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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39화 (3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39화>

39화. 어쩌면 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안시현은 구매한 책을 곽상필 감독의 차 트렁크에 실었다. 우연히 만난 곽상필 감독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 차를 얻어 타고 근처 찻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곽상필 감독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안시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손녀에게 선물로 줄 동화책 사러 왔다가 안 배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손녀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요. 안 배우는 다음 작품 이미 확정했다면서요?”

신년을 맞아 안부 차 연락했을 때, 안시현은 차기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났으니 당분간 쉴 거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곽상필 감독은 안시현의 차기작이 확정됐다는 걸 알고 있다.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 짐작이 갔다.

차기작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몇 없으니까.

“김 대표님께 들으신 건가요?”

“형님이 엄청 자랑하시더군요. 여기 주전부리 맛있으니까 양껏 먹어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이야기 좀 들어볼까요?”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배우의 일상이라고 해 봐야 사실 좀 뻔하잖아요. 아, 최근에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운동이요?”

“네. 다음 작품에서 맡을 캐릭터가 몸이 좀 좋아야 하거든요. 덕분에 죽어나고 있죠. 주말에는 격주로 봉사 활동을 하고 있고요.”

“안 배우는 여전히 연기밖에 모르는군요.”

“제가 좀 그렇죠?”

안시현은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곽상필 감독과 좀 더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곽상필 감독의 손녀와 연기 외의 다른 화두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를 수가 없었다.

평상시 하는 거라곤 운동과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게 전부인데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심지어 대화의 대상은 영화 감독이다.

연기를 빼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안시현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김진모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던 속마음을 슬쩍 비춰 보기로 결심했다.

근래 들어 운동과 영화에만 집착한 이유를 말이다.

“사실 요즘 들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어요. 일할 때는 괜찮았는데, 쉬다 보니까 머리가 비어서 그런지 계속 고민이 되네요.”

“편하게 말해 봐요. 이 나이까지 메가폰을 잡다 보면, 배우들의 고민 상담을 제법 자주 하게 되거든요.”

“그게…….”

안시현은『형아, 동생』의 뒤풀이 당시 박국영으로부터 들었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말해 줬다.

시야를 넓혀라.

휴식 기간 동안 안시현의 머릿속에서는 그 조언이 계속 맴돌았다.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 궁금했고, 멍하니 쉬고 있으면 계속 그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고 집에 있을 때마다 온갖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본 거였다.

대본을 손에 잡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생인데 조언까지 머릿속을 헤집으니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안시현은 박국영의 조언으로 인해 자신이 조급해질까 괜히 더욱 조심스러웠다. 연기력에 대한 고민으로 조급함을 느낀 배우들이 커리어를 망치는 모습을 종종 봐 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안시현의 고민을 들은 뒤.

“역시, 다들 눈은 비슷비슷하네요.”

곽상필 감독은 조언의 뜻을 대번에 파악했다.

‘이 조언이, 안 배우를 망칠 수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조언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조언이 좋은 것과 배우가 그것을 받아들일 역량이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니까.

박국영은 안시현에게 좋은 조언을 했다.

다만 지금의 안시현이 그 조언을 소화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곽상필 감독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조언이 신경 쓰여서 마냥 고민하는 것도 그리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안 배우.”

“네, 감독님.”

“박 배우로부터 들은 조언은 미래의 안 배우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다만, 지금의 안 배우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답을 듣고 싶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선택권을 안시현에게 넘겼다.

안시현이 원하면 답을 말해 주고,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안시현의 판단은.

“정답을 듣고 싶습니다, 감독님.”

답을 듣는 것이었다.

단순히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곽상필 감독의 입에서 나올 정답이, 자신에게 독이 되지 않을 거란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감독님은 내 배우 경력을 모른다.’

22살의 안시현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년의 연기 경력을 쌓고 회귀한 지금의 안시현에게는 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힘들긴 해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머릿속에서 조언이 계속 맴돌며 신경 쓰이는 것보다야, 속 시원하게 정답을 듣고 나서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로 했다.

확신이 선 안시현의 눈빛을 바라보며 곽상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안 배우의 그릇이 진모의 그릇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10년, 그리고 20년 후의 미래를 그려 보면 안 배우의 위에 누군가가 있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아요.”

“항상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제 그릇이 정말 진모보다 크다면 배우로서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진모는 천재잖아요.”

무명 배우였다가 다수의 조연 경력을 거쳐 20년 만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가, 20대에만 연기대상 한 번과 남우주연상 두 번을 수상하며 완벽한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간 국민배우보다 재능이 뛰어나다?

안시현에게 있어 김진모는 평생의 친구이자 목표이며, 동시에 넘을 수 없는 벽이기도 했다.

아니.

김진모와 경쟁한 그 어떤 배우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다. 김진모와 경쟁한 건, 다른 배우가 아닌 자신이 과거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안시현은 곽상필 감독이 자신을 배려해서 과하게 포장을 해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 순간.

안시현이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내 그릇이, 정말 진모보다 큰 걸까?’

고민하는 안시현을 보며 곽상필 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안 배우를 보며 자주 고민했는데, 지금의 반응을 보니 그동안 안 배우가 보여 준 행동들이 어렴풋이 이해가 가네요. 메소드에 집착한 건 스스로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서겠죠. 다른 수단들을 포용할 역량이 아니라 지레짐작했겠죠. 정말 안타까워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도해 봤다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텐데.”

곽상필 감독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저렇게 재능이 흘러넘치는데, 모든 걸 자유자재로 표현할 능력을 지녔는데, 스스로의 재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가둬 두다니.

용이 자신을 뱀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성향이 짙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러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안 배우.”

“네, 감독님.”

“스스로를 규정하지 마세요. 그 순간, 배우로서의 성장은 끝납니다.”

“…….”

순간.

안시현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회귀 전 군대를 다녀온 이후, 안시현은 자신의 연기를 메소드로 한정 짓고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회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배우들의 장점을 보고서 감탄만 했을 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 생각이야 지겹도록 했지만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역량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메소드에만 올인해서는 국민배우가 될 수 없다.’

곽상필 감독의 조언을 듣고서 안시현은 깨달았다.

한 가지 스타일의 연기를 고집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목표로 하는 국민배우나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안시현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인 최정수만 보더라도 다양한 연기 스타일을 보여 준다.

최정수의 연기는 메소드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나 감정선을 극대화한 연기도 적절하게 보여 주곤 한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최선의 스타일을 추구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반면 안시현은 메소드만을 고집했다.

국민배우를 목표로 하면서 정작 국민배우가 될 수 없는 환경에 스스로를 억압해 놓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어쩌면 난, 내 재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변화가 두려워 나 자신을 메소드에 가둬 두려 한 게 아닐까?’

『나는 간첩입니다』와 『형아, 동생』을 촬영하며 발전한 연기력이, 단순히 회귀 전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재능이 발아하고 있는 거라면?

조금 늦게 싹을 텄고 『위장취업』이후 뿌리를 내린 재능이 회귀 이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런 거라면…….

‘한번…… 도전해 봐도 되지 않을까?’

마침내 안시현이 결심을 굳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곽상필 감독이 조언 전의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다.

“답을 찾았나 보군요.”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허허허.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그리고 답을 찾은 것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다른 이야기인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답을 찾았다.

이제 그것을 실현하는 일만 남았다.

‘기본부터 다시 시작한다.’

안시현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을 찾았다.

*   *   *

곽상필 감독의 조언을 들은 이후에도 안시현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져서는 안 됐다.

몸이 근질거렸지만 드라마를 위해서라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의욕이 앞서 마구잡이로 날뛰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쉬는 중에도 간간이 연기를 맛볼 기회가 있다는 거였고, 안시현의 옆에서 최고의 교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다.

여행을 다녀온 뒤.

김진모는 2, 3일에 한 번 꼴로 안시현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오디션을 대비해 연습을 했다.

첫 연습 날.

안시현은 새삼 김진모를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김진모는 언제 준비를 했는지 제법 그럴듯하게 캐릭터 구축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영화 촬영을 끝마치고 시간이 거의 없었을 텐데도 캐릭터가 살아 있었다.

‘내 재능이 이 정신 나간 천재 놈보다 위라니……. 아직 실감은 안 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다 보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반면 안시현은 캐릭터를 구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 연습을 도와준다고 해 봐야 어색하지 않은 수준에서 대사를 쳐 주는 게 사실상 전부였으니까.

그 대신.

안시현은 김진모의 연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든다.’

메소드를 바탕으로 그 외에 다른 요소들을 더해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이것저것 시도해 볼 생각은 아니었다.

천천히, 하나씩 색을 입혀 나가기로 했다. 너무 많은 걸 하려다 보면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그 시작은 김진모였다.

김진모의 연기 스타일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영빈 캐릭터의 구축에 제법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진모의 연습을 도와주는 건 안시현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2, 3일에 한 번 꼴로 하루 3, 4시간 남짓.

휴식에 크게 방해되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위한 교보재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노래방에서 연습을 하는 것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으면 즉석에서 노래 부르며 풀었다.

‘차분하게 하자. 급할 거 없어.’

조금씩, 하나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다 보면 그토록 바라는 국민배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상을 욕심내도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매 순간.

안시현은 조급함을 억눌렀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며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2월 28일.

어느새 김진모의 오디션 당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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