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6화 (3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6화>

36화. 아, 행복하다

어느 날.

한미영은 주지웅 형제에게 가족사진을 찍는 게 어떻겠냐며 권유한다. 주지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은 주지웅은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다.

두 사람의 삶을 정상 궤도로 되돌려 준 한미영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지웅과 주지성은 가족사진을 찍는다.

주지성이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를 두 사람의 사이에 놓은 채로.

신 125.

『형아, 동생』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신의 촬영을 몇 시간 앞두고서, 일찌감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안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시간 참 빨리 가네.’

『형아, 동생』의 촬영은 매 순간이 즐거웠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촬영했고, 촬영이 진행됨에 따라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해감을 스스로 느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촬영이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달이 삽시간에 지나갔다. 단 한 번의 OK 사인만이 남았다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아련한 감정과 별개로.

‘신 125에서는…….’

안시현의 책임감은 평소와 똑같았다.

신 125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해 줘야 한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신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촬영 아니던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안시현은 차분하게 산책을 하며 마지막으로 주지성을 만날 준비를 해 나갔다.

*   *   *

“정말, 제가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당연히 되죠. 가족사진을 찍고 나서 선생님과도 함께 셋이서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는걸요? 지성이도 선생님을 좋아하고요. 그치, 지성아?”

“선생님 좋아요. 네 번째로 좋아요.”

“첫 번째는 지웅 씨고, 두 번째는 분홍색 나비었지? 지성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건 뭘까?”

“형아가 해 주는 자장라면 좋아요. 세 번째로 좋아요. 주말엔 형아가 자장라면 요리사~”

“……저 지금 자장라면에 밀린 거예요?”

자장라면에게 우선순위가 밀린 걸 억울해하면서도 한미영은 미소를 지었다.

파출소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위태위태해 보였던 주지성과 주지웅 형제는, 몇 달 사이 부쩍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는 파출소에서의 불안한 모습이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였다.

주지웅은 주지웅대로, 주지성은 주지성대로 안정됐다.

이대로 교육만 꾸준히 받는다면 큰 문제없이 행복한 일상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선생님, 그 보따리는 뭡니까? 사진 찍으러 간다고 하기에는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아, 이거요? 가 보면 알아요.”

잠시 후.

한미영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진관에 도착한 주지웅과 주지성의 가족사진 찍기 도전이 시작됐다.

“형님분, 동생분 쪽으로 조금만 더 붙어 주세요. 네, 네. 그렇게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 주세요. 아이고, 좋습니다!”

정장을 입은 주지웅은 간만에 찍는 사진이 어색한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주지성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사진관의 낯선 분위기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다.

“동생분, 카메라 봐 주셔야 돼요. 카메라 안 보면 사진 제대로 안 나와요.”

사진사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지성은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별의별 짓을 다 해 봐도 카메라를 바라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결국.

“이럴 줄 알고 준비해 왔지.”

한미영이 나섰다.

그녀는 짊어지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커다란 분홍색 나비 인형을 꺼냈다.

주지성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자, 성공적으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다.

한미영은 분홍색 나비 인형을 들고 사진사의 뒤로 향했다. 카메라 근처에 분홍색 나비 인형을 들이밀고서 열심히 흔들어 보였다.

“분홍색 나비 좋아요.”

그제야 주지성이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분홍색 나비 인형을 바라본 것이었지만, 시선 처리가 불안정하던 이전과는 구도가 사뭇 달라진 게 사실이었다.

“아이고. 이제 카메라 좀 봐 주시네. 웃어 주면 더 좋을 텐데, 그것까진 어렵겠죠?”

“아하하. 지성이한테는 이게 최선이에요.”

“어쩔 수 없죠. 그 대신 형님분이라도 환하게 웃어 주세요. 자, 이제 찍습니다!”

주지웅은 환하게 웃었다. 반면 주지성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지성이 심리적으로 가장 편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림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얼마 전 주지성이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였다.

“자, 한 번 더 찍겠습니다. 동생분, 이번에는 웃어 봅시다! 하나, 둘, 셋!”

가족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주지성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끝끝내 멍한 표정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주지웅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지 않는 주지성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멍한 표정과 정신 사나운 움직임이 가장 주지성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온한 분위기 속.

주지웅이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아, 행복하다.”

손해수의 마지막 대사 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최한수 감독은…….

“……OK.”

OK 사인으로 『형아, 동생』의 마지막을 알렸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동시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촬영 종료를 자축했다.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스태프와 배우도 제법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아영은 분홍색 나비 인형을 끌어안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 씨……. 왜 주책맞게 눈물이 나냐. 아, 분위기 좋은데 망쳐서 죄송합니다.”

“허허허. 아영이는 언제 봐도 참 소녀 같다니까. 다들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과 함께해서 촬영하는 모든 순간들이 제게는 분홍빛이었어요.”

“저희도 선생님과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12월의 마지막 날.

『형아, 동생』의 촬영이 종료됐다. 회귀 후 안시현의 두 번째 작품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   *   *

“오늘 한번 먹고 죽어 보자!”

“이야. 1999년의 마지막 날에 뒤풀이라니, 이거 완전 뜻 깊은데요?”

“하. 새해를 애인이 아니라 징글징글한 남정네들하고 같이 보내야 하다니. 나 이러다가 결혼 못하고 노총각으로 늙어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선배, 다음 달에 자리 한번 마련할게요.”

“역시 내 마음 이해하는 건 아영이밖에 없어. 자, 자. 음료수 한 잔 받아. 우리 아영이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니까 막내랑 둘이 음료수 다 드세요.”

뒤풀이 자리는 시끌벅적하고 정겨웠다. 평소 촬영장 분위기를 식당에 그대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안시현은 역시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회귀 후, 그는 되도록 음주를 자제하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한 잔 정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에 잠겼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여운을 즐기고 싶은 탓에 관뒀다.

분위기가 얼마나 무르익었을까?

“시현아.”

“네, 아버지. 한 잔 따라드릴까요?”

“허허허. 그래. 우리 막둥이랑 한잔하고 싶어서 왔다. 음료수로 짠.”

갤러리 관장으로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해 준 중견 배우 박국영이 안시현의 옆에 앉았다. 안시현과 잔을 부딪친 그는, 가득 차 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서 안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다. 시현이 네가 아니었다면 영화가 흔들렸을 거야. 개봉하고 나면 몸값 확 오르겠던데?”

“다들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덕분에 제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겸손하기는. 뭐,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든다만.”

『형아, 동생』의 촬영 내내.

박국영은 안시현을 막내아들처럼 대했다.

막내아들과 동갑인 안시현이 모든 걸 내던지고 불태우며 연기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급기야 『나는 간첩입니다』 개봉 이후에는 인터뷰를 통해 몇 년 내에 안시현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휘어잡는 배우로 성장할 거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시현은 그런 박국영을 촬영 내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막내아들과 동갑인 자신을 챙겨 주는 박국영의 진심에 화답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시현이 너, MBS에서 드라마 하나 하기로 했지? 작가 이름이…… 김희숙 작가님 맞지?”

“네, 맞아요. 혹시 아버지도?”

“며칠 전에 캐스팅 제안받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캐스팅 라인에 네가 포함되어 있더구나. 우리 막둥이가 주연이라니까 냅다 한다고 해 버렸지. 시놉시스도 괜찮았고. 아, 참고로 내가 제안 받은 역은 정건국이란다.”

“다음엔 진짜로 부자가 되겠는데요?”

“허허허. 그러게 말이다.”

안시현과 박국영은 다음 작품에서도 함께하게 됐다.

『형아, 동생』 촬영장에서 친분을 다지지 위해 막둥이와 아버지라고 호칭하다가, 정말로 부자 관계에 있는 배역을 맡게 된 것이다.

안시현은 그 사실이 기뻤다.

『나는 간첩입니다』에 함께 출연했던 이아영과 『형아, 동생』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좋은 추억을 쌓았던 배우들과 또 다시 작업하는 건 언제 경험해도 항상 기분 좋은 일이니까.

“아버지가 해 준 조언이 제게 큰 도움이 됐어요. 주지성 역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제 배우 인생에 탄탄한 뿌리가 되어 줄 겁니다.”

안시현이 박국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국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친 김에 조언 하나 더 해 볼까?”

“아버지 말씀이라면 백 번, 천 번도 환영합니다.”

“허허허. 그래, 시현아. 나는 네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단다. 엄청난 재능을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해 주잖니. 스타일은 다르지만 진석 형님 아들내미를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말이다. 가끔 너를 보며 아쉬울 때가 있어.”

박국영은 『형아, 동생』을 촬영하는 내내 안시현으로부터 느꼈던 아쉬움을 꺼내 놓기로 했다.

사실 별거 아닌 아쉬움이었다. 지금처럼 탄탄히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면 몇 년 내로 엄청난 배우가 되어 있을 거다.

다만.

박국영이 느낀 아쉬움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더 빨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네가 좀 더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단다.”

시야를 넓혀라.

무심하게 내뱉은 조언을 듣고서 안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영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조언을 한 건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썼다.

‘똑똑한 아이니까 때가 되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되겠지. 조금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너무 급하게 가려고 하지만 마렴.’

해가 바뀌어도 안시현의 나이는 22세다.

웬만한 배우들은 학교를 다니거나, 극단에서 경험을 쌓거나, 대사 몇 마디가 전부인 단역이라도 따 보기 위해 열심히 프로필을 돌리고 있을 나이다.

그 시기에 안시현은 24부작 드라마의 주연에 도전하게 됐다.

안시현이 지금껏 보여 준 연기력이라면 드라마의 흥행 여부와 별개로 좋은 연기를 선보일 거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판을 만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안시현이 자신이 말한 사소한 문제를 드라마 촬영 전에 해결할 수 있다면?

왠지 안시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사소한 문제의 해결로 배우로서 엄청난 성장을 이뤄 내지 않을까 싶었다.

조언을 할 때마다 정답을 찾아내며 끝을 모르게 발전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해낼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됐다.

‘허허허. 재밌는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는걸?’

*   *   *

1999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시간을 확인한 손해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자! 다들 잔 듭시다!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와…… 작품 몇 개 하다 보니까 어느새 한 해가 다 갔네요. 시간 참 빠르다.”

“그러게요. 그래도 이번 연말은 기분이 좋네요. 좋은 배우, 좋은 스태프들과 추억을 쌓고 있잖아요.”

“크으. 우리 아영이 말 한번 잘한다. 자, 카운트 세겠습니다. 5! 4! 3! 2! 1!”

켜 놓은 TV에서 밀레니엄을 카운트했다. 재야의 종소리를 기점으로, 1999년이 끝나고 2000년이 도래했다.

“해피 밀레니엄!”

“다들 내년 하는 작품 모두 잘되고, 광고도 찍고 돈 많이 법시다!”

“우리 영화 대박 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맞이한 2000년의 첫날.

이른 새벽, 안시현은 김진모와 함께 부산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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