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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화 (1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화>

14화. 토끼 귀 머리띠

신 22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는 좋았다.

상대역인 황영민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줬고, 그에 발맞춘 안시현 또한 좋은 연기로 화답하며 곽상필 감독으로부터 OK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한 신 내내 몰입을 유지한 집중력.

심적으로 흔들리는 남파공작원의 민낯을 표현한 섬세한 표정 연기.

살짝 잠긴 목소리와 감정을 담은 몸짓까지.

문자 그대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볼펜을 떨어트린 황영민의 애드리브는 화룡점정이었다. 사소한 애드리브가 신 22의 긴장감을 확 살려 냈다.

오죽하면 곽상필 감독이 이례적으로 촬영 후 두 배우를 공개적으로 칭찬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찝찝할까? 왜 이렇게 아쉬운 거야? 분명 좋은 연기를 보여 줬는데…… 왜 만족이 안 되냐고.’

안시현은 만족하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다. 지금 자신의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마땅한 표현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게 선배님들이 말한 그건가?’

회귀 전, 몇몇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연기를 하다 보면 짙은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고, 잘해 놓고도 아쉽고 찝찝하다고,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니까 답답해 미치려 한다고.

그 대신 이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안시현은 자신에게 그 계기가 찾아왔단 걸 느꼈다.

20년간 연기를 하며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회귀하자마자 겪게 된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촬영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이유를 알아내고 말겠어.’

그리하여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리라.

*   *   *

애석하게도 안시현은 한 동안 자신이 신 22를 촬영하고 아쉬움을 느낀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아쉬움과 별개로 자신의 연기는 좋았고, NG의 이유가 그인 경우는 극히 적었다. 이유가 되더라도 동선을 벗어나서 그런 거지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초조해질 필요 없어. 촬영이 모두 끝나기까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실체가 보이지 않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린다 한들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당장은 매순간 연기에 충실한 게 최선이라 여겼다.

촬영 6일 차.

안시현은 신 25를 촬영했다.

안시현과 김진모가 함께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장면이며, 첫 대본 리딩 당시 갑자기 등장한 류성웅으로 인해서 마저 연습하지 못했던 바로 그 신이었다.

신 25의 내용은 단순하다.

서영만으로부터 고문을 통해 남파공작원 중 한 명이 나간동에서 위장해 산다는 정보를 얻고,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간동을 방문한 강석우가 리수철을 만난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강석우는 리수철의 아주 사소한 계기로 인해 어쩌면 그가 남파공작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이후 리수철에게 미행이 붙는 게 전부다.

단순하지만 영화 전체에 나름 영향을 미치는 신이다.

월남 이후 정체를 잘 숨기고 살아 왔던 리수철이 신 22 이후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걸 드러내는 한편, 훗날 남파공작원들이 곤경에 처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니까.

신 25는 세 번의 시도 끝에 OK 사인이 났다.

촬영이 끝난 뒤.

“예고했던 대로 7일 차 오전과 오후는 놀이공원에서 촬영할 겁니다. 자세한 일정과 장소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 놨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신 34를 촬영하지 않는다면 저녁 촬영에 맞춰 촬영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곽상필 감독이 놀이공원 촬영을 예고했다.

신 21에서 리수철이 고아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가자고 한 약속을 신 34에서 지키게 된 것이다.

세 번째 휴식일 뒤 이어진 7일 차 촬영.

안시현과 김진모는 아침 운동을 끝낸 뒤 곧장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로 싸 온 삶은 달걀과 사과를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놀이공원 가 본 게 언제였더라?”

“치매왔냐? 고등학교 2학년 때 단체로 놀러 갔었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생각났어.”

“그때 참 재밌게 놀았는데 말이야.”

“응. 재미있었지. 어떤 얼빠진 놈이 무섭다고 하루 종일 회전목마만 타자고 한 덕분에 회전목마 10번 타고 오락실에서 죽치고 있었으니까.”

“바이킹 타고 바지에 똥 지리는 모습을 보여 줄 걸 그랬나?”

“그럼 너 버리고 갔을 걸?”

“매정한 새끼.”

안시현에게 있어 놀이공원에서의 추억은 김진모와 둘이서 회전목마만 10번 탄 게 전부였다. 김진모가 고소공포증이 있어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그 흔한 바이킹이라도 타 보자고 했더니 그랬다간 바지에 똥을 지릴 거라나 뭐라나.

뭐,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김진모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1층만을 고집할 정도로 심각한 고소공포증이 있었으니까.

웃긴 건 그런 김진모가 훗날 영화를 위해 대역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했다는 거다.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고소공포증마저 이겨 낸 연기에 미친놈이었다.

내려오고 나서 바지에 살짝 지리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때와 달리 놀이공원에 가는 것임에도 안시현은 딱히 놀이기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놀이기구는 무슨. 연기나 잘해야지. 신 22를 연기하며 느꼈던 기분이 뭔지도 알아내야 하고.’

회귀 후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촬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찌 보면 배우 안시현이 대중들의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다.

촬영장에서 촬영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고로 무슨 일이든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다.

평일이다 보니 많은 인파가 아닐 수도 있지만, 최대한 좋은 첫인상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게다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 22를 촬영하며 느꼈던 아쉬움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주차를 한 김진모와 안시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직원에게 배우라 설명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어? 선배님들!”

누군가가 안시현과 김진모를 불렀다.

놀이공원의 매표소 너머.

그곳엔 정장을 차려입은 한나래가 서 있었다.

“우와!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면접 보러 왔다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동안 잘 지내셨죠?”

“간만이네. 배역 때문에 면접 보러 온 거야?”

“네. 놀이동산 안내원 역인데, 촬영 전에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백날 연습해도 연기가 도통 안 느니, 이렇게라도 해도 해야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요.”

촬영이 시작하기 전 해당 배역의 직업을 직접 체험해 보는 배우들은 생각 이상으로 많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해 보는 게 답이라 생각하는 거다.

실제로 안시현 또한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여러 직업을 취재하고, 때론 직접 체험해 보기도 했다.

다만 한나래가 그렇게 한 건 다소 의외였다.

솔직한 말로『아내가 가출했다』 전까지 한나래의 연기력은 답이 없는 수준이었다. 괜히 발로 연기해도 저것보다 잘하겠다는 말을 하면, 지금 발 무시하는 거냐는 조롱을 들었던 게 아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렇게 연기를 못한 거라고?’

사실 안시현은 이해가 잘 안 됐다.

대부분의 경우 노력은 보상을 해 준다. 연기의 경우 재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부분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 회귀 전 한나래가 보여 준 연기력은 노력이라는 말로 감싸 주기 불가능할 만큼 처참했다.

회귀 전에는 지금처럼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노력했음에도 결과물이 그러했던 걸까?

‘어찌 됐든 메소드 말곤 답이 없지만.’

반가운 표정으로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말을 건 한나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우물주물거리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한참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저……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촬영을 견학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직 촬영하는 걸 한 번도 못 봐서요. 작품 들어가기 전에 참고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촬영 견학.

아직 촬영 현장을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던 한나래가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을 두 눈으로 보길 바랐다.

김진모와 안시현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감독님께 말씀드려 봐야겠지만, 신인 배우가 견학을 하는 건 반대하진 않으실 거야. 같이 가서 허락받자.”

“우와…… 감사합니다! 촬영 끝나고 제가 밥 살게요!”

안시현은 회귀 전 한나래와 마땅한 접점이 없고 이미지가 별로인 것과 별개로, 좋은 연기를 위한 배우의 노력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 또한 좀처럼 늘지 않는 연기 탓에 고민하던 시기가 있지 않았던가.

세 사람이 롤러코스터 앞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제작진 사이에서 곽상필 감독이 보였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그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곽상필 감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배우와 안 배우 후배요? 견학이야 언제든 환영이죠. 편하게 봐요. 필요하면 촬영장에 와도 돼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리고 저…… 실례가 아니라면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실 제가 감독님 광팬이거든요! 데뷔작이신 『독도의 밤』부터 시작해서 『서울 그 어딘가』, 『달의 동네』, 그리고 또…….”

한나래의 입에서 곽상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의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곽상필 감독의 팬들도 잘 모르는 몇몇 독립 영화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곽상필 감독이 종이와 펜을 건네받고서 웃었다.

“허허허. 독립 영화도 아는 경우는 드문데 놀랍네요. 기회가 되면 나중에 같이 작품 했으면 좋겠어요.”

“정, 정말요?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죽어라 연습하고 필모그래피 쌓아서 감독님과 작품 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할게요!”

한나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곽상필 감독의 의례적인 말에 한나래는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 곽상필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할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곽상필 감독님 팬이었다고 말했던 것 같네.’

안시현이 기억을 더듬었다.

한나래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긴 하지만, 인터뷰에서 곽상필 감독의 팬이라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됐다.

자신도 열렬한 팬이었던 곽상필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어서, 곽상필 감독이 『나는 간첩입니다』에 이어 유작의 메가폰을 잡길 바랐기에 수많은 선택지들 중 리수철 역을 택하지 않았던가.

존경하는 감독의 작품에 캐스팅되는 건 배우로서 동기 부여가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동선 체크부터 해야겠어.’

한나래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안시현은 크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선후배 관계를 제외하면 접점이 없는 한나래를 챙기는 것보다 신 34의 촬영이 중요했다.

의외라 생각하는 게 안시현이 가진 관심의 전부였다.

안시현은 동선을 체크하고 정수혁과 미리 대사를 맞춰 봤다. 곽상필 감독에게 리수철의 대화와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수철이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들어오는 부분부터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동선 상 여러 번 나눠 촬영하겠습니다.”

배우들은 곽상필 감독의 지시에 따라 동선을 파악하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숙지했다.

잠시 후.

“액션.”

곽상필 감독의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놀이공원이다, 놀이공원!”

“수철 아저씨, 저 바이킹 타고 싶어요!”

“바이킹! 바이킹! 바이킹 태워 줘요!”

“하하하. 그래, 타고 싶은 거 하나씩 다 타 보자.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길 잃어버리지 않게 아저씨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알겠지?”

“네에에!”

이수철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회전목마부터 시작해 바이킹과 여러 놀이기구를 탔고, 신이 난 아이들을 지켜보는 이수철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컷. 끊고 가겠습니다.”

놀이기구를 타야 했기에 몇 번 나눠서 촬영이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이용객들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탓에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때문에 리수철과 최진웅이 접선하는 장면은 오후가 돼서야 촬영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

배우와 스태프들이 한데 어우러져 놀이공원 근처의 식당을 빌려 식사를 했다.

“어? 선배, 식사 안 하세요?”

“시현이는 촬영 있을 때 밥 안 먹어. 리수철 배역이 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이라 밥 먹으면 턱선 사라져서 안 된대.”

“에엑? 배 안 고파요?”

“괜찮아. 아침에 삶은 계란이랑 사과 조금 먹었어.”

단, 안시현은 예외였다.

옆에서 사과 하나를 먹은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은 김진모에게 먹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나래는 혀를 내둘렀다.

배우 데뷔를 앞둔 그녀이지만, 안시현처럼 노력하는 케이스는 아직까지 본 적 없었다.

“연기를 잘하려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구나…….”

“보통은 안 저러지. 시현이가 특이한 거야. 저 자식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거든. 메소드 중에서도 심한 편이지. 아, 그래서 연기를 잘하나?”

“궁금하면 너도 해 보던가.”

“내가 미쳤냐. 너처럼 하면 정신 나갈 텐데?”

안시현은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배우 중에서도 몰입을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이 유독 철저한 스타일이었다.

대신 그만큼 원하는 연기력이 나왔다.

배역 그 자체가 되는 안시현의 연기는 철저한 준비가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메소드는 저렇게 배역에 몰입하려고 주변 환경을 철저하게 통제하는구나. 하지만…… 그런 노력에 비하면 연기력이 특별히 뛰어나진 않은 것 같던데?’

한나래는 안시현이 노력한 것에 비해서는 결과물이 다소 아쉽다고 느꼈다.

모자란 자신의 눈에도 안시현이 연기를 잘하는 게 보이긴 했지만, 메소드 연기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감안하면 만족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한나래의 그 생각이 박살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촬영을 재개하기 전.

곽상필 감독이 안시현을 불러 놓고서 물었다.

“안 배우, 준비됐어요?”

“네. 준비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네.”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점심 식사 전까지 보여 주던 온화한 미소의 환경미화원은 떠나고, 굳은 표정의 남파공작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리수철이 귀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놀이공원 직원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남파공작원 최진웅과 접선했다.

아이들이 사 준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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