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0화>
10화. 쪽팔려서 이렇게 됐습니다
류성웅이 대사를 치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안시현의 연기에 겁을 먹었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자신을 씹어 먹을 것 같은 숨 막히는 분위기에, 사람을 죽여 봤을 듯한 살벌한 눈빛에 기가 죽고 말았다.
배우로서 하지 말아야 할 치명적인 실책.
덕분에.
‘겁 먹은 거 보니까 연기 잘했나 보네.’
안시현은 자신이 연기를 잘했음을 느꼈다. 연기가 조금이라도 어설펐다면 자신을 업신여기는 류성웅이 겁먹을 리가 없다고 봤다.
실제로 류성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작이 좋아. 역시 한길만 파는 게 맞았어.’
회귀 후, 안시현은 연기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면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할 수 있겠지만, 국민배우가 되는 건 어렵다.
안시현이 자가 진단한 자신의 연기 수준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국민배우가 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안시현이 내린 결론은…….
‘내 장점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장점 살리기였다.
김진모, 송강식, 황영민, 이석재를 비롯한 다수의 중견 배우들까지.
그들과 대본 리딩을 하며 안시현은 수없이 감탄했다.
배우들마다 장점이 명확했고, 어떻게 하면 그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곧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안시현은 좋은 배우지만 천재는 아니다. 타인의 장점만을 쏙쏙 골라 흡수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면, 회귀 전에 오랜 시간 무명 시절을 겪지도 않았을 거다.
어설프게 따라 하려고 했다가 가랑이 찢어지고 패가망신할 확률이 높았다.
결국은 가진 걸 최대한 살리는 걸로 결론이 났다.
안시현은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한다. 메소드 연기법을 통해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대본 리딩을 진행한 한 달여.
그사이 안시현은 시간이 남을 때마다 리수철 배역에 한계치까지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을 지우고 리수철이라는 캐릭터만을 남기려고 발악했다.
자신과 리수철을 일체화시켰다.
물론 안시현이라고 해서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배우들이 으레 겪는 후유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배우들에 비해 확연히 적었다. 촬영 후 두어 달 정도만 푹 쉬면 말끔히 털어 낼 정도였다.
그 정도야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봤다.
일단 그 판단은 적중했다.
오디션 때와 대본 리딩 때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방금 전 보여 준 연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곽상필 감독은.
‘대본 리딩 때도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판을 깔아 줬더니 미쳐 날뛰는구나. 이걸 연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냥 리수철 그 자체인데 말이야. 어쩜 최 배우와 저리도 닮았을까.’
안시현의 연기를 보고 진심으로 고민했다.
어쩌면 오디션 때 안시현이 모든 걸 보여 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금 안시현이 보여 준 건 연기가 아니라, 남파공작원 리수철이라는 사람의 일면을 본 것 같았으니까. 이전에 보여 준 연기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으니까.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의 연기에서 최정수를 봤다.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자, 국민배우 최정수.
배우가 아닌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 안시현의 메소드 연기는 최정수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야. 대본 리딩 때 보여 준 건 새 발의 피였구만.”
“형님, 우리도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한 10년 지나면 진모랑 시현이한테 우리 자리 뺏길지도 모르겠어.”
“밥그릇 지키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하하하.”
송강식과 황영민 또한 안시현의 연기에 감탄했다.
대본 리딩 때부터 안시현과 김진모를 좋게 보던 두 사람이었지만, 방금 전 안시현의 연기를 보고서는 안시현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다.
싹수가 보이는 후배를 넘어 훗날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는 배우로 말이다.
그만큼 방금 전 안시현의 연기는 좋았다.
한편.
‘시발, 안시현 저 새끼 때문에 이제 무슨 개쪽이야…….’
NG를 낸 당사자인 류성웅은 거듭 사과를 하고서 애써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으드득.
연기를 위해 이까지 악물었다.
새파란 애송이한테 기가 죽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안시현보다 연기를 잘한다는 걸, 저런 풋내기한테 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지만…….
“리수철이 집 안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다시 촬영하겠습니다. 집중해 주세요.”
사람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되던가.
“동무, 정신 나갔네? 남조선 아새끼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마당에 찾아와?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거야?”
“미, 미안합네다, 동무. 서…… 아, 죄송합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캐릭터의 이름을 헷갈려서.
“남조선 아새끼들, 선거철만 되면…… 아이, 씨. 왜 이러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웅 씨, 집중 좀 합시다.”
대사를 까먹어서.
“잠깐 쉬었다 가죠. 머리 좀 식히고 옵시다. 성웅 씨, 감정 이입 좀 해 주세요.”
감정 이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류성웅은 다양한 패턴으로 NG를 내며 지겹도록 사과를 해야만 했고, 결국 11번째 시도 끝에야 OK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데뷔 이후 한 신에 가장 NG를 많이 낸 날이었다.
* * *
신 15를 끝으로 안시현의 첫날 촬영은 끝이 났다.
비중이 높아지긴 했다지만 안시현은 조연이었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의 출연 비중이 높다 보니 초반에 촬영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촬영장에 계속 머물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집에 돌아가 봐야 할 것도 없으니 차에서 연습을 하는 게 낫다 생각했으며,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공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강식 선배와 영민 선배의 연기는 지금 이 시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 거야.’
수많은 배우가 데뷔하지만 그들 중 국민배우라는 칭호를 받는 건 극소수다.
2000년대에는 최정수와 송강식과 황영민 트리오가, 이후에는 김진모 정도가 국민배우라는 칭호를 얻는다.
국민배우라 불리는 이들이 대단한 건,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작품을 보는 눈 또한 좋다는 거다.
국민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을 보면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 적다. 연기력과 안목이 더해지며 상업적으로 꾸준히 성과를 내야 비로소 국민배우로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송강식과 황영민은 안시현에게 좋은 교보재라고 봐야 했다.
2000년대 영화판을 주름잡고 이후에도 꾸준히 상업적으로 성과를 낸 송강식과 황영민은, 국민배우를 목표로 하는 안시현이 보고 배울 게 많은 이들이었다.
저녁 식사 후.
실내 세트장에서 신 5의 촬영이 이어졌다.
신 5는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이 남파공작원 서영만을 고문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강석우를 특유의 나긋한 어조로 질책하는 장면이었다.
김진모의 첫 촬영 신이기도 했다.
“감독님, 얼른 끝내고 소주 한잔하러 가시죠.”
“송 배우가 쏩니까?”
“어휴. 그럼요. 제 계약금이 얼만데 당연히 제가 사 드려야죠. 비도 오는데 김치찌개에 한잔 어떠십니까?”
“허허허. 좋지요. 얼른 끝내고 갑시다.”
촬영을 앞둔 송강식은 여유로웠다.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긴장은커녕 곽상필 감독에게 촬영 후 한잔하자고 할 정도로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액션.”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송강식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곽상필 감독과 담소를 나누던 모습은 어디 가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기에 임했다.
탁.
송강식이 철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다리를 꼰 채 김진모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없다고?”
“죄송합니다, 차장님. 회유는 실패했고, 고문을 해도 그냥 죽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후우.”
짧은 한숨.
“석우야.”
이내 이어지는 대사와 나긋한 목소리와 입가에 맺힌 미소. 그러나 눈매는 웃고 있지 않았고, 방금 전보다 톤이 살짝 낮았다.
송강식은 이장혁이 화가 났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눈빛과 톤만으로 절제된 감정을 표현했다.
“너, 우리나라에 있는 빨갱이 새끼들이 몇 명이나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냐?”
“잘…… 모르겠습니다.”
“88올림픽 당시를 기준으로 서울에만 천 명이 넘을 거라고 추산한다. 전체는 그보다 더 많겠지? 그 새끼들 중 몇 놈만 잡자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아, 아닙니다.”
“우린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잡는 시늉만 하면 돼. 대선 전에 적당히 쇼만 해 주면 되는 거라고. 저 새끼 입만 열게 하면 해결되는 거고.”
송강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김진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어때, 쉽지?”
김진모가 이를 악물었다.
강석우는 소심하고 유약한 성정을 지녔다. 국가안전기획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렵사리 잡은 성공의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아 발악하며 괴로워한다.
이장혁이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강석우는 고민한다.
남파공작원 서영만에게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할지, 못한다고 해야 할지를 두고 수없이 갈등했다.
흔들리는 눈동자, 움찔거리는 손가락, 경직된 몸.
긴장한 채 고민하던 강석우가 내린 결론은…….
“……노력하겠습니다, 차장님.”
서영만을 고문하는 거였다.
고문을 하며 느끼는 죄책감과 성공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후자를 택한 것이다.
송강식이 다시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김진모가 불을 붙여 주자,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허벅지를 툭툭 손가락으로 쳤다.
“고문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원하는 걸 알아내는 거…… 아닙니까?”
“아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송강식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 안에 담긴 감정마저 좋은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라는 압박감이 김진모의 어깨를 짓눌렀다.
“죽이지만 마.”
“…….”
“일주일 준다.”
김진모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네, 알겠습니다.”
“명심해. 저 빨갱이 새끼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죽여라가 아니라, 죽여 달라야.”
송강식의 대사를 끝으로.
“컷.”
신 5의 대사가 끝이 났다.
잠시간의 침묵.
송강식과 김진모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던 곽상필 감독은…….
“오케이. 이대로 갑시다. 수고했습니다.”
OK 사인을 냈다.
신 5의 촬영이 원 테이크로 끝났다. 현장에서 지켜보던 안시현은 절로 감탄을 토해 냈다.
‘강식 선배도 대단하지만 진모도 대단해. 단 한순간도 감정선이 흔들리지 않았어.’
신 5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곽상필 감독 자체가 한 신에 대사를 많이 욱여넣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다른 영화들에 비해 한 신의 대화가 적은 편이었다.
그 대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든 재촬영을 하는 스타일이다.
점심 식사 후 첫 촬영에서 류성웅이 무려 11번이나 재촬영을 한 끝에야 OK 사인을 받지 않았던가.
때문에 원 테이크는 의미가 있었다.
신인 배우가 첫 촬영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를 당당하게 보여 줬다. 한 신 내내 몰입을 유지했다는 건, 그만큼 김진모가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배우라는 방증이었다.
신인 배우들의 경우 테이크마다 촬영을 끊어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마저도 몇 번이나 NG를 내고 나서야 겨우 쓸 만한 장면을 건지기도 한다.
첫 촬영에서 원 테이크로 OK 사인을 받아 낸 신인 배우는 극히 드물다. 곽상필 감독이 경험한 그러한 배우는 김진모가 두 번째다.
첫 번째 배우는 방금 전 김진모와 함께 원 테이크로 OK 사인을 받아낸 송강식이었다.
‘한 명은 수준급 메소드 연기를 보여 주고, 한 명은 송 배우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감정선을 유지해 원 테이크를 해냈다. 두 사람 다 대본 리딩 때보다도 더 연기가 좋아졌어.’
오디션 때보다도 대본 리딩 때가, 대본 리딩 때보다 지금이 더, 안시현과 김진모의 연기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21살.
경험과 노력을 양분 삼아 발전할 시기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일취월장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배우를 경험한 곽상필 감독이지만 안시현과 김진모 같은 케이스는 본 적 없었다.
“너희 둘, 무슨 1000년 정도 연기한 산신령한테 교육이라도 받고 왔냐? 아니, 무슨 짓을 하면 대본 리딩 때랑 사람이 이렇게 달라져?”
김진모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스로도 최근 들어 연기가 많이 좋아진 걸 느끼고 있었고, 연기가 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다만 타인에게 말하기엔 그 이유가 다소 민망했기에 말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어쭈. 뭐가 있긴 있네. 얼른 말해 봐. 비밀로 하면 오늘 궁금해서 촬영 더 이상 못한다.”
“시현이는 잘 모르겠고, 저는 솔직히…….”
망설이던 김진모가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쪽팔려서 이렇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