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3화>
33화. 어쩜 사람이
김희숙.
훗날 드라마의 여왕으로 불리며 집필한 모든 드라마를 흥행시키고,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게 될 그녀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안시현의 앞에 서 있었다.
이후 대부분의 작품을 같이하며 김희숙 사단에 포함될 최창국 PD와 함께 말이다.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연이고 조연이고 예산 문제로 죄다 캐스팅에 난항을 겪으니 기가 죽을 만도 하지. MBS 내부에서는 제작 자체에 회의적인 분위기이기도 하고.’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에 배정될 예산은 24부작 드라마 평균 예산의 절반 수준이었다. 연기력과 흥행이 보장된 주연급 배우를 데려오는 순간, 제작비 부족으로 드라마의 퀄리티가 확 떨어질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MBS 내부에서는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 제작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예 몇몇 PD들은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조연들의 대사가 너무 튀어서 주연을 잡아먹을 것 같다고, 망할 게 뻔한 드라마를 내 손으로 만들어서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적은 예산과 부정적 분위기, 이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방송국 가라.
김희숙 작가는 어려운 여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캐스팅을 해 나간다.
몸값이 비싼 검증된 주연 배우들보다는 연기력이 괜찮다고 평가받는 조연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을 하는 방식을 택한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MBS에서의 제작이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는 거다.
총괄 프로듀서, CP가 조연 캐릭터들의 대사에 간섭하려 든 게 문제였다.
김희숙 작가는 대본에 손을 대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못한 채 노발대발했고, 결국 MBS에서의 제작을 포기하고서 KNC와 STS의 문을 노크한다.
그러나 결과는 방송 3사에서 모두 퇴짜.
그렇게 그녀의 입봉작은 제작이 불발되고 만다.
‘KNC와 STS에서 제작이 무산됐던 건 작품성의 문제가 아닌 MBS와의 트러블이 영향을 끼친 결과야. 예산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간섭 문제는 어떻게든지 해결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안시현은 기가 죽은 채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김희숙 작가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정영빈 역의 비공개 오디션을 요청한 안시현입니다.”
“아…… 반, 반가워요. 솔직히 조금 의외였어요. 제안을 받아 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리가요. 시놉시스부터 마음에 들었고, 대본을 보고 난 다음에는 무조건 정영빈 역을 따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는걸요.”
“저, 정말요?”
“저 사탕발림 안 좋아해요.”
그제야 김희숙 작가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사실 그녀는 최근 들어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예산은 평균의 절반 수준으로 책정될 예정이라고 하지, 배우 캐스팅은 마음먹은 대로 안 되지, 이러다 제작 자체가 엎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캐릭터가 튄다, 대사가 오글거린다, 스토리텔링이 정석을 벗어났다 등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으니 위축되는 게 당연했다.
대본이 좋다는 말을 들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흠흠.”
헛기침을 한 30대 초반의 사내, 최창국 PD가 안시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연출을 맡은 최창국 PD입니다. 『나는 간첩입니다』 인상 깊게 봤습니다. 리수철을 생각하고 와서 그런가, 이미지가 전혀 다른데요?”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오디션은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준비되시면 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신 10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PD님께서 대사를 받아 주셨으면 하는데…….”
“아, 당연히 해 드려야죠.”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구축했던 주지성 캐릭터를 잠시 머릿속에서 지웠다. 리수철 이전에 구축해 놨던, 미련을 담아 매달렸던 캐릭터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일단 오디션부터 합격하고 생각하자.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어. 이번 한 번만 가져다 쓰고 나중에 재구축하자.’
회귀 전.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안시현은 대본을 붙잡고 매달렸다.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촬영에 돌입할 수 있도록 캐릭터를 분석하고 구축하며 병마와의 싸움에서 버티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선 뒤에는 대본을 손에서 놓긴 했지만…….
당시 만들어 놓은 캐릭터는 유효했다.
시대에 맞춰 대본이 대폭 수정됐다지만, 주인공 정영빈의 캐릭터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휴식일 동안 별다른 연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주지성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정영빈이다.’
눈을 감았다 뜬 안시현은…….
“박 본부장님, 그리고 임원 여러분.”
미리 소품으로 준비해 놓은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최창국 PD를 바라보았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옅은 미소와 달리,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요즘 안팎으로 안 좋은 소리 많이 들리죠? IMF에 부도에 구조 조정까지, 중소기업들은 다 죽어나고 대기업들도 우는 소리잖아요.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요. 뉴스에서 허구한 날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에 반에 우리 백화점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롭네요? 구조 조정도 최소한만 했고, 신입사원 채용 인원 줄이고, 불필요한 지출 줄이는 선에서 마무리됐죠. 어째서 이럴까요?”
“그야…… 저희 백화점이 지난해에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흑자는 어떻게 기록했습니까?”
“…….”
말문이 막힌 최창국 PD가 지문대로 시선을 피했다. 안시현은 이전과 달리 최창국PD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서류로 시선을 내리깔고서 대사를 이어 나갔다.
“제가 대신 답해 드릴까요? 면세점 입점, 분기별 이벤트, VVIP 고객 관리, 외국인 고객 대상 이벤트 덕분이죠. 이 중 여러분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 습니다.”
“1월 매출이 12월 매출에 비해 34.2%가 감소했습니다. 연말 특수를 감안하더라도 낙폭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장님, 그 부분은…….”
탁.
안시현이 서류를 내려놓고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서 눈을 감았다.
“변명 듣자고 여러분 부른 거 아닙니다. 입이 아닌 결과로 증명하세요. 2월 매출이 반등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 절반은 옷 벗으셔야 할 겁니다. 제가 괜히 여러분께 비싼 월급 주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시현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아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나가서 일들 보세요. 아, 그리고 박 본부장님. 내일 있을 면접, 제가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요?”
“신입 채용 줄인 마당에 사장이 직접 면접 봐주는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준비해 주세요.”
* * *
‘와…….’
비공개 오디션 내내.
‘어쩜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지?’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감탄했다.
안시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는 최근에 『형아, 동생』의 촬영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최한수 감독의 허락을 받고 몇 분 정도 안시현의 연기를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 곧장 자리를 비웠다.
그렇기에 지금 보여 주는 연기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안시현은 데뷔작인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남파공작원 리수철을, 차기작인 『형아, 동생』에서는 자폐성 장애인 주지성을 연기했다.
스타일이 다른 두 캐릭터지만, 공통점이 존재했다.
캐릭터의 색이 너무 강렬했다. 특히나 주지성은 한동안 그 향기를 지워 낼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비공개 오디션이 시작된 지금.
김희숙 작가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안시현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안시현은 영락없는 백화점 사장의 모습이었다.
정장이 아닌 펑퍼짐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음에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착 가라앉은 눈빛과 절도 있는 제스처가 인상적이었다. 말투에서는 오만함과 특유의 자신감이 한껏 묻어났다.
안시현은 그녀가 생각한 정영빈 그 자체였다.
캐스팅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정영빈 역은 안시현으로 각인됐으니까.
‘일단 주연 한 명은 낙점했는데…….’
기쁨도 잠시, 김희숙 작가는 삽시간에 우울해졌다.
제작이 확정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
자유연기도, 인터뷰도 필요 없었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는 안시현의 지정연기를 보고서 캐스팅을 확정 지었다. 안시현보다 정영빈 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예산의 문제를 떠나 안시현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영빈을 완벽하게 표현해 줬다.
예산이 넉넉했더라도, 다른 배우들과 경합을 했더라도 그들은 안시현을 택했을 거다. 이견이 없을 정도로 안시현의 연기는 최고였다.
현재 다른 작품을 촬영하고 있는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캐릭터의 완성도가 높았다.
문제는…….
“듣자 하니 MBS 내부에서 반발이 제법 있다더군요.”
“대표님께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대본이 캐릭터가 좀 튄다더라고요.”
“조연들의 캐릭터성이 두드러지긴 하더군요.”
“그게 불만이 분들이 많았어요. 조연이 주연을 잡아먹는다면서요. 덕분에 제작비는 평균의 절반 수준, 방송 일정은 기약조차 없는 상태네요. 제작비 때문에 캐스팅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그 문제, 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김진석 대표의 말에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의 두 눈이 커졌다.
평균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는 제작비를 책정해 놓고 방송 일정도 미정이다. 드라마를 함께 만들어 나갈 스태프들도 확정되지 않았다.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을 버리는 카드로 쓰려는 거다, 그게 싫으면 그냥 나가라는 거였다.
상황을 알면서도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는 제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입봉작과 메인 PD로서의 데뷔작을 포기할 수 없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제 겨우 주연 배우 한 명을 캐스팅한 게 성과의 전부라는 것.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만약 그중 일부라도 JM액터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다면? 최소한 방영 일정이라도 확정 짓는 게 가능하다면?
제작에 탄력이 붙을 거다.
“정, 정말 도와주실 수 있나요?”
“네. 첫 촬영을 내년 4월 중순이나 말 정도로 미룰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저희 배우 4명이 이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합니다.”
김진석 대표는 배우 4명의 이름과 원하는 배역을 차례대로 열거했다.
다들 연기력이 검증받은 배우들이었으며, 공교롭게도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가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배역들이 거론됐다.
“주연 한 명에 조연 네 명, 이 정도면 캐스팅라인 확정에도 도움될 거고 드라마국에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충, 충분해요! 편성은 빨라야 내년 하반기일 거니, 4월부터 촬영해도 괜찮을 거예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김진석 대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친분이 있는 MBS 드라마국 국장에게 미리 연락해서 작품에 간섭하지 말고 편성 확정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사실은,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에게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 * *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를 보낸 뒤, 김진석 대표는 안시현을 대표실로 불렀다.
“4월부터 촬영하기로 했다. 스태프 구성이랑 캐스팅 라인 확정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할 거 같더라. 국장 말 들어보니 편성은 7월 말에나 되지 않을까 싶은데.”
“넉넉하네요.”
“넉넉한 만큼 싹 다 비워 내고 재구축해. 꼼수는 오디션이기에 통했다는 거, 네가 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어설픈 모습 보려고 너 도와준 거 아냐.”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석이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에 배우 네 명을 투입하고 MBS 드라마국 국장에게 전화해 영향을 끼친 건, 안시현의 부탁 덕분이었다.
물론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이 성공할 거라는 감이 온 게 결정적이었다. 성공할 것 같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안시현의 부탁이라도 들어주지 않았을 거다.
김진석 대표의 입장에선 흥행이 예상되는 드라마에 소속 배우 다섯 명이 출연하고, 겸사겸사 안시현에게 빚도 지게 했으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인 샘.
다만.
흥행할 거라는 가정은 안시현이 정영빈 역을 제대로 소화했을 때의 이야기다.
“열심히 준비해야죠.”
“그래. 알고 있으면 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 대표님이 안 도와주셨으면 제작이 불발됐을 거예요.”
“대본이 좋아서 도와준 거야. 널 한 방에 주연급으로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협력한 거니까, 기대에 부응해라. 일단 『형아, 동생』부터 잘 마무리하고.”
“네. 그래야죠.”
대표실에서 나온 뒤, 안시현은 김진석의 안목에 새삼 감탄했다.
‘역시 대표님은 눈치채셨네.’
연습실 안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 중 오로지 김진석만이, 안시현이 보여 준 정영빈 연기가 부실 공사였음을 정확히 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