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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0화 (2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0화>

20화. 집에 가세요

류성웅의 출연 마지막 날.

그는 촬영 몇 시간 전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동선을 체크하고, 대본을 수차례 체크하고, 어떤 애드리브가 좋을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시현도 해냈다.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찌질함의 끝을 보여 주고야 말겠어.’

류성웅은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다. 동년배 중에서는 비교할 만한 배우를 찾기 힘들 정도다.

안시현이 회귀하기 전 역사에서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두 번이나 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나는 간첩입니다』에 함께 출연한 배우 중에서 류성웅보다 어린 나이에 정신 나간 연기력을 뽐내는 괴물이 둘이나 있다는 거였다.

한 명은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특유의 능숙한 감정 연기는 동년배 배우들을 무시하는 류성웅마저도 인정할 만큼 뛰어났다.

다른 한 명은 첫 촬영부터 메소드 연기로 소름을 끼치게 만들더니 허구한 날 곽상필 감독의 칭찬을 받았다. 심지어 마지막 출연 장면인 신 99에서는 영화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임팩트를 남겼다.

안시현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류성웅의 눈에도 10번의 촬영 끝에 보여 준 그 연기는 엄청났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류성웅의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안시현과 김진모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게다가 황시국 역은 출연 빈도가 제법 높기는 하나, 임팩트를 남길 만한 신이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류성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출연 장면인 신 109.

변절한 황시국이 정체가 발각되지 않은 남파공작원들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구걸하지만 살해당한 뒤 사고사로 위장당하며 제거되는 신이다.

그는 이 장면에서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안시현이 신 99에서 임팩트를 남긴 것처럼 말이다.

이를 위해 신 109의 예행연습을 수차례 끝마친 류성웅은 자신했다.

신 109의 촬영이 끝났을 때, 곽상필 감독이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 줄 거라고.

실제로…….

“류 배우, 그런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하려면 집에 가세요.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스럽네요.”

곽상필 감독의 시선이 달라지긴 했다.

‘……응? 집에 가라고?’

류성웅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   *   *

사실 곽상필 감독은 김진모와 안시현만큼은 아니지만 류성웅 또한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첫 촬영 당시의 연속된 NG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봤다. 담금질만 제대로 하면 주연 급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좋은 배우라고 판단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미와 귀에 탁탁 틀어박히는 허스키한 목소리, 거기에 준수한 연기력까지 지니고 있다.

평가가 박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류성웅은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는 내내 괜찮은 연기를 보여 줬다. 김진모와 안시현이 워낙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류성웅은 촬영 첫날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곽상필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줬지만…….

신 109.

마지막 출연 신에서 류성웅은 곽상필 감독을 실망시켰다. 지금껏 내렸던 좋은 평가를 번복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그의 실망감은 컸다.

“촬영 중단하고 오후에 다시 재개하겠습니다. 류 배우가 정신 못 차리면 오후에 다른 신으로 촬영 대체합니다. 정 안 되면 신 109에서 류 배우는 제외합니다.”

결국 곽상필 감독은 촬영을 중단시켰다.

지금 이 상태로는 촬영을 계속 이어 나간다고 한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류성웅을 배제하고 신 109를 촬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만큼 곽상필 감독의 실망감은 컸다.

연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지금껏 잘하다가 갑자기 왜 존재감에 목숨을 거는 거지? 황시국 역 자체가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데다, 신 109는 황시국이 메인이 아닌데? 영화가 개봉하면 자신이 돋보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신 99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리수철이었다. 극 후반부의 확실함 임팩트를 위해서 리수철의 존재감을 부각시켜야만 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신 109의 주인공은 황시국이 아니다.

강석우는 리수철의 죽음을 계기로 국가안전기획부와 북한과의 거래를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으로 넘어가서 언론의 힘을 빌려 진실을 폭로한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국가안전기획부 말단 직원 몇 명이 총대를 메는 걸로 끝났다는 거다. 이장혁 2차장도, 북한과 국가안전기회부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했던 최철만 상위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 약간의 피해가 있긴 했다.

최철만이 더 이상 위장 신분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 그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위장 신분을 내다 버린 대신 국가안전기획부의 비호를 받았다. 더 이상 남파공작원들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순 없었지만, 여전히 거래는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황시국은 위기에 처하게 됐다.

변절 후 방송에 나와 최철만 상위와 관련한 정보를 풀어내며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최철만이 북한과의 거래를 대가로 남파공작원들에게 황시국의 처리를 부탁하면서 신 109가 진행되는 거다.

신 109의 메인은 최철만이지 황시국이 아니다. 최철만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신이다.

그런데…….

류성웅은 남파공작원들로부터 제거당하는 황시국의 최후에서 지나치게 존재감을 높였다. 애드리브까지 더하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곽상필 감독의 기획 의도를 벗어난 해석이었다.

연기력이 조금 부족한 배우는 괜찮다. 상세한 디렉팅과 연출로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다.

성격이 나쁜 배우도 괜찮다. 아무리 성격이 나쁜 배우라도 최소한 자신의 앞에서는 디렉팅을 따를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만들 자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획 의도를 벗어난 해석을 하는, 영화 전체가 아닌 자신의 존재감만을 위해 연기하는 배우와 같이 작업하는 건 곽상필 감독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류성웅이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하. 시발. 왜 나한테만 지랄하는데? 안시현 그 새끼가 난리 칠 때는 가만 놔두더니, 내가 존재감 좀 드러내자니까 집에 가라고? 대놓고 사람 차별하는 거야? 생각할수록 기분 더럽네.’

지금의 류성웅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할 만큼 멘탈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대본 리딩 때부터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모든 관심이 쏟아졌다. 조연 배우들 중에서는, 20대 배우들 사이에서만큼은 가장 주목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김진모와 안시현은 갈수록 존재감을 드러냈다.

반면 류성웅은 신 109가 마지막 촬영임에도 이전까지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다.

문제는 애초에 황시국 역이 스스로 돋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감초, 영화 전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배역이라고 보는 게 맞다.

존재감 자체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출연 비중이 높다 보니 어설픈 연기력으로는 영화 자체를 망칠 수도 있는 역할이다.

실제로 류성웅은 좋은 연기를 통해 감초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 줬지만…….

그것과 별개로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이제 막 데뷔했으면서 곽상필 감독과 선배 배우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두 핏덩이들을 곱게 볼 수 없었다.

열등감은 곧 그의 이성적 사고를 막아 버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 109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곽상필 감독을 찾아가 사과하고 오후에 다시 신 109의 촬영을 이어 나갔을 거다.

촬영이 다 끝난 뒤에는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 좋은 배우가 될 거라는 곽상필 감독의 진심 어린 격려 또한 받았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그래. 당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봅시다. 존재감을 팍팍 드러내면 결국엔 무시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무시하면, 당신은 감독 자격이 없는 퇴물인 거야.’

류성웅은 끝끝내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몇 번의 리테이크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

결국 신 109에서 황시국의 사망은 김진모의 내레이션으로 대체하게 됐다.

*   *   *

한편 안시현은 김진모를 통해 신 109의 변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놀랐다.

“그래? 성웅 선배가 진짜 그랬다고?”

“어. 이석재 선배님께서 따로 불러 이야기를 했는데도 변화가 없어서, 결국 촬영을 포기하고 내레이션으로 대체하는 걸로 결론이 났어. 그 이후로 촬영장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고.”

“신 109에서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는 이유가 있나? 애초에 황시국은 윤활유 역할이지, 임팩트를 남기는 역할이 아닌데 말이야.”

“뭐…… 이유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닌데 우리가 알 바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류성웅이 신 109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것도,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아 출연 분량이 내레이션으로 대체된 것도 솔직히 의외였다.

이유야 대충 짐작이 됐다.

회귀 전 김진모와 함께 받았던 관심을 안시현이 뺏어갔기 때문일 테지만…….

‘알게 뭐야. 나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미안해할 이유가 있나?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안시현은 류성웅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안시현이 류성웅에게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는 내내 최선의 연기를 보여 주려 묵묵히 노력했을 뿐이다.

곽상필 감독이나 선배 배우들의 칭찬을 받는 걸 보고 열등감을 느낀 류성웅이 무리수를 던졌다고 한들, 그것이 안시현의 잘못이 될 순 없었다.

심지어 류성웅에겐 상황을 무마할 기회가 있었다.

중견 배우 이석재가 따로 불러 곽상필 감독이 대노한 이유를 설명해 줬을 때, 그때라도 자신의 실책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면 촬영은 재개됐을 거다.

그러나 류성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전히 신 109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이어 나갔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연기를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신 109에서 제외되는 거였고 말이다.

고작 한 신에서 빠지는 거니 큰 문제가 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안시현은 류성웅의 판단이 생각 이상으로 큰 여파를 미칠 거라 판단했다.

‘그 양반이 어찌되건 자업자득이란 생각밖에 안 드네. 신경 끄고, 난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안시현이나 김진모나 류성웅에 대한 관심은 찰나였다. 애초에 관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대화 정도에서 그쳤다.

오전 8시.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이 함께 옥탑방에서 나왔다.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기 전, 김진모가 슬쩍 안시현에게 물었다.

“근데 너 요새 뭐하고 다니느라 그렇게 바빠? 촬영 끝났으면 그냥 푹 쉬지, 너무 밖으로 나도는 거 아냐?”

“나? 봉사 활동 다니고 있어.”

“으응? 봉사 활동?”

“어. 나만의 휴식 방법이라고나 할까.”

김진모가 피식 웃었다.

“아주 그냥 이수철 실사판 납셨네. 이제 환경미화원으로 취직만 하면 되겠는데?”

“닥치라우, 동무.”

혹여나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생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최근 안시현의 모습을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휴식을 위해 봉사 활동을 다니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특이하긴 하지만 놀랍진 않았다. 배우는 많고 그만큼 휴식 방법 또한 다양한 거 아니겠는가.

“촬영 다 끝나면 나도 같이 봉사 활동 다닐까?”

“차 있으면 좋지. 끝나고 같이 가자.”

“오케이.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막상 하면 뭐든지 잘하는 남자거든. 봉사 활동도 거뜬하지.”

“개소리 그만하고 가기나 해. 가서 촬영 잘하고.”

“오냐. 이제 두 신 남았다. 이제 곧 해방이다!”

김진모가 운전대를 잡은 무쏘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안시현은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봉사 활동은 정말로 안시현이 휴식을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봉사 활동을 통해 리수철 역을 연기하며 쌓인 후유증을 조금씩 해소해 나가고 있었다. 다음 작품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자, 그러면 차기작 준비를 하러 가 보실까.”

온전히 휴식만을 위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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