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9화>
19화. 바빠질 것 같다
“으음…….”
“새끼, 일어났냐?”
눈을 떴을 때, 안시현은 자신이 옥탑방에 와있음을 깨달았다.
“나, 왜 여기 있어?”
“왜긴 왜냐. 너 10번째 촬영 끝나자마자 잠들어 가지고 차에서 재웠는데, 촬영 다 끝날 때까지 안 일어나서 데려왔지. 근데 너, 촬영 끝났으니까 다시 살 좀 찌우자. 업고 올라오는데 삐쩍 말라서 하나도 안 무겁더라.”
“그래? 살 좀 찌워야겠네.”
안시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날이 밝은 걸 보니 오후가 아닌 오전이었다.
“하루 넘게 잔 건 아니지?”
“7시 조금 넘어서 잠들었으니까 13시간 정도 됐네. 푹 자고 나니 이제 좀 사람 같아 보인다. 촬영할 때는 걸어 다니는 시체 같더니만.”
“……그 정도였어?”
“배우 아니었음 신고 당했을지도? 그나저나 마지막에 그건 어떻게 한 거야? 분명 배역에 완벽하게 몰입한 상태였는데, 어떻게 그리 빠르게 몰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 정도 몰입은 바로 벗어나기 힘든 걸로 알거든.”
안시현이 기억을 더듬었다.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법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그때의 감정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촬영할 때는 내가 리수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네 말대로 완벽하게 몰입한 상태였어. 연기를 한 게 아니라, 리수철이란 사람이 내 몸에 빙의해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데?”
“OK 사인을 받고 나니까 몰입이 확 깨지더라고. 너무 졸려서 나도 모르게 잠든 거고. 으음. 뭔가 저지르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안시현이 거듭 리테이크를 요구한 건 이대로 촬영을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기에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를 영영 깨닫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리테이크를 반복하며 안시현은 자신이 촬영을 한다는 걸 잊어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든 걸 잊고 철저하게 리수철이라는 사람의 최후의 표현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10번째 촬영에서 보여 준 극한의 몰입.
안시현은 10번째 촬영에 보여 준 리수철 연기가, 20년 배우 인생에서 자신이 보여 준 최고의 연기였다고 자부했다. 흠잡을 구석 없는 완벽한 연기였다.
‘최고의 연기였지만, 위험했어. 잘못하면 몰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라.’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 또한 눈치챘다.
지나친 몰입감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괜히 수많은 메소드 연기자들이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심하면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게 아니다.
실제로 안시현 또한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리수철의 대사가 떠올랐다. 리수철의 감정이 가슴을 후벼 팠다.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이야 이전에도 있었다. 이수철과 리수철을 오가야 하는 배역 특성상 몰입으로 인한 후유증은 일찌감치 각오한 바였다.
다만 신 99의 촬영하고 나서 유독 후유증이 유독 심해진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촬영이 끝나고 한나절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인생작인『위장취업』때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결과에 만족했다.
후유증이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거고, 어쨌거나 한순간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다음 작품 오디션 보기 전까지 좀 쉬어야겠네. 겸사겸사 준비해야 할 것도 있으니 편하게 생각하자. 체중도 다시 불리고.’
다만…….
‘촬영도 끝났으니 모처럼 극단에 한번 가 볼까?’
어떻게 하면 다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전날 겪었던 그 느낌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안시현은 그 이유를 알 만한 배우를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시현은 간만에 스승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 * *
그날 오후, 안시현은 대학로를 방문했다.
왼손에는 술, 오른손에는 안주가 가득 둔 봉투를 든 채로 극단에 들어서자마자.
“야, 인마! 넌 신인 배우가 무슨 돈이 있다고 술이랑 안주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 빈손으로 오라니까!”
최정수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시현은 늘 그랬듯 넉살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무대 한가운데에 신문을 깔고 안주를 풀었다.
“에이~ 선배. 저 계약금 두둑하게 받았어요. 한 번 쏠 정도는 여유 있다고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다음에 또 이렇게 싸 들고 오면 출입금지 당할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최정수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별로 가르쳐 준 것도 없는 까마득한 후배가 곽상필 감독 작품의 오디션을 보고 조연을 따낸 걸로도 모자라, 은혜를 잊지 않고 극단에 다시 찾아왔다.
데뷔 후 극단을 찾아오지 않는 배우는 제법 많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극단 생활이 마이너스가 된다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소위 말하는 어깨 뽕이 들어가 거들떠도 안 보는 경우도 있다.
최소한 안시현은 그 두 가지 케이스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겨우 21살, 헛바람에 흔들릴 나이임에도 이전과 변하지 않은 게 기특했다.
“술 한 잔 따라 봐, 인마.”
“으흐흐.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정수가 자리에 앉자, 극단원들 또한 너 나 할 거 없이 주변에 둘러앉았다. 누군가는 술잔을 가득 채웠고, 누군가는 안주에 먼저 손이 갔다.
“크으. 장원급제한 막내 덕분에 모처럼 기름칠 좀 하겠네. 잘 먹으마, 시현아!”
“근데 촬영은 다 마무리하고 온 거야? 아님 오늘 쉬는 날이야?”
“어제 다 끝났어요. 간간히 놀러 가면서 다음 작품 검토해 봐야죠.”
“소속사는 구했고?”
“아, JM액터스와 계약하기로 했어요. 조금 쉬다가 바로 계약서 써야죠.”
“오~ JM~”
“축하한다, 야. JM이면 차기작 검토하기도 좋을 거고, 스케줄 관리도 잘해 주니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겠네.”
촬영을 끝마친 것도, JM액터스와 계약하게 된 것도, 극단원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진심을 다해 안시현을 축하해 줬다.
안시현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자리는 즐거웠지만 술과 안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과 달리 눈매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최정수는.
“시현아.”
“네, 선배님.”
“바람이나 쐬고 오자. 급하게 마셨더니 좀 덥네. 담배도 사야 하고. 말동무나 좀 해 주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시현은 데리고 나간 최정수가 향한 곳은 슈퍼가 아닌 김치찌개집이었다. 김치찌개와 공기밥, 소주 두 병을 주문하자마자 욕쟁이 할머니는 안시현을 타박했다.
“아이고야. 사내새끼가 몸이 그게 뭐여? 안 보는 사이에 완전 해골이 됐잖아.”
“배역 때문에 다이어트 좀 해야 했거든요. 촬영 끝났으니까 이제 다시 찌우려고요.”
“그럼 오늘 배 터지게 먹고 가. 고기도 많이 넣어 주고, 전도 서비스로 줄 테니까. 내 가게에서 밥 먹고 간 놈이 삐쩍 마른 거 난 죽어도 못 본다.”
“고마워요, 이모. 배 터지게 먹을게요.”
김치찌개와 공깃밥과 소주가 나온 직후, 병나발을 불며 최정수가 입을 열었다.
“말해 봐. 고민이 뭐야?”
“……티 났어요?”
“입은 웃는데 눈은 안 웃고, 대화 나누면서도 힐끔힐끔 날 쳐다보는데 그걸 모르겠냐? 딱 봐도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건데.”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질문은 겸사겸사고요.”
“똥 싸지 말고 빨리 말해. 상담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만큼은 답해 줄 테니까.”
“어제 촬영하면서 배역에 완전히 몰입했어요. 제가 안시현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요. 연기하던 그 순간만큼은 전 남파공작원 리수철이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안시현은 자신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최고의 연기를 한 대가로 후유증을 얻었다. 유독 증상이 심하긴 해도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심한 수준은 아니고, 휴식을 취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을 거다.
후유증과 별개로.
안시현은 전날 겪었던 그 현상을, 자신과 배역의 완벽한 일체화를 다시 하고 싶어졌다. 20년 연기 인생의 정점을 맛봤던 최고의 연기를 또 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더 좋은 연기에 대한 열망을 느끼는 건 배우에겐 지극히 당연한 현상 아니겠는가.
문제는 위험부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배역과 일체화된다는 건 그만큼 몰입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날엔 쉽게 벗어났지만 앞으로도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다.
어쩌면 후유증이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정수를 찾아온 거였다.
최정수라면 답을 알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메소드 연기로 정점에 오른 그라면 자신과 같은 현상을 겪어 봤을 거라고 믿었다.
안시현의 고민을 들은 뒤, 최정수는 두 번째 소주병마저도 나발째로 비웠다.
“크으…… 아, 이제 술 좀 마신 거 같네. 시현아.”
“네, 선배님.”
“너, 게임 좋아하지? 허구한 날 진모랑 오락실 가서 시간 때우고 그러잖아.”
“네. 좋아하죠.”
“그럼 게임으로 설명할게. 네가 어제 경험한 건 체력이 깎이는 필살기야. 근데 깎인 체력이 회복이 안 돼. 쓰면 쓸수록 네 체력은 줄어들고 결국 0이 돼서 게임 오버가 되고 말겠지.”
“그럼, 안 쓰는 게 좋겠네요?”
“정말로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아,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필살기를 진화시키면 되거든. 난 한 10년 정도 걸렸지, 아마?”
안시현은 최정수의 비유를 대번에 이해했다.
전날의 경험은 확실한 연기력을 보장하지만, 지독한 후유증으로 배우의 연기 인생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
그렇다고 해독제가 없는 건 아니다.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후유증도 최소화 할 수 있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폐기처분하면 된다.
그게 어려우니 아무나 못하는 거지만.
“선배는 어떻게 극복한 거예요?”
“나? 필요할 때마다 쓰다가 덕분에 자살 시도 한 세 번 했거든? 그러고 나니까 되더라.”
“아. 죄송한데 전 자해는 선호하지 않아요.”
“미친놈.”
반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안시현은 정말로 자해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생각이 없었다.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경험해 본 이상 두 번이라도 안 될 이유는 없어. 일상에 지장가지 않을 정도로 간격을 두고 경험하다 보면 컨트롤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배우 인생 20년, 메소드 연기 인생 10년.
최정수만큼은 아니지만 메소드 연기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했다. 경험만큼은 지금 이 시기의 최정수와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봤다.
최정수는 해냈다. 배역과의 완벽한 일체화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
‘정수 선배가 해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지독한 후유증?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절정의 순간을 맛본 배우에게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또한 메소드 연기를 처음 배울 때, 최정수는 안시현에게 말했다. 몰입에 대한 후유증을 이겨 내지 못할 것 같다면 발조차 담그지 말라고 말이다.
지난 10년.
안시현은 후유증과의 싸움에서 늘 이겼다. 적절한 선을 지키며 후유증과 연기력을 등가교환해 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메소드 연기의 끝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차기작에서도 최고의 연기가 필요한 순간, 존재감을 마음껏 뿜어내고 싶었다.
‘한번 시도해 보자.’
안시현이 결심을 굳혔다.
이후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됐다.
안시현도 최정수도, 더 이상 배역과의 완벽한 일체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기작은?”
“느긋하게 쉬다가 『나는 간첩입니다』개봉 전후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래. 적당히 쉬다가 보는 게 좋지. 그때쯤이면 인터뷰도 나가고 본격적으로 홍보 시작할 테니 오디션 볼 때도 좋을 거고 말이야. 일부러 촬영장은 안 찾아갔지만, 시현이 네 연기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리더라. 거기에 그 경험까지 했으면 말할 것도 없지. 차기작도 분명 좋은 배역 따낼 수 있을 거다.”
“선배님이랑 같은 작품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응. 안 돼. 나 다음 달부터 촬영 들어간다. 늦어도 한참 늦었으니 다음 기회 노려.”
“쩝. 아쉽네요.”
“배 터지게 먹고 들어가서 푹 쉬어. 당분간 쉬면서 차기작 잘 검토하고. 비중 있는 조연 따내고 흥행에 성공하면 몇 년 내로 주연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안시현은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차기작에서 안시현이 노리는 건『나는 간첩입니다』의 리수철보다 비중 있는 배역의 수준이 아닌, 작품의 흥행을 좌지우지할 핵심 배역이라는 걸.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JM액터스와 계약하려는 거란 사실을 말이다.
캐스팅 된 이후에 말해도 늦지 않다고 봤다. 아직 대본조차 받아 보지 않았는데 설레발치는 건 안시현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맞아. 진수성찬 차려진 잔칫집에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넙죽넙죽 받아먹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휴식도 취하고, 봉사 활동도 하고, 차기작도 준비해야 하고, 거기에 메소드 연기의 정점도 다시 한 번 맛봐야 한다.
안시현은 예상했다.
자신의 휴식기가 제법 바빠질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