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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1화 (2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1화>

21화. 10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 99 이후.

더 이상 출연이 없는 안시현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깐 들릴 법한데 보이지 않고 연락조차 없자 류성웅을 제외한 모두가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김진모를 통해 안시현의 근황을 체크했다.

촬영 내내 좋은 연기를 보여 주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항상 예의 바른 모습만 보여 줬다. 거기에 신 99에선 최고의 연기로 모두를 경악시켰다.

안시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문제가 있다면…….

“저도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서 정확히 모르는데, 봉사 활동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동거인인 김진모조차 신 99 촬영 이후 안시현이 뭘 하고 지내는지 명확히 모른다는 거였다.

그나마 김진모가 아는 건 안시현이 촬영을 끝낸 뒤 최정수를 찾아갔었다는 것과 며칠의 휴식 뒤 곧장 봉사 활동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런 것치고 안시현의 행적은 다소 의아하긴 했다.

허구한 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가끔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TV를 보며 집에서 일절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하고 다니는지, 진짜로 휴식을 취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의아함을 느낀 건 다른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봉사 활동을 다닌다고? 푹 쉬거나 놀러 다니는 게 아니고?”

“네. 자기만의 휴식 방법이라나? 아침에 저랑 같이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더라고요.”

“흐음. 혹시 차기작 준비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건 아닐 거예요. 한 작품 끝내고 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거든요. 심지어 메소드인데 그런 미친 짓을 하겠어요?”

“하긴. 제정신이라면 쉬면서 차기작 검토를 하겠지. 봉사 활동이 너무 의외라서 물어본 거야.”

“뭐, 본인이 휴식이라 생각하면 된 거지.”

김진모도,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심지어는 천하의 곽상필 감독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다.

안시현이 보이는 일련의 행보들이, 사실 휴식과 차기작 준비를 병행하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   *   *

1999년 7월 14일.

4월 말에 크랭크 인을 해서 두 달 하고도 14일을 더 촬영한 『나는 간첩입니다 』는 김진모의 내레이션 녹음만을 남겨 두고 공식 촬영이 모두 마무리됐다.

편집 과정에서 추가 촬영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촬영은 없을 예정이었다.

녹음은 JM액터스 소유의 녹음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안시현은 신 99 촬영 이후 처음으로 스태프와 배우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마지막 촬영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였다.

촬영 30분 전, 김진석 대표가 녹음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녹음실에 들어오자마자 환히 웃으며 곽상필 감독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아이고. 오랜만이야, 곽 감독.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들어? 이민 간 줄 알았네!”

“허허허. 요즘 좀 바빴습니다. 어째 형님은 날이 갈수록 정정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정정은 무슨. 안 아픈 데가 없어. 곽 감독도 건강 관리 잘해. 혹시 등산회 가입할 생각 있으면 말하고. 연예기획사랑 제작사 대표들끼리 건강 관리를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었거든.”

“오. 등산 좋지요. 땀 쫙 흘리고 내려와서 파전 한 입에 막걸리 한 잔 마시면 무릉도원 아니겠습니까?”

“역시 곽 감독이 뭘 안다니까. 오랜만에 한잔 어때?”

“저야 좋지요.”

간만에 만난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 감독은 긴 대화를 나누며 그간의 아쉬움을 풀었다.

곽상필 감독과 대화를 나눈 뒤, 김진석 대표의 시선은 안시현에게로 향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지척에 접근한 그가 안시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현아, 나랑 한 약속 잊은 거 아니겠지? 촬영이 끝났는데 어째 소식이 없다?”

“아, 안 그래도 슬슬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말 나온 김에 모레 바로 계약서 쓸까요? 내일 당장 해도 되는데 뒤풀이라서요.”

“모레? 당연히 좋지!”

안시현은 뒤풀이가 끝나고 모레 JM액터스와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슬슬 할 때가 되긴 했지.’

11월 초.

안시현이 차기작으로 노리고 있는 작품의 크랭크인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배역은 이미 캐스팅이 완료됐지만, 한 배역만큼은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어렵사리 캐스팅이 마무리된다.

안시현이 노리는 건 바로 그 배역이었다.

슬슬 대본을 받아 준비를 시작한다면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몰입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한 메소드 연기자들에게는 한 작품을 끝내고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는 게 필수다. 회귀 전 안시현도 연기 스타일을 메소드로 바꾼 이후에는 그 간격을 철저하게 지켰다.

연기 욕심이 앞서 휴식을 등한시한 메소드 연기자들이 정신적 문제로 힘들어하는 걸 많이 봐 왔다.

작품을 끝내고 최소 한두 달은 작품 생각하지 않고 푹 쉬는 게 좋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휴식도 취하고 차기작 준비도 하고, 얼마나 좋아?’

안시현은 봉사 활동을 다니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힐링을 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게 차기작 준비와 과정이 일치하는 것뿐이었다.

휴식 과정이 차기작 준비 과정과 일치하다면 큰 문제가 없다고 봤다. 실제로 회귀 전에도 딱 한 번이긴 하지만 휴식과 차기작 준비를 일치시켜 봤다.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었고 말이다.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안시현은 과감하게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다.

*   *   *

다수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김진모가 『나는 간첩입니다』의 대미를 장식할 내레이션의 녹음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떠난 그 해, 국가안전기획부는 32명의 남파공작원을 잡아들였고 8명을 사살했다. 뉴스와 신문은 연일 남파공작원 이슈를 대서특필했다. 미국 언론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폭로했지만 여론은 바뀌지 않았다. 대선은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간첩들의 편을 들고 그들을 보호하려 한 빨갱이 매국노가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왜곡된 다수의 여론에 묻혀 소음으로 전락했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이장혁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과 국가안전기획부와 내통하며 당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파공작원 최철만 상위의 이야기를 다룬다.

단순한 간첩 이야기를 다룬 게 아닌, 북한을 이용한 정치적 암투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의 마무리를 맡은 건 이장혁 역의 송강식도, 최철만 상위 역의 황영민도 아니었다.

곽상필 감독은 중책을 김진모에게 맡겼다. 타인의 시선으로 영화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하고 4년. 그사이 이장혁은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장이 됐다. 이중간첩 신분이 탄로 난 최철만 상위는 국가안전기획부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국가 안보 강연을 다니며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남파공작원들의 체포 소식이 다시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남파공작원들이 희생될까?”

『나는 간첩입니다』의 주인공 최철만 상위와 이장혁은 악인이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남파공작원들을 이용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남파공작원과 국가안전기획부 직원 모두 각자의 목적에 따라 움직일 뿐, 선인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영화에서 선인이라 부를 수 있는 주요 캐릭터는 단 한 명.

강석우가 유일하다.

그래서 강석우가 영화의 마무리를 맡게 된 거다. 악인의 시선이 아닌 선인의 시선에서, 변한 게 없는 현실을 응시하며 끝내는 게 곽상필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게 다였다.

“언제쯤 남한과 북한은 서로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게 될까? 나는, 내 조국을 되찾을 수 있을까?”

김진모의 긴 내레이션이 끝났다.

“OK. 수고했어요, 김 배우. 다들 수고했습니다.”

김진모는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좋은 배우였다. 거기에 훌륭한 목소리가 더해지며, 바뀌지 않은 현실에 대한 허탈함과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담아 좋은 내레이션을 해 줬다.

그렇기에 재녹음은 없었다.

짝짝짝.

곽상필 감독의 OK 사인과 동시에, 박수 소리가 녹음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은 마음껏 먹고 마시는 겁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공식 촬영이 종료됐다.

*   *   *

결과적으로『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은 곽상필 감독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끝이 났다.

굳이 예상을 벗어난 포인트를 찾자면 두 가지.

류성웅이 막바지에 존재감을 드러내려 난리를 쳤던 것과 안시현이 신 99에서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 것 정도?

전자는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문제 될 게 없었고, 후자는 영화의 흥행에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될 일은 없었다.

덕분에 곽상필 감독은 기쁜 마음으로 김진석 대표와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웃는 거 보니 결과물이 잘 나왔나 봐?”

“대중적 요소를 상당 부분 거세시킨 작품이라 대박은 어렵겠지만, 손익 분기점은 얼추 넘길 것 같습니다.”

“손익 분기점 넘기면 된 거지. 대중영화 감독에게는 그게 최고의 미덕이야. 그보다…… 감독의 시선으로 봤을 때 우리 진모 연기는 어땠어?”

김진석 대표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JM액터스의 대표가 아닌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묻는 것이었다. 아무리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 감독의 친분이 두텁다지만, 자칫 선을 넘긴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건이었다.

다행히 곽상필 감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명불허전이더군요. 진짜 형님이랑 형수님의 장점만 흡수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허허허. 그래? 우리 진모가 좀 하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 녀석 유치원 학예회 때부터 장난이 아니었다니까. 분명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될 거야. 얼굴 잘생겼고 목소리 좋아, 거기에 연기까지 잘하니 금상첨화잖아. 안 그래?”

“네. 아마 몇 년 내에 주연급으로 성장할 겁니다.”

“그래 주면 나야 바랄 게 없지.”

“진모야 걱정 없고…… 문제는 안 배우입니다.”

“안 배우? 시현이?”

“네.”

사실 김진모의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 거기에 아버지가 연예기획사 대표라는 든든한 후광까지 존재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사생활 논란만 없다면 좋은 배우로서 롱런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때문에 곽상필 감독은 성공이 보장된 김진모보다는 안시현 쪽에 더 관심이 갔다.

“20대 후반의 최 배우가 재림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간첩입니다』가 개봉하기 전에 못 도망가게 잘 잡아 두셔야 할 겁니다. 몇 년 내에 반드시 주연 배우로 성장할 재목이니까요.”

“평가가 엄청 후한데?”

“그만큼 좋은 배우라 생각합니다.”

곽상필 감독은 김진모와 안시현의 성장세가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내다봤다. 몇 년 내에 주연급으로 발돋움할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김진석 대표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이왕이면 안시현이 JM액터스라는 최고의 보금자리에서 자신의 연기를 마음껏 펼치기를 바랐으니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시현이 잡는 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최선의 조건으로 계약할 테니까.”

“하긴, 형님이야 워낙 배우들에게 많이 퍼 주는 걸로 유명하시니까.”

“그렇게 퍼 줘도 많이 벌어.”

JM액터스가 업계에서 배우에게 가장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걸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다. 좋은 조건으로 좋은 배우를 다수 확보하는 게 안정적인 수입 구조이기에 그렇게 하는 거였다.

따라서 안시현의 계약 조건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김진석 대표는 퍼 주지 못해 안달이 날 테니 말이다.

곽상필 감독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약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건, 본론을 꺼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위해서였다.

“JM액터스, 슬슬 더 키울 때 되지 않았습니까?”

“회사를 성장시킬 좋은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일전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자체 제작, 혹은 투자?”

“네.”

툭.

곽상필 감독이 시놉시스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곽상필 감독이 작성한 것, 하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작성된 시놉시스였다.

“이건…….”

“저랑 제 제자 놈 시놉시스입니다. 저는 좀 시간이 걸릴 테니, 제자 놈 입봉작부터 투자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이름을 걸고 100퍼 남는 장사일 겁니다.”

“네 제자라면 믿을 만하지.”

곽상필 감독의 제자가 누구인지 김진석 대표도 알고 있다. 때문에 완성될 대본의 퀄리티에는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느낌이 좋아.’

세간에서는 김진석 대표가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감이 오면 철저하게 계산기를 두들겨 손익을 계산하고 절대 손해 보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모두 맞아떨어지며 감이 좋다는 평가를 들어서 그렇지, 실상은 이성주의자에 가깝다.

그런 김진석 대표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감은 좋았으니 손익을 계산해 볼 단계였고, 그 결과.

‘돈 냄새가 난다.’

곽상필 감독의 제자가 메가폰을 잡게 될 입봉작에 투자한다면 JM액터스가 큰 이익을 남길 거라 결론지었다.

다만 그 사실은 김진석 대표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곽상필 감독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놉시스는 두 개였다. 제자의 입봉작이 아닌 다른 시놉시스 쪽에서 더 달콤하고 맛있는 향기가 났다.

“네 마지막 작품, 이건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보장된 진수성찬.

곽상필 감독의 인생 마지막 작품이 탐났다. 그 작품에 전액 투자를 하고 싶었다.

지금의 JM액터스 규모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꾸준히 성과를 내며 회사의 규모를 키운다면? 후한 계약으로 확보한 좋은 배우들이 투자한 작품에서 활약해 준다면?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는 충분히 가능하게 될 거다.

“10년 생각하고 있습니다.”

“10년이라…….”

김진석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끝내고 곽상필 감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10년 동안 잘 준비해 보자. 너도, 나도.”

“이 작품에 영혼을 갈아 넣을 겁니다. 단독 투자로 최대한 많이 뽑아 먹으십쇼. 형님께 받은 도움, 이걸로 갚고 후련하게 그만두렵니다.”

“허허허. 오냐. 돈 잔뜩 벌어 놓고 기다리마.”

70년대 말.

입봉 감독과 주연 배우 관계로 만났던 두 사람이,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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