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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8화 (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8화>

8화. 너, 메소드지?

두 번째로 리딩한 건 신 5.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이장혁 역의 송강식이 고문실 앞에서 부하 직원 강석우 역의 김진모를 질책하는 장면.

리딩 내내 숨을 참고 있던 안시현은 송강식과 김진모의 대사가 끝난 뒤에야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역시 강식 선배님. 괜히 국민배우가 아니라니까. 두 번째 주연 작품인데 이미 연기력이 물올랐어.’

송강식.

그는 황영민, 최정수와 함께 2000년대 영화판을 주름잡게 될 국민배우다. 어떤 배역이든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믿고 보는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다.

연기력은 당연히 명불허전.

무려 5분짜리 신을 원 테이크로 촬영한 건 영화판에서 줄곧 전설로 회자되기까지 한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송강식이 두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다. 1999년의 송강식은 아직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배우로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고 중임에도 연기력이 안정되어 있었다.

훗날 경험이 더해지며 연기에 깊이가 생기지만, 연기관은 자체는 이미 완성된 상태라고 보는 게 맞았다.

안시현은 30대 초반의 송강식이 하는 연기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사실 회귀 전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연기 잘한다. 나도 저렇게 잘하고 싶다. 오늘 대본 리딩 끝나고 회식으로 뭐 먹으려나?

딱 그 정도 생각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르고 회귀해서 다시 보니 송강식의 연기에서 많은 게 느껴졌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감정이 제각각 달랐다.

그 다양한 감정들이 정확한 발음과 귀에 박히는 발성을 통해서 전달됐다. 거기에 표정과 행동이 더해지며, 비로소 송강식의 연기가 완성됐다.

촬영이 아닌 대본 리딩이다. 표정과 행동이 빠져 있음에도 감정 표현이 능숙하다.

목소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아는 배우였다.

‘역시 피나는 연습만이 살길이야.’

아직 발성이 완벽하지 않은 21살의 몸을 뜯어고치기 위해 안시현은 매일같이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시현은 어쩌면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연습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주연 배우가 아니라 국민배우다. 수많은 배우 중에 손가락에 꼽히는 몇몇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다.

단순한 연습으로는 안 된다.

신체 곳곳, 하다못해 솜털까지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습할 필요를 느꼈다. 회귀 전의 자신이 아닌, 그 이상을 목표로 하고 내달려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야 송강식의 발치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대본 리딩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신 15의 리딩 이후.

안시현은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대본 리딩을 지켜보았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며 장점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어떤 부분을 적용할 수 있지 생각하다 보니 삽시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짝짝짝.

곽상필 감독이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앞 소고기 집에 회식 자리 준비해 놨습니다. 스케줄 없는 분들은 드시고 가세요.”

“감독님, 육회 먹어도 됩니까?”

“송 배우, 저희 육회 먹으려고 회식하는 거예요.”

“크으. 사랑합니다, 감독님. 제 맘 아시죠?”

“형님, 간만에 한번 달려 볼까요? 연극판 뜨고 형님이랑 대작 안 한 지 꽤 됐잖습니까.”

“크흐흐. 그래, 모처럼 한번 달려 보자.”

회식 자리에서 곽상필 감독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석이든 사석이든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송강식와 황영민, 그리고 중견 배우들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 주는 게 전부였다.

다른 배우들은 곽상필 감독에게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곽상필 감독이 가져다주는 존재감은 엄청났다.

술이 한 잔 들어간 뒤, 송강식은 김진모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짜식, 연기 잘하던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선배님.”

“부족하긴. 발성도 안정적이고, 감정 표현도 수준급이더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연극부 들어갔다고 좋아했었는데 벌써 다 컸네. 아버지는 잘 계시고?”

“정정하십니다. 너무 정정하셔서 문제죠.”

“크흐흐. 조만간 한번 찾아봬야겠네.”

김진모 다음은 안시현이었다.

“시현이 너, 이수철과 리수철을 전혀 다른 인격으로 해석한 것 같던데 맞아?”

“맞습니다, 선배님. 환경미화원 이수철과 남파공작원 리수철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석도 좋지만, 연기도 좋았어. 특히나 몇 초 만에 인격을 자유자재로 전환하는 건 엄청나더라. 웬만한 연기 내공으로도 쉽지 않은 건데 말이야. 너, 메소드지?”

“그렇습니다, 선배님.”

“불알친구라면서 연기 스타일은 정반대네. 조심해. 메소드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배우가 캐릭터에 잡아먹히는 경우도 많이 봤거든.”

메소드 연기법.

배우가 자신과 배역을 일체화시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연기법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다.

대표적인 단점으로는 일체화가 지나친 나머지 배우가 캐릭터에 잡아먹혀, 촬영이 끝난 뒤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거다.

메소드 연기를 하는 대표적인 배우인 최정수는, 조폭 배역을 맡은 뒤 팬들이 인사를 할 때마다 시비를 걸고 싶고 쌍욕이 나오는 걸 참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안시현이 메소드 연기법에 심취하게 된 건 군 입대 후,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발전을 꾀하기 시작한 이후다.

결과적으로 메소드 연기법과 안시현의 궁합은 최고였다. 조연으로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며 명품 조연으로 불렸고, 결국 『위장취업』을 통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까.

만약 메소드 연기법을 접하지 않았다면? 연기법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면?

그래도 연기는 계속했을 것이다.

안시현은 연기가 좋았다. 연기를 사랑하고 즐겼다. 자신의 입지나 성과와 상관없이 연기는 계속했을 거다.

다만 명품 조연 안시현,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 안시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메소드는 안시현에게 딱 맞는 옷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송강식의 조언이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이상, 캐릭터에게 잡아먹힐 걱정은 항상 해야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선배님. 주객전도가 되지 않도록 공부 많이 하겠습니다.”

“공부는 무슨. 인마, 딱 봐도 너랑 진모는 몇 년 내로 주연급이 될 재목들이야. 그런 놈이 공부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욕한다.”

“아하하. 그럼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진 말고. 내 밥그릇까지 뺏길까 봐 무서우니까. 으흐흐. 자, 한 잔 받아.”

“내일 가야 할 곳이 있어 딱 한 잔만 받겠습니다.”

안시현은 회귀 후 처음으로 술잔을 입에 댔다.

오늘따라 술이 달게 느껴졌다.

*   *   *

회식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안시현은 소주 두 잔을 마신 뒤에는 잔을 사양하고 물로 대신했다. 반면 김진모는 평소 동경하던 곽상필 감독과의 술자리에 들떠 주량을 초과했다.

그 결과.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이제껏 준비했던 많은 말을 뒤로 한 채~”

“제발 좀 닥쳐 줘. 버리고 가기 전에.”

“네 이노옴! 유기범으로 신고할 거다! 하하하!”

술에 취한 김진모를 업고 와야 했다.

김진모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안시현은 김진모를 침대에 눕혀놓고서 밖으로 나왔다.

이내 백열등을 켜고 평상에 앉아 새 대본을 집어 들었다. 리수철 배역에 생긴 변화를 확인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신 99.

인질을 잡은 채 궁지에 몰린 리수철이 혼란을 겪다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신이자, 안시현이 오디션 당시 지정연기를 보여 준 신.

쓰러진 리수철.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중얼거린다.

리수철: 공화국…… 만세.

오디션 당시 안시현이 했던 애드리브가 대본에 추가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대사가 꽤 늘어났다.

비율로 따지자면 기존보다 20퍼센트 증가한 수준으로, 곽상필 감독으로 소폭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조연 네 명 중 가장 비중이 없던 리수철 배역이 이제는 다른 조연들과 엇비슷한 수준이 됐으니까.

‘귀찮아질 수도 있겠네.’

맡은 배역의 비중이 늘어난 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리수철 역의 비중이 류성웅이 맡은 황시국 역과 존재감이 비슷해지게 됐다는 거였다.

게다가 두 배역 모두 남파공작원이다.

반드시 비교가 될 터였다.

성격 더러운 류성웅이 신인 배우인 안시현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뭐, 지가 기분 나빠도 어쩌겠어. 기껏해야 둘이 있을 때 시비 거는 게 전부겠지.’

안시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류성웅이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좀 귀찮아지는 게 전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철면 곽상필 감독에게 배역의 비중을 놓고 따지지 못할 거고, 대놓고 안시현에게 해코지 할 일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류성웅은 송명현처럼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키는 타입은 아니다. 이미지의 고착화와 글러먹은 인성으로 인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케이스다.

즉, 안시현이 류성웅의 해코지를 참아 내기만 하면 영화의 흥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란 거다.

무려 20년 동안 연기생활을 했다.

온갖 인간군상을 다 겪어 봤다.

모든 스태프가 보는 앞에서 감독에게 손찌검을 당한 적도 있고, 얼굴에 침 뱉은 선배라는 작자도 있었고, 술에 담뱃재 타고 마시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안시현은 전성기 시절, 인성질이 절정에 다다랐던 류성웅과도 작품을 해 봤다.

이 시점에서 류성웅의 성질 머리야 애교 수준이다.

류성웅의 성질을 받아 주며 별문제 없이 촬영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것. 그게 안시현이『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을 앞두고 바라는 최선이었다.

*   *   *

첫 대본 리딩 다음 날.

김진모와 안시현의 계좌에『나는 간첩입니다』출연 계약금이 입금됐다.

1,500만 원.

훗날을 생각하면 별거 아닌 금액일 수 있지만, 데뷔작 계약금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많은 금액이었다.

곽상필 감독이 배우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 주기로 유명한 감독인 덕분이었다. 심지어 이마저도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하며 줄어든 거였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계약금에 만족했다. 1,500만 원이면 할 수 있는 게 꽤 많았으니까.

가장 먼저 한 건 중고차를 구입하려는 김진모를 따라가는 거였다.

대본 리딩은 충무로에서 하지만, 촬영장은 양평에 있다. 이동 거리와 편의성을 감안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차를 장만하는 게 맞았다.

고민 끝에 구입한 차량은 주행거리 15만km를 넘긴 무쏘 602EL 1994년식.

회귀 전에도 SUV만을 고집하던 김진모다. 회귀 후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더 좋은 중고차 매물도 더러 있었지만 그는 무쏘 말고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 무쏘 사서 폐차할 때까지 잘 타고 다닐 거니까 그럼 된 거지.’

다음 날 오후.

안시현은 강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진모와 함께 중고차 정비를 맡기고 백화점에 들러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산 직후였다.

해가 뉘엿뉘엿 진 이후에야 안시현은 강진 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마중을 나오신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이고, 우리 배우 아들 왔어? 캐스팅되더니 신수가 훤해졌네! 배고프지? 너 온다고 소 잡아 놨으니까 가서 고기부터 먹자.”

“내일 잔치하려고요?”

“그럼! 당연히 해야지! 우리 아들이 곽상필 감독님 작품에 조연으로 캐스팅됐다는데 소 몇 마리 잡는 게 중요하겠어?”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마을 앞에 도착했을 때, 안시현은 마을 입구에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서 웃음을 흘렸다.

[축! 안 씨네 농장 외동아들 안시현, 곽상필 감독 차기작 오디션 합격!]

회귀 전과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회귀 전에는 단역이었고, 지금은 조연이라는 것 정도?

물론 기쁜 건 똑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안시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머니에게 다가가 집게를 건네받으려 했다.

“제가 할게요, 엄마.”

“우리 안 배우님은 얌전히 앉아서 구워 주는 고기나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맞는 말씀. 어딜 손님이 고기를 구우려고 해?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고 먹기나 해.”

“아하하. 네, 잘 먹겠습니다.”

안시현은 부모님이 구워 준 소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맛있었다.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소고기야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지만, 부모님이 구워 준 소고기를 먹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그립던지.

안시현은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연신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과 눈을 마주쳤다.

“아들, 언제 올라가야 돼? 한 일주일 있을 거지?”

“마음 같아서는 한 달도 더 있고 싶은데, 모레 오후에는 대본 리딩 있어서 첫차 타고 올라가야 돼요.”

“모레 오후? 뭐가 그렇게 바빠? 그럼 그냥 오지 말고 진모랑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쉬지 그랬어.”

“촬영 들어가면 더 바빠져서 그래요. 드릴 것도 있고요.”

“응? 선물이라도 사 왔어?”

“네.”

식사가 끝난 뒤, 집 안으로 들어간 안시현이 선물을 꺼내 놓았다.

선물은 총 세 가지였다.

아버지께 드릴 넥타이, 어머니께 드릴 스카프, 마지막으로 고된 일 때문에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부모님을 위해서 가방 안에 한가득 사온 파스까지.

안시현이 부모님께 처음으로 해 드리는 선물이었다.

회귀 전을 포함해서.

“파스 효능 좋다니까 아프면 바로바로 붙이세요. 넥타이랑 스카프는, 저 영화 개봉하면 시사회 때 하고 오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아이고. 스카프 예쁜 거 봐라. 엄마나 꽃무늬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만날 입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경조사 있을 때마다 하고 가서 자랑해야겠네. 우리 배우 아들이 사 준 넥타이라고.”

“돈 더 많이 벌면 축사 새로 지어 드릴게요.”

“허허허. 말만 들어도 좋구만!”

별거 아닌 선물이다.

넥타이와 스카프, 파스를 다 합쳐도 저녁 식사로 먹은 고깃값 정도일 거다.

하지만 안시현의 부모님에겐 수백만 원짜리 명품보다 더 뜻깊고 가치 있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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