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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8화 (3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8화>

38화. 여기서 왜 나와?

운동을 시작한 이후.

안시현의 스케줄은 꽤나 단순해졌다.

월수금 주 3회 운동을 하고, 최봉팔이 짜 준 식단대로 식사를 했으며,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의 대부분은 집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했다. 촬영 전까지는 주말에 간간히 봉사 활동을 할 계획도 세웠다.

스케줄을 벗어난 행동을 한 거라고는 간만에 학교를 간 것 정도가 전부였다.

방학이라 선배 몇 명의 얼굴만 가볍게 보고 갈 생각이었지만 이게 웬걸, 간만에 안시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던 학생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도합 23명.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과 동문들이 모였다.

23명 중 남성은 15명이었다. 그들은 학교 정문 앞에 나타난 안시현을 발견하자마자…….

“아이고, 우리 안 배우님 오셨습니까!”

“애들아, 안 배우님 오셨다! 뭣들 하냐! 배우님 발 아프실 텐데 꽃가마 준비하지 않고!”

“꽃가마 준비됐습니다요!”

“자, 자! 편하게 타시면 됩니다, 배우님!”

안시현에게 인간 가마를 태워 줬다.

덕분에 안시현은 선배와 동기들에게 들려 학생회실로 향했다. 내려 달라고 발버둥 쳐 봤지만, 장정 다수의 힘을 이겨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안시현은 방학임에도 제법 있는 학생들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아, 당분간 학교 안 와야겠다. 민망해 죽겠네.”

“크흐흐. 진모가 말 안 해 주던? 시사회 전에 와서 먼저 겪고 갔는데.”

“그 자식 일부러 저한테 말 안 한 것 같은데요. 혼자 당하긴 억울하니까.”

“오~ 진모 머리 좀 썼는데?”

“실컷 쪽팔렸더니 배고프네요. 점심식사 겸 낮술이나 하러 걸까요? 제가 쏠 테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다들 마음껏 먹고 마셔요.”

“다들 들었냐? 우리 안 배우님이 쏘신다니까 적셔!”

안시현과 학생들은 학교 근처의 고기집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고기를 양껏 주문하고, 술과 음료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시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편하네.’

『나는 간첩입니다』시사회 당시, 안시현은 김진모에게 학교와의 연결고리를 떠넘긴 게 약간 미안했었다. 특히나 친분이 있는 몇몇 선배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한 게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형아, 동생』의 촬영이 끝나고 여유가 있을 때 학교를 방문한 것이었다.

다행히 다들 반응이 좋았다.

안시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서운함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부러움과 존경심이 느껴졌다.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기에 데뷔작과 차기작에서 안시현이 연달아 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안시현과 가장 친한 선배인 우정태가 말했다.

“캬. 시현이 네가 잘되니까 왜 이렇게 내 일인 것처럼 좋냐. 너 다음 작품도 정했냐?”

“네. 오디션 보고 붙었어요.”

“빠르다, 빨라. 진짜 뒤 없이 내달리는구나. 너랑 진모 칭찬에 임 교수님 입에서 침 마를 날이 없는 거 아냐?”

“오빠, 나래도 있잖아요.”

순간.

안시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나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임진섭 교수의 칭찬 대상에 자신과 김진모가 있는 건 그렇다 쳐도, 한나래가 포함되는 건 안시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회귀 전 그녀의 처참한 연기력을 보지 않았던가.

“맞네. 나래도 있네. 걔 연기 잘한다더라. 난 아직 영화 못 봤는데, 단역인데도 연기 잘한다고 호평 받았대.”

“임 교수님 시사회 다녀오셨잖아요. 좋은 배역만 따내면 배우로서 금방 자리 잡을 거라고 칭찬하시던데요.”

“맞아. 모델 출신이라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예상 이상으로 밑바탕이 탄탄하다 하셨지 아마?”

임진섭 교수는 제자라고 해서 포장을 해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제자가 아니라 가족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하곤 했다.

그런 그가 한나래의 연기를 호평했다면 정말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준 게 맞을 거다.

‘연기가 좋아졌다고. 어째서?’

안시현이 의문을 품는 사이, 한나래의 동기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또 나왔다.

“오빠. 나래 차기작도 확정됐어요.”

“정말? 너무 빠른 거 아냐?”

“그저께 나래 만나서 밥 먹었는데 말해 주더라고요. 영화 보고 캐스팅 요청이 와서 인사 수준의 비공개 오디션 간단하게 봤대요.”

“영화야?”

“드라마라고 하더라고요. 나래가 너무 좋아해서 자세한 건 못 물어봤는데, 다음에 물어볼까요?”

“에이, 됐어. 나중에 알게 되겠지. 나래가 중요하냐. 저번 주에도 오디션 떨어지고 노가다 뛰며 학비 버는 내 앞가림이 중요하지.”

회귀 전.

한나래는 데뷔작에서 연기력에 대해 악평을 받았고, 2년 후에야 차기작에 캐스팅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차기작에서도 연기력은 좋아지지 않았다.

비중은 커졌는데 최악의 연기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대중이든 평론가든 한나래에게 호평을 할래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 어떤 언론 플레이로도 포장이 불가능한 수준.

분명 그러했는데…….

데뷔작에서 임진섭 교수의 호평을 받고, 좋은 연기를 바탕으로 차기작까지 확정됐다니 솔직히 놀라왔다.

‘간만에 영화나 보러 가 볼까?’

안시현은 달라진 한나래의 연기력이 궁금해졌다.

*   *   *

『청춘별곡』.

한나래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20대 초반 대학생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솔직담백하게 그려 낸 영화다.

한나래는 『청춘별곡』에서 여주인공이 아르바이트하는 놀이동산의 동료 직원 역으로 나와,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오작교 역할을 한다.

출연 분량은 도합 5분 남짓.

비중 자체는 크지 않지만, 여주인공의 동료 역으로 얼굴을 비추니 첫걸음을 내딛기엔 나쁘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잘하는데?’

한나래는 데뷔작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출연 분량은 적어도 존재감은 확실했다. 청춘남녀의 연애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며 설레는 20대 초반 풋풋한 여성의 심리를 잘 표현해 냈다.

임진섭 교수가 괜히 호평을 한 게 아니었다. 한나래의 연기는 회귀 전 이맘때의 처참함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나래의 연기가 진일보한 이유만큼은 확실하게 파악이 가능했다.

‘메소드.’

회귀 전과 달리 한나래는 데뷔작부터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었다. 풋풋하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캐릭터의 모델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성격일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회귀 후 한나래가 안시현 앞에서 보여 준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 모습들이 연기였다면, 회귀 전 그렇게까지 어설픈 연기력을 보여 주지 않았을 거다.

‘발연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해.’

안시현의 감상은 그것이 끝이었다.

후배나 이성으로서가 아닌 배우로서의 평가가 전부였다. 회귀 전과 다른 모습에 호기심을 생겼고, 호기심을 풀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로드 매니저 최봉팔부터 시작해서 김진모의 첫사랑과 한나래의 연기력에 이르기까지.

회귀 전과 달라진 부분들이 제법 생겼지만, 안시현은 매번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변화가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당장 10년 넘게 무명이었던 안시현의 입지부터가 달라졌다. 데뷔작부터 조연, 차기작과 세 번째 작품에서는 주연을 꿰차지 않았던가.

안시현의 입지가 달라졌고,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가 달라졌고, 출연한 작품의 흥행이 달라졌다. 많은 게 달라진 마당에 안시현이 아는 미래가 온전히 똑같을 거라 기대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거다.

실제로 여러 부분에서 변화가 생기고 있고 말이다.

한나래의 연기력 발전 또한, 앞으로 수없이 발생할 변화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신경 끄고 내 일이나 잘하자.’

한나래가 만든 파도는 높지 않았고, 금방 꺼졌다.

*   *   *

최봉팔과의 운동 1주 차.

“배우님은 일단 유연성부터 길러야 합니다. 몸이 너무 굳어 있어요.”

안시현은 첫날 이후 호신술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유연성을 키우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몸이 너무 굳어 있는 게 문제라고 최봉팔이 진단해서였다.

운동 2주 차.

“간만에 호신술 한번 해 보겠습니까?”

안시현은 첫날 이후 11일 만에 다시 호신술을 배울 수 있었다. 여전히 운동 신경은 최악이었지만, 유연성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인지 첫날보다는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물론.

“액션 연기 직접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이대로 액션 스쿨 가면 문전박대당합니다.”

아주 잠시 우쭐했다가, 최봉팔의 냉정한 평가를 듣고서 금세 현실을 깨달아야 했지만 말이다.

안시현이 발전을 한 건 3주 차부터였다.

운동을 할 때마다 특유의 집중력을 미친 듯이 발휘한 덕분인지 최봉팔로부터 배운 호신술 동작이 제법 매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배우님, 오늘 아주 좋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액션 연기도 조금은 희망이 보입니다.”

안시현은 최봉팔에게 칭찬을 받았다. 운동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졸지에 매니저로서의 업무보다 안시현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시간이 늘어나 버린 최봉팔이었지만, 오히려 김진석 대표에게 칭찬을 받았다.

“배우 차기작 도와주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 생각해. 대신 적당히 쉬어 가면서 시켜. 시현이 그놈, 컨트롤 안 하면 미친 듯이 운동에만 매진할지도 모르니까.”

“네. 스케줄 잘 조절하겠습니다.”

안시현이 휴식과 운동을 구분할 수 있도록 주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최봉팔은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그는 쉬는 날에도 안시현의 스케줄을 체크하며 적절한 수준의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안시현은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의 대부분을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냈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다가 보며 간만에 느긋하게 옛 영화들을 감상했다.

놀랍게도 안시현은 그 과정에서 1월 내내 대본을 단 한 번도 손에 잡지 않았다.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집에 있다 보면 가끔 대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애써 욕구를 억누르며 다를 일을 하는 걸로 머리를 식혔다.

‘드라마는 마라톤이야.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중간에 나가떨어진다. 어차피 촬영 들어가면 지겹도록 볼 대본, 대본 리딩 보름 전까지는 손대지 말자.’

작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영화보다 드라마의 스케줄이 더 타이트하고 배우를 지치게 만든다.

안시현이 『나는 간첩입니다』와 『형아, 동생』 사이의 휴식기를 짧게 가져간 건, 두 작품 모두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가 드라마였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스케줄이다.

사실 이번 휴식기도 그리 긴 건 아니다. 이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캐스팅 라인이 속속들이 확정되고 있고,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4월 말부터 촬영이 시작된다. 대본 리딩은 늦어도 3월 말부터는 한다고 봐야 한다.

3달도 채 안 되는 휴식기다.

심지어 운동을 병행해야 하니 실제로 휴식기는 그보다 더 적다. 따라서 적절한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라도 쉴 때만큼은 철저히 쉴 필요가 있었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최소 6개월 이상 푹 쉬자. 욕심 때문에 너무 가혹하게 내 자신을 밀어붙이면,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는 날이 오고 말 거야.’

*   *   *

1월의 마지막 주.

“나 여행 갔다 온다.”

“갑자기 여행?”

“갑자기는 무슨. 이미 2주 전에 예약 다 해 놨거든요? 촬영 끝나는 오늘만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맛집 조사랑 관광지 조사도 다 해 놨거든요?”

“그 정도 정성이면 인정하다.”

“2박 3일, 새 역사를 쓰고 돌아오마.”

촬영을 끝내자마자 김진모가 여행을 떠났다. 여자친구와 2박 3일 동안 동해바다를 보고 오겠다나 뭐라나.

여자친구와의 첫 여행에 들뜬 걸 넘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은 김진모의 모습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좋을 때네.”

한편으로는 여행에 들떠 있는 게 이해도 됐다.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사생활에 제약이 많아진다. 공개 열애를 할 게 아니라면 연인과 여행은커녕 데이트조차도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김진모가 연인과 당당히 여행을 떠나는 건 앞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왕 간 거 마음껏 즐기고 와라.”

김진모가 여행을 간 2박 3일 동안에도 안시현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둘째 주와 넷째 주 주말에 봉사활동을 가는 게 유일한 일탈일 정도로, 철저하게 정해 놓은 스케줄대로 운동과 휴식을 병행하는 게 전부였다.

김진모가 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한 날.

‘간만에 서점이나 갈까?’

안시현은, 학교를 다녀온 이후 간만에 운동과 봉사활동이 아닌 다른 이유로 현관문을 나섰다.

모처럼 책을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종류는 상관없었다.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에세이든, 연기 관련 서적이든 상관없이 끌리는 책을 몽땅 사서 읽기로 마음먹었다. 회귀 전에는 제법 자주 책을 읽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연기에만 집착하느라 손도 못 댄 거 같아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휴식기에 그동안 못 본 책을 한꺼번에 몰아보기로 작심했다.

마포의 한 대형서점.

안시현은 오로지 제목만을 보고 책을 골랐다. 그냥 마음에 들면 죄다 집어서 카운터로 가져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시현이 고른 책은 무려 42권이나 됐다.

‘……너무 많이 샀나? 택시타고 가야겠네.’

양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충동구매를 후회하고 있던 찰나.

“안 배우?”

누군가가 안시현을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색하며 몸을 돌린 순간.

“감독님!”

안시현의 시야에 동화책을 한 아름 안고 있는 곽상필 감독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홍보 일정 이후 꼬박 두 달 여 만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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