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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28화 (2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8화>

28화. 부지런히 크세요

『나는 간첩입니다』의 시사회를 하루 앞둔 1999년 10월 10일, 안시현과 김진모는 JM액터스 사옥 근처의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내용은 사실 별게 없었다.

영화와 관련된 질문과 안시현과 김진모라는 배우 자체에 대한 질문이 적절하게 뒤섞여 있었고, 사전에 준비한 대답을 하는 게 전부였다.

문제는 그걸 하루에 무려 다섯 번이나 했다는 거다.

오전 일찍 시작한 인터뷰는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끝이 났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녹초가 돼서 힘없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인터뷰도 하루에 여러 번 하니까 피곤하네.”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이제 인터뷰 다 끝났잖아. 아. 오늘은 집에서 살살 연습해야겠다. 넌 어떻게 할래?”

“먼저 들어가. 학교 들렸다 갈게.”

“학교? 갑자기 무슨 학교?”

“시사회 초대해야 될 거 아냐. 너, 촬영 시작한 이후로 학교에 한 번도 안 갔지?”

“아.”

“아는 무슨.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하나에 빠지면 주위 볼 줄 모르는 건 어쩜 저리 똑같은지 몰라.”

“미안. 내가 좀 그러잖아.”

“알면 됐어. 초대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서 쉬기나 하셔.”

그리고 보니 학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교수들에게는 미리 연락을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복학을 할 생각이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심이 너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하나에 빠지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안시현과 달리, 꼼꼼한 성격의 김진모가 학교 사람들을 챙긴다는 거였다.

안시현은 뒷일을 김진모에게 맡긴 채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이번 생에는 데뷔작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질리도록 받을 수 있기를.

*   *   *

시사회 당일.

“축하한다, 시현아. 휴학하고 작품에 올인해서 솔직히 걱정했었는데, 좋은 소식만 들려오더구나.”

“교수님들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현이, 영화 찍더니 립 서비스만 늘었나? 1년 배워 놓고 무슨 우리 덕이냐. 그냥 네가 잘한 거지.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 그럼요. 다 시현이랑 진모가 잘한 거지요.”

안시현은 임진섭 교수를 비롯한 교수들과 간만에 대화를 나눴고, 그 후에는 친분이 있는 선배, 동기들과 짤막하게 대화를 나눴다.

시사회에 초대받은 동문 중에는 한나래도 있었지만, 안시현은 살짝 눈인사를 하고서 그녀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비단 한나래뿐만이 아니었다. 주로 동문들과 대화를 나눈 건 김진모였고, 안시현은 대부분의 동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 이쪽으로 오면 돼요.”

그의 관심은 온통 부모님에게 있었으니까.

안시현이 선물해 준 넥타이와 스카프를 한 채 간만에 정장과 원피스를 빼입은 부모님이 시사회에 온 것이다.

“아이고. TV에서나 보던 배우들이랑 인사하는 거 보니까 우리 아들 배우인 게 이제 좀 실감나네.”

“실감은 축사 신축할 때 느낀 거 아니었어요?”

“그땐 우리 아들 배우라는 생각보다는 복권 1등 된 줄 알았지. 연기한 걸 직접 봐야 실감나지 않겠어?”

“올라온 김에 호텔에서 며칠 묵으면서 서울 구경 좀 하고 가요. 엄마 저번에 남산 가 보고 싶다 했었죠?”

“어휴. 호텔은 무슨 호텔이야. 돈 아까워. 여관방에서 대충 자고 내일 첫차 타고 내려갈란다.”

“돈 걱정 하지 마요. 대표님이 잡아 주신 거니까요.”

“그거 네 몸값에서 까이는 건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소속 배우 복지 차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안 주무시고 가시면 엄한 돈 날리는 거니까 푹 쉬시다가 가요.”

“시현이 너도 같이 있으면 생각해 보고.”

“오후에는 대본 리딩 있어서 안 되고, 오전이랑 저녁은 같이 있을 수 있어요.”

“흠흠. 그럼 간만에 서울 공기 좀 마셔 볼까?”

몇 차례 호텔에서의 숙박을 거절하던 부모님은 안시현이 오전과 저녁에 함께한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쁨을 드러냈다.

간만에 서울 구경을 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안시현 또한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솔직한 말로 시골에서 소와 닭 키우며 지내는 게 삶의 낙인 부모님이 앞으로 몇 번이나 서울에 올라오시고, 함께 서울 구경을 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이왕 올라오신 거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즐거운 추억을 쌓고 싶었다.

*   *   *

상영을 앞두고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이어졌다. 안시현은 정석적인 멘트로 첫 번째 무대 인사를 끝마쳤다.

번지르르한 무대 인사보다는 연기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배우 안시현을 어필하고 싶었다.

무대 인사의 마무리는 곽상필 감독의 차지였다.

“『나는 간첩입니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영화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 속에서, 두 주인공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주인공들은 선인이 아닙니다. 조연들도 선인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옆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본 관객 분들이 제각각 다른 감정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곽상필 감독의 말과 함께 시사회가 시작됐다.

안시현은 부모님의 옆에서 영화를 봤다.

두 달여 촬영의 결과물이 스크린에서 90분으로 함축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됐다.

‘음…… 묘하네.’

20년간 연기를 하며 제법 많은 시사회에 참여해 봤다.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더해야 겨우 셀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다.

그럼에도 이번 시사회는 의미가 남달랐다.

20년 차 배우 안시현이 아닌 신인 배우 안시현으로서 관객들과 처음 마주하는 결과물이다. 단역이 아닌 조연이고, 촬영 당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냈다.

실제로 완성된 결과물 또한 좋았다.

안시현은 스스로 좋은 연기를 했다고 자부했다. 편집을 통해 완성된 리수철 연기는 남파공작원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부모님은 안시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안시현이 나오는 순간에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신 99에서는 손이 터져라 꽉 움켜쥐었다.

영화가 모두 끝났을 때.

“90분을 봤는데 기억에 남는 게 우리 아들밖에 없네. 아들, 왜 이렇게 연기 잘해? 이러다 대상 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대상은 무슨. 애한테 헛바람 넣지 마.”

“뭐라는 거야. 당신, 영화 보다가 펑펑 울어 놓고서 설득력 하나도 없는 거 알아?”

“크흐흠. 누가 울었다고 그래.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먼지가! 실내라서 공기가 안 좋잖아!”

“네, 네. 어련하시겠어. 하여간 애도 아니고, 감정에 솔직하면 얼마나 좋수.”

어머니는 양손을 꼭 잡은 채 안시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고, 신 99를 보고 눈물을 흘린 아버지는 아닌 척 헛기침을 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그 모습에 안시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단언컨대, 회귀 후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   *   *

류성웅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마무리가 찝찝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곽상필 감독이 바보가 아닌 한, 감초 역할인 황시국을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룰 거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화를 다 봤을 때 그는 자신했다.

김진모와 안시현 못지않게 자신 또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고, 이번 작품을 발판 삼아 다음 작품에서는 더 좋은 배역을 따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슬슬 휴식도 지겨운 차였다.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연기력을 바탕으로 차기작에 들어갈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차기작 오디션을 보기 전에 주목을 받길 바랐다.

상당수의 기자들이 시사회가 끝난 뒤 곽상필 감독과 주연 배우인 송강식과 황영민에게 몰려들 테지만, 자신 또한 제법 관심을 받을 거라 확신했다.

배우들 또한 어느 정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배우들이 일제히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공식 인터뷰 시간이 주어졌다.

예상대로 곽상필 감독과 송강식과 황영민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았다. 거장과 두 주연 배우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김진모 배우에게 묻고 싶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JM액터스 김진석 대표의 외동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이름부터가 스포일러라서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네요.”

“『나는 간첩입니다』와 11월부터 촬영 예정인 차기작 캐스팅에 JM액터스의 도움은 일절 받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전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만, 그와 별개로 배우 인생의 시작은 제힘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JM액터스에 몸을 담았습니다만, 두 작품의 캐스팅은 제 힘으로 직접 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낙하산이라는 말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합니다. 배우이니만큼 연기로 헛소문을 잠재우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안시현 배우는 촬영 중에 아홉 번이나 재촬영을 요청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고, 더 좋은 연기를 하고 싶은 바람에 부탁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에 드는 연기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어떤 신에서 10번이나 재촬영을 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리수철이 자결하는 신입니다.”

“아…….”

류성웅의 예상과 달리, 조연 배우들에 대한 관심은 김진모와 안시현에게 대부분 차지했다. 김진석 대표의 외동아들인 김진모와 폭발적인 메소드 연기를 보여 준 안시현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류성웅에게 질문을 한 기자가 두 명 있었지만…….

시사회 전 류성웅의 소속사에서 미리 심어 놓은 기자들이었다. 즉, 류성웅은 일반 기자들에게서 전혀 관심을 못 받은 것이다.

‘괜, 괜찮아.’

류성웅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을까, 표정이 굳은 건 아닐까 걱정됐다. 시사회이니만큼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상황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맘처럼 쉽지 않았다.

‘배우들이 무대로 올라왔을 때 관심을 독차지하면 돼. 배우들이라면 분명 알아봐 줄 거야. 김진모와 안시현의 연기보다 내 감초 연기가 영화 전반에 있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류성웅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할 때,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될 거라고 장밋빛 미래를 그려 보았다.

공식 인터뷰 이후 시사회에 참여한 배우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 무대 위에 올랐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건 최우종.

90년대 최고의 배우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류성웅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연기 잘 봤습니다. 기회가 되면 같이 작품 한번 했으면 좋겠어요.”

“영광입니다, 선배님. 부지런히 크겠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부지런히 크세요. 지금보다는 내년, 내년보다는 내후년이 기대되는 배우는 간만에 보네요.”

류성웅의 옆에 있는 안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류성웅과 같은 소속사인 최우종은 당초 류성웅에게 악수를 청할 예정이었다. 시사회에서 류성웅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게 하기 위한 소속사의 배려였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최우종은 안시현의 손을 잡았다. 소속사 후배를 도와주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안시현이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연기에 매료됐다.

그 순간.

류성웅은 시사회 이후 처음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

시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나는 간첩입니다』는 개봉 이후 4일 동안 관객 수 1위로 순항했다.

곽상필 감독은 명불허전이라 평가받았으며, 송강식과 황영민은 주연 배우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수준급 연기를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나는 간첩입니다』의 최대 수혜자는 안시현과 김진모라는 평가가 나왔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배우의 아들이자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배우, 데뷔작부터 절정의 메소드 연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우.

김진모는 조연들 중 가장 존재감이 컸고, 안시현은 조연들 중 가장 확실한 임팩트를 남겼다.

심지어 동갑에 동거하는 사이이기까지 하다.

두 사람과 관련된 기삿거리는 차고 넘쳤다. 관심을 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덩달아 두 사람이 출연한 차기작도 주목을 받게 됐다.

특히나 『형아, 동생』에 대한 관심이 엄청났다.

첫 작품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남긴 배우가 차기작에서 주연을 맡게 됐는데, 무려 자폐성 장애인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먹잇감임이 분명했다.

물론 그것은 『형아, 동생』 입장에서 봤을 때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될 관심은 아니었다.

“이야. 막내 덕분에 아직 촬영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슈가 되네. 우리 막내가 대단하긴 한가 봐.”

“오빠, 영화 안 봤죠? 보고 오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될 거예요.”

“그래? 주말에 보러 가던가 해야겠다.”

“가서 보고 와. 난 시사회 초대받아서 갔는데 장난 아니야. 우리 막내가 크랭크인 하면 어떤 연기를 보여 줄까 벌써부터 기대된다니까.”

“어휴. 형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꼭 가야겠네요.”

작품에 쏟아지는 관심 덕분에 『형아, 동생』의 촬영장은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정작 관심을 불러일으킨 안시현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예정보다 길게 일주일이 넘도록 서울 구경을 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안시현은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날짜를 체크했다.

‘으음. 내일인가? 당분간 시끄럽겠네.’

『나는 간첩입니다』5일 차.

송명현의 연기 인생을 끝장내고 한동안 연예계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 사건이 뉴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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