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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5화 (1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화>

15화. 아, 사인 마렵다

신 34에서 리수철이 최진웅을 만날 때 토끼 귀 머리띠를 쓰는 지문은 수정 전 대본에는 없었다.

대본이 수정되며 추가된 내용이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디션 당시 안시현은 신 99를 지정연기하며 곰 인형과 장난감 칼이라는 기괴한 조합을 이용해 인질을 잡는 장면을 표현해서 호평을 받았고, 그 모습을 본 곽상필 감독이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노는 분위기와 남파공작원들끼리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뒤섞였을 때 어떤 연기가 나올까?

그것이 궁금했다.

기대치를 충족시킨다면 오디션 때처럼 안시현의 연기에 몰입될 것이고, 기대 이하의 연기를 보여 준다면 머리카락을 빡빡 민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무표정으로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질 거다.

당연히 곽상필 감독이 바라는 건 전자였다.

촬영이 시작된 직후.

촬영을 지켜보던 몇몇 시민들은 안시현의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그 웃음은 안시현이 본격적으로 연기에 몰입하자 조금씩 줄어들다, 정확히 이수철이 리수철로 변하는 시점부터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말이다.

귀신의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리수철의 표정이 굳었다. 온화한 동네 아저씨에서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남파공작원이 됐다.

이전과 180도 달라진 분위기.

말을 걸면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만 같은 독기 서린 눈빛, 힘 있고 절도 있는 움직임.

몇몇 시민들은 반전된 분위기에 감탄을 토했다.

귀신의 집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안시현의 연기를 지켜볼 수 없었지만, 거기까지만 보고서도 안시현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와…… 어떻게 몇 초 사이에 저렇게 사람이 확 바뀔 수 있는 거지? 진짜 대단하다.’

직전까지 안시현의 연기가 평범하다 생각했던 한나래는 자신의 생각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사실 이수철 연기는 좋긴 하지만 대단하진 않았다.

이수철과 리수철의 연기를 따로 놓고 보면 훌륭하긴 해도 감탄이 터져 나올 수준까지는 아니다.

안시현의 진면목은 이수철과 리수철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데에서 나온다. 하나의 인격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두 가지 인격을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이수철이 리수철로 변모했을 때, 한나래는 그제야 안시현이 그토록 악착같이 관리를 한 이유를 깨달았다.

머리를 빡빡 밀고 살을 빼고 철저한 식단 관리를 했기에, 배역에 철저하게 몰입할 수 있는 준비를 한 덕분에 이수철과 리수철을 자유롭게 오가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였다.

한나래는 귀신의 집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카메라 감독의 뒤에서 안시현의 연기를 두 눈으로 지켜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서영만이 잡혀갔습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잠깐 봤던 선배 안시현도,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배우 안시현도 없었다.

카메라 너머엔 남파공작원 리수철이 존재했다.

*   *   *

휴식 시간인 귀신의 집 내부.

인적이 없는 곳에서 리수철과 최진웅이 접선했다.

서영만이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에도 최진웅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서 혀를 찼다.

“쯧. 그 작자는 너무 조심성이 없다니까. 아가리 털기 전에 콱 뒈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제거하려 했지만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흘러나가면 혁명전사들이 위험하다는 걸 당에서 모를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혁명전사는 얼어 죽을.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우린 그저 소모품일 뿐이야. 협상 카드로 쓰이고 버려질 운명이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

리수철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전의 그였다면 곧장 대답했을 거다.

불순한 사상 좀 고쳐먹으라고, 공화국의 혁명전사는 의심하지 않고 명령에 따르는 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동무는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었다고.

최진웅을 믿고 의지했지만, 그가 농담 삼아 던지는 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리수철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최철만 상위와의 만남 후, 당에서 서영만의 척살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봉합이 되기는커녕 점점 커져 가고 있다는 걸.

사고를 거세시켰던 자물쇠는 이제 풀어졌다.

리수철이 사고했다.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어쩌면…… 최진웅 동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혁명전사들이 조국 통일의 염원을 품은 채 월남하고, 그중 상당수가 변절한다.

리수철은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변절자를 죽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들었다.

당에서는 우리를 혁명전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모품으로 사용되다 가치가 없으면 폐기될 거다, 그 전에 몸값을 최대한 올렸을 뿐이니 비난하지 마라.

최진웅은 변절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위장 신분에 충실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남한에서의 10년.

밀항을 하던 앳된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됐다.

기억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한 만큼 길었다.

이제는 자신의 고국이 남인지 북인지, 고향의 풍경이 어떠한지,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못하게 됐다.

최진웅은 흔들리는 리수철의 눈빛에 피식 웃었다.

탁.

리수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걱정과 경고를 동시에 담아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허튼짓은 하지 마. 서영만은 이미 동무 손을 떠났어. 미련을 가지는 순간, 제거되는 건 동무가 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면 됐고.”

리수철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최진웅은 관심을 껐다. 믿음이 흔들리는 상태일 때 백날 말해 봐야 들리지 않는다는 걸 수많은 남파공작원들을 보며 경험했으니까.

“할 말 다 했으면 가. 그리고 당분간 찾아오지 마. 동무 말대로 서영만이 잡혀갔다면,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몸을 사리는 게 최선이야.”

“몸조심하십시오, 동무.”

“손바닥에 털 나길 바라겠어.”

리수철이 귀신의 집에서 벗어났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제법 긴 시간 동안 최진웅과 접선하지 못할 거다. 최철만 상위 정도가 아니면 다른 남파공작원과의 접선은 피하는 게 최선이다.

최진웅의 말대로 몸을 사리는 게 맞다.

다만…….

‘서영만 동무가 변절한다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에 대한 정보를 넘긴다면? 그 상황에서 당은 우리를 지켜 주려고 할까? 아니면 소모품이 될까?’

균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리수철이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이수철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곰인형 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이 화장실로 들어가며 탈을 벗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정체는 강석우.

나간동에서 이수철을 만난 뒤 그가 남파공작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고, 고아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놀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과 함께 미리 잠입한 것이었다.

혹여나 이수철이 남파공작원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휴식 시간인 귀신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5분 정도를 있다가 나왔다. 실수로 들어갔다고 보기엔 너무 오래 걸렸어. 저 안에 있는 누군가와 접선한 건가?’

평소의 리수철이었다면 감시를 일찌감치 눈치챘을 거다. 아예 최진웅과의 접선을 포기하고 아이들과 놀다가 돌아갔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리수철은 판단이 흐려진 상태.

감시를 눈치채지 못한 채 최진웅과 접선했고, 그가 남파공작원이라는 강석우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로 인해.

‘이수철에 대한 감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귀신의 집 안에 있던 사람의 뒤를 캔다.’

리수철과 최진웅은 나란히 국가안전기획부의 감시망에 오르게 됐다.

*   *   *

안시현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다.

애초에 리수철은 감정을 많이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설사 드러내더라도 절제하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는 신 34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시현은 흔들리는 눈빛과 경직된 몸, 거기에 말끝을 흐리는 정도로 리수철의 흔들리는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감정 표현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리수철은 원래 그런 캐릭터다.

어릴 때부터 남파공작원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살아남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들을 제거해야 했다. 철저히 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됐다.

그렇기에 신 99에서 예정된 폭발적인 감정 표현이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거고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와아. 시현 선배가 눈에 안 들어와. 캐릭터만 남았잖아? 이게 메소드인가?’

한나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영화에 캐스팅된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연기 수업을 받고 있는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감정이 절제되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감정을 조금 더해 버리면 캐릭터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안시현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나를 지우고 캐릭터만을 남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정된 메소드 연기란 이런 건가 싶었다.

안시현의 연기를 지켜보며 한나래는 생각했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나라면 안시현처럼 연기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메소드 연기는 어떤 느낌일까? 연기법을 바꾸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연기 수업을 받으며 한 번도 접하지 않은 영역, 안시현의 회귀 전 그녀에게 ‘광녀’라는 별명을 안겨 준 변화.

한나래가 메소드 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OK. 구도 바꿔서 한 번만 더 촬영하고 마무리합시다. 연기 좋았어요.”

구도를 다르게 해서 도합 세 번 만에 귀신의 집에서의 촬영이 모두 끝났을 때, 한나래는 결심을 굳혔다.

‘연기 수업 때 메소드 연기에 대해 물어봐야겠어.’

좀처럼 늘지 않는 연기력을 보완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메소드를 접해 보자고 말이다.

*   *   *

놀이공원에서의 촬영은 오후 6시가 지난 이후에야 끝이 났다. 촬영 통제를 하는 가운데 구도까지 다양하게 잡아야 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심적으로 흔들리며 긴장이 느슨해진 리수철, 그런 리수철을 감시하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게 된 강석우, 이로 인해 리수철과 최진웅의 뒤를 파게 된 국가안전기획부.

많은 이야기를 한 신에 담아야 했다.

신 34에서의 핵심은 안시현이었다.

이수철과 리수철을 오가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귀신의 집 안에서는 평소처럼 절제된 감정을 베이스로 흔들리고 있는 신념을 표현해야 했다.

메마른 감정을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안시현은 이수철이 아닐 때의 리수철을 시종일관 날이 서 있는 모습으로 그 해답을 제시했다.

심지어 리수철이 심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감정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눈동자와 제스처, 목소리의 미약한 떨림 정도면 차고 넘쳤다. 많은 도구는 안시현에겐 오히려 사치였다.

‘다소 삭막해 보이는 연기일 수도 있지만…… 신 99를 위해서는 절제할 필요가 있지.’

신 99.

사실상 리수철 캐릭터의 임팩트는 신 99에 대부분이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보여 줬던 절제된 감정과 흔들리는 모습이 아닌,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한 인간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여 줘야 하는 장면이었으니까.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은 그때 다 표현하면 된다.

신 34의 촬영이 끝났을 때의 시간은 오후 6시.

“이 앞 식당에서 식사하고 촬영장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다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특히 안 배우. 이러다 감정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예요.”

“원하신다면 대성통곡 한번 하겠습니다.”

“허허허. 메마르지 않았으면 됩니다. 신 99, 아시죠?”

“물론입니다, 감독님. 그때를 위해 참고 있습니다.”

곽상필 감독도, 안시현도, 함께 촬영하는 배우와 스태프들까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안시현의 절제는 신 99를 위한 초석이라는 걸.

순조롭게 신 34의 촬영이 끝나고 식당에서의 식사만 남은 상황. 안시현과 김진모가 선뜻 스태프들의 뒷정리를 도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였다.

한참 뒷정리를 하던 중.

“저기…….”

여성 두 명이 안시현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나요? 계속 지켜봤는데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회귀 전, 대중들이 안시현을 칭하는 별명은 크게 두 가지였다.

명품 조연, 그리고 연쇄사인마.

사인을 원하는 팬들에게 항상 웃는 낯으로 사인을 해 주고 단 한 번도 사인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붙은 별명.

그 습성은 이번 생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두 명의 여성을 기점으로 몇 명의 시민들이 더 다가와 사인을 받았다. 덩달아 옆에 있던 김진모와 정수철까지 사인을 하게 됐다.

김진모와 안시현은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은 신임임에도 각각 열 명이 넘는 시민들에게 사인을 해 줬다.

안시현은 환하게 웃으며 일일이 눈을 마주친 채 사인을 해 줬고, 고맙다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사인 감사합니다! 이름 기억할게요!”

“응원할게요! 영화 개봉하면 꼭 보러 가고, 친구들한테도 다 소문 낼 테니까 파이팅!”

모처럼 한 사인은 즐거웠고 아쉬웠다.

안시현은 더 많이 사인을 하고 싶었다. 팬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 사인 마렵다. 팬들 붙잡고 팔 저릴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사인만 해 주고 싶다.’

안시현이 배우로서 성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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