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2화>
42화. 보여 주세요
여성과 시선을 마주하며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매니저님? 반가워요. 일룡백화점의 정혜영 본부장이라고 해요.”
“정혜영 본부장님? 아, 혹시 그…….”
“알고 계시는 그 정혜영이 맞을 거예요.”
“유명 인사를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반갑습니다. 안시현 배우의 매니저 박정상 대리입니다.”
“반가워요, 박 대리님.”
싱긋.
정혜영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빼어난 미모를 빛나게 하는 미소를 바라보며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식으로 정영빈의 모티프 대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정혜영.
일룡그룹의 창업주인 정일룡 회장의 막내손녀이자, 일룡백화점의 영업 본부장.
그녀가 처음 매스컴에 이름을 알린 건 199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면세점 입찰을 진두지휘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룡백화점이 면세점 사업권을 확보하면서부터다.
그 후로도 그녀가 추진한 사업은 모두 흑자를 기록했고, IMF의 위기 속에서도 다양한 판매 전략을 통해서 적자와 구조조정을 최소화했다.
직위는 본부장이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정일룡 회장이 일찌감치 그녀에게 일룡백화점을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 젊은 나이인 그녀가 계열사 하나를 맡는다는 것에 논란이 일 법도 한데, 그룹 내의 그 누구도 이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본부장을 맡은 이후 줄곧 일룡백화점이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김희숙 작가의 입봉작인 『너와 나의 시간』의 남자 주인공 정영빈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다.
김희숙 작가는 정혜영의 사례를 접하고서 『너와 나의 시간』을 집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한동안 밀착 취재하면서 자료를 수집했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완벽주의자 백화점 사장님 정영빈 캐릭터였다.
서울에 올라가면 만나려 했던 대상을 광고 계약 건으로 만나자 안시현은 묘한 부분에서 운이 따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음료를 주문하고 착석하자마자 정혜영은 안시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안시현 배우님, 실례가 아니라면 패딩 한번만 벗어 주실 수 있나요?”
“패딩이요?”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줬다. 동시에 정혜영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역시, 제 눈이 맞았네요. 『형아, 동생』을 보면서 배우님이 슈트 핏이 잘 살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영화로 본 것보다 몸이 좀 더 좋아지신 것 같네요?”
“아, 배역 때문에 운동을 좀 하고 있어서요.”
“으음. 좋네요.”
정혜영은 담백한 대화를 선호했다. 겉치레나 사탕발림보단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안시현의 몸이 좋아진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화보 및 광고 계약 건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일룡백화점에서 안시현과 계약하기를 원하는 건 5월 초 국내 런칭 예정인 명품 정장 브랜드였다.
본점을 비롯한 6개 지점에 입점하기로 했으며, 향후 5년간 다른 백화점에 입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일룡백화점에서 국내 홍보를 전담해 주기로 했단다.
“연예계 전반에 걸쳐 모델을 물색하고 있던 차에 『형아 동생』의 최종 편집본을 보고서 느낌이 딱 왔어요. 조금만 꾸미면 훌륭한 모델이 되겠다고요. 직접 뵈니,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네요.”
『형아, 동생』에서 슈트 핏을 보았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스컴을 통해 접한 정혜영 이미지와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세상을 철저하게 사업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백화점에 이득이 된다면 세간에서 파격적이라고 평가하는 판단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기에 20대 중반의 나이에 면세점 사업권을 따내고, 이후에도 수많은 사업들을 진두지휘하며 직원들에게까지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거다.
정혜영은 안시현에게 다년 계약을 제시했다.
일룡백화점에 독점 런칭하기로 한 명품 정장 브랜드와의 계약 기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몸값 낮은 연예인과 다년 계약해서 대박을 터트리는 것, 그게 정혜영 씨의 영업 방식이었지 아마?’
안시현이 정혜영에 대해 아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집필에 영향을 끼쳤고 정영빈의 모티프 대상이란 것, 일룡백화점이 면세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 마지막으로 특유의 광고 계약 스타일 정도였다.
현재의 가치 이상의 몸값을 반영해 다년 계약을 해서 호구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계약이 끝날 즈음에는 모델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결국 일룡백화점은 훨씬 싼 몸값에 A급, 혹은 S급 연예인과 광고 계약을 체결한 게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정혜영의 주도로 일룡백화점과 계약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말이 연예계에 나돌기까지 했다.
정혜영은 단순히 슈트 핏에 매료되어 계약을 제시한 게 아니었다. 안시현이 배우로서 성공할 것이고, 몸값이 치고 오를 거라 예상하는 거였다.
계약 조건은 들은 안시현이 정혜영에게 물었다.
“장기가 아닌 분기별, 혹은 매년 갱신을 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가능은 해요. 다만 계약 조건이 달라지겠죠. 미래 가치를 반영한 계약이 배우님께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혹 부족한가요?”
“지금은 후하고, 미래에는 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혜영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고민 안 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네.’
현재 가치가 아닌 미래 가치를 일부 반영한 계약이다.
1996년, 일룡백화점 사업 전반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이래 그녀는 도합 5명의 연예인과 계약을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계약서를 보고 큰 고민 없이 도장을 찍었다. 미래 가치를 반영해 후하게 조건을 맞춰준 계약이 머릿속에서 고민을 지워 버렸다.
하지만 안시현은 달랐다.
다른 계약 조건에 대해 묻는 건 안시현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현재는 후하고 미래는 박한 계약이라며 배우로서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까지 내비추고 있다.
지금껏 계약한 연예인들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정혜영은, 어쩌면 안시현과의 계약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민 끝에 안시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룡백화점 측에서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하겠습니다. 만약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추가 계약을 원하거나, 다른 건으로 계약을 원할 때도 조건을 맞춰 드리겠습니다.”
의외로 안시현은 흔쾌히 계약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계약 조건에 대해 한참이나 고민하던 정혜영을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밀고 당기기가 없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 하나 붙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조건인가요?”
“제게 옆자리를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순간.
안시현을 만난 뒤 처음으로 정혜영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사업적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미래가 기대되던 배우가, 초면에 혼자 반해서 고백하는 머저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계약 건을 계속해서 진행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될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오로지 외모 혹은 조건만을 보고 호감을 드러내는 건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봐 온, 가장 경멸하는 남성 스타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제가 차기작에서 맡을 배역이 백화점 사장님 역입니다.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정혜영 본부장님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며칠, 아니 부담스럽다면 하루라도 괜찮으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시현이 한 말은 고백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배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꺼낸 거였다.
‘백화점 사장 역이라고? 혹시……?’
순간.
정혜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쳤다.
면세점 입찰 건을 끝내고 몇 달 뒤, 자신을 모티프로 캐릭터를 만들어 대본을 쓰고 싶다며 2주 동안 취재를 다녀갔던 한 살 연상의 작가가 떠올랐다.
몇 달 전.
드라마가 제작 단계에 들어갈 거 같다고, 촬영 일정과 편성이 확정되면 또 연락하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혹시…….
“드라마 이름이 뭔가요?”
정혜영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너와 나의 시간』입니다.”
“맡은 배역이 혹 정영빈인가요?”
“네, 맞습니다.”
안시현의 대답을 듣자 확실해졌다. 안시현이 맡은 배역은 정혜영을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였다.
“며칠이면 된다고요?”
“불편하시다면 하루라도 괜찮습니다.”
“아뇨.”
정혜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맺혔다.
“만족할 때까지 옆에 있어도 돼요. 캐릭터를 완성할 때까지 마음껏 지켜보도록 해요.”
미래 가치가 기대되는 배우가, 자신을 모티프로 한 배역을 맡게 됐다.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 준 그는 어떤 식으로 정영빈을 표현해 줄까?
경멸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 * *
제주도 여행을 끝마치고 이틀 뒤.
안시현이 일룡백화점을 방문했다.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정혜영을 따라 일룡백화점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들어와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혜영의 경우 집무실이 별도로 있었다.
집무실 내부는 꽤 넓었고 전담 비서까지 한 명 두고 있었다. 말이 본부장이지 백화점 내에서는 입지는 그 이상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매년 성과를 내며 인정을 받고 있으니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한 거려나? 상무이사가 되는 게 2002년 월드컵 이벤트로 매출 팍팍 올린 직후였지?’
안시현이 소파에 앉자 정혜영이 물었다.
“차 한잔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업무 보시면 됩니다.”
안시현은 가방에서 미리 챙겨 온 대본을 꺼냈다. 이내 특유의 집중력으로 대본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그는 정말로 정혜영을 방해하지 않았다.
집무실에 들어온 이후 주야장천 대본을 읽었다.
아주 가끔 정혜영의 목소리가 들리면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고, 손가락을 튕기며 대본에 한참 동안 뭔가를 적어 나가기도 했으며, 외부 업무를 볼 때 조용히 뒤를 따라다니는 게 하는 일의 전부였다.
심지어 그때마저도 대본을 손에 놓지 않았다.
‘움직일 생각을 안 하네.’
정혜영은 그런 안시현이 신기해 보였다.
예쁘고, 몸매 좋고, 학벌 장난 아니고, 능력이 차고 넘치며, 집안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배경을 아는 남자에게도, 모르는 남자에게도 수없이 많은 대시를 받아 왔다.
적어도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본 남자 중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건 안시현이 처음이었다.
아,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있긴 했다.
다만 그건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저 사람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분석해서 캐릭터를 완성시키겠다는 배우로서의 관심일 뿐이었다.
‘이걸 자존심이 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네.’
한 가지 확실한 건.
안시현은 그녀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타일의 남자이자, 좋은 배우라는 거였다.
솔직한 말로 놀라웠다.
영화 감상이 취미인 그녀는 『나는 간첩입니다』를 네 번이나 봤고, 『형아, 동생』의 최종 편집본도 좋은 영화라 생각하고 즐겼다.
그 와중에 가장 관심이 간 건 안시현이었다.
남파공작원과 자폐성 장애인,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심지어 세 번째 작품에서도 앞선 두 배역과 연관성을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백화점 사장 역을 맡았다.
눈앞에서 보는 배우는 캐릭터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한 장 한 장 씹어 먹을 것만 같은 눈빛으로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을 걸기 전에는 입조차 열지 않았고, 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는 법도 없었다.
하루는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까지 단 한 번도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실로 경이로운 집중력이었다.
그런 안시현을 지켜보면 볼수록 정혜영의 호기심 또한 조금씩 커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본부장님.”
“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뇨. 방금 막 정영빈 캐릭터를 완성해서요. 지금까지 불편하셨을 텐데 흔쾌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영빈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면 그건 본부장님 덕입니다.”
안시현은 대뜸 캐릭터가 완성됐음을 선언했다. 정혜영의 집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고서 정확히 열흘째가 되던 날의 일이었다.
이에 정혜영은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언제? 대사 한 마디 읊조린 적 없으면서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캐릭터가 대본 읽고 뭐 좀 적는 걸로 완성되는 거였어?
짧은 시간,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황당하게 한 건.
‘불편한 적 없는데…….’
안시현이 집무실에 온 이후, 그녀가 단 한순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 필터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막상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결국 그녀는.
“시현 씨, 제가 부탁 들어줬으니까 이제 제 부탁도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요?”
“몸값 깎겠다는 거만 아니면 얼마든지요.”
“정영빈 연기, 한 번만 보여 주세요. 절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고 싶어요.”
일단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