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7화>
37화. 심각합니다
난데없는 부산행이 결정된 건 김진모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사실 안시현은 부산에 갈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냥 1월 1일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려 했다. 뒤풀이를 끝내고 돌아와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고, 피로가 싹 풀릴 때까지 깨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안시현을 김진모가 깨웠다.
그것도 무려 동이 트기 전에 말이다.
“시현아. 야, 안시현! 일어나 봐. 부산 가자.”
“하아암…… 졸려 죽겠는데 뭔 부산이야. 약 먹었냐.”
“바다 보고 돼지국밥도 먹고 오게. 난 3일 동안 휴가고, 때마침 신년이고, 넌 작품 하나 끝냈는데 집에서 뒹굴기만 하자고? 그러지 말고 부산 가자. 운전은 내가 할 테니 넌 차에서 푹 자.”
“안 가면 잠 못 자게 할 거지?”
“당연한 소리.”
“……부산 도착할 때까지 깨우지 마.”
“접수 완료했습니다, 고객님.”
그렇게 안시현은 부산을 가고 싶어 안달이 난 김진모에게 이끌려 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어느새 바닷가 근처에 도착해있었다.
“벌써 다 왔어? 해운대야?”
“어. 산책 좀 하다가 돼지국밥 먹으러 가자. 20년 전통 돼지국밥집 찾아놨으니까.”
“돼지국밥? 좋지.”
“이번 여행의 테마는 식도락이니까 소화제 잘 챙겨 먹어. 무조건 살 쪄서 서울 올라간다.”
주차를 한 안시현과 김진모는 겨울이라 한적한 해운대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부산에 마지막으로 온 게…… 2012년이었나? 영화 촬영 때문에 왔었는데 참 오랜만이네.’
간만에 온 해운대의 차가운 바닷바람도, 산책 후 먹게 될 따뜻한 돼지국밥도, 부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먹을 맛있는 음식들도 모두 다 좋았다. 작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느긋하게 쉬러 온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회귀 후로는 처음이었다.
회귀한 지 아직 1년도 안 지났지만, 두 작품의 끝낸 뒤 세 번째 작품을 앞두고 있다. 그사이 참 부지런히도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채우기 전에, 모조리 내려놓자.’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안시현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 * *
부산에서의 여행 첫 날부터, 안시현과 김진모는 자신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인 요청을 받았다.
덕분에 두 배우는『나는 간첩입니다』가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고 흥행에 성공하며 자신들의 인지도가 꽤나 올라갔음을 실감하게 됐다.
한동안 집과 촬영장과 JM액터스 사옥 연습실만을 오가는 삶을 살아왔기에 인기를 실감할 일이 없었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사인 요청을 흔쾌히 받아 줬다.
특이한 건 두 사람이 함께 다니는데 김진모 혼자 사인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다. 사인 요청 전체의 무려 7할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김진모가 더 인기가 많다거나, 김진모가 더 잘생겼다거나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저…… 옆에 계신 분, 혹시 리수철 아닌가요?”
“네. 배우 안시현입니다.”
“우와! 맞으시구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못 알아봤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사람들이 안시현을 알아보지 못해서였다.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리수철의 이미지와 현재 안시현의 이미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랐던 몸에 살과 근육이 붙었고 머리카락이 자란 것도 있었지만, 분위기 자체가 워낙 다르다 보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안시현은 자신이 리수철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함을 느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끝낸 안시현과 김진모는 미리 잡아 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안시현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김진모는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마른안주와 맥주를 정성스럽게 세팅하고 있었다.
“맥주?”
“시원하게 한잔하고 자게. 시현이 넌?”
“얼음물이나 마시련다.”
“싱겁기는.”
피식 웃은 김진모는 안시현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테이블 위에 얼음물 한 컵을 올려놓았다.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 안시현이, 마른안주를 집어먹고서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남자 둘이서 단둘이 호텔이라니 참 정겹다.”
“크흐흐. 그러게 말이다. 이런 곳은 여자친구랑 둘이서 와야 하는데 말이야. 내일은 뭐할까?”
“경주 갔다 올래? 나 놀이기구 타고 싶은데.”
“이야. 한겨울에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이라니, 스케줄 완전 미쳐 돌아가는구만. 하루종일 회전목마만 타다가 돌아오고 싶어?”
“그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한창 맥주를 마시던 중.
김진모가 슬쩍 안시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근데 넌 연애 안 하냐? 시사회 건으로 학교 갔을 때 보니까, 죄다 연애하고 있던데.”
“흐음. 글쎄다.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는데?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하지 않으려나.”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안시현은 연애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김진모가 몇몇 톱스타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 것과 다르게, 안시현은 연애를 하더라도 스캔들 한 번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했다.
오죽하면 한때 성 기능에 문제가 있다거나 동성애자라는 루머가 돌았을 정도였다.
워낙 연기에 미쳐 있고 연기를 좋아하다 보니 연애를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고, 조연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이후로는 나이와 연기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누군가를 만나는 게 꺼려져 자연스레 피하게 됐다.
결국 31세 이후로는 연애 경험 전무.
20년 전으로 돌아왔지만 딱히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 후.
안시현이 도리어 되물었다.
“너, 만나고 있는 사람 있지?”
그는 김진모가 굳이 부산 여행을 와서 뜬금없이 분위기를 잡고 연애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눈치챘다.
아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맥주를 마시는 내내 자신을 힐끔힐끔 살피는 게 너무 티 나서 김진모가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티 났어?”
“뜬금없이 연애 이야기 꺼낸 거 보면 뻔하지. 연애 상담 아니면 연애한다고 말해 주려는 건데, 네가 나한테 연애 상담을 받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너, 요즘 촬영 끝나고도 바로 안 들어오는 날 많았잖아. 누구 만나는 사람 있구나 싶었지.”
“크흠. 자식, 하여간 눈치 하난 더럽게 빨라요.”
“언제부터 사귄 거야? 연예인?”
“호감 느낀 건 두어 달 됐고 사귀기 시작한 건 12월 초부터야. 연예인 맞아. 너도 아는 사람이고.”
안시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김진모는 이맘 즈음에 연애를 했었고, 그의 연인은 안시현과도 안면이 있는 연예인이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라고?”
김진모의 입에서 연인의 나왔을 때 안시현은 진심으로 놀랐다. 너무 놀라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바뀐 거지?’
안시현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이름이 김진모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김진모가 말한 연인은 안시현이 회귀 전 알고 있던 사람과 동일인이 아니었다.
김진모의 첫사랑이 달라졌다.
* * *
여행 둘째 날.
김진모와 안시현은 예정대로 경주에 놀러 갔다.
놀이공원에서 안시현 혼자 놀이기구를 탔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김진모는 지겹도록 구경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회용 사진기 네 개 분량의 사진을 찍었고, 지인들과 김진모의 촬영장에 선물로 나눠 줄 황남빵도 잔뜩 구입해서 트렁크에 실었다.
여행 셋째 날.
두 사람은 체크아웃을 하고 맛집에 들러 든든하게 식사를 한 뒤 부산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안시현과 김진모는 배우로서의 미래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화장실 가려고 들른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김진모는 안시현에게 대본 하나를 슬쩍 보여 줬다.
타이틀을 확인한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이 작품이네.’
『너를 부르다』.
최고 시청률 35.5%를 기록하며 대박이 난 24부작 드라마로, 인기에 힘입어 김진모를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올려줄 드라마이기도 했다.
김진모의 선택은 또다시 『너를 부르다』였다.
대본을 보자마자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매달렸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을 정도로 김진모는 이 작품에 완전히 매료됐다.
실제로 대본도 괜찮고 연출도 훌륭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연기력 구멍이 딱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최고 시청률 35.5%를 기록한 것이다.
대본을 훑어본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대본 좋네. 어떤 배역 노리는 거야?”
“이진수. 이번에는 주연 한번 노려 보려고. 다른 배역에는 전혀 관심 없어. 따내면 하는 거고, 떨어지면 다른 작품 찾아봐야지.”
“크흐흐. 너다운 선택이다. 오디션 언제야?”
“2월 말 공개 오디션 예정이야.”
“너무 빡빡한 거 아냐?”
“촬영이 5월부터라니까 오디션 보고 나서 쉬어야지. 나도 스케줄 때문에 고민했는데, 대본을 보니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준비 안 할 수가 없더라. 조금 고생스러워도 참고 해야지 어쩌겠어.”
안시현은 김진모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배우가 작품에 대해 욕심을 가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었다. 안시현도 『형아, 동생』을 위해 휴식기에 봉사 활동을 감행했고, 세 번째 작품을 위해 『형아, 동생』의 휴가 기간 동안 오디션을 보지 않았던가.
힘든 일정이 될 걸 알면서도, 좋은 작품과 좋은 배역을 위해서라면 달려들게 된다. 이 작품을 놓치면 뼈저리게 후회할 거 같기에 가시밭길을 사서 걷는다.
안시현과 김진모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오디션 준비는?”
“촬영 끝나는 대로 바로 시작하려고. 시간이 촉박하긴 한데 죽자고 매달리면 가능할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나 좀 도와주라. 합격하면 거하게 한 턱 쏠게.”
“연습 파트너 정도야 해 줄 수 있지.”
“연습은 전처럼 노래방에서 하자. 이 작품 오디션, 아빠 모르게 진행하고 싶거든. 정상 형한테 비밀로 해달라 신신당부하고 대본 슬쩍 빼 온 거야.”
“오디션 참가자 명단에 너 있는 거 아시면…….”
“놀라시겠지. 뒤집어질지도 모르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놓고 진행하면 뜯어말리실 거 같지 않냐? 난 무조건 이 작품을 하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말이야.”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석 대표에게는 비밀로 하고 작품을 준비하고 싶다는 김진모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지. 휴식 겸하면서 적당히 도와줄게. 대신…….”
“대신?”
“합격하면 제주도 여행 쏴라.”
“오케이. 거래 성립.”
* * *
2박 3일의 부산 여행 이후.
김진모는 다시 촬영에 매진했다.
1월 말에 촬영 종료될 예정인 영화에 집중하며 『너를 부르다』를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시현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칠 수 있다. 아무리 급해도 우선순위를 정하고 순리대로 처리하는 게 상책이었다.
김진모가 촬영에 매진하는 사이 안시현은…….
“일단 가볍게 몸부터 풀겠습니다, 배우님. 뛰십시오.”
최봉팔과 함께 한 도장을 찾았다.
어릴 때부터 최봉팔이 다녔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사범 업무를 도와준다는 곳이었다.
합기도복을 차려입은 최봉팔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안시현을 바라보았다. 도장 내부를 일정한 속도로 뜀박질하는 안시현의 모습을 구석구석 분석하듯 살폈다.
“아침마다 김진모 배우님하고 운동한다고 하셨죠?”
“네. 거창한 건 아니고 체력 관리 차원에서 같이 뜀박질하는 거죠. 근력 운동은 집에서 덤벨이나 조금 드는 정도에요.”
“일단 기초 체력은 좋아 보이십니다. 근육은…… 잠깐 몸 좀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네. 편하게 만져요.”
안시현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은 최봉팔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 치고는 좋습니다. 촬영 전에 만족할 수준으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우.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부터 식단과 운동 스케줄은 제 지시를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배우님의 몸을 보기 좋게 조각해 드리겠습니다.”
안시현이 맡게 될 정영빈 배역은 유일한 결점이 인성 부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매사에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는 캐릭터다.
5개국어 마스터에 학창시절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으며, 너무나도 당연하게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한다.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해 호신술 실력을 드러내는 신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최봉팔과 도장을 찾은 거였다.
체대 출신인 최봉팔의 도움을 받아 몸을 근육질로 탈바꿈시키고 호신술을 배우기 위해 말이다.
안시현의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긴 하지만, 전문가가 직접 관리해 주는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이왕이면 최봉팔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완벽한 몸 상태로 촬영에 돌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마냥 집에서 할 일 없이 지내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놀고 있으면 대본으로 자꾸 눈길이 가니, 땀을 흠뻑 흘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게 마음이 편했다.
운동 1일 차.
호신술을 배우고 3시간째.
“저…… 배우님.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편하게 말해도 돼요, 형.”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이 상태면 호신술은 대역을 써야 할 거 같습니다.”
“아하하. 제가 좀 그렇죠?”
“네.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그렇습니다. 배우님은 운동신경이 제로입니다. 제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심각합니다.”
안시현은 체대 출신인 최봉팔에게 운동 신경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판정을 받아 버렸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안시현은 연기 외적으로는 도통 재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