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3화 (1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화>

13화. 뭔가가 아쉬워

“계약이요?”

안시현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JM액터스와 계약할 생각이긴 했지만,『나는 간첩입니다』촬영이 끝난 이후를 생각했다. 설마 김진석이 먼저 자신에게 계약하자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계약 이야기를 꺼냈다. 두서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음. 아저씨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기는 한데…….’

생각해 보면 김진석은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다.

계획보다는 자신의 감을 우선시하고, 확신을 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

회귀 전 안시현이 긴 무명 시절을 겪을 때 계약을 유지한 이유도, 안시현이 대기만성할 거라는 자신의 감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감이 맞았고.

그렇다 해도 당황스러운 건 변함없었다.

다짜고짜 손을 잡고 계약 이야기부터 하는 김진석을 바라보며, 김진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빠, 제발 결론만 말하지 말라니까요. 앞뒤 다 자르고 다짜고짜 계약하자고만 말하면 시현이 입장에서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아, 미안. 또 성격 나왔네. 일단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우리 아들이랑 시현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제육볶음 어때요? 저번에 먹은 곳 괜찮던데.”

“크으. 우리 시현이가 맛을 좀 아네. 제육에 소주 한잔하면 끝장이지. 오늘은 계약 이야기해야 하니 소주 대신 콜라지만. 자, 얼른 가자. 배고프다.”

식당에 도착한 뒤.

음식과 음료를 주문하고서 김진석이 본론을 꺼냈다.

“전부터 말했지만 난 시현이 네가 좋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단다. 단, 재능이 만개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 봤어. 그래서 계약 이야기도 천천히 할 생각이었고. 근데 오늘 연습하는 걸 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단다. 눈에 띄게 연기가 좋아졌어. 지금 계약을 안 하면 다른 데서 노릴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남 좋은 일 시키기 싫어가지고 대뜸 계약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거란다.”

연습이 끝나갈 무렵, 김진석은 간만에 얼굴을 본 아들과 저녁 식사를 할 생각으로 들뜬 채 연습실을 찾았다.

그리고 연습하는 안시현을 본 순간, 본 목적을 잊어버렸다. 고등학교 축제 공연 때 마지막으로 봤던 안시현의 연기가 불과 2년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보일 만큼 발전해 있는 탓이었다.

오랜 가공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던 원석은 어느새 빛나는 보석이 되어 있었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그림을 그려 나가는 중이었다.

김진석의 감이 소리쳤다.

지금 당장 계약해야만 한다고,『나는 간첩입니다』가 개봉된 이후에는 수많은 연예기획사에서 안시현을 데려가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할 거라고.

그래서 대뜸 계약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김진석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서, 안시현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계약,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조건은 최대한 맞춰 주마. 연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선금도 주고, 집도 구해 줄게. 아,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다른 회사가 있는 건…….”

“아뇨, 다른 곳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배우 전문 연예기획사 중 JM액터스보다 괜찮은 곳 없잖아요.”

“그럼 왜 나중에 하자는 거냐?”

“『나는 간첩입니다』는 촬영 외에 스케줄이 없어 진모랑 둘이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JM액터스와의 계약은 그 이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흐음. 어디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에이. 아저씨, 전 예나 지금이나 JM액터스가 아닌 다른 연예기획사와 계약하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진심이었다. 안시현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JM액터스가 아닌 다른 연예기획사와 계약할 생각이 없었다.

인연이나 은혜의 문제가 아니었다.

JM액터스보다 배우 케어를 잘하는 연예기획사가 없는 것은 기본이고, 워낙 많은 대본이 들어오다 보니 작품 선택의 폭 또한 넓고, 게다가 계약 조건마저 후하다.

현실적으로도 거절할 이유가 만무했다.

‘다음 작품 캐스팅을 위해 JM액터스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다만 지금 당장 계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안시현은 계약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일 때 성립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에는 딱히 JM액터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이 끝나고 계약을 하길 바랐다.

그때가 안시현이 원하는 적기였다.

안시현의 뜻을 확인한 김진석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촬영 일정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계약하는 거다? 알겠지?”

“아하하. 네. 계약서 준비해 놓고 계세요. 촬영 일정 끝나면 바로 찾아와서 사인할 테니까요.”

그렇게 안시현은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이 끝나는 대로 JM액터스와 계약하기로 약속했다.

*   *   *

휴식일 다음 날.

화창한 날씨 속에 신 22의 촬영이 재개됐다.

서영만을 처리하라는 지령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당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지자 리수철은 당황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이 남파공작원들을 보낸 저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런 리수철을 향해 최철만 상위가 경고를 하고, 태연한 척하면서도 혼란을 느끼며 최진웅과 접선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신 22의 핵심이다.

황영민과 안시현.

두 배우의 연기력에 따라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면이 될 수도, 별생각 없이 보고 넘어가는 그저 그런 장면이 될 수도 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일찌감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안시현은 차에서 대본을 읽었다. 신 22를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그 모습을 보며 김진모가 혀를 내둘렀다.

“아주 그러다 대본 뚫리겠어.”

“중요한 장면이니까 계속 봐야지. 그러는 너도 허구한 날 대본 끼고 살잖아.”

“나? 나야 대본이 애인이잖냐. 흐흐.”

“그 애인이 잘해 주냐?”

“매일 밤 홍콩 간다, 인마. 그나저나…… 신 22가 먼저 촬영하면, 난 한참 대기해야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곽 감독이 원래 중요한 신은 여러 번 촬영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시잖아.”

“강식 선배님 말로는 한 신을 30번 촬영한 적도 있다더라. 아침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었대.”

“후우. 10번 안에만 끝나길 바라고 있다.”

“그래, 나 오늘 안에 촬영하게만 해 주라.”

신 22는 『나는 간첩입니다』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장면 중 하나다. 김진모는 물론이거니와 촬영을 앞두고 있는 안시현 또한 최소 몇 번은 촬영해야 한다고 봤다.

곽상필 감독의 스타일상 중요한 신은 원 테이크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오전 9시.

고아원 건물 내부.

고아원 복도와 원장실 내부를 도합 6대의 카메라가 비추는 가운데, 신 22의 촬영이 시작됐다.

눈을 감았다 뜬 안시현이 원장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노크를 했다.

“원장님, 이수철입니다. 다음 봉사와 관련해 원장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 네. 들어오세요.”

리수철이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최철만 상위는 책상 앞에 앉아 오른손에 볼펜을 들고 왼손으로는 턱을 괸 채 리수철을 맞았다.

툭. 툭. 툭.

볼펜 끝이 책상을 두들기길 수차례.

“이수철 씨.”

최철만 상위의 저음이 원장실을 채웠다.

“행동은 없습니다.”

꿈틀.

리수철의 오른 눈썹이 움찔거렸다.

당연히 암살 명령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다. 변절자든, 정체가 발각됐든 자격을 상실한 남파공작원은 선 보고, 후 제거가 기본이니 말이다.

암살 명령이 없는 케이스는 단 하나.

“……서영만 동무가 죽었습니까?”

암살의 대상이 이미 사망했을 경우뿐이지만.

“살아 있습니다.”

이번 케이스는 그마저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죽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았지만, 곧 죽을 거다. 행동은 없다.

리수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 있는 낯선 지령을 이해하기 위해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어렵사리 떠올렸다.

암살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 케이스가 또 있다는 걸, 자신이 남파공작원으로 월남하기 전에 이런 케이스가 제법 많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무거운 공기 속, 리수철이 물었다.

“서영만 동무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잡힌 겁니까?”

“생각한 대로입니다.”

“…….”

“서영만은 버립니다.”

“서영만 동무가 변절할 수도 있습니다. 고문에 굴복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입을 열면 저희도 위험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자격이 없는 거겠지요.”

리수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해가 안 됐다. 쉬운 길이 있음에도,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 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정보가 흘러나가면 우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어쩌면…….

정말 어쩌면, 공화국은 자신들을 혁명전사가 아닌 일개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큰 소란이 싫어 문제를 덮어 두려는 게 아닐까?

아니다. 아니야. 공화국이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런 거라면?

리수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고를 억제하던 자물쇠들 중 하나가 풀리고 말았다.

결국.

“동무, 다시 한번 당에 보고해 주십시오. 제가 서영만 동무를 죽이겠습니다.”

리수철은 처음으로 당의 명령에 사족을 달았다.

주먹을 움켜쥔 채 당장이라도 국가안전기획부에 침투할 듯 몸에 힘이 들어갔다.

툭.

최철만 상위의 손에 들려 있던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철만 상위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리수철을 응시했다.

“이수철 씨. 아니, 리수철 동무.”

최철만 상위의 입에선 월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방언이 튀어나았다.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공화국의 혁명전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래 리수철 동무를 가르치며 수없이 했던 말인데, 그새 잊었나?”

고아원장 최철민이 아닌, 남파공작원들을 직접 훈련시킨 최철만 상위가 말했다. 리수철에게 혁명전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되새겼다.

스르륵.

리수철이 손에 힘을 풀었다.

“……복종하겠습니다.”

그제야 최철만 상위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가 보세요. 다음 봉사 때 웃는 낯으로 다시 보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리수철이 원장실에서 나왔다. 텅 빈 복도를 걸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최진웅…… 동무.”

한 번 풀린 자물쇠는.

“만나 봐야겠어.”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   *   *

원장실 앞에 고정된 카메라가 복도를 걸어가는 안시현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안시현이 복도를 벗어난 뒤.

“컷. OK.”

곽상필 감독의 OK 사인이 나왔다.

“복도 걷는 거 앞모습 대사 없이 풀 샷으로 찍고 신 22 촬영 마무리하겠습니다.”

원장실에서 나온 리수철이 복도를 걸어가며 최진웅을 만나겠다고 대사를 치는 건, 편집을 할 땐 대사가 아니라 내레이션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다만 뒷모습을 롱 샷으로, 앞모습을 풀 샷을 나눠서 촬영할 예정이었기에 롱 샷으로 촬영하면서 대사를 친 거였다. 어차피 대사를 치는 입은 나오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 안시현과 황영민은 사실상 신 22를 원 테이크로 통과 받은 것이다.

OK 사인을 듣고 원장실에서 나온 황영민이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아오! 이 자식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해? 네가 잘 받아 주니까 신나서 완전 몰입해버렸잖아.”

“선배님의 감정 연기에 맞춰 갔을 뿐입니다!”

황영민과 안시현, 두 사람 다 신 22을 촬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감정을 끈을 놓지 않았다. 완벽하게 몰입한 채 최철만 상위와 리수철로 분했다.

그 결과가 바로 원 테이크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황영민도 잘했고, 안시현도 잘했기에 이뤄 낸 성과였다.

하지만.

‘……뭘까.’

중요한 장면을 원 테이크로 끝내는 기염을 토했음에도 안시현의 입가엔 미소가 맺히지 않았다.

‘뭔가가, 아쉬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