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8화>
18화. 연기에 미친놈
촬영을 하다 보면 간혹 배우가 먼저 리테이크를 요청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거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더 좋은 아이디어나 구도가 떠올라서 건의를 하려는 목적에서다.
곽상필 감독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안시현은 신 99에서 좋은 연기를 했다. 한 신에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흠잡을 부분 없이 훌륭하게 표출해 줬다.
무엇보다 마지막의 자살 장면은 최고였다.
평생을 당의 명령에 따라 살아온, 사고가 거세된 남파공작원의 최후를 곽상필 감독의 생각대로 완벽하게 표현해 줬으니까.
카메라 감독들은 그것을 최선의 구도에서 담아냈다.
안시현을 비롯한 배우들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또한 신 99와 한정해서는 더 좋은 아이디어와 구도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리테이크를 요청했다면 이유는 하나.
본인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을 따로 불렀다. 온화한 표정으로 리테이크를 요청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안시현은 대답 대신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라 말씀드리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괜찮아요. 받아들이는 건 내 몫이니까, 안 배우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돼요.”
“그게…… 제 연기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족하지 못해서요?”
“네. 사실 이런 느낌을 받은 게 꽤 됐습니다. 원 테이크로 촬영을 끝내고, 감독님께 극찬을 받아도 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고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신 99에서마저도 못 찾으면 영영 해답을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리테이크를 요청하게 됐습니다.”
안시현의 대답을 들은 뒤.
‘역시 그거였어.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
곽상필 감독의 추측이 확신이 됐다.
십여 년 전, 그는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배우 중 안시현과 같은 현상을 겪은 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최정수였다.
당시 최정수는 무려 14번이나 리테이크를 요청했고, 오전에 시작한 촬영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OK 사인을 받자마자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곽상필 감독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최정수가 대한민국 최고의 메소드 연기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상당수의 배우가 연기력이 대폭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겪지만, 현상 자체는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안시현이 지금 겪고 있는 현상은 최정수가 겪었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당시 최 배우의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었지? 허허…….’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당시 최정수의 나이는 29세였고, 안시현의 나이는 이제 겨우 21세다. 누군가는 평생 연기를 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현상을 21세에 겪고 있는 것이다.
이 성장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곽상필 감독은,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신했다.
‘판은 만들어 줘야지. 받아먹는다면 엄청난 물건이 탄생하는 거고, 게워 낸다면 거기가 한계인 거고.’
성장을 할지 도태될지는 본인에 능력에 달렸다는 것.
곽상필 감독은 이번 기회에 안시현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스태프들은 그런 그의 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좋은 결과물이 나왔는데 구태여 다시 찍는다고 하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다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곽상필 감독과 10년 이상을 함께해 왔다. 간혹 의아한 판단을 내리는 곽상필 감독이지만, 그는 그때마다 결과물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곤 했다.
때문에 이번에도 결과물이 말해 줄 거라 믿었다.
또한 스태프들 중 몇 명은 곽상필 감동의 의중을 어느 정도 눈치채기도 했고 말이다.
“저는 안 배우가 신 99에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더 촬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곽상필 감독이 첨언까지 하니 스태프들의 입장에선 토를 달기가 난감해졌다.
결국.
“뭐…… 감독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라야지요.”
“자, 자. 조명부터 다시 체크합시다!”
“감독님, 구도는 전과 동일하게 가면 되겠습니까?”
“의상팀, 리수철 의상 몇 벌이나 준비되어 있어요?”
OK 사인으로부터 15분 남짓 후, 신 99의 두 번째 촬영이 시작됐다.
“이, 이 간나 새끼들! 움직이지 말라우!”
두 번째 촬영에서 보여 준 안시현의 연기는 첫 번째 촬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촬영도, 네 번째 촬영에서도 첫 번째 촬영과 비슷한 결과물이 나왔다. 제스처나 사소한 애드리브의 차이가 있을 뿐, 리테이크를 한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변화가 생긴 건 다섯 번째부터였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챈 건, 고아원 선생님이자 리수철에게 인질로 잡히는 박정임 역의 이아영이었다.
‘힘이 너무 들어갔는데? 숨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이러니까 진짜 인질을 잡은 것 같잖아?’
그녀의 목을 조른 안시현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대고만 있던 이전과 비하면 확연히 차이나 갔다.
게다가…….
“공화국…… 만세…….”
“OK. 좋았습니다.”
OK 사인이 난 뒤에도, 흙바닥 위에 쓰러진 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황영민이 안시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상태를 살펴보기까지 했다.
“괜찮냐, 시현아?”
“아…… 네. 괜찮습니다. 감독님, 한 번 더 가도 되겠습니까?”
“다시 가겠습니다.”
안시현에게 생긴 변화는 바로 몰입의 강화였다.
이전에 연기를 할 때도 엄청난 몰입도를 보여 줬지만, 리테이크를 반복하면서 더욱 좋아졌다. OK 사인이 나고도 이십여 초가 넘게 역의 몰입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메소드 연기법을 추구하는 배우가 몰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제법 많다. 이게 심해지면 배우가 캐릭터에게 잡아먹히는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황영민은 지금 안시현이 주객전도의 경계선에 발을 걸친 상태라고 봤다.
‘정수 선배님은 저걸 이겨 냈지만, 시현이가 해낼 수 있을까? 재능이 넘치는 건 맞지만 아직 21살인데.’
황영민은 메소드 연기법에 대해 잘 몰랐다. 원래부터 메소드 연기법을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배우로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안시현이 지금 겪는 현상을 이겨 낸다면, 최정수처럼 해낸다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될 거란 사실이었다.
물론…….
‘캐릭터에 잡아먹힐 것 같으면, 바로 말린다.’
안시현에 대한 걱정도 잊지 않았다.
* * *
여섯 번째 촬영 이후 점심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안시현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홀로 고아원 운동장에 선 채 대본만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 안시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스태프들은 곽상필 감독에게 미리 지시를 받았기에, 배우들은 오랜 경험상 배우가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는 안 건드는 게 예의라는 걸 알기에 그러했다.
다만 김진모의 태도는 의외였다.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일 텐데도 그는 안시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밥차로 향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식사를 하며 반찬이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이에 몇몇 배우들이 물어보았다.
안시현이 걱정되지 않냐고, 저렇게 몰입해 있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이에 대한 김진모의 답은 명쾌하고 정답에 가까웠다.
“촬영장에 오자마자 뜯어 말리려고 했는데 그만뒀어요. 전에 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메소드 연기자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을 땐 건들지 말라고. 심한 수준이라고 해도 건드는 게 아니라고. 위험한 길을 걷기로 선택한 이상,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배우 스스로가 지는 거라고 말이에요.”
배우 선배이자 아버지인 김진석의 말에 따랐다.
설사 과한 몰입으로 인해 메소드 연기법의 후유증을 심하게 겪더라도, 그것은 안시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뜯어 말리겠지만…… 시현이라면 잘 이겨 낼 거야.’
결단의 이면에는 안시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촬영을 하며.
“닥치라우! 에미나이 죽는 거 보고 싶어? 어디서 개수작이가!”
안시현의 몰입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OK 사인이 나면 본능적으로 운동장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간의 탈의실에 들어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액션 사인이 나면 곧장 연기를 시작했다.
그사이.
안시현은 다른 배우와 대화하지도, 시선을 교환하지도 않았다. 오롯이 리수철하고만 대화하고 리수철만을 바라보며 집중력을 계속해서 끌어 올렸다.
“남조선 아새끼들과 내통하는 게 당에서 내린 명령이란 말입네까? 당이, 정말로 그리 명령했습네까?”
안시현이 겪고 있는 변화는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매 촬영을 따로 놓고 보면 구분을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아홉 번의 리테이크가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쌓은 변화가 더해지며 눈에 띄게 됐다.
마침내 시작된 열 번째 촬영에서.
“액션.”
뚜벅. 뚜벅.
곽상필 감독은 운동장으로 걸어가는 안시현을 바라보며 이전과 다른 확실한 변화를 눈치챘다.
‘자신을 지우고 리수철만을 남겼다.’
리테이크를 할 때마다 조금씩 상승하던 몰입도는, 결국 안시현을 지우고 리수철이라는 캐릭터만을 카메라 너머에 존재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최정수가 추구하는 메소드 연기법의 극한, 배우를 지우고 캐릭터만을 남기는 것.
안시현이 그것을 보여 주려 하고 있었다.
리수철이 살아 움직였다. 조국으로부터 버려지고, 선택의 순간에 처한 남파공작원의 처절한 몸부림이 눈앞에서 날것으로 드러났다.
‘안 배우가 해냈어.’
곽상필 감독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안시현이 해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고, 지켜보다가 상태가 안 좋아지면 촬영을 끊고 이전의 결과물을 최종본으로 쓰려고 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안시현은 보란 듯이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방금 해낸 걸 이후에 의지대로 보여 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말이야.’
20대 후반에 처음으로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맛본 최정수는, 그 후 1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의지대로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마저도 자주 드러내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지만, 그만큼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이 크다는 부작용 또한 명확했으니까.
기껏해야 작품 하나에 두세 번.
임팩트가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했고, 덕분에 대중들은 최정수라는 배우를 기억하게 됐다.
지금 보여 주는 연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가능성이 높지만, 한 번 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배우들이 끝끝내 경험하지 못하는 영역에 고작 21살의 배우가 발을 담가 본 것이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배우로서 엄청난 자양분이 되리라.
10번째 촬영에서 안시현이 내뱉은 대사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 흔한 애드리브조차 치지 않고서 철저하게 정석을 지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안시현은 애드리브를 할 때보다 엄청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본 속의 캐릭터가, 리수철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연기였다.
리수철의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OK.”
신 99의 열 번째 OK 사인이 나왔다.
짝짝짝.
전염병이 퍼지듯 현장이 있는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가 박수를 쳤다.
심지어 곽상필 감독마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대 후반의 최정수가 정점을 보여 준 이후, 감독 인생 두 번째로 촬영 중에 기립박수를 치는 거였다.
현장에 있는 모두가 안시현이 보여 준 최고의 연기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좋은 결과물을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준 데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가 개봉하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은 신 99가 될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안시현.”
바로 김진모였다.
그는 OK 사인이 나자마자 안시현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가는 호흡을 내뱉으며 여전히 죽은 연기를 하는 안시현에게 말을 걸기를 몇 차례.
“안시현, 안시현! 눈 떠 봐, 이 새끼야!”
김진모가 고함을 내질렀다.
안시현이 리수철 캐릭터에게 잡아먹혔다, 과한 몰입으로 인해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판단했다.
최고의 결과물과 별개로 배우에게는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기에, 촬영하는 내내 항상 웃는 낯으로 스태프와 배우들을 대했던 김진모가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가 안시현을 깨우기 위해 뺨이라도 치려는 찰나.
“진모…… 야…….”
안시현이 눈을 감고서 입을 뗐다.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던 김진모의 오른손이 움찔했다. 그는 뺨을 때리려던 걸 멈추고 안시현의 몸을 흔들어대며 상태를 살폈다.
“정신 들었어? 너 리수철 아니지? 안시현 맞지?”
“시끄…… 러워. 나 잘 거야.”
“……어?”
그 순간.
흥분해 있던 김진모의 표정이 멍해졌고.
커어어~
촬영장에는 안시현의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랬다.
안시현이 눈을 뜨지 않은 건, 몰입에서 헤어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졸리기 때문이었다. 밤을 지새우며 연습했고,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 10번의 촬영을 하며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다.
최선의 연기를 보여 주고 OK 사인을 받자마자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결국 봇물처럼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채 잠이 들고 말았다.
덕분에 흥분한 김진모만 민망해진 상황 속에서.
“큭…… 크하하하하!”
황영민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진해서 열 번이나 한 신을 촬영하고, 결국엔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황영민이 본 배우 중에는 안시현이 최초였다.
“진짜 걸작이다, 걸작! 내 살면서 시현이 너처럼 연기에 미친놈은 처음 본다!”
결국 황영민은 인정하고 말았다.
자신이 아는 배우 중, 안시현보다 연기에 미친 이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