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화>
12화. 너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스케줄 없을 때 수혁이랑 소속사 연습실에서 둘이 연습하는데, 가능하면 너랑 진모도 같이했으면 해서. 너희도 노래방보단 제대로 된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게 낫지 않겠어?”
황영민의 제안을 듣자마자 안시현은 옆에서 제육볶음을 쌈 싸 먹는 데에 열중하던 김진모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보다는 김진모의 의견이 중요한 사안이라고 봤다.
최진웅 역을 맡은 정수혁과 황영민의 소속사는 JM액터스.
배우를 잘 케어하기로 유명한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로, 지금도 상당한 규모지만 이후 대한민국 4대 연예기획사로 성장할 곳이었다.
또한 JM액터스는 회귀 전 김진모와 안시현이 몸을 담았던 소속사이기도 했다.
당초 안시현은 『나는 간첩입니다』촬영이 끝나는 대로 JM액터스와 계약할 계획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JM액터스 연습실에서의 연습은 전혀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인연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문제는 김진모다.
안시현은 김진모와 JM액터스의 관계를 알고 있는 터라 이 사안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안시현의 눈빛에서 그 뜻을 읽은 걸까?
김진모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연습하면 저희야 좋죠! 사실 노래방에서 연습하는 것도 은근 돈이 많이 들어서 고민하던 차였거든요.”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네. 스케줄은?”
“저희야 남는 게 시간 아니겠습니까!”
“그럼 매니저랑 번호 교환해. 연습실 올 때 차량 보내 줄 테니까.”
“오오! 저희 연예인 밴 타는 거예요?”
“밴? 크흐흐. 오냐. 밴으로 보내 주마.”
식사가 끝난 뒤, 안시현은 슬쩍 김진모에게 물었다.
황영민이야 알고 있겠지만 정수혁에게 JM액터스와의 관계가 알려져도 되겠냐고, 커리어를 쌓을 때까지 비밀로 하고 싶은 게 아니었냐고.
김진모의 답은 명쾌하고, 현실적이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간첩입니다』개봉하고 나면 다 알려질 걸? 알려져도 상관없을 만큼 내가 연기를 잘해야지 어쩌겠어.”
안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모의 말이 맞았다.
회귀 전에도 『나는 간첩입니다』개봉 후 김진모와 JM액터스와의 관계가 알려졌었다.
그러나 김진모의 배우 인생에서 JM액터스와의 관계가 크게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데뷔 때부터 주목받으며 탄탄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은 덕에 배우 김진모 그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으니까.
반면 안시현은 JM액터스와 계약하고 긴 무명 시절을 겪으며, 김진모의 후광 덕분에 JM액터스로부터 계약 해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조롱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상관없었다.
이번 생에 그런 조롱을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조롱과 별개로 JM액터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으니까.
* * *
“아이, 씨……. 비 너무 많이 오는데요?”
“빗소리 들어가도 상관없는 장면으로 대체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할까요, 감독님?”
“저녁에 하려던 국가안전기획부 건물 내부에서 찍는 장면부터 찍는 걸로 하죠. 신 22는 비가 그치면 촬영해야겠습니다.”
“네. 배우분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점심 식사 이후 예정되어 있던 신 22 촬영은 일기예보에 없던 폭우가 쏟아지며 뒤로 미뤄지게 됐다.
안시현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고, 신 21의 감정선을 이어 가야 하는 신 22의 촬영이 미뤄진 탓이었다.
게다가 곽상필 감독은 이틀 촬영 후 하루 휴식을 고수하는 스타일이다. 오늘로 촬영 4일 차이니 내일은 휴식이 예정되어 있다.
신 22의 촬영은 이틀 뒤에야 가능한 상황.
그나마도 비가 오면 또 미뤄지게 될 거다.
‘뭐, 어쩔 수 없지. 언제 촬영하더라도 문제없을 정도로 연습하고 있을 수밖에.’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안시현과 김진모는 황영민이 보내 준 밴을 타고서 마포에 위치한 JM액터스 사옥으로 향했다.
JM액터스 사옥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안시현은 김진모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
“뭐, 조금 귀찮을 수도 있다는 거 말고는? 연습실에서 연습하면 우리야 좋은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아이고. 노래방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번 작품 끝날 때까지만 영민 선배님께 신세 좀 지게.”
“그 이후에는?”
“당연히 몸값 두둑하게 받고 보금자리 찾아야지. 10원 한 푼까지도 안 깎아 줄 거야.”
잠시 후, JM액터스 사옥 주차장에 도착하자 황영민이 안시현과 김진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기다려 주신 겁니까, 선배님? 영광입니다.”
“그놈의 영광, 아침에 똥 싸면서 변기에 같이 버리고 오지 그랬냐.”
“앗. 제가 요즘 변비인 건 어떻게 아시고…….”
“크흐흐. 미친놈.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서 밥 먹고 오자.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려면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지. 수혁이가 자리 잡아 놨을 거다.”
식사 후 JM액터스 사옥에 들어왔을 때.
“다들 점심 맛있게 먹었어?”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정수혁이 사내를 바라보며 폴더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국밥에 수육 먹고 왔습니다!”
사내의 정체는 김진석.
70년대와 80년대를 풍비했던 왕년의 국민배우이자, 사기가 횡행하는 연예계에서 후배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선한 이유로 연예기획사를 설립한 JM액터스의 대표.
그리고…….
“아이고, 우리 아들. 아빠 보러 왔어요? 촬영 끝날 때까지 절대 안 온다더니,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해 주니까 아빠 완전 감동했잖아.”
김진모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김진석을 보자마자 김진모가 몸을 슬쩍 뺐지만, 김진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마구잡이로 비벼 댔다.
김진석만의 애정 표현.
김진모는 들러붙은 김진석을 억지로 밀어내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아, 아빠. 제발 면도 좀 해요.”
“응? 왜? 수염 기른 게 좋다면서?”
“그거야 어릴 때고요! 게다가 적당히 길러야 멋있는 거지, 지금은 거의 도 닦는 노인네 수준이잖아요!”
“크흠. 수염 기른 게 인상에 남아 사업하기에는 좋은데……. 진모 네가 싫다고 하니 밀어야 되나?”
수염을 밀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김진석은 이내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시현아.”
“잘 지내셨죠, 아저씨? 재작년에 마지막으로 뵀었죠?”
“허허허. 나야 뭐 항상 잘 지내지. 아, 참. 저번에 아버님께서 보내 주신 소고기 잘 먹었다고 전해 주렴.”
“다음에 또 말씀드려서 보내 드릴게요.”
“그러면 나야 좋지. 한데 오늘은 무슨 일이냐? 황 배우랑 정 배우도 같이 온 걸 보니 놀러 온 건 아닌 거 같고, 이번 기회에 계약하고 갈래?”
“아하하. 아뇨. 오늘은 계약이 아니라 영민 선배가 같이 연습하자고 해서 온 거예요.”
“그래? 연습 잘하고,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자꾸나.”
“네. 그럴게요.”
김진석은 김진모에게 다가가 애정 표현을 하며 팔불출을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 준 뒤 대표실로 향했다.
“아…… 진짜 너무 주책이야. 아들내미 나이가 몇인데 저렇게 애정표현을 하냐고.”
김진모의 진저리치는 반응은 보너스였다.
이후 안시현 일행은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습실에서 가볍게 목을 풀며 연습을 준비하는 동안, 정수혁은 여전히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김진모가 용변을 보러 화장실에 간 사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슬쩍 안시현에게 다가갔다.
“저…… 시현아?”
“네, 선배님.”
“야, 고작 두 살 차이인데 선배님이 뭐야.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진모랑 김진석 대표님…….”
“형이 보셨다시피 부자 관계예요.”
“그치? 부자 관계 맞지? 근데 난 왜 몰랐지?”
“대외비이니까요. 뭐, 대외비라고 해 봐야 아저씨하고 친한 배우나 관계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요. 영민 선배님도 이미 알고 계셨을 거고요.”
“나? 나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황영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데뷔 초 김진석과 함께 작품에 출연한 이후 지금까지 인연은 이어 온 그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이는 송강식과 곽상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김진석의 사생활은 세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7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윤수진과 결혼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때문에 정수혁은 알지 못했다.
김진석이 마흔이 돼서야 늦둥이를 얻었다는 것과, 자신과 아내의 연기 재능을 모조리 빼다 박은 늦둥이 아들 앞에서 껌뻑 죽는 팔불출이라는 것을.
“사실 기획사 이름부터가 스포일러잖아요. 김진모, JM액터스. 모르는 기자들은 JM액터스가 무슨 영어 단어의 조합인지 추측하고 난리던데, 보고 엄청 웃었어요.”
“그러네. 이름부터가 스포일러네. 그런데 대표님과 진모는 왜 부자 관계를 대외비로 하는 거야?”
“진모가 원해서요. 아저씨의 아들이 아니라, 배우 김진모로서 대중들에게 먼저 인정받고 싶대요. 그래 봐야 데뷔하면 알려지긴 하겠지만, 대중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았으면 싶은 거죠. 아시잖아요. 2세 배우들을 향한 대중들의 선입견이 꽤 심한 거.”
아버지도 배우, 어머니도 배우.
어릴 때부터 만화 대신 지겹게 본 영화들, 툭하면 집에 놀러 와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은 죄다 유명한 배우 혹은 감독.
김진모는 배우를 목표로 하지 않는 게 이상한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거기에 가진 재능도 뛰어났다. 아버지의 연기력과 어머니의 외모를 모두 물려받으며, 유치원 학예회 때 처음으로 그 싹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배우를 목표로 한 건 중학교 때.
연극부에 들어갔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으며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때부터 김진석과는 거리를 뒀다.
아버지가 싫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싫었다면 JM액터스에서의 연습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와 마주치는 상황 자체를 어떻게든지 피했을 거다.
그저 배우이자 JM액터스 대표 김진석의 아들 김진모가 아니라, 배우 김진모로서 대중들에게 먼저 알려지고 연기력을 인정받고 싶은 거였다.
언젠가는 알려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지만, 적어도 데뷔작만큼은 김진모라는 배우 자체로 평가받길 바랐다.
그래서 다들 모른 척해 주고 있는 거고.
사연을 들은 이후, 화장실에서 돌아온 김진모를 바라보며 정수혁이 감탄하듯 속삭였다.
“진모 넌…… 진짜 타고난 배우네.”
자신이라면 김진모처럼 할 수 있었을까 고민하며.
* * *
JM액터스 사옥 연습실에서의 연습은 순조롭고 만족스러웠다.
일단 환경 자체가 좋았다.
JM액터스는 배우들의 원활한 연기를 위해 사옥 3층 전체를 개조해 연습실 6개를 만들었고, 방음 시설까지 갖춰져 있으니 연습하기에는 최고였다.
황영민과 정수혁, 거기에 안시현까지.
세 사람 다 남파공작원 역이다 보니 겹치는 신이 많아 연습이 수월했다.
다만 김진모의 경우 혼자 국가안전기획부 직원 역이다 보니 겹치는 신이 거의 없었고, 함께 연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황영민은 그것을 배려하여 겹치는 신 위주로 연습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진모는 정중히 거절했다.
합을 더 많이 맞추어야 할 세 사람이 자신에게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말이다.
“……못 하겠습니다.”
“제 손으로 서영만을 죽였습니다.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진모는 구석에 앉아 대본을 읽으며 홀로 연습에 매진했다. 다른 세 사람의 연습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연습을 시작한 순간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 모습에 안시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여간 미친 집중력이라니까. 나도 슬슬 시동을 걸어 볼까?’
연습도 실전처럼, 대사 한 마디를 내뱉더라도 늘 최선을 다할 것.
안시현은 그렇게 연기를 배웠다.
그에게는 연습도 실전이었다.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실전에서 80%라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안시현도 김진모를 따라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 * *
연습에 매진한 신은 도합 두 개.
폭우로 인해 촬영이 연기된 신 22와 놀이공원에 간 리수철이 최진웅과 접선하는 신 34.
두 장면 모두 안시현에겐 중요한 신이었다.
신 99와 함께 리수철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신이기 때문에, 텐션을 끌어올려 연습에 집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해가 질 무렵이 됐다.
안시현은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황영민에 의해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저녁 먹고 가볍게 한 번만 더 맞춘 다음 끝내자. 연습도 적당히 해야지, 지나칠 정도로 하면 과부하 온다.”
“네, 선배님. 연습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긴 무슨. 나한테도 도움이 되니까 한 거지. 스케줄 없으면 연습실에서 모이자고. 혹시 내가 못 오면 매니저 보낼 테니까 둘이서라도 와서 눈치 보지 말고 연습해.”
“네, 선배님. 진모야, 슬슬 나가자.”
안시현이 구석에 앉아 있는 김진모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김진모는 몰입에서 벗어나 하품을 내쉬며 안시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아암. 다 끝났어?”
“저녁 먹고 와서 가볍게 한 번만 더 하기로 했어.”
“그래, 나가자.”
오후 내내 연습에 매진한 배우들이 연습실에서 나온 직후.
“시현아.”
언제 온 건지 연습실 앞에 있던 김진석이 안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점심시간 무렵에 봤을 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안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저씨.”
“너,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그리고는 폭탄 발언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