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0화 (3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0화>

30화. 제 동생은

배우에게 있어 캐릭터 구축의 중요성은 수없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연 배우의 캐릭터 구축은 때론 작품의 흥행 여부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잘못된 캐릭터 해석과 구축으로 작품에 악영향을 끼친 케이스는 제법 많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안시현이 구축한 주지성 캐릭터는 『형아, 동생』 촬영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충분한 요소임이 분명했다.

감독의 뜻과 일치하는 캐릭터 해석과 구축,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이 더해져 시너지를 발휘했다. 촬영을 할 때마다 좀처럼 연기에 흠잡을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배우들은 안시현이 정말로 21살 배우가 맞는지, 혹시 호적을 10년 정도 늦게 등록한 30대 초반의 동안 배우가 아닐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만큼 안시현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보고 온 배우들은 안시현이 신스틸러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스크린 속 리수철은 남파공작원 그 자체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

안시현은 리수철을 완전히 지워 내고 그 위에 주지성을 덧칠했다. 사소한 제스처 하나까지도 자폐성 장애인의 특징을 살려 낼 만큼 완벽했다.

더 무서운 건 안시현의 연기가 촬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다는 거였다.

조금 더 완벽하게, 조금 더 리얼하게.

안시현이 구축한 주지성이 카메라 너머에서 살아 움직였다. 촬영을 하는 동안, 안시현은 주지성이 되어 움직임과 말투와 표정을 총동원해 그를 표현했다.

한 달이 삽시간에 흘렀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훈훈했고 촬영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어느새 『형아, 동생』의 촬영이 반환점을 넘었다.

그 즈음 되자 배우들은 기대를 품게 됐다.

갈수록 연기가 좋아지고 있는 안시현이,『형아, 동생』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신을 어떤 식으로 연기할까?

*   *   *

“음…….”

『형아, 동생』의 촬영 휴식일.

안시현은 집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서 대본을 붙잡은 채 고민에 빠졌다. 오전에 촬영을 나간 김진모가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도 안시현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와, 독종 새끼. 하루종일 소파에 드러누워서 대본 붙잡고 씨름한 거야?”

“……어, 뭐야. 벌써 저녁이야?”

“반응 한번 참 빠르네. 밥은?”

“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다. 나 맛있는 거 해 줘.”

“어휴, 귀찮은 놈. 빨리 돈 벌어서 독립하든가 해야지. 집주인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김진모는 투덜거리면서도 저녁밥을 차렸다. 옥탑방에 살 때부터 음식은 김진모 몫, 청소와 빨래는 안시현의 몫이었기에 자연스러웠다.

저녁 식사를 하며 김진모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촬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촬영이야 순조롭지.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이제 곧 『나는 간첩입니다』에서의 신 99와 비슷한 신의 촬영이 있거든.”

“아아, 그래서 이러고 있었구만. 방법은?”

“죽어라 연습하고 대본 읽는 거밖에 더 있겠냐. 넌 요즘 어떠냐. 할 만해?”

“나야 뭐, 촬영장에서 막내라고 선배님들이 잘 챙겨 주셔서 편하게 촬영하고 있지. 살 맛 난다.”

“크흐흐. 너도? 나도 그런데.”

신 78.

주지웅과 주지성 형제의 삶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는 신이자,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계기를 시사하는 신.

대중들에게 『형아, 동생』을, 그리고 안시현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주지성 캐릭터를 각인시켜야 할 임팩트 있는 그 신의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한수 감독은 미리 안시현에게 예고했다.

지금으로부터 나흘 뒤에, 신 75와 신 77, 그리고 신 78을 연달아 촬영할 테니 준비 잘하라고 말이다.

신 75와 신 77은 괜찮았다. 연습 결과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신 78인데…….

『나는 간첩입니다』의 신 99만큼은 아니지만 연습 결과가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기에 휴식일임에도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대본을 보고 있는 거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나는 간첩입니다』의 신 99 때처럼 10번이나 촬영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내가 의도한 타이밍에 몰입도를 최대치까지 끌어 올릴 수 있으니까.’

결국 관건은 몰입이다.

안시현이 얼마나 더 주지성이라는 사람을 리얼하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연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주지성이 되어야 한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촬영할 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몰입을 끌어 올릴 방법을 체득했다.

후유증이 다소 따라오긴 할 거다.

그래도 영화의 핵심인 신의 촬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신 78에서, 몰입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   *   *

며칠 뒤.

최한수 감독이 일찌감치 예고했던 신 75와 77, 그리고 신 78의 촬영 당일이 됐다.

오전 7시.

안시현이 평소보다 빨리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찌감치 자고 일어나 아침 운동을 새벽에 하면서까지 촬영장에 빨리 온 건, 그만큼 오늘의 촬영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 저 산책하면서 대본 좀 보고 있을게요.”

“괜찮겠어? 안 피곤해?”

“일찍 자서 괜찮아요. 어제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서 잠들었거든요.”

“으음. 그래. 피곤하면 바로 들어와. 촬영 전에 힘 빼서 좋을 거 없잖아.”

“네, 그럴게요.”

박정상의 우려와 달리 실제로 안시현의 컨디션은 좋았다. 일찌감치 푹 자고 일어나 루틴대로 운동까지 하고 와서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았다.

촬영장 주변을 산책하는 동안, 안시현은 대본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지성은 자폐성 장애인이다. 자신을 책임지기로 한 형과 함께 살며 평온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곪은 부분이 꽤나 많아. 부모님이 양육을 포기한 트라우마로 인해 주지웅은 주지성을 과보호하고 있어. 결국 주지성은 다른 자폐성 장애인들에 비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과보호를 받으며 살아왔지. 이 문제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대두되는 게 바로 신 78인데…….’

주지웅은 평소 주지성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항상 웃는 낯으로 주지성을 대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집에서만큼은 좋은 형이자 부모의 역할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 주지웅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주지성에게 화를 내는 게 신 78이다.

주지웅의 지나친 과보호 성향이 문제라는 건 이전 신들에서도 몇 차례 암시됐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건 신 78이 처음이다.

또한 신 78은 주지성이 꽤나 어릴 때의 일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표현되는 신이다.

주지웅은 자신이 했던 말들을 동생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 충격을 받는다.

이후 주지웅의 과보호 성향을 해결하고, 주지성이 원하는 걸 하게 해 주는 것이 영화 후반부의 전개다.

신 78가 영화 후반부를 분위기를 좌우한다. 관객들이 영화 후반부에 몰입할 수 있게 하려면 신 78의 완성도가 필연적으로 높아야 한다.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나 하나로 인해 『형아, 동생』의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어.’

안시현이 수없이 봐서 너덜너덜해질 지경이 된 대본을 붙잡고 촬영 몇 시간 전부터 산책을 하고 있는 건,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주연 배우는 매 순간, 모든 신에서 최선의 연기를 보여 줘야 하는 자리다. 한순간이라도 연기력이 무너지면 작품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연일 때보다 비중이 늘어난 대신, 좋은 연기에 대한 책임감 또한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안시현은 자신이 욕심을 내서 따낸 배역이니만큼 최선의 연기로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래야 배우로서 한층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OK. 수고했습니다.”

신 75는 두 번 만에 OK 사인이 났다. 다른 구도에서 촬영을 해야 했기에 두 번 촬영한 거지, 안시현의 연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점심 식사 뒤, 파출소에서 촬영 이어 나가겠습니다.”

신 77과 78의 촬영 장소는 촬영장 근처에 있는 파출소로, 점심 식사 뒤에 곧장 촬영을 하기로 했다.

“막내야, 밥 먹으러 가자!”

“아, 죄송한데 전 거를게요. 아침 든든하게 먹고 와서 아직도 소화가 덜 된 느낌이에요.”

“그래? 혹시 배고프면 문자해. 간식거리라도 사 올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시현은 점심 식사를 걸렀다.

아침 식사를 과하게 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늘 그렇듯이 단백질 위주로 가볍게 식사한 게 전부였다.

점심 식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신 77과 78의 촬영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더 대본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박정상이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차 안에 제육볶음 냄새가 진동했다.

“옛다.”

박정상이 내민 손바닥 위에는 제육덮밥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자고로 속이 비면 목청도 안 나오는 법이야. 대본 검토도 중요하지만 밥은 먹으면서 해야지.”

“고마워요, 형. 잘 먹을게요.”

“국물도 주랴?”

“챙겨 왔어요?”

“어. 보온병.”

안시현은 박정상의 배려 덕분에 차 안에서 식사를 하며 대본을 검토할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손에서는 대본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출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여전히 대본에 머무를 정도로 집중력이 좋았다.

박정상은 그런 안시현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안시현과 김진모 이전에 몇몇 배우를 담당해 봤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배우가 몰입해 있을 때 말을 거는 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다.

‘진모랑은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 이쪽은 대단한 걸 넘어서 얼핏 광기마저 느껴진단 말이지.’

광기라고 생각될 정도의 집중력을 보며, 박정상은 안시현에게 수 차례 감탄했다.

신기한 건.

이렇게 몰입하다가도 촬영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디에서나 볼 법한 21살 청년이 된다는 거였다.

‘매 촬영 때마다 집중력이 좋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신 78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 주려고 이러는 걸까?’

*   *   *

길거리에서 소변을 지린 주지성의 모습을 보고도 행인은 당황하지 않는다. 대번에 주지성이 자폐성 장애임임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주지성을 파출소로 데려간다.

근처 옷가게에서 트레이닝복을 사 와 주지성이 스스로 바지를 갈아입을 수 있게 유도한다. 루틴이 깨진 채 낯선 곳에 와 있어 불안해하는 주지성과 대화를 통해 몇몇 정보를 알아낸다.

동시에 행인, 특수학교 여교사 한미영은 깨닫는다.

주지성의 정체가 얼마 전 자신이 만났던, 도움을 주기 위해 조만간 만나려고 했던 주지웅의 동생이라는 걸 말이다.

한미영은 주지웅에게 곧장 연락을 취한다. 그리고 주지웅이 파출소에 오기를 기다린다.

이게 신 77의 내용이다.

주지성이 자폐성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신이자, 신 78에 앞서 앞으로의 변화를 맛보기로 예고하는 신.

파출소 근처 대로변.

촬영을 앞둔 안시현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대본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안시현을 방해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촬영 전, 안시현이 대본을 보는 것 외에 한 행동이라고는 단 하나.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들고 있던 대본을 박정상에게 건네주는 거였다.

“액션.”

마침내 시작된 촬영.

한미영 역을 맡은 이아영은 바지에 소변을 지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지성을 바라보았다.

특수학교 여교사인 그녀는 대번에 눈치챘다.

‘자폐성 장애.’

주지성이 자폐성 장애인이라는 걸, 현재 주지성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소변을 참지 못한 채 바지에 실례를 했음에도…….

“나비는 영어로 버터플라이, 불어로 빠삐용, 러시아어로 바바치카, 나비의 종은 세계적으로 2만여 종이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250여 종이 서식합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비정상적으로 톤이 높으면서 고저의 변화가 전혀 없는 말투로, 나비와 관련된 정보를 녹음기처럼 늘어놓았다.

한미영은 말투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폐성 장애인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증상이었으니까.

그녀가 신경 쓴 건.

‘왜 길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소변을 본 거지? 혹시…… 길을 잃은 건가?’

자폐성 장애인이 길을 잃은 듯한, 심지어 길거리에서 바지에 소변을 누고 만 이 상황 자체였다.

한미영은 주지성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대화를 시도한 끝에야, 처음으로 주지성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제, 제 동생은, 주지성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