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4화>
24화.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회귀 후.
안시현은 출연 작품을 놓고서 고민이 많았다.
데뷔작이 회귀 전과 같은 『나는 간첩입니다』였지만 배역이 달라졌다. 단역이 아닌 조연 리수철이었고, 회귀 전보다 비중이 높아졌다.
당연히 차기작 또한 회귀 전과 달려져야 한다.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작품을 골라야 할까?
안시현은 앞으로 상영될 영화와 드라마가 각기 어떤 결과를 내는지 상당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은 선택지에서 모조리 배제시켰다.
성공이 보장된 작품에 숟가락만 얹을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차려진 밥상을 넙죽 받아먹는 건 안시현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진정한 국민배우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연기력만으로도 영화를 흥행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래야 자신이 더욱 돋보이고 빛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차기작은 흥행에 실패한,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작품들에서 고르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기준점이 정해졌다.
작품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나는 간첩입니다』처럼 특정 사유로 인해 흥행에 실패한 아쉬운 작품을 선택하자고 말이다.
『나는 간첩입니다』가 리수철 역을 맡은 송명현이 개봉 며칠 후 대형 사고를 쳐서 흥행에 영향을 미친 거라면, 안시현이 이번에 노리는 작품의 경우는 한 배우의 연기가 문제였다.
시나리오도, 연출도,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다만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투톱 중 한 명인 배우의 연기력이 기대 이하인 게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다.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사회 정서상 그 배역을 꺼려하는 배우들이 많았고, 그로 인해 기준치를 낮춰 캐스팅해야만 했으니까.
그 결과가 손익 분기점 돌파 실패였다.
개봉 첫 주의 동원된 관객이 총 관객의 반절 가까이였을 정도로, 대중과 평론가들의 제법 날 선 비판을 들으며 실패를 맛봤다. 완성도 낮은 주연 배역이 치명적인 평가절하 요인으로 작용했다.
제작비의 절반 정도만 간신히 건진 영화.
하지만…….
만약 캐스팅에 실패한 배역을 연기력 좋은 배우가 완벽하게 소화해 준다면? 감독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움직여 준다면?
안시현은 흥행에 성공하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자신이 맡길 바랐다.
이는 해당 배역이 탐나서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시기에 주연을 맡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이것밖에 없어.’
안시현은 회귀 전보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고 싶었다.
회귀 전 김진모는 세 번째 작품에서 곧장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그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안시현이 원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김진모와 다른 게 있다면,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선택지가 많다는 것 정도였다.
두 번째 작품에서 주연을 맡는다. 이를 바탕으로 세 번째 작품으로 노리고 있는 드라마에서 주연을 따내 배우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진다.
그것이 안시현이 현재 추구하는 목표였다.
* * *
『형아, 동생』.
안시현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의 이름이다.
주지성은 『형아, 동생』에서 동생 역이다. 다시 말해 작품의 투톱 중 한 명이라는 거다.
안시현은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주지성은 현실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어설픈 연기력이라면 캐릭터성이 무너질 위험부담이 존재하지만, 연기에 자신만 있다면 배우의 연기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배역임이 분명했다.
한편, 안시현의 말을 들은 김진석 대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알고 찔러 보는 걸까, 아니면 순수하게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를 꺼낸 걸까? 봉사 활동까지 갔다는 걸 보면 알고 찌른 것 같기도 한데…….’
『형아, 동생』은 김진석 대표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감독과 개인적인 친분도 두텁고, 시나리오를 쓸 당시 김진석 대표가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안시현이『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을 끝마치자마자 봉사 활동을 다닌 게 단순히 우연인지, 아니면 『형아, 동생』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는지 말이다.
‘뭐……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시현이가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배역을 따낼 가능성이 제법 높다는 거야.’
물론 호기심에 그쳤다. 안시현에게 물어보지도, 물어볼 이유도 없다고 판단했다.
핵심은 안시현이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수준의 연기력을 이번에도 보여 줄 수 있다면, 『형아, 동생』오디션을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현 상황에서 주지성 배역에 가장 근접한 배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속 배우가 오디션을 원하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회사가 할 일이다.
‘쉬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번 기회에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김진석 대표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담배를 꺼내 문 뒤, 곧장 『형아, 동생』의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시현아.”
“네, 대표님.”
“식사하고 바로 연습실 가야겠다. 저녁에 바로 오디션 보자고 하는데, 괜찮겠지?”
“물론이죠. 전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비공개 오디션이 확정됐다.
* * *
혜인원.
『나는 간첩입니다』에 투자를 했던 영화사 대표실에, 『형아, 동생』의 감독인 최한수가 방문했다. 투자사 정기 보고를 위한 만남이었다.
혜인원의 대표와 최한수 감독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지만 투자사와 감독의 관계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기에 분위기가 다소 경직됐다.
게다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었다.
“오디션은 어땠어?”
“괜찮은 배우가 없었습니다. 2차 후보군에 오른 배우들에게 캐스팅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거절할 만도 하지. 제대로 연기 못하면 본전치기도 못할 배역이니까. 그만한 연기가 되는 20대 배우 구하기가 어디 쉽겠어?”
“후우. 출연료를 높여 준다 해도, 권한을 대폭 늘려 주겠다고 해도 다 소용없네요. 괜찮은 배우 어디 없을까요?”
“수소문 좀 더 해 보자. 그래도 안 되면 제작 좀 미루고. 이 작품, 주지성이 중심을 잡아 주지 못하면 망해.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네.”
다른 배역은 캐스팅이 모두 완료됐다.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로 꾸렸기에 문제는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주지성 역이었다.
배역의 특성상 20대 초중반, 아무리 높게 쳐줘도 동안인 20대 후반의 배우가 필요하다. 거기에 연기력 또한 검증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조건에 맞는 배우들이 죄다 캐스팅을 거절했고, 오디션에 참여한 배우들 중에는 좀처럼 마음에 드는 이가 없다는 거였다.
무려 5차까지 가는 공개 오디션과 10번이 넘는 비공개 오디션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핵심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구하지 못하다 보니 촬영 일정도 확정 짓지 못하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최한수 감독은 김진석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저 지금 혜인원입니다.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제가 이따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혜인원 방문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야.
“그럼 짧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지성 배역, 아직 캐스팅 안 끝났지?
“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 나누던 참입니다. 마땅한 배우를 찾기가 어렵네요.”
-우리 쪽에 괜찮은 배우가 있는데 만나 볼 생각 있냐? 장담하는데, 연기력으로 실망할 일은 없을 거다.
“혹시 진모를 추천하시려는 거라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진모의 연기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주지성 역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도 알아. 그래서 이야기도 안 꺼냈잖냐. 진모 아니니까 걱정 말고, 말 길어 봐야 선입견만 생길 테니 만나서 직접 봐. 잠깐 시간 낸다고 해서 손해 볼 거 없잖아. 안 그래?
김진석 대표의 말이 맞다.
공개 오디션과 비공개 오디션 모두 마땅한 성과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성에 안 차는 배우가 주지성 역을 맡거나, 그게 아니면 제작을 미뤄야 한다.
이 상황에서 배우 한 명 더 비공개 오디션을 본다고 한들 손해 볼 건 눈곱만큼도 없다.
최한수 감독이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가능합니까?”
-이쪽은 지금 당장도 가능해. 얼른 연기 보여 주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어.
“그럼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최한수 감독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혜인원 대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내 혜인원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누군지 알 것 같네.”
“JM액터스 소속 20대 배우 중에 진모보다 더 좋은 배우가 있습니까?”
“좋은지는 모르겠고, 스타일이 다르지. 메소드거든. 연기력도 준수한 편이라더라. 곽 감독도 극찬하던데.”
“메소드라……. 그래서 비공개 오디션을 요청했군요.”
“진석 형님을 쏙 빼닮은 진모는 주지성 역에 어울리지 않지만, 메소드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일단 한번 만나 봐. 혹시 알아? 기대도 안 했는데 마음에 쏙 들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최한수 감독은 진심으로 바랐다.
난데없이 김진석 대표가 내민 것이, 썩은 동아줄이 아닌 황금 동아줄이기를.
* * *
식사를 끝내고 JM액터스 사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시현은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그사이 얼마나 더 발전했을지 구경이나 해 볼까?’
김진석 대표는 내심 기대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촬영 기간 동안 안시현은 연습을 하면 한수록 연기력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신 99를 촬영하고 나서 두 달이 넘게 지났다.
푹 쉬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쉰 것도 아닌 기간 동안, 안시현의 연기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궁금했다.
‘자신 있게 주지성 역 비공개 오디션을 보겠다고 한 걸 보면 뭔가가 있겠지. 자, 최 감독 오기 전에 맛 좀 보여 줘 보렴. 궁금해서 미치겠으니까.’
하지만.
김진석 대표의 기대와 달리 안시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갈아입고서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는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았다.
비공개 오디션을 앞두고 보여 주는 비정상적인 여유로움에 천하의 김진석 대표마저도 당황했다.
“시현아, 그래도 비공개 오디션인데 연습이라도 하면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에이. 괜찮아요. 저 준비 잘했어요. 믿고 지켜봐 주세요. 솔직히 지금 반짝 연습한다고 오디션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다만…… 음, 그래. 혹시 오디션 볼 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렴. 가능하면 다 준비해 주마.”
“물 한 병하고 봉지 한 장과, 그리고 걸레 여러 장이면 될 것 같아요.”
“박 대리,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대표님.”
물 몇 병과 봉지 한 장과 걸레 여러 장.
『나는 간첩입니다』의 오디션을 볼 때에 비하면 많은 걸 준비하지 않았지만, 안시현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간첩입니다』오디션 당시엔 송명현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와 함께 오디션을 봐야 했고, 지금은 마땅한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소품의 준비 차이로 결과가 정해지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중요한 건 소품을 준비하는 게 아닌, 주지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구축으로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라고 봤다.
한편.
‘그 신을 보여 주려는 건가? 임팩트는 확실하겠군.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면 말이야.’
물 몇 병과 걸레 몇 장의 준비물을 보면서 김진석 대표는 안시현이 준비한 신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덕분에 판단이 빠르게 섰다.
『나는 간첩입니다』촬영 기간 당시의 캐릭터 구축과 연기력을 보여 준다면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고, 급하게 준비해서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다른 배우에게 기회가 넘어가게 되리라.
과연, 안시현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을까?
그가 구축한 주지성 캐릭터의 맛은 어떨까?
김진석 대표가 들뜬 가운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최한수 감독이 JM액터스 사옥에 모습을 드러냈다.
“6시에 온다더니 5시 50분에 와 놓고 늦기는 무슨. 오랜만이야, 최 감독. 살 좀 빠졌네?”
“하하하. 요즘 마음고생이 좀 심해야지요. 이쪽이 형님이 말한…….”
“반갑습니다, 최한수 감독님. 오늘 비공개 오디션을 요청한 배우 안시현입니다.”
“반가워요, 안시현 배우님. 피차 본론은 정해져 있으니 바로 시작할까요? 혹시 준비할 시간 필요하나요?”
“아닙니다. 바로 가능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최한수 감독은 몸이 달아 있었다.
주지성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줄 배우를 찾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신뢰가 두터운 김진석 대표가 자신 있게 소개한 배우이니만큼 얼마나 좋은 연기를 보여 줄지 기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주지성이다. 나는 주지성이다. 나는…….’
몸이 달아 있는 건 안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는 완벽했다.
『형아, 동생』의 비공개 오디션을 보기 위해 『나는 간첩입니다』신 99 촬영 이후 많은 시간을 봉사 활동에 할애했다.
휴식을 병행하며 주지성 캐릭터 구축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해냈다.
이제는 자신이 주지성 역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캠코더로 촬영을 하는 가운데 시작된 비공개 오디션.
안시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벽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