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29화>
29화. 자신 있냐?
송명현은 사생활에 큰 흠집이 없었고, 연기력 또한 좋아 관계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제법 괜찮은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주연을 한 번 정도 맡을 거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배우 생활을 젊은 나이에 그만두게 된 건, 그의 유일한 결점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 뉴스입니다. 배우 송명현 씨가 뺑소니를 저지르고 6시간 후, 관할 경찰서를 찾아와 자수했습니다. 송명현 씨가 치고 간 피해자는 사고 시점으로부터 30분이 지난 뒤에야 병원으로 후송돼 수술대에 올랐지만,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자수 당시 송명현 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9%로 측정됐는데요. 네. 음주운전으로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연예인들의 음주운전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불과 두 달 전…….
술을 마시면 운전대를 잡는 빌어먹을 버릇이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데뷔 이후 웬만해서는 술을 마시지 않고 참았는데…….
간만에 술을 입에 대고 말았다.
자신이 낙마한 리수철 배역을 안시현이 완벽하게 소화해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나는 간첩입니다』가 연일 관객 수 1위를 기록하는 걸 보고 있자니 술을 입에 안 대고는 속이 쓰려 견딜 수 없었다.
그 결과.
음주운전에 뺑소니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송명현이 저지른 사건이 여타의 음주운전이나 뺑소니 사건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건, 사고 당시 피해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차에 치이고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면 피해자는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송명현이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간 것이라고 말이다.
뉴스 보도 후.
송명현의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음주운전 뺑소니 송명현, 배우 활동 잠정 중단.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 젊은 배우의 몰락.
-소속사 ‘송명현과 전속계약 파기’ 선언.
-연예인의 음주운전 사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딴따라들의 도덕적 해이,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송명현의 음주운전 사건을 앞서 일어났던 연예계 사건들과 연관, 연예계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규정하고 맹폭을 가하기까지 했다.
결국 송명현은 배우 활동 잠정 중단을 넘어 은퇴를 선언, 평생을 속죄하며 살겠다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혜인원의 대표는 곽상필 감독과 식사를 하며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시현 배우와 리수철 역을 놓고 경합했던 게 송명현 배우 맞지?”
“네. 아마 안시현 배우가 아니었다면, 리수철 역을 차지한 건 송명현 배우가 됐을 겁니다. 캐릭터 해석도, 연기도 꽤 준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랬다면 『나는 간첩입니다』는 작살났겠지.”
“파장이 꽤 큽니다. 과거 음주운전과 뺑소니 전력이 있는 배우들의 이름까지 죄다 거론되고 있어요. 송명현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이슈에 영화가 묻혔을 겁니다. 리수철 역 오디션 떨어지고 택한 드라마가 KNC 껀데, 제작발표회 앞두고 지금 초상집이라고 들었습니다.”
“크흐흐. 안시현이가 복덩이는 복덩이구만. 『나는 간첩입니다』도 살려 줘, 골치였던 주지성 역도 맡아 줘. 어디서 이런 보석이 튀어나왔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다행히 회귀 전처럼 『나는 간첩입니다』가 송명현의 음주운전 뺑소니 이슈에 휘말려 흥행에 악영향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언론의 호의적인 평가와 입소문 덕분에 일일 관객 수 1위를 놓치지 않은 채 순항 중이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건 기정사실로 보였다.
마침내 개봉 20일 차.
혜인원은 보도 자료를 통해 『나는 간첩입니다』가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음을 알렸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 * *
안시현이 『나는 간첩입니다』의 손익분기점 돌파 소식을 들은 건 『형아, 동생』의 크랭크인 하루 전이었다.
대본 리딩을 모두 끝마치고 크랭크인 전 휴식이 주어졌을 때, 안시현은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해 김진석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가 손익분기점 넘었다더라.”
“벌써요? 빠르네요.”
“슬슬 관객 수가 줄어들기 시작할 시점이긴 한데, 그래도 보름 정도는 더 힘이 있을 거야. 아. 그 덕분에 시현이 너한테도 좋은 소식이 몇 개 있단다.”
“저 광고 찍어요?”
“화보 촬영이랑 인터뷰 요청이 좀 있네. 차기작 제안도 들어왔는데, 한번 볼래?”
“음. 보기만 할게요.”
김진석이 건넨 시놉시스는 도합 네 개.
아직 『형아, 동생』의 크랭크인도 들어가지 않은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차기작을 검토하는 건, 문자 그대로 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안시현은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안이 궁금해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놉시스를 뒤적였다.
하지만…….
네 번째 시놉시스의 타이틀을 본 순간, 안시현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안시현은 최대한 아무 일 없던 척 했다. 타이틀을 보고 끌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놉시스를 펼쳐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작품이 맞았다.
훗날 흥행보증수표 될 드라마 작가의 입봉작이자, 『형아, 동생』의 차기작으로 노리고 있는 작품이 분명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흥행보증수표가 될 작가는 자신에게 어떤 배역을 제안하려고 한 걸까?
“이 작품, 저한테 어떤 배역을 제안한 거예요?”
“흐음. 그 시놉시스가 마음에 든 거냐?”
“네. 스토리도 괜찮은 것 같고, 무엇보다 연기 변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하하. 확실히 어떤 배역을 고르더라도 리수철이나 주지성과는 다른 느낌이긴 하지. 보통 이런 작품을 고르면 이미지가 정형화될까 고민하는데 말이야.”
“제가 좀 독특한 캐릭터를 연속으로 골랐잖아요.”
“아, 나쁜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 아무튼 이 작품은 네게 두 가지 배역을 제안했단다. 각각 주연과 조연인데, 주연은 오디션을 봤으면 한다더구나.”
“오디션을 봐야 하는 주연은 두 남자 주인공 중 어느 쪽인가요?”
“정영빈 역이란다.”
정영빈.
안시현이 노리고 있는 바로 그 배역이었다.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건 안시현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공개 오디션을 통해 정영빈 배역을 따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드라마가 제대로 제작될 수 있냐는 거겠지.’
드라마의 여왕이라 불릴 작가이지만, 방송 3사에서는 그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입봉작에 모두 퇴짜를 놓는다. 어렵사리 기회를 잡아 MBS에서 제작이 되려나 했지만, 그마저도 난항을 겪다 무산되고 만다.
결국 그녀는 다음 작품에서야 이름을 알리게 되고, 이후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다.
흥행불패.
모든 작품을 성공시킬 작가다.
특유의 스타일이 묻어나는 대사와 뻔한 것 같으면서도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안시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형아, 동생』의 차기작으로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
주연인 정영빈 역을 차지하는 것도 거리낌 없었다.
왜냐면…….
‘이렇게라도 회귀 전의 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어? 이미 미래가 달라지기 시작한 이상, 얌전히 기다린다고 또 다시 내가 정영빈 역을 맡으리란 보장도 없고.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잡아야지.’
드라마의 여왕의 입봉작은 오랜 퇴고를 거쳐 2019년에야 제작이 확정됐고, 안시현은 대한영화제 직전에 정영빈 역에 캐스팅이 됐었다.
즉, 아프지 않았다면 『위장취업』의 차기작으로 촬영할 예정이었던 작품인 것이다.
캐스팅 당시.
안시현은 2019년의 대본이 아닌 원본 또한 볼 수 있었다. 주연 배우이기에 허락된 기회였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입봉작이 빛을 못 봤다는 미련 때문에 시대에 맞춰 퇴고를 거듭한 2019년의 버전보다, 퇴고를 거치지 않은 이맘때의 대본이 훨씬 더 좋다고.
아무리 봐도 제작이 무산된 건 대본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단순해진다.
외적 요인을 제거해 주면 그만 아닌가.
고민 끝에 안시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이 작품 제작 언제부터에요?”
“아직 미정일 걸? MBS 쪽으로 넘어가긴 했는데, 작가도 PD도 신인이라 캐스팅부터 골머리라고 들었어. 이상은 국장이 나랑 친한 사이라서 들은 대외비 정보.”
“그럼 저, 이 시놉시스 쓴 작가님이랑 미팅 좀 잡아 주실 수 있나요?”
“목적은?”
“정영빈 역 비공개 오디션이요. 주연 배우가 확정되면 숨통이 좀 트이지 않겠어요?”
김진석 대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주지성 역을 소화하는 것만 하더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오디션을 위한 캐릭터 구축이라지만, 동시에 두 배역의 연기를 준비한다는 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과정일 게 뻔하다.
“자신 있냐? 배우로서 욕심이 있는 건 좋지만, 과욕은 금물이야.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가 있어.”
“믿고 맡겨 주세요.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 주지성 역 오디션 볼 때도 잘 했으니까 한 번 믿어보마. 오디션용 대본 요청하고, 최대한 빨리 일정 잡아 볼 테니 준비 잘해 봐. 주지성도, 정영빈도.”
* * *
1999년 11월 5일.
『형아, 동생』이 크랭크인을 했다.
촬영 초반은 대본 리딩 때와 마찬가지로 손해수의 독무대였다.
극 초반부가 과거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안시현이 출연하는 분량 자체가 없었고, 안시현은 주로 촬영장에서 대기하며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촬영을 대비해 연습에 매진했다.
촬영 4일째 되던 날.
“안 배우, 식사 후에 바로 촬영 들어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신 15 준비하면 됩니다.”
마침내 안시현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신 15.
형이 놔두고 간 만 원짜리 두 장을 들고, 주지성 혼자서 장을 보러 가는 신이다.
“액션.”
집 안에 있던 주지성이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다. 마당을 한 바퀴 돈 뒤에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오늘은 일주일에 두 차례 주지성이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을 하러 간 주지웅을 대신해 동네 슈퍼로 장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분홍 소시지 사요. 오늘은 자장라면도 사요. 일요일엔 형아가 자장라면 요리사~”
“오. 지성이 오늘 장 보러 가는 거야?”
“분홍 소시지 사러 가요. 두 개 사요.”
슈퍼로 가는 50미터.
주지성은 몇몇 주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아니, 사실 대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주지성은 그들의 말에 대답을 한 게 아니라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손을 정신 사납게 움직이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자폐성 장애 특유의 행동을 보여 줬다.
주민들은 그런 주지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할머니와 형과 함께 살아온 주지성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주지성의 행동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항상 밝고 힘이 넘치는 주지성을 좋아해 줬다.
그것은 슈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홍 소시지 두 개, 고추 조금, 두부 둘, 김도 사고, 자장라면도 사요. 요구르트 사요. 형아 장 안 좋아.”
주지성은 장을 보면서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특유의 강박증 때문에 흐트러진 물건을 좀처럼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 모습에 슈퍼 주인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우리 지성이가 아저씨보다 정리를 더 잘하네. 아저씨가 서비스로 요구르트 한 줄 공짜로 줄게. 집에 가서 형이랑 나눠 먹어. 알았지?”
“요구르트 좋아. 우리 형 장 튼튼해져.”
“서비스 주면 뭐라 해야 한다고? 자, 한번 따라 해 봐. 감사합니다.”
“으음…… 몰라요. 요구르트 맛있어.”
“아저씨는 지성이한테 고맙습니다 한번 들어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다.”
슈퍼 주인은 주지성이 올 때마다 ‘고맙습니다’를 가르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지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주지성 형제의 사연을 알고 있기에,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에 평온한 일상이 허락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주지성이 슈퍼를 나간 뒤, 홀로 남은 슈퍼 주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주지웅과 주지성 형제를 걱정했다.
“어휴. TV에서 보니까 자폐성 장애인도 독립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지웅이는 지성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으니 원…….”
* * *
“OK. 이대로 갑시다.”
신 15는 원 테이크로 끝이 났다.
현관을 나설 때부터 장을 보고 슈퍼에서 나올 때까지, 단 한순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안시현은 빈틈없는 연기를 보여 줬고, 다른 배우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연기를 보여 줬다.
카메라에 담긴 구도 또한 일품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촬영은 무의미했다.
OK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안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선배 배우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빠른 속도로 몰입에서 벗어나 평소의 안시현으로 되돌아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최한수 감독은 생각에 잠겼다.
‘듣긴 했지만 몰입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엄청 빠르네. 게다가……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빨리 캐릭터를 완성했어. 준비는 대본 리딩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건가?’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촬영 전까지 한 신이 아닌 영화 전체에 통용시킬 주지성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신 15를 통해 기우라는 게 증명됐다.
안시현은 우려를 딛고 완벽한 주지성 캐릭터를 완성해 왔다.
덕분에 최한수 감독은 확신을 품게 됐다.
‘손익 분기점…… 넘을 수 있다.’
영화의 핵심인 주지성 캐릭터의 열연을 바탕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란 걸, 자신의 감독 경력을 통틀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