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6화 (1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화>

16화. 조금만 더

신 34 촬영 다음 날 오전, 마포의 작은 연기 학원.

일찌감치 학원에 나온 한나래를 보며 연기 선생 이정민이 미소를 지었다.

“나래 너, 내일부터 일주일간 놀이공원 아르바이트 체험한다며? 그럼 연습은 저녁에 해야겠네?”

“선생님만 괜찮다면 전 새벽까지도 가능해요.”

“얼씨구? 됐네요, 됐어. 자정까지만 연습하고 들어가서 자라. 많이 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에헤헤. 네.”

이정민은 한나래가 영화에 캐스팅 된 뒤 그녀를 가르치며 부쩍 친해진 사이였다. 좀처럼 늘지 않는 연기력 때문에 고민하는 한나래와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둘 다 초보자라는 것.

이정민은 한나래가 세 번째로 맡은 학생일 만큼 연기 학원을 오픈한 지 얼마 안 됐다. 커리어 있는 연기 선생을 붙여 주기엔 한나래의 소속사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탓에 이정민을 택한 거다.

한나래는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했다.

이전에 연기 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다지만 경험 수준이고,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캐스팅 이후다.

그래서일까?

연기력이 좀처럼 늘지 않고 있음에도 이정민과 한나래는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8시간에서 12시간.

학교까지 휴학하고서 죽어라 연습에 매진하고 있음에도 연기력이 좋아질 조짐조차 전무했다.

이대로라면 최악의 데뷔를 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한나래는 전날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저…… 선생님.”

“응? 왜?”

“메소드 연기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어쩌면…….

메소드 연기가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라면 답보 상태인 연기력에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설사 답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답보 상태인 지금의 연기력보다 더 최악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한나래는 메소드 연기를 접하게 됐다.

*   *   *

놀이공원에서의 만남 이후로 안시현은 한나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껐다. 아니, 애초부터 한나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은 말이리라.

‘놀이공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캐릭터를 구축하려 하는 건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그게 관심을 줄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여우주연상 받을 배우한테 연기로 조언해 봐야 뭐하겠어? 내 앞가림부터 하는 게 맞지.’

한나래에게 신경 쓸 시간에 대본 1초라도 더 보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안시현의 연기는 매번 기대 이상이었다. 구축해 놓은 리수철 캐릭터에 몰입해 OK 사인이 나올 때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니 결과물이 좋은 게 당연했다.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류성웅과의 트러블도 없었다.

촬영 첫날.

안시현의 연기에 기가 죽고 11번 만에 OK 사인을 받아 낸 뒤로, 류성웅은 의도적으로 안시현을 피했다. 안시현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티가 났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가뜩이나 연기를 잘해서 거슬렸던 후배 놈에게 촬영 첫날부터 연기로 압도를 당했다. 무려 10번의 NG를 내며 수치심을 느꼈고, 자괴감까지 들었다.

문자 그대로 연기력에서 완패를 당했다.

시비도 적당이 차이가 나야 거는 거지, 너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니 시비를 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덕분에 안시현은 편하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거슬렸던 요소가 알아서 나가떨어졌으니 오롯이 연기에만 집중하면 됐다.

그럼에도 굳이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찾자면…….

‘원 테이크가 두 번이나 있었고, NG가 나더라도 내가 연기를 못해서인 경우는 없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찝찝한 걸까? 왜 자꾸 심장에 구멍이 난 것처럼 휑한 느낌이냐고.’

신 22를 촬영한 이후, 줄곧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찝찝함을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갈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곽상필 감독과 선배 배우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상하리만큼 불편한 감정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안시현은 부디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이 모두 끝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 99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신 79.

국가안전기획부와의 거래를 결정한 북한이 몇몇 남파공작원의 정보를 양도한다. 그중에는 리수철과 비정기적으로 접선하던 남파공작원의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리수철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점점 악화되기만 한다.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체포된 남파공작원 중 몇 명이 변절했고, 그로 인해 리수철을 비롯한 남파공작원들의 정보가 추가로 흘러나간다.

남파공작원들과의 연락에 하나둘씩 실패하는 가운데, 리수철은 불안함을 느낀다. 어쩌면 남파공작원들의 정보가 국가안전기획부로 흘러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한다.

신 88.

국가안전기획부 고문실.

고문을 받기도 전에 황시국이 남파공작원들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고 변절한다. 정보를 대가로 신변 보장과 거액의 돈을 약속받는다.

중간 연락책인 황시국의 변절로 인해 다수의 남파공작원들의 정보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넘어간다. 그중에는 리수철에 대한 정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리수철의 존재를 묵인해 주던 강석우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국가안전기획부는 리수철을 다음 표적으로 삼는다.

장면이 전환되며 리수철의 집.

그나마 자주 접선하던 최진웅과의 연락마저 끊기고 만다. 다른 남파공작원들과의 연락 또한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편지로 연락이 온 남파공작원은 리수철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알린다.

최철만 상위가 이중 간첩이라고, 변절한 지 오래됐고 주기적으로 남파공작원들의 정보를 국가안전기획부에 팔아치우고 있다고.

또한 리수철에게 경고한다.

실적에 눈이 먼 국가안전기획부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면 새 신분을 만들거나, 변절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이다.

동무, 우리에겐 남은 선택지가 없어.

편지 마지막 줄을 보며 리수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신 94.

뉴스를 본 리수철은 충격에 빠진다. 국가안전기획부와 충돌한 최진웅이 두 명을 사살한 뒤 사망한 게 방송 3사 저녁 뉴스에 메인으로 다뤄진 것이다.

최철만 상위의 동생인 최진웅의 정보마저 팔려 나가고 만 상황.

뉴스를 본 리수철은 휴가를 쓴다. 주변과의 연락을 끊고서 무장을 한 채 최철만 상위를 만나러 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다.

그렇게 리수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휴가를 떠난다.

“OK.”

신 94는 3번의 리테이크로 OK 사인을 받아냈다.

“아주 좋았어요, 안 배우.”

“감사합니다, 감독님.”

“시현 씨 이제 한 신 남았나?”

“네, 선배님. 모레 신 99만 촬영하면 이제 끝입니다.”

“얼마 촬영 안한 거 같은데 벌써 끝이네. 지켜보는 맛이 있었는데 아쉬워라.”

“허허허. 신 99, 기대해도 되죠? 감독님도 엄청 기대하는 눈치시던데.”

“마지막 신이니만큼 모든 걸 쏟아 내려고 합니다. 선배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랭크인으로부터 꼬박 한 달.

신 93까지의 촬영을 끝마친 안시현은 이제 자신의 마지막 출연 장면인 신 99의 촬영을 앞두게 됐다.

안시현이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리수철의 캐릭터성이 함축된 신이며, 대중들에게 확실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신이다.

안시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앞서 촬영했던 신들은 신 99를 촬영하기 위한 예열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만큼 신 99는 『나는 간첩입니다』전체에 큰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영화 후반부의 긴장감을 높이고, 확실한 임펙트를 주며 곽상필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에 안시현은 16번째로 맞이한 휴식일에 아침 일찍부터 JM액터스 연습실로 향했다. 신 99에서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마지막 담금질을 할 생각이었다.

황영민과 김진모와 안시현이 함께 연습했다.

정수혁은 신 93에서 최진웅이 사망하며 더 이상 출연이 없었고, 이에 일찌감치 차기작 검토에 들어갔기에 연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황영민과 김진모는 상황이 달랐다.

두 사람은 안시현과 함께 신 99를 촬영해야 한다. 핵심은 안시현이지만 두 사람의 연기 또한 중요하다. 혼자서 잘한다고 장면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니까.

세 사람은 오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배달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할 때를 제외하면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신 99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저녁 7시 경, 몇 번째인지 모를 연습을 끝내고서 황영민이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연기 좋은데? 이 정도면 더 할 것도 없겠다.”

황영민은 안시현과 연습을 하며 수차례 감탄했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는 내내 안시현은 단 한순간도 연기력에 구멍 난 적이 없었다. 구멍은커녕 김진모와 더불어 시간이 갈수록 연기력이 좋아져 갔다.

심지어 신 99를 앞두고는 모든 걸 쏟아 내겠다고 한 게 허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연습임에도 특유의 몰입도가 엄청났다.

실전에 들어가면 사고 한번 제대로 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선배님, 저…….”

“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녁 식사 이후에 저 혼자 더 연습하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왜? 그렇게 해 놓고도 만족이 안 돼?”

“중요한 신이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연습하고 가야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흐음. 그래, 네가 편하면 그렇게 해라. 대표님께는 내가 말해놓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시현은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만족할 때까지 연습실에 남아 있길 택했다.

황영민에게 허락을 받은 직후, 김진모가 안시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더 연습하게? 같이 있어 줘?”

“됐어. 조금만 더 연습하고 들어갈 테니까 저녁 먹고 먼저 가.”

“흐음. 오케이. 이따가 집에서 보자고.”

저녁 식사 뒤 황영민과 김진모는 연습실을 떠났다.

연습실에 혼자 남은 안시현은 대형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연습 과정은 괜찮았어. 시종일관 몰입했고, 최선의 연기를 보여 줬다 자부할 수 있어.’

안시현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연습 내내 보여 준 자신의 연기가 좋았다고 자부했다. 신 99에서 곽상필 감독의 기대치를 충족하는 연기를 보여 줄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연기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신 22 이후 느끼고 있는 허전함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이대로라면 신 99를 촬영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좋은 연기를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더 연습을 보면 허전함의 원인을 찾을 수 않을까? 이 미쳐 버릴 것 같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연습을 시작했다. 연기를 하며 생긴 문제는, 연기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더, 더, 조금만 더.

안시현은 스스로를 쉼 없이 채찍질했다.

*   *   *

다음 날 오전.

피곤에 찌든 얼굴로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안시현을 보며 황영민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너 잠 안 자고 왔냐?”

“아, 연습하다 보니까 귀찮아서 연습실에서 잤거든요. 일찍 깨서 연습 좀 더 하고 왔더니 그런가 봐요.”

“연습 너무 많이 한 거 아냐? 목 상태 괜찮아?”

“네. 자고 일어나서는 목 관리 한다고 대본만 봤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황영민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대본 리딩 때부터 줄곧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준 안시현이다. 이번에도 어련히 생각한 바가 있겠거니 싶어서 별말은 하지 않았다.

황영민이 생각한 대로 안시현은 거짓말을 했다.

대본을 본 건 맞지만 목 관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캐릭터 분석을 위해서였고, 연습실에 이불을 깔아 놓긴 했지만 잠을 잔 건 아니었다.

그랬다.

안시현은 밤새 연습을 하고 촬영장에 왔다.

신 22 이후 느끼고 있는 모종의 느낌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눈곱만큼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고 신 99를 촬영하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과연 안시현은 답을 찾았을까?

밤을 지새우며 원하는 걸 얻었을까?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나나 강식 선배는 답을 찾기까지 몇 년이 걸렸지만, 저 미친 천재라면 더 빨리 찾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황영민은 바랐다.

안시현이 부디 답을 찾았기를,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