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화>
11화. 괴물들
송강식은 김진모의 말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쪽팔려서 연기가 좋아졌다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길 희망했고, 중학교 때 연극부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나이에 비해 연기를 잘한다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김진모가 슬쩍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오디션 전후로 시현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연기에 미친 사람처럼 연습에 올인을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부끄러워졌어요. 나름 노력한다고 했지만 전력투구를 한 건 아니었구나. 타고난 재능만을 믿고 자만했었구나.”
그랬다.
김진모의 연기가 대본 리딩 때보다 눈에 띄게 좋아진 건, 안시현을 보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회귀 후 안시현은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에 매진했다. 외부 일정이 없으면 옥탑방이나 노래방에서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20년의 경험이 있다지만 몸은 21살이다. 경험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만이 답이었다.
오디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성이 좋아지고 안면 근육의 사용이 능숙해진 건, 안시현이 피나는 노력을 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김진모를 자극했다.
함께 사는 동갑내기 배우 친구가 죽어라 연습하는데 자극을 받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는가.
안시현에게 자극받은 김진모는 연습 시간을 늘렸다.
머리를 식히러 잠깐 밖에 나갔다 오는 게 아니라면 안시현과 함께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에 매진했다.
목 관리를 위해 대사를 입으로 내뱉지 못할 때는, 거울을 보고 안면 근육의 사용을 연습하거나 강석우 캐릭터를 분석하는 걸로 대신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회귀 전의 김진모는 훗날 국민배우로 성장할 정도로 좋은 재능을 지닌 배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오늘처럼 능숙한 감정 연기를 보여 주진 못했었다.
안시현의 노력이 김진모를 회귀 전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송강식은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김진모와 안시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부럽네. 나도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짜식들, 보면 볼수록 더 기특하고 마음에 든다니까.’
동시에 확신했다.
몇 년 후 김진모와 안시현이 20대 배우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게 될 거라고 말이다.
* * *
촬영 넷째 날.
안시현의 두 번째 촬영과 세 번째 촬영을 연달아 하게 됐다.
고아원에 봉사를 가서 고아원장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는 남파공작원 최철만 상위와 접촉하는 신 21, 최철만 상위에게 명령을 하달 받고 나간동으로 돌아가는 신 22.
이 두 신은 영화 전체에서 제법 비중이 컸다.
평생을 조국에 충성하며 당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랐던 남파공작원 리수철이 처음으로 당의 저의에 의심을 품기 때문이다.
이 의심은 리수철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는 남파공작원들에겐 일찌감치 퍼져 있던 것이기도 하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
안시현이 촬영 동선을 체크하며 마지막으로 대본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철만 상위 역의 황영민이 슬쩍 안시현에게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이야, 우리 막내는 예습도 부지런하게 하네. 이래서 연기를 잘하는 건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민폐는 무슨. 연기력으로 이 형님 기죽이지나 마세요. 성웅이한테 하는 거 보니 아주 그냥 살벌하던데?”
안시현이 여유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이 시작된 이후로 그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자신이 나오는 장면이 촬영하기를 매 순간 간절히 바라게 됐다.
크랭크인과 더불어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타고난 배우 체질이라는 걸, 회귀 전에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죽어라 연기에 매달렸던 건 연기가 너무 좋아서였다는 걸.
황영민과의 촬영을 앞두자, 이제야 본격적으로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사흘 동안의 촬영 분량은 영화의 전반부.
최철만 상위와 리수철의 만남을 시작으로 영화는 본격적으로 흐름을 타게 된다.
남파공작원을 잡기 위해 눈이 돌아간 국가안전기획부, 대선을 앞두고 여론을 유리하게 형성하기 위해 북한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는 집권 여당, 남파공작원 일부의 정보를 넘기고 실리를 챙기기로 결정한 북한, 조국으로부터 버려지게 된 남파공작원들.
최철만 상위와 접선하며 당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리수철과 남파공작원들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과의 만남에서 사건을 일으킨다.
자신들의 믿음이 흔들려 사건을 일으키는 것마저 거래에 포함된 것인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동선 체크 후.
“액션.”
신 21의 촬영이 시작됐다.
곽상필 감독의 신호와 함께 안시현은 이수철이 됐다.
“수철 아저씨이이이!”
“우와! 수철 아저씨 왔다!”
“아저씨! 수진이 아저씨 올 동안 한 번도 안 울었어요! 아저씨랑 약속한 대로 산수 시험도 100점 맞았어요! 이제 놀이공원 데려가 주시는 거죠?”
이수철은 고아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늘 올 때마다 군것질거리를 한가득 사 오고 잘 놀아 주니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당연했다.
“수진이 산수 시험 100점 맞았어? 그럼 약속대로 아저씨랑 놀이공원 가자. 또 약속 지킨 사람 있어?”
“저요, 저요! 아저씨 가신 이후로 사탕 안 먹고 하루 세 번 양치했어요!”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 했어요!”
“지난번에 그린 그림 금상 받았어요!”
이수철은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들어 줬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 사 온 군것질거리를 하나둘씩 나눠주고서, 돌아오는 주말에 약속을 지킨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놀이공원은 리수철이 비정기적으로 남파공작원 최진웅과 접촉하는 장소였다.
일일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준 뒤, 이수철은 아이들과 공놀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애틋함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놀아 주는 이수철.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연기였다.
다만.
“컷. 으음. 시현 씨, 연기 좋았어요. 아이들과 노는 장면을 다른 각도로 한 번만 더 촬영하고 넘어가죠.”
“알겠습니다, 감독님.”
“다들 표정 조금만 더 밝게 합시다. 앵글 벗어나 있을 때도 대사 이어 나가야 합니다.”
촬영은 안시현 혼자 하는 게 아니기에 그가 잘한 것과 별개로 네 차례 더 촬영을 한 뒤에야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OK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구도를 다르게 촬영하고, 안시현이 아닌 다른 배우들의 아쉬운 부분들을 꼬집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물을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린 뒤.
곧장 다음 장면 촬영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식당에 모여 봉사자들이 사 온 치킨을 먹는 동안, 이수철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후원금 전달하러 원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수철 씨 몫은 남겨 놓을게요.”
후원금을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고아원장으로 위장해 살아가는 최철만 상위와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저벅저벅.
사람이 없는 고아원 내부 복도.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수철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환경미화원 이수철에서 남파공작원 리수철로 변해 갔다.
똑똑똑.
“원장님, 이수철입니다.”
“수철 씨? 들어오세요.”
끼이익.
리수철이 문고리를 돌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복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원장실에 들어갔다.
분장을 통해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게 된 황영민이, 고아원장 최철민으로 위장한 남파공작원 최철만 상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앉으세요, 수철 씨.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일본 여행을 다녀온 봉사자분께서 좋은 차를 선물로…….”
“동무.”
우뚝.
차를 우려내려던 최철만 상위의 움직임이 멈췄다.
리수철과 최철만 상위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주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면서도 단 한 번도 서로의 본명을 말하거나 북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리수철이 최철만 상위 앞에서 동무라고 말한 건, 그가 남파공작원으로서 서울에 내려온 이후 처음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나흘 전, 황시국 동무가 갑작스레 절 찾아왔습니다. 정기적으로 접선하던 서영만 동무와 연락이 끊겼다고 하면서요. 아무래도…….”
“변절했거나, 발각됐다?”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서영만 동무가 변절했든 발각됐든, 정보가 흘러 나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신 22에서의 리수철 대사는 신 15와 느낌이 달랐다.
신 15에서 황시국과 조우했을 땐 방언을 사용했지만, 최철만 상위를 만나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한 방언이라고는 ‘동무’가 전부.
그 대신 억양을 통해 남파공작원임을 드러내야 했다.
안시현은 북한 방언을 쓰지 않고 억양만으로도 남파공작원의 느낌을 제대로 살려 냈다.
최철만 상위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툭툭 치다가, 고개를 숙인 리수철을 지그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수철 씨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나?”
“당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서영만 동무를 암살하고 오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변절했거나 정체가 발각된 남파공작원은 당의 명령에 따라 제거하는 게 일반적이다.
리수철은 남파공작원이 된 이후 변절한 남파공작원 몇 명의 숨통을 끊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개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정체가 발각됐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는 게 핵심 임무인 남파공작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증거이니까.
공화국의 전사가 될 자격이 없는 폐기물들.
리수철은 서영만이 전자든 후자든 직접 그를 단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당의 명령이 떨어질 거라 믿었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최철만 상위가 고민에 빠졌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1시간 후, 소풍 봉사와 관련해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하고 다시 오세요. 보고하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동무.”
리수철은 최철만 상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이수철의 얼굴을 하고서 원장실을 나갔다.
“컷. OK. 좋았습니다. 점심 먹고 신 22 촬영 이어서 가겠습니다.”
동시에 OK 사인이 떨어졌다.
안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황영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방금 전까지 남파공작원을 연기했던 배우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평범한 21살의 청년.
황영민은 눈앞의 사내를 보며 감탄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스타일은 메소드 연기법이 분명한데, 몰입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빨라.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리수철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데 말이야.’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배우들은 배역에 대한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몰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는 메소드 연기법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시현의 몰입감은 엄청났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배우 안시현을 지우고 환경미화원 이수철과 남파공작원 리수철만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몰입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극도로 짧았다. 대한민국에서 메소드 연기로 정점을 찍었다는 최정수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OK 사인 후 보여 주는 평소의 모습이 진짜일 수도, 아니면 멀쩡한 척 연기하는 거일 수도 있다.
하나 어느 쪽이 됐든 안시현의 메소드 연기가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인 경지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저건 절대 21살이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야. 진모도 그렇고, 시현이도 그렇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괴물들이 분명한데……. 하. 미치겠다. 두 사람 다 갈수록 마음에 들잖아.’
황영민은 고민 끝에 배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시현아.”
“네, 선배님.”
“너랑 진모, 촬영 없을 때 나랑 같이 연습하면 어떻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