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4화>
34화. 형아
사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 앞에서 비공개 오디션을 하는 내내, 안시현은 정영빈 캐릭터에 단 1초조차도 몰입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몰입이 불가능했다.
머릿속에 주지성의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의 휴식으로 지워 버리기엔 안시현은 그동안 주지성과 너무 짙은 스킨십을 해 왔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영빈 연기는 메소드가 아니었다.
메소드인 척, 배역에 몰입한 것처럼 흉내를 낸 거였다. 연기 위에 연기를 덮어씌워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의 눈을 속인 거였다.
김진석 대표의 눈은 속일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포장 덕분에 그럴 듯해 보이는 정영빈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었지만, 이 상태로 촬영을 시작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높았다.
“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안시현이라고 회귀 전에 구축한 캐릭터를 빌려, 정영빈 캐릭터에 몰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오디션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형아, 동생』의 촬영을 끝마치기 전에 오디션을 봐야만 했다. 김희숙 작가와의 접점을 만들고, 김진석 대표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해가 넘어갈 때쯤이면 제작 자체가 무산되고 말 테니까.
때문에 김진석 대표에게 최대한 빨리 비공개 오디션을 잡아 달라 했던 거고, 닷새간의 휴가가 주어지자마자 이때다 싶어 오디션을 강행한 거였다.
“급한 불은 껐으니까, 재구축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형아, 동생』부터 확실하게 마무리하자고.”
김진석 대표가 MBS 드라마국 국장과의 친분까지 이용해서 안시현을 도와줬다. 김희숙 작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편성을 확정 짓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따라서 드라마는 차질 없이 제작될 거다.
이제는 걱정을 내려놓고 다시 주지성으로 돌아가서 현실에 충실할 때였다.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에, 『형아, 동생』의 개봉으로 인지도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해. 연기만 놓고 보면 주연을 맡은 것도 납득이 된다는 평가를 들어야 해.’
안시현의 목표는 확실했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통해 인정받은 연기력에, 『형아, 동생』으로 방점을 찍는 것.
* * *
닷새간의 휴가 마지막 날.
“로드 매니저 최봉팔입니다!”
안시현은 로드 매니저를 소개받았다. 박정상과는 달리 회귀 전에는 함께한 적이 없는 이였다.
‘내가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무명이라, 정상이 형을 보조할 로드가 딱히 필요 없었지.’
회귀 전에는 군 입대 전까지 무명 배우였던 안시현이기에 박정상 혼자서 2명의 스케줄을 모두 챙기는 게 가능했고, 따라서 로드 매니저가 필요 없었다.
이번 생은 다르다.
김진모의 성장세는 회귀 전과 엇비슷하지만, 안시현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두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에서 내리 주연 자리를 꿰찼다.
박정상 혼자서는 스케줄을 소화하기 버거운 상황이 돼버렸다. 원활한 소속 배우 관리를 위해서라도 로드 매니저의 존재는 필수였다.
“체대 출신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경호 업체에서 일하다가 대표님 눈에 들어 입사하게 됐습니다.”
“간간히 운동 같이해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저보다 형이잖아요.”
“아닙니다. 제가 편해지면 천천히 놓겠습니다.”
“전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배우님 편하신 대로 호칭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봉팔 형.”
최봉팔.
2018년 즈음 유행했던 연예인과 매니저의 동반 출연 예능에서 운동 중독 매니저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광고까지 섭렵한 사내다.
안시현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담당했던 배우들 모두 해당 방송에서 성실하고 우직한 최봉팔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안시현이 좋아하는 매니저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최봉팔은 운전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다음 날.
양평의 촬영장으로 가는 내내 안시현은 흔들림이 부쩍 줄어든 차 안에서 편하게 대본을 읽었다.
촬영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막내 왔어?”
“오! 우리 막내 왔구나.”
일찌감치 현장에 도착한 몇몇 배우들이 휴가를 끝마치고 온 안시현을 격렬하게 반겨주었다.
이에 안시현은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간만에 뵙습니다.”
“얼굴 보니까 잘 쉬고 온 거 같네. 오자마자 밀린 신 왕창 찍을 거라고 감독님이 작정하셨던데.”
“저한테 그저께 연락 주셨어요. 오늘 바로 신 85를 찍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던데요?”
“신 85? 와우. 휴가 끝나자마자 중노동인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신 85.
신 78만큼은 아니지만 『형아, 동생』에서 의미 있는 신이다. 영화 중후반부에서 주지웅과 주지성의 삶에 변화가 생긴다는 걸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신이기도 하다.
안시현이 비공개 오디션에서 정영빈 역에 몰입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건, 신 85의 촬영이 예상보다 빨리 잡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그에게는 『형아, 동생』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잠시 동안 머리를 비우는 것 정도가 비공개 오디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전부터 신 85의 촬영을 앞둔 안시현은 산책을 하며 대본을 점검했다. 신 78 때와 비슷한 준비 과정을 거치며 주지성이 되기 위한 밑거름을 만들어 나갔다.
최봉팔은 근처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 와 스태프들에게 나눠 줬고, 오늘 안시현의 촬영 스케줄을 다시 한번 체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안시현은 홀로 산책을 하며 신 85를 앞두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더 이상의 의도적인 감정 표현은 없다. 나는 그냥 주지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기만 하면 돼. 주변 환경의 변화로 눈에 띄게 변해 가는 주지성, 그로 인해 함께 변해 가는 주지웅이 영화 후반부의 핵심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주지웅의 감정 표현이 두드러진다.
안시현에게 필요한 덕목은 주지웅의 감정 표현을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주지성의 행동 변화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거다.
『형아, 동생』은 자폐성 장애인을 다룬 영화가 아닌, 자폐성 장애인 가족을 다룬 영화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파출소에서의 일 이후 주지웅과 주지성 형제의 삶이 변하는 걸 보여 주는 게 핵심이다.
주지웅의 감정선을 흔들 연기.
안시현이 신 85에서 보여 줘야 할 연기였다.
* * *
오전 10시.
촬영장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분교.
그곳에서 신 85의 촬영이 시작됐다.
파출소에서의 만남 이후, 한미영은 주지웅에게 주지성을 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한다. 주지성에게는 교육과 독립이 필요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주지웅이 먼저 지치고 말 거라고 거듭 호소한다.
결국 주지웅은 한미영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일단 한 번, 주지성을 학교에 보내보고서 상황을 지켜본 뒤 최종 판단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신 85의 촬영을 위해, 안시현은 『형아, 동생』의 크랭크인 전에 그림을 배웠다. 보다 리얼한 주지성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 중 직접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을 거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것이기에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샘플을 보고 느낌만 표현할 거니 큰 문제는 없었다.
“안 배우, 손 배우. 준비됐죠?”
“완벽합니다, 감독님.”
“하하하. 저야 뭐 언제나 스탠바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신 85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안시현이 몰입을 위한 의식을 거친 직후.
“액션.”
사인이 떨어졌다. 눈을 뜬 주지성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미영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그림을 그려 볼 거예요.”
“그림이요?”
“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지성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나씩 해 보면서 알아 가려고요. 지성이의 정서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에요. 지웅 씨, 지성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게…….”
“지웅 씨를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지성이에게도 좋아하는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몰랐으면 이제부터라도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요. 일단 구기종목이랑 음악은 아니었으니, 그림도 한 번 해 보자고요.”
한미영의 설득에 따라 주지웅과 주지성은 몇 차례 특수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를 보내는 걸 고민하기 전, 주지성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별 성과가 없었다.
주지웅은 이게 과연 주지성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한미영의 말에 어렴풋이 동의했기에 특수학교를 방문한 거였다.
그렇게 결정된 이번에 할 일은 그림 그리기.
주지성이 캔버스 앞에 앉았다.
“지성아, 오늘은 그림을 그려 볼 거야. 선생님이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 테니 보고 따라하면 돼. 알겠지?”
한미영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주지성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해했어?”
주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붓을 집어 든 채 자신의 옆에 놓인 여러 색의 물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림 그리고, 일기 써요. 지성이는 분홍색 좋아요.”
“지성이가 그리고 싶은 거 마음껏 그려 봐.”
“분홍색 나비가, 날아다녀요.”
새하얀 캔버스 위에 분홍색이 조금씩 덧칠해졌다.
신기하게도 평소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주지성의 손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미동을 하지 않았다. 두 눈은 캔버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미영이 미소를 지었다.
“정답을 찾은 것 같네요.”
* * *
주지성은 분홍색이 좋았다. 그리고 나비가 좋았다.
분홍색 나비는 주지성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거지만, 잡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가끔씩 마당에서 봤지만 단 한 번도 손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주지성은 캔버스 위에 분홍색 나비를 그렸다. 자신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걸 계속해서 채워나갔다.
그 와중에도 캔버스의 정중앙은 비워 놓았다. 열댓 마리가 넘는 나비를 그리면서도 한가운데는 깨끗했다.
분홍색 나비가 캔버스의 외각을 가득 채웠을 때, 주지성이 처음으로 붓을 씻었다. 그림을 그리고 근 1시간 만에 분홍색 나비가 아닌 다른 걸 그리기로 결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주지웅의 입이 벌어졌다. 주지성이 그린 그림을 보고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한미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보여 준 주지성의 행동들과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주지성을 학교에 데려와야 한다고 우겼던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주지성에게선 자폐성 장애 특유의 행동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니 손이 정신 사납게 움직이지도, 시선 처리가 불안하지도 않았다.
다른 걸 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다.
주지성에게는 그림이 알맞은 처방전이었다. 그림을 통해 주지성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지웅이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한미영이 주지성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지성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선생님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니?”
주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캔버스의 외각, 수북이 그려 놓은 분홍색 나비들을 정신없는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성이가 두 번째로 좋아해요. 잡을 수 없어요.”
잠시 후.
주지성의 손가락이 캔버스 정중앙을 가리켰다. 시선은 캔버스가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지웅 쪽으로 엇비슷하게 향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성이가, 제일 좋아해요.”
주지웅이 주지성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는 동생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성아, 이 그림 이름이 뭐야?”
“이름 있어요. 지성이 이름 정했어요.”
“이름 한 번 적어볼까?”
캔버스의 최하단.
주지성은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그림에 무어라 적어 내려나갔다. 그것을 본 주지웅의 눈에서는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처음 우는 거였다.
캔버스에는 환한 미소를 지은 성인 남자 한 명이, 수많은 분홍색 나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림의 이름은, ‘형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