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7화>
27화. 잘할 수 있어
손해수 다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건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고아원 선생, 박정임 역으로 함께 합을 맞췄던 30대 초반의 여배우 이아영이었다.
그녀는 안시현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응? 시현이 네가 왜 여기 있어? 8월 말에 들었던 캐스팅 라인에는 네 이름이 없었는데? 혹시 너, 주지성 역 따낸 거야?”
“네. 8월 마지막 날에 비공개 오디션 봤습니다.”
“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그걸 또 준비했어? 『나는 간첩입니다』때도 느꼈지만 완전 독종이잖아?”
“아영이 눈에 나는 안 보이는구나. 몇 초만 더 무시당하면 오빠 서운할 거 같은데?”
“에이. 뭘 또 서운해하고 그래요. 잘 지냈어요? 못 보는 사이 신수가 훤해졌네.”
“잘 지냈다고 봐야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꾸준히 연기할 기회를 얻는 게 최고의 미덕이잖아.”
이아영 이후 배우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시현은 그들 모두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고, 다행히 『나는 간첩입니다』대본 리딩 당시의 류성웅처럼 그를 아니꼽게 보는 배우는 없었다.
오히려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지성 배역의 캐스팅이 차일피일 미뤄졌다는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이 자리에서 주지성 역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다 자신하는 배우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기대감을 품게 됐다.
과연 안시현은 어떤 연기를 보여 줬기에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모든 배우가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최한수 감독이 대표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가 회의실에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겠습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좋지 않은 평가, 편견을 모두 뒤엎을 수 있는 영화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최한수 감독의 말을 들은 모든 배우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시현을 제외한 모두, 최한수 감독이 어떤 마음으로 『형아, 동생』의 시나리오를 썼는지 알고 있었다. 그 진심에 감동해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모였다.
진통을 겪었던 주지성 역 캐스팅도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최한수 감독과 배우들이 손을 한데 모으고 파이팅을 외친 뒤,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첫날 대본 리딩은 손해수의 독무대였다.
『형아, 동생』의 초반부는 과거 이야기가 주로 나오며, 안시현의 출연은 아역으로 대체됐다.
주지성은 어릴 때부터 이상 행동이 잦았다. 유독 분홍색과 나비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말을 가르쳐 줘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방을 어지럽히지도 않았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혼자 방에서 분홍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말을 배우는 게 조금 늦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주지성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형 주지웅은 그를 병원에 데려갔고, 자폐성 장애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얼마 후, 사이가 안 좋던 부모님이 이혼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다 주지성을 양육하기 거부하고 주지웅만을 데려가려고 한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주지성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주지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거부한다.
“지성이 내가 키울 거예요. 장애가 있어도 내 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양육비 꼬박꼬박 보내요.”
주지웅의 바람과 달리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양육비가 끊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새 가정을 꾸리고서 연락이 두절되고 만다.
그런 주지웅 형제를 보듬어 준 건 할머니였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마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주지성을 보육원에 맡기고,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데려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이에 주지웅은 답한다.
“할머니, 지성이는 잘못한 게 없어요. 장애가 있는 게, 부모님이 이혼하고 양육을 거부한 게 지성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전 지성이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전, 부모님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요.”
주지성을 보육원에 보내지 않을 거라고, 주지성과 함께 살 거라고 말이다.
『형아, 동생』의 초반부는 부모님의 이혼과 중단된 양육비라는 막막한 현실 속, 동생과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뇌하는 주지웅이 중심이 된다.
덕분에 첫날 대본 리딩의 지분 절반 이상이 손해수의 차지였고, 같은 투톱인 안시현은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고 대본 리딩을 끝마쳐야 했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역시 해수 선배님, 감정 표현이 장난 아니야.’
안시현은 손해수의 연기를 면밀히 분석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주지웅을 표현하는지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최고의 호흡을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손해수의 가장 큰 장점은 선 굵은 감정 연기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감정 연기로 맡은 배역을 찰떡같이 소화할 줄 아는 배우다.
주지웅 역은 감정이 과하면 영화를 신파극처럼 보이게 만들고, 부족하면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다.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이 필요하다.
대본 리딩 첫날 손해수가 보여 준 주지웅 연기는 적절한 감정의 선을 지켰다. 그가 주지웅 캐릭터를 얼마나 열심히 분석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안시현은 하루빨리 촬영 날이 다가오기를 바랐다.
손해수와 호흡을 맞추며 『형아, 동생』을 만들어 나갈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촬영 둘째 날, 마침내 안시현이 대본 리딩에 참여했다.
신 11.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후, 20살이 된 주지성과 28살이 된 주지웅이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신이다.
오전 7시, 아침 식사를 차린 주지웅이 주지성을 깨운다.
하지만 주지성은 식탁이 아닌 화장실로 향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는 화장실에 물을 뿌리고는 곳곳을 빡빡 닦았다. 냄새가 난다고 투정을 부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윽고 화장실 청소를 끝마친 뒤에야 주지성은 식탁에 앉는다.
식사를 끝마친 주지성은 아침 일찍 일을 하러 간 형을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거실에 홀로 앉아 분홍색 나비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린다.
“지성아, 밥 먹자!”
대본 리딩이 시작된 순간.
모든 배우들의 시선이 안시현에게 집중됐다.
과연 최한수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안시현이 보여 줄 주지성은 어떤 모습일까?
눈을 감았다 뜬 안시현이 대사를 내뱉었다.
“밥은 꼭꼭, 반찬은 분홍소시지에 김치와 김, 된장국에는 고추 두 개~ 밥은 꼭꼭…….”
안시현은 주지성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반찬을 노래처럼 흥얼거렸다. 음역대도 엉망이고 박자도 제멋대로에 음이탈까지 났지만, 주지성이 느끼고 있는 즐거운 감정만큼은 제대로 표현해 냈다.
그 와중에 안시현은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까닥거렸다. 회의실에 있는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대본 리딩임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지성의 행동 습관이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지성아, 화장실 그만 청소하고 밥 먹자! 형아 일하러 가야 돼!”
“화장실 더러워요. 냄새 안 좋아요. 형아 장 아파요. 내 요구르트도 형아가 먹어요. 지성이 응가는 분홍색.”
“……내 반드시 저 결벽증 고쳐 놓고 만다.”
손해수와 안시현은 자연스럽게 대사를 주고받았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동생과 그런 동생의 부모 역할까지 겸하는 형이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신 11 대본 리딩의 화룡점정은.
“어휴. 빨리도 온다. 얼른 먹어, 지성아. 형아 일하러 가야 된다니까 아침마다 이러냐.”
“형아 위 안 좋아요, 입에서도 응가 냄새 나요. 양배추 많이 먹어야 돼요.”
안시현의 애드리브였다.
식탁에 앉은 주지성을 보고 주지웅이 핀잔을 주는데, 그때 주지성의 원래 대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반찬 이야기를 반복하는 거다.
안시현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반찬 이야기 대신에 애드리브를 선택했고, 그 결과.
“크흐흐…… 애드리브 미쳤는데요? 화장실이랑 입 냄새를 연결하다니, 시현이 머리 좋네. 감독님, 이거 대사에 추가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애드리브네요. 추가합시다.”
안시현의 애드리브는 정식으로 대사에 추가됐다.
주지성 대사 자체가 애드리브에 많이 의존해야 하다 보니, 안시현은 특정 상황에서 사용할 애드리브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만들어 왔다.
그중 하나를 사용한 건데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덕분에 안시현은 자신감을 얻었다. 자신이 해석한 주지성 캐릭터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을 가지게 됐다.
한편 대본 리딩장에 있던 이들은 안시현의 연기를 보고 다들 감탄을 토했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이들 특유의 말투를 제대로 표현해 냈으며, 재치 있게 상황에 어울리는 애드리브까지 준비해 왔다.
심지어 그렇게 대사를 치는 와중 이어진 자연스런 몸짓까지 보여 줬다. 지독한 연습을 거치지 않고서야 저토록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안시현이 많은 노력을 했다는 방증이었다.
신 11의 대본 리딩으로 안시현은 배우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힘을 좀 뺐네. 하긴, 일상 상활에서도 신 75처럼 힘이 바짝 들어갈 필요는 없긴 하지. 대본 리딩이기도 하고.’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힘을 뺐다고 봤다.
그는 비공개 오디션 당시 보았던 안시현의 연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연기는 힘을 다소 뺀 걸로 보였다.
그 모습이 최한수 감독의 마음에 쏙 들었다.
조연 배우와 달리 주연 배우는 매 순간 전력질주를 해선 안 된다. 힘을 빼야 할 신과 힘을 줘야 할 신을 구분해 줘야 한다. 매 순간 전력질주를 하면 관객이 먼저 지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 11은 주지웅과 주지성의 일상을 보여 주는 신이니만큼, 자폐성 장애의 특징을 드러내는 정도면 충분했다.
따라서 힘을 빼는 게 맞지만…….
‘그나저나, 아직 캐릭터 완성이 덜 된 건가?’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아직 주지성 캐릭터를 100% 만들지 못했다고 판단을 내렸다.
오디션 당시 보여 준 주지성 캐릭터에 비해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느껴졌다. 힘을 뺀 것과 별개로 완성도가 살짝 부족한 느낌이 났다.
이에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신 75를 위해, 오디션만을 바라보고 주지성 캐릭터를 구축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추측이 맞다면, 한 신에서 사용했던 캐릭터를 영화 전체에서 사용 가능하게 재구축하고 있을 터.
오히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과연, 안시현은 크랭크인 전까지 비공개 오디션에서 보여 주었던 완벽한 주지성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을까?
* * *
대본 리딩을 진행하며 『형아, 동생』의 출연 배우들은 연일 감탄을 했다.
그 대상은 대부분 안시현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안시현은 참으로 희한한 배우였다.
첫 대본 리딩 때부터 기대 이상의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더니, 대본 리딩을 반복하며 실시간으로 연기력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캐릭터가 갈수록 탄탄해졌다.
비공개 오디션 당시 보여 준, 물 한 방울조차 새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를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첫 대본 리딩 때에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주지성 역을 소화하기에 충분했는데, 갈수록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물론 놀라지 않은 배우도 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에 함께 출연했던 이아영이었다.
“시현이는 『나는 간첩입니다』 때도 이랬어요. 대본 리딩 때도, 촬영에 들어간 이후로도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뭐 이런 괴물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요.”
『나는 간첩입니다』 때와 달리 『형아, 동생』에는 20대 배우가 안시현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배우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가는 안시현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고, 상황에 따라 진심 어린 조언 또한 아끼지 않았다.
‘더 잘할 수 있어. 난 아직 더 발전할 수 있어.’
사실 안시현은 『위장취업』을 통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과 별개로 회귀 전 자신의 연기에 100% 만족하지는 못했다. 노력하면 조금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하며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일순간 맛보기도 했고 말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형아, 동생』의 대본 리딩을 하며 안시현은 자신의 연기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회귀 전 『위장취업』에서 보여 준 고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만큼 지금의 안시현은 성장세가 매서웠다.
솔직히 안시현도 자신의 고점이 어디까지인지, 연기가 어디까지 좋아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형아, 동생』이라면, 어설픈 메소드 연기로는 뼈도 못 추리는 주지성 캐릭터라면 그 한계까지 도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았다.
대본 리딩을 하는 사이 어느새 10월 중순이 됐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나는 간첩입니다』의 시사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