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6화>
26화. 그 미친놈이구나
비공개 오디션 후.
최한수 감독과 간만에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김진석 대표가 물었다.
“동민이는 잘 지내냐?”
“항상 똑같죠. 하루종일 그림 그려요.”
“동민이가 이제 18살인가?”
“네.”
“시간 참 빠르네.”
최동민.
자폐성 장애가 있는 최한수 감독의 외동아들이자, 『형아, 동생』의 모티브가 된 18살 소년.
김진석 대표는 예전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몇 년 전.
최한수 감독은 김진석 대표를 찾아가 서럽게 울며 꼭 만들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고, 그런데 감정이 이성을 집어삼켜 힘드니까 도와 달라 절규했었다.
이후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결국『형아, 동생』은 캐스팅이 끝났다. 가장 걱정이 많았던 주지성 배역은 다수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안시현이 맡는 결로 확정이 났다.
사실 경쟁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민망한 감도 있었다.
주지성 배역을 원한 배우들 중 오로지 안시현만이 주지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으니까.
“솔직히 도와주긴 했지만, 난 네가 『형아, 동생』을 만든다고 할 때부터 반대했다. 아무리 각색을 했다고는 하지만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성공하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주지성 역을 제대로 소화해 줄 배우를 찾는 것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으니, 형님이 걱정을 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아마 시현이가 주지성 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성에 안 차는 배우와 무리를 해서라도 작업하려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망했겠죠.”
성에 안 차는 배우와 작업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을 때까지 미루는 것.
최한수 감독은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후자가 옳은 판단이지만 자신은 전자를 택할 거란 걸, 『형아, 동생』의 제작을 포기하지 못할 거란 걸 말이다.
어리석은 판단이란 건 안다. 알고는 있지만, 어디 사람 일이 늘 마음먹은 대로만 되던가.
그렇기에 주지성 역에 대한 이해와 캐릭터 구축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안시현이란 배우가 나타나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거 하나만 명심하자. 메가폰을 잡은 순간만큼은 감정을 걷어 내. 담백하게 가자고. 네 감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순간 영화는 신파극으로 변절되고 말 거야.”
“후우. 그래야죠. 겨우 주지성을 제대로 표현해 줄 배우를 찾았는데, 제가 망치면 안 되잖습니까.”
먼 길을 돌고 돌아 안시현이라는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됐다. 다른 배우들 또한 연기력은 모두 검증된 좋은 이들이다.
최한수는 자신의 역량을 모두 발휘해 『형아, 동생』의 완성도를 높이리라 다짐했다.
* * *
오디션 합격 다음 날.
안시현은 부모님과 김진모에게 전화해서 오디션 합격 소식을 알렸다.
부모님은.
-주연? 조연 아니고 주연 맞지? 독립 영화도 아니지? 세상에…….
-여보, 뭐하고 있어요! 일단 소부터 잡아야지!
-내가 소 잡는 동안 당신은 현수막 의뢰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말해! 우리 아들 주연 배우 됐다고!
『나는 간첩입니다』때보다 더 흥분해서 잔치를 열겠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김진모는.
-주연? 크흐흐. 미친놈, 솔직히 말해 봐. 너 봉사 활동 다닌 것도 차기작 준비의 일환이었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봉사 활동 다닌 게 의아했는데, 이제 좀 답이 나오네.
봉사 활동과 차기작 준비와의 연관성을 집요하게 추궁한 이후에야 축하를 해 줬다.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냐?”
-열흘 정도 더 있다가? 나도 빨리 가고 싶은데, 외출만 해도 엄마가 서운해하니까 쉽지가 않네.
“그러게 평소에 좀 찾아뵙지 그랬냐. 뭐, 이왕 간 거 넉넉하게 쉬다가 와라.
간만에 들어간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날 오후, 안시현은 박정상과 함께 선물을 한가득 사들고서 보육원을 방문했다.
“내가 같이 가도 되려나?”
“그럼요. 가서 애들하고 놀아 주고 오는 거니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요.”
“그럼 다행이고. 아이들하고 놀아 주는 건 자신 있다. 형이 조카만 여섯 명이거든.”
“최고인데요?”
그렇게 간 보육원에서 안시현은 아이들에게 선물부터 나눠 줬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에게 유독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박정상은 그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안시현이 옆에서 챙긴 아이들은 제각각 나이는 달라도 자폐성 장애가 있다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아마도 안시현이 『형아, 동생』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해졌을 거라 짐작되는 이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퍼즐에 집착했고, 어떤 아이는 초콜릿맛 과자에 집착했으며, 또 어떤 아이는 사과 주스가 없으면 못 사는 것처럼 안시현의 선물을 보고 안달이 났다.
제각각 집착하는 대상은 달랐지만 행동 양상은 비슷했다. 오늘 처음 보육원에 방문한 박정상이 금세 그 아이들에게 자폐성 장애가 있다는 걸 눈치챘을 정도였다.
그들이 안시현의 주지성 캐릭터 구축에 도움을 줬을 거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준 뒤.
안시현은 보육원장과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눴다. 보육원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원장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한 거라고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도록 허락해 준 것밖에 없는걸요. 시현 씨가 좋은 배우라서 합격한 거 아니겠습니까.”
신 99의 촬영 이후.
안시현은 몇몇 보육원을 방문해서 자신이 배우라는 걸 설명하고 차기작 준비를 위해 자폐성 장애인을 옆에서 지켜보며 봉사해도 되겠냐고 문의했다.
그리고 다섯 번이나 거절을 당했다.
여섯 번째로 방문한 보육원에서 겨우 허락을 받고 봉사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단, 전제 조건이 붙었다.
보육원장은 안시현에게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봐 달라고,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과장 또한 하지 말아 달라고, 그동안 영화나 TV에서 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표현하는 걸 보고 속이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안시현은 보육원장의 뜻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안시현이 구축한 주지성 캐릭터는 자폐성 장애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반향어와 상동행동 장애 등, 자폐성 장애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 내 표현했다.
안시현이 주지성 역을 따낼 수 있었건 건 그가 비공개 오디션에서 대단한 연기를 보여 줬기 때문이지만, 보육원에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 대단한 연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터였다.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니까.
“영화가 개봉하면 시사회에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이들이 좋아할 겁니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바빠서 얼굴을 못 비추겠지만, 원장님과 아이들에게 받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 * *
보육원에 다녀온 이후로 안시현은 하루의 절반을 JM액터스 연습실에서 보냈다.
아침 운동을 하고 과일과 단백질 위주의 식단으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나면, 9시쯤 박정상이 안시현의 집 앞으로 와서 그를 데려갔다.
연습 과정에서 목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
주로 대본을 보거나 눈을 감은 채 주지성 캐릭터를 머릿속에서 그려 나가거나, 혹은 자폐성 장애와 관련된 서적을 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직접적인 연습보다는 주지성 캐릭터를 조금 더 탄탄하게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디션 때 보여 준 주지성 캐릭터는 좋았지만, 신 75만을 위해서 급하게 구축한 캐릭터야. 영화 전체를 놓고 본다면 좀 더 캐릭터를 탄탄히 다져 놓을 필요가 있어.’
사실 주지성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축하기엔 『나는 간첩입니다』이후 안시현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다만 비공개 오디션에서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한 신이면 충분했고, 20년에 걸친 연기 경험을 지닌 안시현에게 한 신을 위한 캐릭터 구축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형아, 동생』의 촬영을 위해서는 신 75에 국한된 게 아닌, 어느 신에 붙여 놔도 캐릭터성이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캐릭터 구축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연습의 비중을 낮추고 대본 리딩과 추가 자료 조사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봉사 활동을 하며 쌓은 경험과 대본으로 표현되는 주지성 캐릭터, 자폐성 장애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벽돌을 올려 나갔다.
대본 리딩은 9월 중순부터 예정되어 있다.
촉박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시간은 아니다.
‘대본 리딩 전까지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돼. 욕심 때문에 무리하면서까지 따낸 배역이야. 어설프게 하는 일은 있어선 안 돼.’
* * *
1999년 9월 10일.
본가에서 머무르던 김진모가 간만에 돌아왔다.
“나 오디션 합격했다.”
오디션 합격 소식과 함께 말이다.
난데없는 오디션 합격 소식에도 안시현은 놀라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이맘때 김진모가 두 번째 작품의 오디션을 봤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벌써? 빠르네. 축하한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 하게 생겼는데?”
“나보다 더 먼저 오디션 보고 온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만? 뭐…… 다른 배역 캐스팅이 아직 덜 마무리돼서, 촬영은 빨라야 11월 중순에 시작할 것 같다 하더라고.”
“나랑 비슷하겠네. 우린 11월 초 예정이거든.”
“그때까지 최대한 쉬어. 촬영 시작하면 또 정신없이 시간 흘러갈 테니까.”
“어. 너도.”
안시현은 연습과 휴식을 적절히 배분해 하루를 보냈다. 연습도 중요하지만 휴식 또한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차기작이 영화라서 다행이었다. 장기 레이스인 드라마였다면 이번처럼 짧은 시간 동안 차기작을 준비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니까.
다음 날, 김진모는 JM액터스와 미뤄 뒀던 계약을 체결했다. 제힘으로 차기작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됐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그날 김진석 대표의 입가에서는 하루종일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후 안시현은 김진모와 함께 연습을 했다.
서로 출연하는 작품은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가끔씩은 서로의 연습을 보고 객관적인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대본 리딩 첫날이 됐다.
영화사 혜인원.
『나는 간첩입니다』대본 리딩 이후 간만에 그곳을 방문한 안시현은, 박정상과 함께 테이블 위에 음료와 군것질거리를 한가득 세팅했다.
영화사 측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사서 고생을 하는 건,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캐스팅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곽상필 감독의 작품이라지만 필모그래피에 고작 한 작품이 전부인 배우가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이를 아니꼽게 보는 배우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와 과자와 음료를 세팅하고 대본을 검토하며 선배 배우들을 기다렸다. 잘 보이려고 노력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1시간 정도 흘렀을까?
대본 리딩 예정 시간을 30분 정도 앞둔 상황에서 한 배우가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시현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주지성 역을 맡게 된 안시현입니다. 촬영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가 강식이랑 영민이가 말했던 그 미친놈이구나. 반갑다. 내가 네 형이니까 자주 호흡 맞추게 될 텐데, 서로 잘해서 NG 많이 내지 말자.”
손해수.
주지성의 형 역할이자 또 다른 주연인 주지웅 역을 맡은 배우. 훗날 자타공인 최고의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될 사내.
그리고 안시현의 인생작인 『위장취업』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이기도 하다.
2019년이 아닌 1999년의 손해수와 호흡을 맞췄을 때 어떤 맛이 날까?
안시현은 그와의 촬영이 무척이나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