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2화>
32화. 푹 쉬다가 와요
촬영이 중단된 뒤.
이아영은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거듭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서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근처 벤치에 앉아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며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이아영에게 손해수가 다가왔다. 그는 그녀에게 음료수 한 병을 건네주며 옆에 앉았다.
“아…… 고마워요, 선배.”
“갑자기 울어서 놀랐잖아. 감독님도 놀라서 나한테 한번 가 보라고 하시더라.”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요.”
“시현이 대사 친 게 조금…… 그랬지?”
“네. 몰입하고 있는데도 눈물이 나서, 도저히 연기를 이어 갈 수가 없었어요.”
“난 너보다 더했다.”
손해수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서 안시현이 대사를 내뱉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자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손을 잡고 덜덜 떨면서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대사 치는데 소름 확 돋더라니까. 더 무서운 건, 신 77과 비교했을 때 살짝 하이톤으로 대사를 쳤다는 거야. 의도한 게 분명해. 자폐성 장애인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머리로 아는 거와 실제로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그걸 해내니까 미친놈인 거지. 개인적으론 톤에 변화를 주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지만, 그만큼 감정을 드러내는 게 더 어려워졌겠지. 사실 방금 전에 보여 준 것만으로도 엄청났다고 생각해.”
사실 신 78의 촬영을 앞두고 손해수는 안시현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안시현이 연기를 잘하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신 78은 난이도가 달랐다.
타인의 감정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자폐성 장애인을 연기하는데 감정선을 드러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수준의 과제가 주어졌다. 과하면 캐릭터가 무너지고, 모자라면 감정 전달이 안 되는 신인데…….
첫 테이크부터 안시현은 미션을 100% 완수했다.
웬만해선 상대 배우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손해수마저도 순간적으로 울컥했을 정도였고, 감정이 풍부한 스타일인 이아영은 안시현의 감정에 휩쓸려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선배, 제가 NG를 안 냈으면 원 테이크였겠죠?”
“아마도? 근데 난 네가 NG를 낸 게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
“응? 고맙다고요?”
“어. 나올 때 잠깐 봤는데, 시현이 녀석 뭔가 만족하지 못한 눈치더라고. 왠지 재촬영하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시현이라면…… 가능할지도요.”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 당시 신 99에서 이아영은 안시현에게 인질로 10번이나 잡혔다. 그리고 테이크를 반복할 때마다 안시현의 연기가 갈수록 좋아지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느꼈다.
그런 그녀이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 조절 실패로 리테이크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게, 안시현이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발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아영은 어느 정도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본 손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됐으면 먼저 들어가 있어. 머리도 정리할 겸 한 대 태우고 들어갈게.”
“네, 선배. 챙겨 줘서 고마워요.”
“고마우면 괜찮은 여자 소개 좀 해 주라. 오빠도 이제 장가가야 하지 않겠냐?”
“촬영 끝나고 자리 한번 만들어 볼게요.”
“아, 이런 건 녹음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아영이 파출소 안으로 들어간 뒤.
담배에 불을 붙인 손해수는 안시현이 직전에 보여 준 연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몰입도가 너무 좋아도 문제인데…….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눈치채겠지. 우리 막내는 좋은 배우니까.”
* * *
리테이크 전.
안시현은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보여 준 신 78에서의 연기를 떠올려 보았다.
연기는 좋았다. 자폐성 장애인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해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좋은 연기였지만, 발전할 여지는 존재했다.
‘조금만 더 드라이하게 가 보자.’
안시현의 선택은 톤을 평소와 똑같이 하는 거였다. 의도적으로 살짝 높였던 톤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로 했다.
톤을 높여 주지성의 심리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톤을 평소와 똑같이 하는 게 더 낫다고 봤다.
한 번 촬영을 해 보고 느꼈다.
제스처만으로도 주지성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확신이 섰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더 심금을 울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촬영.
톤을 제외하고는 안시현의 연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주지성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 주지성의 입장에서 최선의 표현을 해냈다.
다만.
톤을 원래대로 되돌린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평소와 달리 손을 덜덜 떨고, 억지로나마 시선을 주지웅에게 가까이 하려는 일련의 몸놀림에서는 흡사 처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상태에서 평소와 똑같은 톤으로 이전 신에 사용했던 주지성의 대사를 그대로 썼다. 의도한 게 아님에도 첫 촬영 때보다 음이탈이 더 심한 건 보너스였다.
또한.
“지웅 씨, 잠깐 저랑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이번에는 이아영도 실수하지 않았다. 한미영 캐릭터에 몰입해 마지막 대사까지 수월하게 이어 나갔다.
“OK.”
OK 사인이 떨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대로 가겠습니다.”
원 테이크는 아니었지만 성공적인 마무리였다. 안시현은 주지성의 입장에서 최고의 감정 표현을 해냈다.
촬영이 끝난 순간.
몇몇 스태프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손해수는 주지성의 말에 울컥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지문이 있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촬영이 끝난 뒤.
“시현 씨, 잠깐 저 좀 볼까요?”
“네, 감독님.”
안시현은 최한수 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최한수 감독이 안시현을 부른 이유는 단순명료했다.
“닷새 동안 시현 씨 출연이 없는 신 위주로 촬영할 테니까 쉬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신 78은 저희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이 될 겁니다.”
안시현에게 짧은 휴가를 주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영화의 핵심이 되는 신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준 주연 배우를 향한 감독의 감사 인사였다.
『형아, 동생』은 최한수 감독의 아들인 최동민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포함된 영화다. 상업 영화로 만들기 위해 많은 부분을 각색하긴 했지만,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다수가 실제 경험한 것들이었다.
특히 신 78.
대사는 다르지만 최한수 감독과 최동민은 파출소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고, 이 일 이후로 김진석 대표를 찾아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고 호소했다.
개봉 직후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사연이 소개될 거다.
다만 회귀 전에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의 반응만 나오고 별일 없이 잊혀졌다.
영화가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했으니 세간의 관심이 적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에는 인터뷰를 영화랑 연관 지어서 비교하는 사람들이 제법 생길 거야.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돼.’
안시현은 같은 인터뷰임에도 회귀 전과 이번 생의 반응이 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는 무조건 그래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후반부 촬영을 위해 준비 잘해서 오겠습니다.”
“허허, 참.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준비하지 말고 푹 쉬다가 와요. 준비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안시현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이며 배려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팅 일정, 조절할 수 있을까?’
닷새간의 휴가.
지금이야말로 미팅을 할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까?
* * *
휴가 첫날.
안시현은 JM액터스를 방문해 김진석 대표와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미팅 일정을 앞당길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휴가 기간 동안 오디션을 보려고?”
“네. 촬영 중간에 억지로 스케줄을 비우느니, 쉴 때 오디션을 보는 게 제일 깔끔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 알겠다. 식사하고 있어 봐. 지금 당장 전화해서 물어보고 올 테니까.”
몇 분 뒤.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온 김진석 대표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는 오늘 당장 봐도 괜찮다는데, 그래도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사흘 뒤로 잡았다.”
“적당하네요. 작가님이 좀 급하신가 봐요? 아무리 그래도 오늘 당장 보고 싶다니.”
“똥줄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거다. 이러다가 제작이 무산될 위기인데.”
이대로 가면 드라마의 여왕의 입봉작은 몇 개월 동안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제작이 무산되고 만다.
그렇기에 오늘 당장 만나고 싶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일단 주연 배우를 한시라도 빨리 확정해야 다른 배우들도 캐스팅할 수 있을 테니까, 좋지 않은 상황에 짧게나마 호흡기를 달아 줄 수 있을 테니까.
‘이맘때의 작가님은 어떤 느낌이시려나. 궁금하네.’
* * *
김진석과의 식사 이후.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신인 배우 안시현입니다. 방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이렇게 보니까 리수철 느낌이 하나도 안 나네요? 모레까지 구경하겠다고 했죠? 같은 식구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다가 가요.”
“네. 감사의 의미로 음료수 좀 사 왔습니다.”
“에헤이. 뭘 이런 걸 다 사오고 그러실까. 우리 스태프들이 좋아하겠네. 잘 마실게요.”
안시현은 김진모의 촬영 현장을 방문했다.
간만의 휴식일에 머리도 비우고 김진모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견학하고 싶어서였다.
선배 배우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직후.
“왔냐?”
분장을 한 김진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진모는 짝다리를 한 채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서, 껌을 씹으며 안시현에게 다가왔다. 김진모의 모습이 아닌 배역의 모습이었다.
“어휴. 저 양아치 새끼.”
“크흐흐. 칭찬 고맙다, 인마.”
“오늘 촬영 몇 시에 끝나나? 간만에 대학로 가서 김치찌개나 먹자.”
“오. 김치찌개 좋지. 6시면 끝날 거야.”
“빨라서 좋네. 아, 맞다. 너 조연이지. 미안. 내가 주연이라서 헷갈렸다.”
“……다음엔 꼭 주연 따낼 거야. 두고 보자.”
안시현과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나누던 김진모는…….
“액션!”
“아따, 형님. 고것이 참말로 거시기 하당께요. 아니, 어제 보니까 수진이한테 허벌라게 껄떡대더랑께? 새끼가 확 뒤져블라고.”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동네 양아치의 리얼함을 몸소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김진모가 차기작에서 맡은 배역은 『나는 간첩입니다』의 황시국처럼 영화의 감초 역할로서, 출연 비중이 제법 되고 연기력이 받쳐 줘야 하는 캐릭터다.
문자 그대로 동네 양아치이기도 하다.
안시현은 김진모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며 감탄했다.
‘연기가 눈에 띄게 좋아졌어. 본가에 들어가 있는 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닌가 보네. 역시, 이러니까 다음 작품에서 바로 주연급으로 발돋움하지.’
안시현의 연기가 발전한 것처럼 김진모의 연기 또한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이제는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바로 연기가 튀어나올 만큼 자연스러움이 극대화됐고, 김진모의 최고 장점인 감정 연기 또한 명불허전이었다.
화룡점정은 전라도 사투리였다.
김진모의 주변에서 전라도 출신은 안시현뿐이다. 그마저도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닌 이후로는 배우의 꿈을 꾸며 사투리를 뜯어고쳤기에 교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진모의 사투리는 수준급이었다.
전라도 사투리를 심하게 사용하는 배역인데, 전라도 사투리 특유의 억양을 맛깔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덕분에 안시현은 눈 호강을 했다.
휴식일 이틀째에도, 삼일째에도 안시현은 김진모의 촬영장에서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배 배우들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것 또한 그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 줬다.
그 모습을 마음 편하게 볼 수 없는 단 한 사람.
“근데 시현아. 내일이 오디션인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상은 안시현이 오디션을 하루 앞두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 걱정됐다.
어련히 알아서 생각하는 바가 있겠다 싶다가도,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니저 입장에서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안시현은 답했다.
“걱정하지 마요, 형. 준비 잘했으니까.”
허언이 아니었다.
오디션 준비는 완벽했다. 캐스팅이 될 자신이 있기에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 거였다.
오히려 3일이라도 푹 쉬면서 머리를 비우는 게, 주지성의 잔상을 조금이라도 지워 버리는 게 오디션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다가온 휴식 4일 차.
“아, 안녕하세요. 드라마 작가 김희숙이에요. 일단…… 정말 죄송해요! 원래는 저희 쪽에서 오디션장을 섭외했어야 하는데, 여력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JM액터스 연습실에서 진행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안시현은 28살의, 아직 사회 초년생티가 물씬 풍기고 있는 드라마의 여왕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