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1화>
31화. 마음껏 날뛰게
스스로를 제 동생이라고 지칭한 안시현의 화법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특수학교 교사인 한미영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당황하지도, 이상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주지성이란 이름…… 어디서 들었더라?’
주지성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한 게 전부였다.
한미영은 주지성을 데리고 파출소로 향했다.
길 한가운데에서 패닉에 빠진 주지성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파출소에서 주지성에 대해 알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자폐성 장애인이요? 으음. 글쎄요? 저희 동네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박 순경, 우리 동네에 자폐성 장애인 산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그거 옆 동네 아니에요? 할머니랑 형이랑 같이 사는 사람 한 명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그래? 그쪽에 연락 한번 해 봐.”
“근데 그, 일단 소변부터 좀…….”
“말하면 알아듣나? 저기요, 일단 바지 좀 갈아입고 이야기합시다. 저기요?”
순경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미영이 끼어들었다.
“제가 할게요. 저 특수학교에서 근무해요.”
“아, 선생님이었어요? 진작 말씀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성인 남자인데 속옷 갈아입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제가 직접 안 하고 유도만 할 거예요.”
“그래요? 그럼 뭐 상관없고.”
한미영은 트레이닝복과 속옷을 사 와 주지성이 옷을 갈아입도록 유도했다.
다행스럽게도.
“바지 벗고 빤스 벗어요, 빤스 입고 바지 입어요.”
주지성은 화장실에서 생각보다 쉽게 옷을 갈아입었다. 주지성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한미영은 몸을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왜 아직도 교육을 못 받은 거지? 이해할 수 없어.’
주지성은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폐성 장애인 중에서도 사회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좋다고 봐야 했다.
사회성이 안 좋다고 초면인 한미영과 대화를 나누지도, 그녀를 따라 파출소로 오지도 않았을 거다. 반향어이긴 했지만 자신의 이름 또한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를 뿐이었다.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거였다.
옷을 갈아입은 뒤.
한미영은 주지성과 대화를 나눴다. 주지성에 대해 알아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
“제 이름은 주지웅이고요, 제 동생은 주지성입니다. 제 이름은 주지웅이고요, 제 동생은 주지성입니다.”
“아! 지웅 씨 동생!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더라니!”
한미영은 얼마 전 만났던 주지웅에게 자폐성 장애인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걸 떠올렸다.
그 동생이 바로 눈앞에 있는 주지성이었다.
‘어쩐지, 어디서 이름을 들어 본 것 같더라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름을 들은 거였다. 그것도 불과 며칠 전에, 진지한 인생 상담을 해 주면서 들었던 이름이다.
한미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주지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웅 씨, 한 선생이에요. 동생분 이름이 주지성 맞죠? 네. 지금 저랑 같이 있어요.”
* * *
신 77에서 안시현이 중점을 둔 건 루틴이 깨져 불안해하는 가운데서도, 한미영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이지만 안정을 찾아가는 주지성의 심리를 표현하는 거였다.
여전히 반향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신 77를 촬영할수록 주지성은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갔다. 파출소에 들어올 때까지 보여 주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사라졌다.
세 번의 촬영 끝에 신 77에 OK 사인이 떨어진 뒤.
안시현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신 78을 촬영하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매니저인 박정상마저도 안시현의 옆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아영이 최한수 감독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레 속삭였다.
“감독님, 아무래도 빨리 들어가야겠는데요?”
“음. 역시 그게 좋겠죠? 손 배우 생각은 어때요?”
“우리 막내가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은데, 마음껏 날뛰게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고…….”
최한수 감독이 분주하게 지시를 내렸다.
한 신의 촬영이 끝났음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는 극한의 몰입 상태, 배우가 배역에 몰입했을 때 종종 일어나는 현상.
이럴 때 스태프와 동료 배우들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다음 촬영을 최대한 빨리 이어 가는 거다.
그리고 보통.
배려에 대한 보상은 절정의 연기력으로 돌아온다.
손해수나 이아영이나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는 안시현이 보여 줄 연기가 기대됐다. 영화 전반부에 큰 영향을 끼칠 신 78을 앞두고 몰입한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궁금했다.
‘이러니까 강식이랑 영민이가 입이 마를 정도로 막내 칭찬을 하지. 저 모습을 누가 이제 겨우 두 작품 째 촬영하는 21살 배우라 생각하겠냐고. 뒤처지지 않으려면 나도 노력해야겠는 걸?’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손해수 또한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막내에게 화답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 * *
‘주지성에게는 감정이 존재한다.’
사실 신 78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안시현은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대본을 죽어라 보긴 했지만 캐릭터를 더욱 견고히 다지기 위해서지, 대본을 보며 힌트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애초에 주지성의 대화는 거의 절반이 애드리브다.
대본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이 구축한 캐릭터를 더욱 견고히 다지고 몰입하는 게 최선이었다. 애드리브는 억지로 쥐어짜는 게 아닌, 캐릭터에 몰입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의 터닝포인트인 신 78에서 주지성은 드물지만 감정 표현을 한다. 그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고 절제되어 있는 게 문제다.
어설프게 연기하면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다.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신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지성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주지성의 스타일로, 주지성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면 된다. 연기를 넘어 실제 주지성이 되어 움직이면 된다.
지금 안시현에게 필요한 건 번뜩이는 애드리브가 아닌, 주지성이 되기 위한 극한의 몰입이었다.
‘나는…… 주지성이다.’
안시현이 잡생각을 지웠다.
머릿속을 비우고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나는 주지성이다, 주지성은 정신 연령 5, 6세의 자폐성 장애인이다.
까딱. 까닥.
안시현의 손이 정신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신 78.
한미영의 연락을 받고 옆 동네 파출소로 온 주지웅이 주지성과 단둘이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화를 낸다.
함께 살기 위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속내를 감춘 채 무리를 하고 있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주지성이 야속하고 서운했다.
화를 내던 주지웅은 어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만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주지성이 기억하고 입으로 내뱉는 걸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
파출소가 침묵에 잠긴 가운데, 한미영은 주지웅에게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며 그를 데리고 파출소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주지웅과 주지성 둘 다 위태롭다는 말을 덧붙인다.
“액션.”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서 시작한 신 78의 촬영.
주지웅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주지성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순경들이 시켜 준 순대국밥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주지웅을 화나게 했다.
“주지성.”
주지웅의 부름에도 주지성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식사를 할 뿐이었다.
“주지성, 형 말 안 들려?”
“형아 왔어요. 다녀오셨어요. 저녁은 분홍소시지에 김치와 김, 된장국에는 고추 두 개 넣어요.”
“주지성!”
너무나도 태연한 주지성의 모습에 결국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주지성과 단둘이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목청을 높였다.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모르는 사람이 오면 문 열어 주지 말고, 슈퍼 갈 때 말고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혹시 밖에 나가면 형 이름이랑 전화번호 알려 주라고 했잖아!”
“전화번호, 몰라요.”
“왜…… 왜 말을 안 들어, 왜!”
지난 몇 주는 주지웅에게 고난의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일하던 회사가 갑자기 도산해 버렸고, 퇴직금은커녕 밀린 월급도 받지 못했으며, 죽어라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봐도 새 직장을 구하는 건 어려웠다.
악착같이 모은 돈은 떨어져 가는데 수입은 0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 가는 가운데, 몇몇 동네 사람들이 주지성과 관련해서 비난하는 이야기까지 우연히 듣게 된다.
가뜩이나 후미진 동네인데 자폐성 장애인이 있어 집값이 더 떨어진다느니, 주지성이 슈퍼에 갈 때는 무서워서 집 밖으로 못 나온다느니.
그럼에도 주지웅은 말 한 마디 하지 못했다.
괜히 싸웠다가 주민들 사이에서 주지성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질까 봐, 이전 동네에서처럼 눈치를 보다 쫓겨나듯이 이사를 해야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주지웅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이 모든 과정들을 주지성이 이해할 리가 없다는 거였다.
감정에 공감하기 어려운 자폐성 장애.
주지웅은 동생의 장애를 혼자 감내하는 게 더 이상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얼마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한미영을 만나 주지성과 관련해서 진지하게 상담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지웅 씨, 일단 진정 좀 해요. 결과적으로 지성 씨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된 거예요.”
“주지성, 너 형이랑 살기 싫어? 혼자 살고 싶은 거야? 도대체 왜 형 말을 안 듣는 건데! 왜 자꾸 네 멋대로 하는 거냐고! 형이 널 위해…… 하.”
울컥한 주지웅의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느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이 주지성에게 화를 낼 이유가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일단 집에 가자. 여기 더 있어 봐야…….”
주지웅이 주지성을 일으킨 그 순간.
주지성이 주지웅의 손을 잡았다. 몸을 덜덜 떨며, 억지로나마 주지웅 근처라도 보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지성이 내가 키울 거예요. 장애가 있어도 내 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지성이 너, 방금 뭐라고…….”
주지웅의 표정이 굳었다.
“전 지성이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전, 부모님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요.”
“밀린 월급 내놔요. 퇴직금 주란 말이에요. 가족이라면서요. 죽기 전까지 함께하자고 했잖아요. 사장님 외제차 하나만 팔아도 저희 퇴직금이랑 월급 다 주고 남잖아요. 제 손으로 동생 먹여 살려야 돼요. 전부 다는 바라지도 않아요. 절반이라도 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주지성은 주지웅이 했던 말들을 그대로 내뱉었다.
멀게는 오래전 부모님이 이혼할 당시에 했던 말을, 가깝게는 회사가 도산한 뒤 사장과 통화하면서 했던 말을 녹음 후 재생하듯이 똑같이 토해 냈다.
주지성의 그 말은 주지웅의 멘탈을 무너트렸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르치려 해도 좀처럼 성과가 없으니 교육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지성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니었다. 교육의 효과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관념에서 다소 벗어나 있을 뿐이었다.
주지웅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지만 주지성의 말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보다 살짝 더 하이톤이라는 게 그나마 차이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하기에 감정이 전달됐다.
그것은 절규이자 사과였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 외쳤고, 자신 때문에 형이 고생하는 게 미안하다고 한탄했다.
주지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한미영의 대사가 나오며 신 78은 이대로 마무리가 된다. 주지성의 말로 인해 그와 주지웅의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아…… 죄, 죄송합니다.”
대사는 이어지지 않았다.
“잠깐,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한미영은, 아니 이아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컷. 잠깐 쉬었다 갑시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NG가 나고 말았다. 연극판에서 제법 내공을 쌓고 스크린에 데뷔한 이아영이 촬영 중에 난데없이 눈물을 흘리는 건, 10편이 넘는 작품에서 단역과 조연으로 출연하며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분홍색은…….”
안시현은, 구석에 앉아 홀로 대사를 중얼거리며 여전히 주지성 캐릭터에 몰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