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5화>
25화. 돌고 돌아
“어느 신을 준비했습니까?”
“신 75입니다.”
김진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역시나, 물과 봉지와 걸레를 요구했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안시현은 비공개 오디션을 위해 신 75를 준비해 왔다.
주지성은 영화 내에서 투톱인 것에 비해 대사가 적은 편인데, 이는 최한수 감독이 정해진 대사보다는 애드리브의 비중을 높여야 주지성의 캐릭터성이 산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신 75는 주지성의 모든 신을 통틀어 대사가 가장 적다. 그만큼 애드리브의 비중이 높다. 어설프게 준비했다면 본전도 못 건질 신이다.
그럼에도 안시현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덤덤한 태도에서는 얼핏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최한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네. 10초만 주십시오.”
10초 후.
눈을 감았다 뜬 안시현이 주지성 캐릭터에 몰입하며 비공개 오디션이 시작됐다.
“신 75. 마당에서 일광욕을 하던 주지성. 분홍색 나비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간다.”
10초의 준비 시간.
몰입을 준비하기에 여유로운 시간이 아님에도, 최한수 감독이 ‘신 75’라고 말하자마자 안시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는 간첩입니다』때처럼 배역에 몰입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극도로 짧았다.
“분홍색 예쁘다, 베이커 밀러 핑크는 마음 편하게 해 줘요, 분홍색은 빨간색과 흰색을 혼합…….”
연기를 시작한 안시현의 말투는 뭔가 이상했다.
기본적으로 지나친 하이 톤이고, 높낮이가 맞지 않았으며, 꽤 자주 음이탈을 하기까지 했다.
‘특징을 아주 잘 살렸어.’
안시현의 대사는 최한수 감독을 만족시켰다.
일단 시작은 합격이었다.
안시현은 주지성 캐릭터 특유의 말투를 아주 잘 표현해 냈다. 거기에 대사와 관련된 지문이 ‘분홍색에 대해 이야기한다.’가 전부임에, 계속해서 분홍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쉴 새 없이 쏟아 냈다.
거의 대사를 만들어 내는 수준의 애드리브였다.
안시현은 자신이 어설프게 준비한 게 아니라는 걸, 작심하고 주지성 역을 따내기 위해 준비해 왔다는 걸 시작부터 작정하고 보여 줬다.
안시현의 준비성을 보여 준 건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행동 또한 일반인들이 보여 주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벽을 향해 걸어가며, 계속해서 분홍색과 관련된 온갖 정보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이내 벽에 부딪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손을 뻗고 손끝을 정신 사납게 움직이면서 대사와 걸음을 반복했다.
가상의 분홍색 나비를 따라 넋을 놓고 움직이는 모습은 흠잡을 데 없는 주지성 그 자체였다.
“한참을 걷던 주지성, 나비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주위들 둘러본다. 자신이 낯선 장소에 와 있음을 깨닫고 패닉에 빠진다.”
우뚝.
안시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어…… 슈퍼…… 여기 슈퍼 아닌데…….”
주위를 둘러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랐고,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손끝의 움직임이 점전 격렬해졌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몸짓.
그런 안시현을 향해, 최한수 감독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무슨 일 있으세요? 괜찮아요?”
“집, 집에 가야 돼요. 7시 되면 형아 와요. 밥 먹어야 돼요. 꼭꼭 씹어 먹어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 분홍소시지에 김치와 김, 된장국에는 고추 두 개 넣어요. 변기 뚜껑 올리고 소변 봐요. 지성이 집에 가야 돼요.”
안시현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워낙 뒤죽박죽이라 화두가 어디로 튈지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려웠다.
특이한 건, 대화를 나누면서도 최한수 감독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최한수 감독이 아닌 그와 벽 사이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대사를 쳤다.
그리고는…….
“화, 화장실 가야 돼요. 변기 뚜껑 올려야 돼요. 마당에서 소변 누면 냄새 나요. 지성이 집 어디로 가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왼손을 바지 뒤쪽으로 뻗었다.
허리춤에 미리 달아놓았던 물이 가득 담긴 봉지를 손가락으로 살짝 찢었다. 물이 흘러나오며 새하얀 트레이닝복을 흠뻑 적셨다.
신 75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주지성은 자폐성 장애인이다.
5살 아이 수준의 지능을 지닌 20살 청년이며, 분홍색과 소시지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용변을 보지 않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에 슈퍼 갈 때를 제외하면 집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성은 분홍색 나비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간다. 수요일과 토요일이 아님에도 대문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항상 가던 길을 한참 벗어나 있었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당황하며 패닉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소변까지 마려운 상황.
그리고 결국,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준 행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 바지에 소변을 누고 만다. 용변은 깨끗이 청소된 집 안 화장실에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불러온 참사였다.
이게 신 75의 전부다.
별거 없어 보이지만 연기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주지성 혼자서 끌고 나가야 하는 신이다. 자폐성 장애 특유의 상동행동과 관심증상,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의 패닉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가 핵심이다.
어설픈 연기로는 본전도 못 건진다.
괜히 다른 배역의 캐스팅이 모두 마무리됐음에도 주지성 역만 지지부진한 게 아니었다.
자폐성 장애를 표현하라고 했더니 지적 장애를 표현하는 배우도 있었고, 상당수의 배우들이 제대로 된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다.
단 한 사람, 안시현만큼은 달랐다.
자폐성 장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구축한 게 확 티가 났다. 거기에 메소드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오죽하면…….
‘오디션을 시작하기 전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자폐성 장애인을 데려왔다고 생각했을 거야.’
오디션 시작 전 미리 대화를 나눴음에도,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자폐성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안시현의 연기는 좋았다. 자폐성 장애의 특징을 제대로 짚고 잘 표현해 냈다.
여섯 번의 공개 오디션과 그보다 더 많은 비공개 오디션을 치르며, 처음으로 자폐성 장예인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연기를 보게 됐다.
‘이 배우와 함께라면…… 할 수 있어. 내가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덕분에 최한수 감독은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마침내, 먼 길을 돌고 돌아 찾았다.
진짜 주지성을 세상에 표현해 줄 배우를.
* * *
신 99 이후.
안시현은 배역과의 완벽한 일체화를 위해서 노력했다. 이는 주지성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자폐성 장애인을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리수철 때와는 달랐다. 주지성 그 자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어설픈 몰입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과 장애인인 것 같은 연기는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봉사 활동을 다닌 거다.
배우라는 걸 미리 밝히고 봉사 활동을 하며 자폐성 장애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말하는지를 직접 느꼈다.
그리고 이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작정하고 한 봉사 활동 덕분에 안시현은 비공개 오디션에서 사용할 주지성 캐릭터 구축을 빈틈없이 끝마칠 수 있었다. 폭우가 쏟아져도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만큼 촘촘했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은 또 하나의 성과를 냈다.
신 99 이후 고민하던 배역과의 완벽한 일체화를 어느 정도 의지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나름대로의 합의점을 찾았다.
몰입감을 조금 더 낮추는 대신, 그만큼 후유증도 줄어드는 선에서 원할 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년 연기 내공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물론 그마저도 일반적인 연기보다는 후유증이 심해 자주 사용할 수 없지만, 확실한 연기력이 보장되는 히든카드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리고 안시현은 비공개 오디션에서 과감하게 합의점을 찾은 연기를 선보였다.
안시현이 예상한 캐스팅 확률은 딱 절반.
그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주머니 속을 탈탈 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과적으로.
“안시현 배우님.”
“네.”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고 오세요. 자유연기는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안시현은 판단은 적중했다.
자유연기를 따로 보지 않겠다는 말은, 지정연기가 마음에 들었으니 곧장 인터뷰로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9부 능선을 넘은 것이다.
안시현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 75를 선택하길 잘했어.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 주기에는 이 신만큼 적절한 게 없지.’
주지성 역을 따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캐릭터 구축과 그 캐릭터를 표현해 줄 수준급 연기력이 필요하다.
안시현은 신 75로 그 두 가지를 모두 보여 줬다.
의도적으로 대사가 많지 않은 신을 택했다. 대사가 적은 대신 자폐성 장애의 특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신이 오디션에서 더 적합하다고 봤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을 걸레로 닦고 뒤처리를 한 뒤,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안시현이 연습실에 다시 들어오자 최한수 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주지성 캐릭터를 구축했습니까?”
“자폐성 장애인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며 그들과 친해지려 노력했고, 그들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하며 깨달았습니다. 아, 저들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이구나. 다만 세상을 향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구나.”
“…….”
최한수 감독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형아, 동생』은 최한수 감독이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과 함께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목표로 한 건 단 하나.
대중들이 자폐성 장애인을 선입견 없이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그들이 그저 우리와 표현 방식이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걸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모두가 그럴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관객의 10%, 아니 단 1%라도 선입견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안시현과 함께라면 그게 가능할 것 같았다.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줬는데 마음가짐마저 완벽한 이 배우와 함께라면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았다.
황금이 아닌, 다이아몬드 동아줄을 잡았다.
그가 다시 말을 이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잔뜩 충혈된 눈동자를 한 채 안시현의 손을 잡았다.
“안시현 배우.”
목소리도 떨리고, 손도 떨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잘……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결국에는 안시현의 손등이 살짝 젖고 말았다.
* * *
비공개 오디션을 끝마친 뒤.
박정상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며, 안시현의 입가에서는 좀처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기분 좋나 보네. 너 이렇게 웃는 거, 담당하고 나서 처음 보는 거 같아.”
“당연히 좋죠. 두 번째 작품에서 주연 배역 따낼 수 있는 배우가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렇긴 하지. 게다가 최한수 감독님이면 이 바닥에서 꽤나 인지도도 있는 분이시니까, 땡 잡은 거라고 보면 되려나?”
“1등 복권 긁은 거죠. 흐흐흐.”
리수철에 이어, 아니 리수철보다도 더 안시현이라는 배우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배역을 따냈다. 절정의 메소드 연기로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확률 50%짜리 도박수가 제대로 적중했다.
리수철 역에 이어 주지성 역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2002년에 방송할 한 드라마의 주연 자리를 꿰찬다.
그 큰 그림을 위한 또 하나의 밑바탕이 완성됐다.
또한…….
‘이걸로, 은혜를 조금 갚을 수 있었지.’
안시현은 최한수 감독에게 입었던 은혜를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갚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 안시현의 인생작인 『위장취업』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바로 최한수였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음에도 가장 티켓 파워가 떨어지는 안시현을 과감하게 주연으로 캐스팅했고, 안시현이 아닌 다른 배우와 함께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해 줬다.
그 결과.
위장취업은 흥행에 성공했고, 안시현은 생애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에서 주연 배역을 따내고, 최한수 감독에게 입은 은혜도 갚고, 안시현에게 있어 『형아, 동생』은 최선의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캐스팅도 끝났겠다, 이제 제대로 준비해 보자고.’
첫 대본 리딩이 예정된 9월 중순.
안시현은 그때까지 조금 더 자신을 담금질하기로 각오를 다졌다. 보다 완벽하고, 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주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