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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9화 (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9화>

9화. 겁먹은 거야?

부모님과의 함께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그리고 너무 짧았다.

마을 잔치를 하고 아버지와 밤낚시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됐다.

부모님은 온갖 반찬을 한가득 싸 주셨다.

안시현이 빈손으로 가는 게 편하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자식 생각하는 부모 마음을 이길 도리는 없었다.

양손 무겁게 서울로 올라가게 된 안시현은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와 준 부모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짐을 내려놓고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안아 드렸다.

“징그러, 인마.”

“어휴. 남사스럽게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축사 새로 지어 드릴 테니까 아프지 말고 오래 사세요.”

*   *   *

두 번째 대본 리딩.

안시현은 자리만 지킨 채 리딩에 참여하지 못했다.

두 번째 대본 리딩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 관련 신 위주로 대본 리딩이 진행됐는데, 안시현의 대사가 포함된 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김진모의 대사가 포함된 신은 무려 다섯.

강석우.

김진모가 맡게 된 배역은 강석우는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신입이며, 체포한 남파공작원을 고문하다가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며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게 핵심인 캐릭터다.

강석우는 최후의 순간까지 남파공작원들에게 귀순을 권유한다. 남파공작원을 모두 잡아 죽여야 한다는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이장혁의 뜻에 반발하면서도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어 고뇌하는, 분단의 비극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춰진 캐릭터다.

신 45.

몇 차례 남파공작원 서영만을 고문하며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강석우는, 자신이 고문한 다음 날 서영만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끝내 무너지고 만다.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못하겠다고?”

“제 손으로 서영만을 죽였습니다.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한 일이야. 빨갱이 새끼들 몇 놈 죽여서 국가에 이바지하는 거라고!”

“사람을 죽이는 게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전 국가를 배신하겠습니다.”

울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김진모는 대사를 읊조렸다.

표정과 행동이 없었다. 그럼에도 강석우의 내적 괴로움이 여실히 전달됐다. 남파공작원을 고문하며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신 45의 대본 리딩이 끝난 뒤.

“이야. 진모 연기 잘하네. 감정 표현이 일품이야.”

송강식이 칭찬하자, 김진모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선배님.”

“자신감 좀 가져라, 인마. 내가 네 얼굴과 네 연기력이면 다른 배우들 다 씹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기했을 거다.”

“하긴. 형님은 다 좋은데 얼굴이 에러긴 하죠.”

황영민의 말에 송강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지를 치켜세웠다.

“지랄. 지는 사포에 뻑뻑 간 얼굴이면서.”

“크흐흐. 형님, 우린 무조건 연기파입니다. 진모나 시현이처럼 잘생긴 놈들하고는 태생이 다르다고요.”

이날 대본 리딩을 하는 내내 김진모는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전매특허와도 같은 절정의 감정 연기를 보여 주며 다른 배우들의 호평을 받았다.

곽상필 감독 또한 만족스러운 듯 김진모의 연기에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대본 리딩 첫날 시비를 걸었던 류성웅은 김진모가 칭찬을 받을 때마다 억지 미소를 지었다. 배알이 꼴리는 걸 참는 티가 확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짜 감정 표현 미쳤다. 저러니까 국민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지.’

안시현은 김진모의 연기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회귀 전의 김진모를 떠올렸다.

김진모는 감정 표현에 무게 중심을 둔 자연스러운 연기 스타일을 추구한다.

중요한 건 그의 감정 표현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란 것.

한 평론가는 김진모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연기의 평가 기준이 감정 표현뿐이라면, 세계 최고의 배우는 김진모일 거라고 말이다.

특히나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보여 준 오열 신은 최고였다. 케이블 채널 역사상 최고 시청률인 29.1%, 순간 시청률 36.3%라는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인생작인『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촬영하기까진 10년도 더 넘게 남았지만, 이제 막 데뷔를 앞두고 있는 21살 김진모의 감정 표현은 그때와 비교해도 그리 부족함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아쉬운 걸 꼽자면 전력투구를 한다는 것 정도?

감정 표현에도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지금이야 조연이라 괜찮지만, 주연으로서 발돋움하려면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구분해야 한다. 시종일관 내달리기만 하면 관객이 연기를 음미하기도 전에 지치고 만다.

뭐, 누군가 굳이 조언하지 않더라도 타고난 배우인 김진모이기에 스스로 깨닫고 주연 배우로서 성장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감정 표현…….’

안시현은 대본 리딩을 지켜보며 수없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김진모처럼 감정 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   *   *

안시현과 김진모는 대본 리딩을 거듭하며 선배 배우들에게 질리도록 칭찬을 받았다.

그때마다 늘 기분이 좋았다.

자고로 칭찬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족하고 아쉬운 거 아니겠는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불알친구인데 연기 스타일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한 명은 자연스러움에 감정을 더했고, 다른 한 명은 메소드라니. 이게 말이 돼?”

“원래는 스타일이 비슷했는데…… 아무래도 저한테는 메소드가 맞는 옷 같습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 빨리 크랭크인 했으면 좋겠다. 너희 둘이 제대로 연기하는 걸 보고 싶어 미치겠거든.”

“실망하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본 리딩을 할 때마다 선배 배우들의 칭찬을 안시현과 김진모가 양분했다.

때문에 류성웅은 심기가 불편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마음에 안 들어.’

그나마 김진모는 겹치는 신이 기껏해야 둘이다.

하지만 안시현은 아니다.

상당수의 신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작품 내에서 비중이 더 많은 자신보다 관심을 받고 있다.

중견 배우들도 김진모와 안시현을 아들 대하듯이 하며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상황에 따라 연기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류성웅을 가장 열 받게 하는 건, 불편한 감정과 별개로 안시현이 정말로 연기를 잘한다는 거였다. 개봉 후 조연들 중 누가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눈에 훤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결국.

“안시현, 좋냐? 거슬리니까 적당히 나대라.”

류성웅은 안시현과 화장실에 단둘이 있을 때, 대본 리딩 내내 감춰 뒀던 속내를 꺼내 들었다. 그에 안시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연기였다.

류성웅의 생각 따위야 뻔하디 뻔했으니까.

“잘하라고 하셔서 잘했는데……. 혹시 제가 선배님께 뭔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리수철보다 황시국의 비중이 더 큰데, 네가 왜 돋보이려고 안달이 나 있어? 너 주연이야? 아니잖아. 적당히 힘 빼고 네 배역에 맞게 연기하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주제넘게 행동한 거 같습니다. 선배님들의 칭찬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그만…….”

“알면 됐다. 부탁이니까 눈치껏 좀 행동하자.”

“네,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안시현은 류성웅의 눈치를 보며 연기를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겉으로는 기죽은 척하며 전력투구를 할 생각이었다.

‘류성웅 따위 알 게 뭐야. 어차피 이번 작품 이후로는 함께 작품할 생각도 없는데. 배우는 아가리가 아니라 연기로 증명하는 겁니다, 선. 배. 님.’

*   *   *

1999년 5월 1일.

『나는 간첩입니다』양평 촬영장 앞.

한 달여의 대본 리딩을 끝마치고, 크랭크인을 앞둔 제작진과 배우들이 한데 모여 고사를 지냈다.

시대가 바뀌며 크랭크인 전 고사를 지내지 않는 현장도 많아졌지만, 아직까지 고사는 흥행과 무사고를 바라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고사의 시작을 알린 건 중견배우 이석재.

7, 80년대 국민배우이자 리수철이 사는 아파트 경비 역으로 나오며 영화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 줄 배우였다.

“곽 감독, 제가 먼저 해도 되겠어요?”

“네. 선생님께서 먼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이거 참…… 민망합니다그려.”

이석재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절을 하고 미리 준비해 온 돈을 돼지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영화와 관련된 소원을 빌었다.

“촬영 끝날 때까지 아무 사고 없길 바랍니다.”

이후 곽상필 감독을 시작으로 배우와 스태프들이 차례대로 절을 했다.

“저희 영화 대박 나게 해 주세요.”

“손익 분기점 넘게 해 주세요, 제발!”

“전 많은 거 바라지 않습니다. 제작 엎어지지 않게만 해 주세요. 영화 무사 개봉 바랍니다.”

“한 신에 NG 열 번 넘지 않게 해 주세요.”

안시현도 만 원 짜리 한 장을 찔러 넣고서 빌었다.

단, 육성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욕심 안 냅니다. 차기작 캐스팅은 제 힘으로 알아서 할 테니, 손익 분기점 넘기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곽 감독님이 앞으로도 계속 현역으로 남게 해 주세요.’

회귀 전의 곽상필 감독은 『나는 간첩입니다』를 끝으로 메가폰을 내려놓았다. 외부 요인이 작용했다지만 입봉 이후 처음으로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한 영화고, 감독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거라 판단한 것이다.

훗날 『나는 간첩입니다』가 주목을 받은 건, 작품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이유 또한 적잖게 영향을 끼쳤다.

개인적으로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이 앞으로도 계속 감독 생활을 이어 나가길 바랐다.

그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연기관을 사랑했다. 기회가 된다면 곽상필 감독과 또다시 작품을 하고 싶었다.

또한.

‘곽상필 감독님이 작고 후에야 제자에게 유언으로 남긴 유작. 그 작품을 곽상필 감독님이 직접 연출했다면 천만 관객을 가뿐하게 넘겼을 거야. 그 작품은 곽상필 감독님이 아니면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어.’

곽상필 감독의 유작이 곽상필 감독의 손에서 완성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땐, 자신이 조연이 아니라 주연 배우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해 있기를 바랐다.

*   *   *

고사를 지내고 점심 식사를 한 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신 15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주세요.”

신 15, 안시현과 류성웅이 메인인 신부터 촬영하기로 했다. 첫째 날 촬영은 남파공작원 위주로 촬영하기로 했기에 내려진 선택이었다.

분장팀이 분주하게 안시현과 류성웅의 옆에서 움직여 댔다. 담배를 한 대 피고 온 송강식이 슬쩍 안시현의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시현이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멀쩡합니다, 선배님.”

“그럼 됐고. 대본 리딩 시작할 때보다 말라서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했지.”

“리수철처럼 보이려고 다이어트 좀 했습니다.”

“흐흐흐. 적당히 해, 인마. 그러다 몸 상하면 나가리 되는 거야.”

리수철은 마른 몸매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녔다.

키 183cm의 안시현에겐 어울리지 않는 신체 조건이다. 인상이야 분장으로 해결한다지만, 신체 조건만큼은 어떻게 바꾸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노력했다.

최대한 리수철처럼 보이기 위해, 관객들이 리수철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안시현의 선택은 마른 근육질 몸매였다.

전날 저녁부터 먹은 거라곤 삶은 계란 두 개와 사과 하나가 전부이기에 배가 고팠지만, 송강식과 대화하는 안시현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촬영 준비는 다 끝났다.

한시라도 빨리 촬영이 시작되길 바랐다. 준비한 것들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약 30분 뒤.

“액션.”

마침내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이 시작됐다.

이른 아침. 나간동의 골목. 환경미화원 이수철이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르신. 마루도 안녕? 아저씨가 줄 건 없고, 소시지라도 먹을래?”

“감사합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머니.”

“수철 삼촌, 못질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남편이 출장을 가서 해 줄 사람이 없네.”

“못질이요? 네. 제가 이따 점심시간에 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역시 수철 삼촌밖에 없다니까.”

“하하하. 별말씀을요. 새댁! 정육점에 오늘 고기 좋은 놈 들어왔어요! 주말에 남편이랑 같이 봉사 가기로 한 거 잊지 말고요!”

안시현은 친절한 환경미화원 이수철이 됐다.

환하게 웃으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동네 주민이었다.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의 연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캐릭터가 살아 있어.’

안시현이 송명현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구축한 리수철 캐릭터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잘하는 것과 캐릭터가 살아 있는 건 별개의 문제다. 캐릭터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으니까.

오디션 때도 그랬지만, 안시현이 구축한 리수철 캐릭터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촬영을 지켜보는 배우들 중 다수가 감탄했다.

대본 리딩을 하며 안시현이 좋은 연기자라는 건 다들 느꼈지만, 행동과 표정이 더해지자 비로소 감춰져 있던 진가가 드러났다.

리수철 그 자체.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보는 사람들이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기.

그것이 바로 안시현의 연기였다.

마을 사람들과의 대화를 끝낸 이수철이 휴식을 위해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이수철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책상 밑에 숨겨 둔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동무.”

천천히.

“정신 나갔네?”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냉정함 속에 숨겨진 분노를 토해 내듯이 대사를 읊조렸다.

이수철에서 리수철로 변모했다.

“남조선 아새끼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찾아와?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거야?”

“컷.”

안시현이 대사를 치자마자, NG가 났다.

안시현 때문이 아니었다. 대사를 받아 줘야 할 류성웅이 넋을 놓고 있어서였다.

“성웅 씨, 집중합시다.”

“아…… 네. 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고 다시 갑시다.”

류성웅이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리깐 얼굴은 곧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방금 나, 겁먹은 거야? 저 애송이 새끼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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