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1화>
41화.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너를 부르다』의 1차 공개 오디션은 6일 만에 마무리됐다.
김진모는 애석하게도 당초 목표였던 1차 오디션에서 배역을 확정짓지 못했다.
김진모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자체 제작이라는 모험을 해야 하는 JM액터스 입장에서는 이진수 역 캐스팅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2000년 3월 8일.
이진수 역 2차 오디션이 진행됐다.
311명 중 단 7명만이 자유연기를 펼칠 기회를 얻었고, 준비해 온 걸 모두 보여 준 뒤에는 단 한 명의 배우만이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바로 김진모였다.
자유연기에서 김진모는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살렸다.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감정 연기로 몇몇 심사위원들이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다.
심지어 김진석 대표마저도 눈시울을 붉혔다.
지정연기에서는 스타일의 변화를, 자유연기에서는 기존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보여 줬다.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뽐내며 311대 1의 경쟁률을 뚫고서 이진수 역을 따내는 데에 성공했다.
“여유 있으니까 쉬면서 준비 잘해. 조연이랑 주연은 배역이 가져다주는 무게감 자체가 달라. 게다가 드라마는 영화보다 호흡이 길어. 네가 지치면 캐릭터도 같이 무너진다는 거 항상 명심해.”
김진석 대표는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으로 아들의 첫 주연 배역 확정을 축하해 줬다.
이에 김진모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수 역에 매료되어 드라마의 흥행을 확신해 무리하게 오디션을 준비한 게 사실이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첫 대본 리딩은 5월 말.
다행히 숨 돌릴 시간 정도는 주어졌다.
“가자! 오늘은 내가 쏜다!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이진수 역을 따낸 김진모는 첫 주연 배역을 맡는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다. 안시현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먹고 싶은 음식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박정상은 그런 두 사람을 뒤따르며 미소 지었다.
참, 언제 봐도 사이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모야, 저녁 메뉴로 김치찌개 어떠냐? 이런 날에는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하면 최고잖아.”
“누구신데 저한테 김치찌개 사 달라고 하세요. 혹시 저 아세요?”
“……형 좀 서운하려고 한다. 쥐꼬리 같은 매니저 월급 쥐어짜서 나흘 연속으로 밥 샀는데 계속 삐질 거야?”
“크흐흐. 장난이에요. 형도 당연히 가야죠. 봉팔 형도 불러서 넷이 같이 먹어요.”
김진모와 안시현과 박정상은 대학로로 향했다. 주문한 김치찌개가 나올 즈음 최봉팔이 도착해 김진모의 오디션 합격을 축하해 줬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안시현이 김진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오디션을 위해 메소드 연기를 선보일 줄이야. 하여간 난놈이라니까.’
김진모는 회귀 전에도『너를 부르다』 이진수 역에 캐스팅됐지만, 그 과정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1차 오디션을 합격했지만 최고점을 받진 못했고, 2차 오디션에서도 판가름이 나지 않아 자유연기를 한 번 더 보여 주고 인터뷰까지 한 끝에야 캐스팅이 확정됐다.
그나마도 한 끗 차이였다.
당시와 지금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그때는 주위에 영감을 받을 만한 대상이 없었고, 지금은 메소드 연기의 표본과 한 지붕에서 살고 있기에 과감히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회귀 전의 김진모는 메소드 연기를 채택하지 않았다. 변화가 아닌 기존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걸 택했고, 그것만으로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반면 이번에는 메소드 연기를 적절하게 더하며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진모랑 같이 살기를 잘했어. 조금만 더, 군대 가기 전까지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올해까지는 같이 살면서 최대한 많은 걸 내 것으로 만들자.’
서로가 서로를 교보재로 삼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배우로서 성장해나가고 있다는 거였다.
김진모의 변화를 보며 안시현은 호기심이 생겼다.
주연 배우의 연기 스타일에 변화가 생긴『너를 부르다』의 시청률은 회귀 전과 어느 정도로 차이가 날까?
그리고…….
‘나도 진모처럼 성공할 수 있겠지?’
자신도, 김진모처럼 성공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 *
3월 10일.
안시현이 박정상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디션에 합격한 김진모가 약속대로 제주도 여행을 보내 준 것이다.
원래는 김진모와 최봉팔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칼 같이 거절당했다.
“오디션 보고 나니까 피곤해.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하고 드러누워 있고 싶어. 제주도는 정상 형이랑 봉팔 형하고 셋이 갔다 와.”
“아. 전 김 배우님 컨디션 관리 도와야 해서 빠지겠습니다. 드라마에서 노래 부를 때 비에 몸이 젖는 신이 있는데, 그때 복근이 드러나길 바란다고 하셔서요. 당분간 하드 트레이닝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둘이서 데이트해야 할 것 같네.”
그렇게 제주도는 안시현과 박정상 둘이서 가게 됐다.
막상 제주도에 왔지만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한라산 등산을 하고 몇몇 맛집을 돌아다닌 걸 제외하면 민박집 근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않았다.
박정상은 산책을 즐기거나, 민박집의 노부부가 키우는 강아지와 놀아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안시현의 경우 마당의 평상이나 방에 드러누워 대본을 잡고 있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대본 리딩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시 시동 걸어야지. 그래도 제주도 와서 대본 보니까 좋네. 집에서 하는 거랑은 느낌이 또 달라.’
김진모가 오디션에 합격한 날.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로부터 캐스팅이 모두 끝났고, 3월 마지막 날에 첫 대본 리딩을 시작해 4월 말 촬영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슬슬 몸을 풀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이번에는 단순한 연습이 아니다. 기존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새로운 것을 더해야 한다.
김진모가 메소드 연기를 섞어 이진수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인 것처럼, 안시현도 메소드에 다른 요소를 더해 보다 완벽한 정영빈 캐릭터를 구축하고 싶었다.
다행히 교보재를 살펴볼 시간은 차고 넘쳤다. 연습을 도와준답시고 지긋지긋하게 지켜보며 분석했다.
이제는 변화를 시도하는 일만 남았다.
“정상 형.”
“응?”
“저 스파링 파트너 좀 해 주세요.”
마침내 안시현의 휴식이 끝났다.
* * *
안시현이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날.
영화사 혜인원에 『형아, 동생』의 투자자들이 모였다. 상영 일정을 잡기 전, 『형아, 동생』의 최종 편집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거두절미하고, 최종 편집본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최한수 감독은 자신이 있었다.
배우들이 최고의 연기와 호흡으로 촬영 기간을 단축시켜 줬다. 배우들은 할 수 있는 걸 다 해 줬으니, 이제는 자신이 보답을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편집에 매달렸다.
조금만 더 하자고 스태프들을 독려하며, 온갖 몸에 좋은 걸 다 사 먹이고 보너스도 주면서 예상 일정을 3분의 1 이상 단축시켰다.
5월과 6월에는 『형아, 동생』과 제작비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영화들이 무려 세 작품이나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값 또한 엄청나 흥행이 낙관되는 작품들이다.
반면 4월은 별 다른 경쟁이 없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라도 5월과 6월을 피하고 싶었다. 7월을 노리자니 개봉일이 너무 밀리기에, 4월 개봉에 맞추기 위해서 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그렇다고 퀄리티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최한수 감독은 시간과 퀄리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최종 편집본 상영회.
영화가 모두 끝났을 때, 몇몇 투자자들이 눈시울을 붉힌 걸 보고 최한수 감독은 생각했다.
아, 내가 제대로 만들었구나.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한수 감독이 최대한 담백하게 입을 열었다.
“피드백하실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상영 전 반영 가능한 부분은 적용토록 하겠습니다.”
“최 감독. 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잘 만들어 놓고 피드백을 하라니요. 저희, 그 정도로 보는 눈이 없지는 않습니다.”
“손익분기점 확실히 넘겠는데요?”
“고생했어요, 최 감독. 제작이 미뤄질 때만 하더라도 불안했는데,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왔네요.”
예상대로 피드백은 없었다.
투자자들은 피드백은 건너뛰고 곧장 상영 일정과 홍보와 관련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홍보 영상은?”
“이미 다 준비해 놨습니다.”
“4월 말 개봉 가능하겠죠?”
“아,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 감독이 편집 잘해 놨을 거라 믿고 제가 미리 4월 말로 잡아 놨거든요.”
“허허허. 이러니 혜인원과 일하는 걸 끊을 수가 없다니까. 하여간 철두철미해.”
홍보와 개봉 모두 문제는 없었다.
최한수 감독은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들으면서 묻는 질문에만 답을 했다. 홍보나 상영은 그가 아닌 혜인원과 투자자들이 전문가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형아, 동생』의 최종 편집본을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로 봤던 20대 여성이,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다가 최한수 감독을 바라보았다.
“최 감독님.”
“네, 본부장님. 말씀하세요.”
“주지성 역을 맡은 배우분 성함이,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리수철 역을 맡았던 안시현 맞아요?”
“아, 네. 맞습니다. 리수철 때와 이미지가 좀 다르죠?”
“네. 많이 다르네요.”
“혹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문제는 없어요. 그게 아니라…….”
잠시 망설이던 여성은 자신에게로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안시현 배우님, 명품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 * *
제주도에서의 4박 5일 여행 넷째 날.
안시현과 박정상은 점심으로 문어라면을 먹으러 갔다. 주차장에 막 주차를 하자마자 박정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한 박정상의 표정이 굳었다.
“대표님 전화. 먼저 들어가 있어.”
“전복구이에 문어라면 두 개 시키면 되겠죠?”
“응. 부탁할게.”
식당 안으로 들어간 안시현이 음식을 주문하고 컵에 물을 따르고 있을 때, 박정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이 너 좀 바꿔 달라고 하시네.”
“저요? 아, 맞다. 나 휴대폰 꺼 놨지.”
제주도에 오자마자 안시현은 휴대폰을 꺼 놓았다.
급한 일이 있으면 박정상을 통해 연락을 받으면 된다 생각했고, 휴식 겸 정영빈 캐릭터 구축을 타인으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예상대로 급한 일이 있자 박정상을 통해서 연락이 왔다. 다만 김진석 대표가 자신을 찾은 건 의외였다.
‘푹 쉬다 오라 하셔 놓고 왜 찾으시는 거지. 혹시 촬영 일정에 변동이라도 생겼나?’
의문을 품으며 안시현이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네,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시현이 너, 화보랑 광고 찍을 생각 있냐?
“으음? 갑자기 화보에 광고요? 어디서 좋은 제안이라도 들어왔어요?”
-『형아, 동생』의 투자사 중 한 곳에서 명품 브랜드 화보 및 광고 건으로 문의가 들어왔어. 최 감독 말 들어 보니까, 최종 편집본 보다가 네 이야기를 꺼내더래.
“엑? 매치가 너무 안 되는데요?”
안시현이 간만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형아, 동생』의 주지성 연기를 보고 명품 브랜드 화보 및 광고 제안을 할 생각을 하다니, 어느 부분을 보고서 확신을 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화보나 광고는 배우를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이자,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주연 배우로서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있으며, JM액터스로부터 선금을 무려 5억 원이나 받은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임이 분명했다.
“미팅 일정 잡아 주세요. 언제가 좋을까요?”
-그쪽에서는 오늘 당장도 가능하다고 하더라. 네가 제주도에 있다고 하니까, 비행기 타고 바로 날아가겠대.
“추진력 장난 아닌데요?”
-휴가에 방해되면 서울 오고 나서 보는 걸로 말하마.
“괜찮아요. 미팅이 길어질 것도 아닌데요, 뭐. 정상 형도 같이 있으니까 바로 처리하죠.”
-그래. 그렇게 전달하마.
어차피 캐릭터 구축의 기본 틀은 끝냈다. 박정상이 잘 도와준 덕분에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심화 과정은 서울에 올라가서 하고, 넷째 날과 마지막 날은 순수하게 박정상과 관광을 즐기려던 차였다.
조금 시간을 내서 미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왕이면 드라마 촬영 전에 해당 건을 마무리하고 싶기도 했다.
10분 뒤.
김진석 대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오후 2시에 제주일룡호텔 카페에서 보자는구나.
“알겠습니다.”
식사를 끝낸 안시현과 박정상은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제주일룡호텔로 향했다.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서 박정상이 피식 웃었다.
“내가 살다 살다 일룡호텔 카페를 미팅 때문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게요. 저도 몰랐어요.”
“덕분에 이런 비싼 커피를 다 마셔 보네. 그나저나 어떤 브랜드 화보랑 광고일까?”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형아, 동생』의 주지성 연기를 보고 화보 및 광고 촬영 제안을 한 건지 안시현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오후 2시 정각.
또각또각.
호텔 로비에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 카페를 향해 다가오는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안시현은 그녀를 보며 적잖게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않기 위해 연기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여성은 안시현과 박정상의 앞에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안시현 배우님?”
그녀는, 안시현이 서울에 올라가면 꼭 한번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