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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5화 (3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5화>

35화. 여기 아프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주지성은 자폐성 장애인이 아니었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 나비와 형을 그리며 행복을 느꼈다.

주지웅은 그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다.

항상 주지성을 천덕꾸러기 취급했고, 통제하고 가둬 두려고만 했다. 그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주지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주지웅이 편하기 위해 내린 판단이었고, 주지성이 필수적으로 누려야 할 기회들을 강탈한 거였다.

이제야 주지성이 교육을 받게 됐지만…….

너무 늦어 버린 게 아닐까, 잘못된 판단으로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린 게 아닐까 걱정됐다.

더욱 주지웅을 마음 아프게 한 건.

그 와중에도 주지성은 형이 제일 좋다고 그림에 주지웅을 그린 거였다. 허구한 날 좋다면서 집착하는 분홍색과 나비보다도 주지웅이 더 좋다고 한 거다.

주지성은 눈물을 흘리는 주지웅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지웅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형아 여기 아프다. 빨간약 발라야 돼요.”

“…….”

주지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말없이 주지성을 끌어안았다.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지성이 숨 막혀요.”

이날.

주지웅은 마음으로 오열했다.

*   *   *

신 85의 촬영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최한수 감독은.

“……OK.”

조심스럽게 OK 사인을 냈다.

“이대로 갑시다. 수고했습니다.”

더 이상의 촬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안시현도 손해수도 이아영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흠잡을 만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배우들이 완벽한 호흡으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리테이크를 하는 건 배우들이 보여 준 연기를 모독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후우…….”

OK 사인이 나오고도 10초 이상 지난 뒤, 안시현을 끌어안고 있던 손해수가 거리를 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붉은 눈시울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진정이 잘 안 되네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손해수가 촬영 현장을 벗어났다.

안시현은 연신 감탄을 토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존경심 어린 눈빛으로 손해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 진짜 감정 표현 미쳐 버렸잖아!’

신 78에서 안시현이 정신 나간 연기를 보여 줬다면, 신 85는 손해수의 독무대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아영이 좋은 연기를 해 줬고, 안시현 또한 그림을 그리며 생기는 주지성의 변화를 잘 표현해 냈다.

하지만.

신 85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주지웅의 감정 표현이었다. 최근 들어 생긴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 자신이 주지성을 억압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고민하던 주지웅의 죄책감이, 주지성이 그린 그림을 보고서 결국 봇물이 터져 버리고 만다.

문제는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

주지웅은 주지성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주지성을 끌어안은 것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주지성 앞에서만큼은 항상 당당하고 멋진 형이자 부모이고 싶어서였다.

따라서 표현이 너무 과해도 안 되고, 너무 부족해도 안 된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감정이 격해져 있다는 걸 드러내다가,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절제된 감정 표현 속에서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야 한다.

오열이 아닌 눈물을 흘리는 수준이기에 웬만한 연기 내공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손해수의 선 굵은 감정 연기는 주지웅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최한수 감독이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손해수의 연기를 본 일부 스태프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상태였다.

“조금…… 울컥하네요.”

“그렇죠? 오열한 것보다 더 슬픈 것 같아요.”

“대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었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이해가 되네요. 아, 이래서 감독님이 오열이 아닌 몸을 떨고 주지성을 끌어안는 지문을 넣었구나 싶어요.”

『형아, 동생』은 주지성만의 이야기가 아닌, 타이틀에서 드러나듯 주지성과 주지웅의 이야기다. 역할상 안시현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구도지만, 손해수의 연기가 부족하면 영화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만다.

특히나 신 85가 그러했다.

손해수는 자신이 『형아, 동생』의 투톱인 이유를 연기로서 명확히 증명해 보였다. 안시현 혼자 돋보이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보여 줬다.

신 78에 이어.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또 하나의 명품 신이 완성됐다.

*   *   *

『형아, 동생』은 최한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네 번째 영화다. 독립 영화까지 영역을 넓히면 여덟 번째다. 거기에 조연출로서 참여한 영화가 세 작품 더 있다.

다수의 작품을 거치며 지금껏 그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영화마다 천양지차다.

투톱 배우들의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살얼음판 위를 걷기도 하고, 사이가 안 좋은 배우들을 모아 놔서 함께 촬영을 안 하는 경우도 있으며, 남녀 주연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눈에 맞아 티를 내며 연애를 하기도 한다.

『형아, 동생』의 현장 분위기는 최한수 감독이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뭐랄까…….

배우들이 모두 한 가족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밀한 사이처럼 서로를 챙겼다.

서로의 연기와 관련해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연습을 도와주며, 필요에 따라 배우가 직접 리테이크를 요청하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일까?

『형아, 동생』은 이상하리만큼 유독 NG가 적었다. 촬영 전에는 웃고 떠들다가도, 사인이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 줬다.

NG가 아예 안 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영화에 비해 유난히 적은 건 분명했다.

덕분에 제작 일정이 꽤나 줄어들었다.

당초 1월 말 즈음 마무리 될 걸로 보였던 촬영은 해를 넘기지 않고 끝날 것 같았다. 배우들과 스태프가 한 몸이 되어 촬영에 열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안시현이 존재했다.

안시현은 『형아, 동생』의 촬영 속도를 예상보다 빠르게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었다.

자폐성 장애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애드리브는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가끔.

촬영을 하며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이 아닌 다른 배우가 주지성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한다고 가정해도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주지성 역에 안시현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쓴 것처럼, 주지성은 그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주지성이 중심을 잡아 주니 다른 배역들도 살아났다.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의 합은 촬영을 반복할수록 점점 좋아져 갔다.

‘안 배우가 아니었다면 촬영이 이렇게 순조롭지 못했을 거야. 안 배우이니까, 주지성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으니까 가능한 연기야.’

최한수는 안시현에게 매 순간 고마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말하려는 메시지를 안시현은 매 순간 완벽하게 표현해 줬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형아, 동생』의 촬영도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몇 신만 더 촬영하면 공식 촬영이 마무리된다.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다.’

자폐성 장애인과 함께 사는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편견을 없애고, 이왕이면 관객들의 심금도 울릴 수 있기를 바라며.

최한수 감독이 꼼꼼히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완벽한 피날레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다.

*   *   *

결과적으로 그림은 주지성에게도 주지웅에게도 동아줄이 됐다.

그림을 그린 이후.

주지성은 놀라우리만큼 안정되어 갔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의 집중력은 엄청났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미영이 하는 교육들을 잘 따라와 줬다.

배우지 못했던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결국 주지성은 학교를 다니게 됐다.

주지성은 이제 더 이상 매주 두 번, 장을 볼 때마다 대문을 나서지 않았다. 아침마다 분홍색 책가방을 메고 기분 좋게 등교하며 세상과 조금씩 소통해 나갔다.

그러던 중.

한미영이 주지성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성아, 대회에 한번 나가 보지 않을래?”

그림에 대해 전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한미영의 눈으로 봤을 때 주지성의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걸 넘어 재능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회에 나가는 게 주지성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주지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영과 보낸 시간이 쌓여 가며, 주지성은 이제 한미영의 말을 잘 따르게 됐다. 주지웅만큼은 아니지만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됐다.

“제일 그리고 싶은 걸 그려 보자.”

주지성은 대회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멈추지 못하는 거였다.

그렇게 주지성이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대회에 출품됐고…….

“지웅 씨, 지성이가 은상을 받았어요!”

주지성은 당당히 입상을 해 버렸다.

그리 규모가 큰 대회는 아니었지만 입상을 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주지성이 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거였으니까.

게다가…….

“주지성 씨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희 갤러리와 함께, 화가로서의 미래를 그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저희 갤러리로 말할 것 같으면…….”

수상을 계기로 한 갤러리에서 주지성에게 관심을 가졌다. 정식으로 계약하고 화가로 키워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주지웅은 주지성의 의견을 물었다.

자신이 판단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지성의 일이니만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지성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지성이는 그림이 좋아요.”

그림이 좋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게 결정됐다.

주지성은 갤러리와 정식으로 계약을 했다. 다른 신인 화가들과 동등한 조건이었고, 갤러리에서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주지웅의 취업은 보너스였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야 좋은 그림이 나오는 법입니다. 지성 씨가 지웅 씨와 있을 때 가장 편안해하니, 되도록 함께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마침 일손도 필요하고요.”

주지성의 갤러리 계약과 주지웅의 취업.

겹경사에 한미영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고, 학교는 나와야 되는 거 알죠? 지성이에게는 아직 교육이 필요해요.”

그녀는 천성 교사였다.

주지성은 평일 오후 3시까지는 학교, 3시 이후와 주말에는 갤러리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주지웅은 아침에 출근해 주지성과 함께 저녁에 퇴근했다.

갤러리에서의 일에 적응하느라 몸은 고됐지만 정신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림을 그리며 나날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주지성을 보는 건, 주지성이 집에만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갤러리에서의 일이 적응됐을 즈음.

주지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지성이가 분홍색 나비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   *   *

“OK. 수고하셨습니다.”

최한수 감독의 사인과 함께 안시현의 긴장이 풀어졌다. 주지성을 잠시 내려놓고서 안시현으로 되돌아왔다.

‘한 번밖에 남지 않았구나…….’

신 125.

어느새 『형아, 동생』은 마지막 한 신의 촬영만을 남겨 두게 됐다. 빨라야 1월 중순에나 끝날 걸로 예정됐던 촬영을 해가 바뀌기 전에 마무리하게 됐다.

“내일 오전, 신 125 촬영하고 바로 뒤풀이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한 만큼 좋은 곳에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되도록 많이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지성에게 몰입하며 살아온 두 달여의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가족처럼 화목한 분위기에서 촬영을 이어 왔기 때문일까?

마지막 신의 촬영을 앞두고 안시현은 울컥했다.

『나는 간첩입니다』도 뜻깊은 작품이었지만,『형아, 동생』은 힘들게 준비하고 모든 걸 내던지며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배 배우들은 그런 안시현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최고의 호흡으로 보답해 줬다. 촬영장의 막내가 기죽지 않고 최선의 열기를 펼칠 수 있도록 항상 도와줬다.

돌이켜보면 주지성은 안시현 혼자서 만든 게 아니었다. 손해수가, 이아영이, 다수의 배우들이, 최한수 감독과 스태프들이 다 함께 만든 캐릭터였다.

시간이 지나 1999년을 회상한다면…….

촬영장의 분위기가 조금은 그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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