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3화>
43화. 곤란한데요
안시현이 정혜영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았듯, 정혜영도 안시현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안시현에게 호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다만 그건 배우 안시현에 대한 호감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 정혜영에게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두 가지 취미가 생겼다.
와인 음미, 그리고 영화 감상이었다.
그 취미들은 일룡백화점을 진두지휘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다.
퇴근 후 푹신한 소파에 앉아 풍미 넘치는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보는 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그 순간만큼은 본부장 정혜영이나 재벌가의 사람이 아닌 인간 정혜영으로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안시현의 미래 가치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영화 감상이라는 취미 덕분이었다. 자연스레 배우의 연기력과 시장 가치를 냉정하게 파악할 안목을 키워 나가는 게 가능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에 호기심을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촬영이 시작되면 김희숙 작가를 만나 몇몇 도움을 줄 생각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안시현은 그녀가 최근 들어 인상적으로 본 배우 중 한 명이다.
기대하는 배우가 자신을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한다.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가장 먼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에 안시현은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아…….”
연기를 보여 주는 거야, 열흘 동안 정혜영이 준 도움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안시현 본인도 완성된 캐릭터를 하루빨리 연습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상태이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이곳이 정혜영의 집무실이라는 것.
직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장소에서 연기를 하기에는 다소 민망한 게 사실이었다.
이에 정혜영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혹시 기분 나쁘신 건 아니겠지?’
난데없이 집무실에서 연기를 보여 달라고 한 것이 실례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가 됐다.
안시현은 사과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정혜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면이 일부 벗겨진 그녀가 이제 좀 사람다워 보였다.
“본부장님, 혹 저녁에 스케줄 있으신가요?”
“아뇨. 오늘은 없어요.”
“그럼 퇴근하고 시간 좀 내주세요. 여기서는 그렇고, 연습실 가서 보여 드릴게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안시현은 완성한 정영빈 캐릭터를 정혜영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기로 했다. 그것으로 열흘 동안 흔쾌히 도움을 준 답례를 조금이나마 하고 싶었다.
‘테스트하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안시현은 남몰래 준비해 온 새로운 무기를 꺼내들기로 작심했다. 이왕 보여 주는 거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저 가면, 다시 한번 벗겨 보고 싶단 말이지.’
히든카드까지 꺼내들었을 때, 정혜영의 포커페이스를 다시 한번 벗길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 * *
그날 저녁.
스포츠카 한 대가 JM액터스 사옥 주차장에 주차됐다. 사옥에 들어간 정혜영은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박정상을 보고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죠, 본부장님. 시현이는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12시쯤에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네요.”
“12시부터요?”
정혜영의 커다란 두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졌다.
12시면 안시현이 집무실에서 나가고 고작 40분 지난 시점이다. 정혜영과 헤어지자마자 연습실에 와서 그대로 틀어박힌 거다.
열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느꼈지만 집중력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또 다시 들었다.
“중간에 화장실 간다고 두 번 나오긴 했네요. 그래도 오늘은 양반이에요. 이틀 동안 연습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봤는걸요.”
“정말 대단하네요.”
“옆에서 지켜보면 깜짝 놀라곤 해요. 항상 기대하는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거든요. 제가 매니저 4년 차인데, 요즘처럼 일이 재밌었던 적이 없습니다. 천재 두 명이랑 같이 일해서 그런가?”
박정상이 담당 배우들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는 사이 연습실 앞에 도착했다.
정혜영이 본능적으로 연습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에 기댄 앉은 채 대본을 응시하며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안시현의 모습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퇴근하자마자 바로 출발했는데, 저녁이다 보니 차가 좀 막혔네요.”
“저녁식사 못 하셨겠네요?”
“네. 아직 못 했죠.”
“끝나고 식사하러 가시죠. 열흘 동안 도와주신 답례로 제가 사겠습니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맛보기만 보여 드리려는 거니까요.”
정혜영은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맛보기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작정하고 보여 줘도 괜찮았다. 좋은 연기라면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느긋하게 감상해 줄 의향이 있었다.
하나 그 생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갑작스런 부탁에 흔쾌히 응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아, 네. 시현 씨가 준비되셨으면 바로 시작해 주세요.”
“정상 형, 저 좀 도와줘요.”
“아까 연습했던 대로?”
“여기 대본이요.”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그사이 박정상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한 채 안시현의 앞에 서서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김희숙 작가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대본을 완성해 놓고, 촬영을 진행해 감에 따라 적절히 수정해 나가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또한 전 회차 대본은 주연 배우들에게만 사전에 지급된다. 주연 배우라면 드라마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고서 캐릭터를 완성해야 뿌리가 탄탄하다는 게 김희숙 작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의 24화 대본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중.
기존의 연기 스타일에 다른 요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음을, 새로운 무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만들어 준 18화의 마지막 신 일부를 정혜영에게 보여 주기로 했다.
일단 시작은 오디션 당시 보여 준 신 10이었다.
정영빈이라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신을, 정영빈 캐릭터의 모티프가 된 정혜영 앞에서 선보였다.
오디션 때와는 그 연기가 사뭇 달랐다.
회귀 전에 구축한 캐릭터를 빌려서 사용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열흘 동안 정혜영을 옆에서 지켜보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완성된 캐릭터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니까.
신 10의 연기를 본 정혜영은.
‘싸가지 없는 나네.’
정영빈의 행동과 성격이, 자신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는 걸 느꼈다. 대사 하나하나와 사소한 제스처에서도 자신의 습성이 묻어났지만, 오만함이 묻어나는 싸가지 없는 성격은 정영빈 캐릭터의 것이었다.
안시현이 열흘 동안 자신을 지켜보면서 허투루 시간을 쓰지 않았음을 느껴졌다.
‘역시…… 남파공작원이나 자폐성 장애인을 연기할 때부터 느꼈지만, 연기 정말 잘한다니까.’
정혜영은 안시현의 연기에 감탄했다. 자신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걸 감상하며 즐겼다.
신 10의 연기가 끝나고.
안시현은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싸가지 없던 백화점 사장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뭔가를 또 보여 주려는 건가?’
안시현이 신 10 말고 다른 것도 준비했음을 느낀 정혜영이 숨을 죽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신 10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보여 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연기.
안시현이 박정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과 십여 초 전까지 싸가지 없는 백화점 사장을 연기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변했다.
들어선 안 될 건 들은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시현이 박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선,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제 귀가 어떻게 된 거죠?”
“미안하다, 영빈아. 수술은 성공했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사고 후에 너무 오래 방치됐어. 솔직히 지금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야.”
박정상은 연기에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었다. 대사를 말하는 게 거의 국어책을 읽는 수준이었다.
그런 대사를 들으면서도 안시현은 몰입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대사를 받아 줄 사람이지, 그 사람의 연기력이 아니었으니까.
“오늘 밤이 고비일 거다.”
“아… 아, 안 돼요. 안 돼요, 선생님.”
주르륵.
안시현, 아니 정영빈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봇물이 터진 눈물샘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병원으로 오는 내내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방파제가 감정의 파도에 휩쓸렸다.
백화점 사장이자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수진이 없으면 안 돼요. 수진이 죽으면 안 돼요. 뭐가 문제예요? 간? 심장? 뭐가 됐든 제가 다 이식해 줄게요. 백화점 경영 포기하라면 할게요. 재산 다 기부하라고 하면 할게요. 그러니까, 살려 줘요. 제가 죽어도 되니까 수진이만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요…….”
“미안하다. 경과를 지켜보자꾸나.”
대사는 마무리됐지만, 연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아……끄, 끄윽.”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내줄 수 있다고 생각한 연인을 만났다.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도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을 각오를 했다.
프러포즈를 다짐한 날.
정영빈의 연인은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룻밤을 넘기는 게 고비일 거라는 최악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 순간부터.
카리스마 넘치고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백화점 사장의 품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평범한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정영빈은 오열했다.
문자 그대로 서럽게 대성통곡했다. 저렇게 울다가 실신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걸 내던져서 감정을 표출했다.
모든 걸 내던진 정영빈을 바라보며…….
“아…….”
정혜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감정 표현의 극대화.
안시현이 새로 장착한 무기의 위력은 엄청났다.
연기를 부탁한 정혜영은 한참 동안이나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대사를 받아 준 박정상도 눈시울을 붉힌 채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려 화장실을 다녀왔다.
덕분에 안시현은 확신을 품게 됐다.
자신이 새 무기를 그럴 듯하게 장착했음을 말이다.
‘촬영 전에 조금 더 가다듬어야겠지만……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야. 정영빈 캐릭터의 완성도를 올려 줄 거야.’
자연스러움과 감정 표현.
김진모의 두 장점을 놓고 오랜 시간 고민한 안시현은 결국 후자를 택했다.
감정 표현의 극대화는 단순히 오열 신에서의 임팩트를 위해 채용한 게 아니다. 평소에는 카리스마 넘치고 싸가지 없다가도, 여주인공 안수진과 엮일 때면 온갖 감정을 다 드러내는 정영빈 캐릭터의 반전 매력을 빛나게 해 주기 위한 요소다.
일단 첫선을 보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완성도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었다.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온 한정식집.
“대표님하고 몇 번 와 봤는데 정갈한 게 괜찮더라고요. 한번 드셔 보세요.”
“아…… 네. 잘 먹을게요.”
정혜영은 퉁퉁 부운 눈이 민망한지 식사를 하면서 안시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정혜영의 모습을 보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계속 저랑 눈 안 마주치시려고요?”
“아, 뭔가 좀 민망하네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타인 앞에서 울어 본 게 처음이거든요.”
“으음…….”
안시현이 기억을 더듬었다.
1990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아프리카에서의 한국인 납치 사건.
15명이 납치되었고, 13명이 무사히 돌아왔다. 몸값을 지불했지만 일행들의 대표였던 두 명은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야 고국에 올 수 있었다.
그 두 명이 바로 정혜영의 부모였다.
정혜영은 연습실에서 10년 전 이별한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세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어요. 어느 순간, 더 이상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그때 미국으로 도망치듯이 유학을 떠났죠. 부모님 생각이 계속 나서 도저히 한국에는 못 있겠더라고요.”
정혜영이 쓴웃음을 흘렸다.
간만에 가면을 쓰기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여린 심성을 감추지 못했던 당시의 기억이 쿡쿡 가슴을 찌르고 생각을 어지럽혔다.
“그렇다고 눈치 보지는 마요. 지금은 많이 무뎌졌으니까요.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제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할아버지가 유독 잘 챙겨 주시고도 하셨고요.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고요.”
“글쎄요…….”
안시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밥상을 차려 준 건 회장님이지만, 그걸 받아먹은 건 본부장님의 능력입니다. 면세점 사업 건부터 시작해서 줄곧 성과를 내고 계시잖아요. 스스로를 평가절하하지 마세요.”
“그런가요?”
정혜영이 간만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수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온갖 감언이설을 들었지만, 방금 전 안시현이 한 말은 지겹도록 들은 사탕발림과는 달리 꽤나 듣기 좋았다.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긴장을 하지 않은 게 얼마 만인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저,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몸값 깎는 거만 아니라면요.”
“저랑 친구 할래요? 아, 이거 너무 직설적인가? 이해해 줘요. 제가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요. 이런 말을 돌려서 할 줄 몰라요.”
“으음. 곤란한데요.”
안시현이 난색을 표했다.
실망한 기색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정혜영을 보며, 안시현이 간만에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친구로 지내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미안한데, 한 대만 때려도 돼요?”
“아, 그것도 좀…….”
“와. 진짜 얄밉다.”
정혜영이 눈을 흘겼다.
안시현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정혜영이 평범한 28살의 여성으로 보였다.
3월의 어느 날, 안시현에게 재벌 3세 친구가 생겼다.
무려 6살 연상의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