게 생긴 변화를 눈치챘다.
오디션 당시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김진모가 타고난 천재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케이스라면, 안시현은 정말로 21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숙미가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 줬다.
특히나 지정연기 당시 보여 준 애드리브는 대본을 수정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못질이요? 네. 제가 이따 점심시간에 해 드릴게요.”
“새댁! 정육점에 오늘 고기 좋은 놈 들어왔어요! 주말에 남편이랑 같이 봉사 가기로 한 거 잊지 말고요!”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그때보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엑스트라들과 대사를 주고받아야 하는 장면임에도 독백으로 대사를 쳤다. 목소리에 담긴 친절함은 지켜보는 이들마저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였다.
‘확실히 발음과 발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어.’
귀에 팍팍 박히는 발성과 또렷또렷한 발음.
성공하는 배우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다.
한 달 전의 안시현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발성과 발음을 보여 줬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산점을 받을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 사이, 가산점을 얼마나 줘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발성과 발음이 좋아졌다.
거기에 무표정으로 대본 리딩을 함에도 자연스럽게 얼굴이 씰룩거린다.
본능적으로 안면 근육을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안면 근육의 사용을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웬만한 연기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한 달도 안 되는 새에 이뤄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본 촬영에 들어갈 즈음에는 얼마나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줄까?
곽상필 감독은 의문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지문을 읽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수철. 책상 밑에 숨겨 놓았던 칼을 꺼내 든다.”
까닥.
안시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디션 때처럼 인격의 변화를 위해 만든 장치, 이수철이 리수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동무, 정신 나갔네? 남조선 아새끼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찾아와?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거야?”
그와 함께, 안시현의 목소리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이수철이 아니라 리수철의 인격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격을 바꾸는 시간도 더 짧아졌어.’
이중인격 연기야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완전히 다른 인격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냐, 없냐다. 관객이 한 사람에게서 두 인격을 느끼기 위해선, 배우가 자유자재로 인격을 넘나들어야 한다.
오디션 때 보여 준 안시현의 이중인격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환경미화원 이수철과 남파공작원 리수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 톤과 감정의 변화만으로도 상반된 느낌을 표현해 냈다.
게다가 변화까지 2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사람이 달라졌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이중인격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고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장면 전환. 며칠 후. 동네 사람들과 봉사 활동을 간 리수철의 독백.”
까딱.
“많이 드세요, 할아버지. 부족하면 더 드릴게요. 식사하고 산책하신 다음에 저희랑 목욕하러 가요.”
리수철에서 이수철로의 변화 또한 자연스러웠다.
눈에 띄게 좋아진 발성과 발음, 안면 근육의 자연스러운 사용, 더 빨라진 인격의 변화까지.
곽상필 감독은 어쩌면 자신이 안시현을 잘못 평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