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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2화 (2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2화>

22화. 마지막 페르소나

『나는 간첩입니다』촬영 종료 다음 날.

양평의 한 가든 식당을 빌려 뒤풀이가 진행됐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기분 좋게 자리를 즐겼다.

다만 그 자리에 류성웅은 없었다.

스케줄로 인한 불참이라며 사유를 전달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란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신 109.

등장하는 마지막 신에서 과욕을 부리다 결국 편집이 되고 만 당시의 해프닝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뭐, 류성웅이 없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괜히 와서 분위기를 망치느니 안 오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류성웅이 마지막에 보여 준 모습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뒤풀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건, 신 99 이후 좀처럼 소식이 없다가 마지막 내레이션 녹음 때야 간만에 얼굴을 비춘 안시현이었다.

“안 배우, 요즘 봉사 활동 하고 있다면서요?”

“네. 봉사 활동 하면서 푹 쉬고 있습니다.”

“차기작은 생각 좀 해 봤어요?”

“다음 달 말부터나 슬슬 준비하려고 합니다. 대본 검토하면서 천천히 고민해 봐야죠.”

“안 배우 실력이면 원하는 배역 얼마든지 따낼 수 있을 겁니다. 차분하게 검토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 골라서 작업하세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곽상필 감독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김진모와 안시현,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동갑내기 배우를 보며 오래 전부 써 오고 있는 시나리오 하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며 집필 중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어 제작을 포기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아닌 제자에게 넘길 생각도 했다.

어설프게 만드느니 안 하느니만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신 99를 10번 촬영하면서 막연함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작품,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

“안 배우, 김 배우.”

“네. 감독님.”

“솔직히 난 이번 작품을 끝내고 메가폰을 내려놓으려 했습니다. 감독으로서 표현하고 싶은 걸 대부분 다 해 봤고, 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아지고 있어서요. 아들 부부가 맞벌이이기도 하고요.”

『나는 간첩입니다』의 흥행 여부와 별개로 곽상필 감독은 이번 작품 이후 당분간 메가폰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함께할 좋은 배우를 물색하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문제는『나는 간첩입니다』가 망하며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곽상필 감독은 대중영화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다했다는 자가 진단을 했고, 결국 그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제자의 손에서 빚어지게 된다.

그 작품은 310만 관중을 동원하며 순익 분기점을 넘겼지만, 곽상필 감독의 유작이란 타이틀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성적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러했지만…….

“하지만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감독으로서 제 역량이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 마지막 한 작품 정도는 더 해도 될 것 같더군요.”

이번에는 달랐다.

흥행에 찬물을 끼얹은 송명현이 캐스팅되지 않았고, 그 자리를 꿰찬 안시현이 기대 이상의 열연을 펼쳤다. 거기에 김진모마저도 회귀 전과 비교했을 때 한층 성숙해진 연기력을 선보였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손익 분기점을 넘을 거다.

그리고 곽상필 감독은 자신의 마지막 시나리오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를 원하고 있다.

‘됐어. 됐다고!’

곽상필 감독의 말을 들은 순간,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초『나는 간첩입니다』를 회귀 후 첫 작품으로 선택하며 그가 바란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첫 작품부터 연기력을 인정받는 것, 『나는 간첩입니다』가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것, 그로 인해 곽상필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는 것.

분위기로 봐서는 세 가지 모두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 때까지 퇴고를 거듭할 테니까요. 최소 몇 년, 어쩌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겠죠. 그때가 됐을 때…… 안 배우와 김 배우가 함께해 줬으면 합니다.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이어진 말로 인해 안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얼떨떨함과 당혹의 과정을 거쳐,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고 경악했다.

‘와…… 시발, 잠, 잠깐만. 이거 진짜야? 꿈은 아니겠지?’

안시현의 기억에 따르면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주연은 총 셋이다. 곽상필 감독은 일찌감치 최정수에게 할당된 한 자리를 제외한 두 자리에 안시현과 김진모를 원하는 거였다.

“두 사람이, 나의 마지막 페르소나가 되어 주세요.”

*   *   *

뒤풀이 다음 날.

아침 운동을 하는 내내 안시현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씻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실실 웃어 댔다.

그 모습을 보며 김진모는 핀잔을 줬다.

“얼씨구. 아주 그냥 좋아 죽으시겠어. 곽 감독님의 말이 그렇게 좋았냐? 어제부터 과하게 흥분해 있네.”

“그러는 넌 안 좋냐?”

“나? 너무 좋아서 이미 죽은 것 같은데?”

“크흐흐. 미친놈.”

정작 핀잔을 준 김진모마저도 미친 것처럼 계속해서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곽상필 감독이 해 준 말이 기분 좋았다.

무려 마지막 페르소나가 되어 달라니!

영화계의 거장으로부터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실감이 없어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들뜨지만은 않았다.

곽상필 감독의 제안은 두 사람이 주연급으로 성장한다는 가정 아래 한 거다. 주연급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정체되거나 도태된다면 무의미해진다.

착실하게 최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야 한다. 곽상필 감독의 마지막 작품에 캐스팅됐을 때, 이견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다.

때문에 들뜨는 건 딱 오늘까지만 하기로 했다.

“아빠가 점심 같이 먹고 계약서 쓰자더라. 괜찮은 한정식집 예약해 놨대.”

“한정식? 좋지.”

『나는 간첩입니다』의 뒤풀이까지 끝난 상황.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안시현은 JM액터스와 계약하기로 했다.

다만 김진모는 아니었다.

다음 작품 캐스팅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직접 하고 싶었다. 『나는 간첩입니다』개봉 후 JM액터스와의 관계가 알려지겠지만, 차기작 배역은 오디션을 통해 직접 따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때문에 계약을 하는 건 안시현 혼자였다.

청담동의 한 한정식집.

그곳에서 안시현과 김진모, 그리고 김진석이 마주앉았다. 계약서를 쓰기 위해 만난 자리이기에 식사를 하면서 곧바로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선금은 내일 바로 지급될 거다. 조건도 네가 원하는 대로 모두 맞춰 줄 거고.”

“감사합니다. 선금 까려면 부지런히 일해야겠네요. 광고나 화보 촬영 같은 건 들어오면 다 소개시켜 주세요.”

“『나는 간첩입니다』개봉하고 나면 몇 개 들어올지도 모르겠네. 아, 개봉 전에 인터뷰 몇 개만 하자.”

“그거야 당연히 해야죠.”

“나머지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사고만 치지 마.”

안시현이 JM액터스와 계약하면서 원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거액의 선금을 받는 것, 그리고 모든 스케줄은 전적으로 자신과 상의한 뒤에 결정할 것.

그 외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이 김진석 대표가 알아서 다 챙겨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식사 후, 계약서를 몇 차례 검토한 안시현이 도장을 찍었다. 김진석이 제시한 계약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봤다.

김진석 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안시현이 JM액터스와 계약할 거라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구두로 약속하는 것과 실제로 도장을 찍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이 바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아들의 절친이고 JM액터스의 조건이 후한 편이라지만, 좋은 배우를 빼 가기 위해 다른 연예기획사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도장을 찍기 전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건 연예기획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도장을 찍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고. 이제야 좀 속 시원하네. 시현아. 회사 돌아가서 사진 한 장 찍자. 기사 좀 뿌리게.”

“네. 당연히 그래야죠.”

“진모 너도 같이 가자. 차기작 검토할 겸 대본 몇 개 받아서 가.”

“전 괜찮아요. 이미 차기작 정해 놨거든요. 좀 쉬다가 9월 초에 오디션 볼 거예요.”

“그래? 차기작도 좋은데 집에도 좀 들러라. 네 엄마가 아들 얼굴 잊어버리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곧 엄마 생신이니 그때 맞춰 갈게요. 가는 김에 좀 있다가 오려고요.”

“허허허. 네 엄마가 아주 좋아하겠구나. 너 언제 올지 모른다고 매일 네 방 청소하던데 말이야.”

김진모는 식사 후 자리를 떴다.

사실 식사 자리에 함께한 것도 일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김진석 대표와 안시현 둘이 있으면 어색할까 봐 걱정해서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걸 봤으니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진모가 떠난 뒤,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의 차를 타고 JM액터스 사옥으로 이동했다.

황영민의 배려를 받아 연습을 위해 매주 한두 차례 방문했던 장소이지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소속 배우로서 당당하게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회귀 전에는 김진모의 친구로서, 무명 배우로 눈치를 보면서 오간 기억이 있어 의미가 남달랐다.

‘이번 생에는, 내가 아니라 직원들이 눈치를 보게 되겠지만.’

무명 배우 안시현은 이제 없다.

단역이 아닌 조연으로 시작했다. 『나는 간첩입니다』가 개봉하면 주목을 받을 거고, 차기작에서 그 기세를 이어 나가리라.

기사에 올라갈 사진을 찍은 뒤, 안시현이 김진석 대표에게 부탁을 했다.

“아저씨. 아니, 대표님. 차기작 검토를 위해 시놉시스랑 대본 좀 가져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마음껏 가져가렴.”

“감사합니다.”

“가자. 직접 안내해 주마.”

김진석 대표가 안시현을 데리고 간 곳은 제2회의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 위에 온갖 시놉시스와 대본과 시나리오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원하는 걸 고르렴. 다 가져가도 되지만, 검토하는 네가 힘들겠지?”

“다는 무리죠. 대략 10개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딱 적당하네. 업무 좀 보고 있을 테니, 검토 끝나면 대표실로 오거라. 매니저 소개시켜 주마.”

“네, 그럴게요.”

김진석 대표가 나가고, 제2회의실에 혼자 남게 된 안시현이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 중에 그 시나리오가 있을 거다.’

족히 몇 백 개는 넘을 듯한 시놉시스와 대본과 시나리오의 무덤 속에서 안시현이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반드시 그 작품이어야만 했다. 다른 작품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이 시기에서 따낼 수 있는 최선의 배역을 위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시나리오를 찾기 위해 안시현은 검토를 시작했다.

내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제목만 보고서 원하는 작품을 찾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한 시나리오를 손에 쥔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혹여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기우였다. 일부를 뒤졌을 뿐인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원하는 시나리오를 찾아냈다.

‘역시 있었어. 공식 오디션은 다 끝났고…… 8월 말에 비공개 오디션을 보면 되겠지? 그때까지도 캐스팅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일 테니까.’

공식 오디션이 끝난 작품일지라도 캐스팅이 확정된 게 아니라면 오디션은 가능하다. 특히나 다수의 좋은 배우를 보유한 JM액터스는 그 과정이 더욱 쉽다.

다른 규모 큰 연예기획사도 가능한 일이지만…….

안시현이 JM액터스를 택한 건, 해당 작품의 비공개 오디션을 자리를 마련하려면 JM액터스 소속인 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김진석 대표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안시현이 대본 몇 개를 더 챙겼다. 하나만 고르면 대놓고 노린 티가 나니 위장용이었다.

“다 골랐어?”

“네. 어떤 작품을 할지는 천천히 검토해 보고 늦지 않게 말씀드릴게요.”

“배우에게는 연기만큼이나 작품 고르는 안목도 중요하다는 거 명심하렴.”

“걱정하지 마세요,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비공개 오디션 예정일까지 약 한 달.

안시현은 리수철과 결별하고 새로운 캐릭터와 짙은 스킨십을 나눠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단 하나.

‘이사하고 고향 내려갔다 와서, 닷새 전까지는 봉사 활동에 전력투구한다.’

봉사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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