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4화>
44화. 선입견을 버리고
2000년 3월 31일 금요일.
『너와 나의 시간』대본 리딩 첫날.
안시현이 회귀 후 처음으로 여의도 MBS 사옥을 방문했다. 드라마국 제2회의실에서 대본 리딩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배우들이 캐스팅됐을지 기대되네.’
안시현은 캐스팅 라인이 궁금해졌다.
그가 알고 있는 건 정영빈의 아버지 정건국 역에 『형아, 동생』에서 함께했던 박국영이 캐스팅됐다는 것과, 여주인공 안수진 역에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불리는 배우 차연우가 캐스팅됐다는 거다.
그 외 캐스팅 라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김희숙 작가가 연기력 위주로 캐스팅을 했다고 호언장담했기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연기력 위주의 캐스팅과 특유의 톡톡 튀는 캐릭터가 더해져 매 작품마다 스타를 배출하는 그녀의 스타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테니까.
그저 어떤 배우들과 2000년 한 해 동안 호흡을 맞춰 나갈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드라마국 제2회의실의 문을 연 안시현의 눈에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안시현을 보고서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 나야 무탈했지.”
여성의 정체는 바로 한나래였다.
‘캐스팅됐다는 드라마가 『너와 나의 시간』이었어?’
안시현은 내심 놀랐다.
학교에 방문했을 당시 한나래가 드라마에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설마 그 드라마가 『너와 나의 시간』일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의외였다.
임진섭 교수가 한나래의 연기를 칭찬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연기력을 중시하는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가 한나래를 캐스팅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안시현의 기억 속 한나래는『아내가 가출했다』 전까지 출연하는 작품마다 최악의 연기력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은 발연기의 대명사였으니 말이다.
“진모 오빠를 통해 말해 주신 조언 감사했어요. 제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부산을 다녀온 이후.
안시현은 김진모의 부탁으로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이겨내는 방법을 정리해 줬다. 여자친구인 한나래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해서 살짝 거들었다.
대체로 정석에 가까운 정보였고, 노하우는 극히 일부만 첨가됐다. 제아무리 절친의 부탁이라도 아무에게나 노하우를 퍼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제법 괜찮은 정보라 자부했다. 안시현의 입장에서야 약간의 노하우였지만, 연기 초보인 한나래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한나래는 그때의 도움을 기억하고 고개를 숙인 거다.
“나래 넌 무슨 역이야?”
“아, 저는 정영빈 사장 비서 겸 안수진 친구 역인 유은서를 맡게 됐어요.”
“좋은 배역 맡았네. 축하해.”
“민폐 끼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사실 오늘도 동 트자마자 와서 대본보고 있었어요. 첫 대본 리딩부터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 실력이 부족하면 노력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거잖아요.”
놀랍게도, 한나래가 맡은 배역은 남주인공 정영빈의 비서이자 여주인공 안수진의 친구인 유은서였다.
조연 중에서도 비중이 제법 큰 배역이다.
주요 배역에 김희숙 작가가 어수룩한 배우를 캐스팅했을 리 없다. 이 정도면 한나래가 회귀 전의 발연기를 했다는 건 완전히 잊어도 될 정도다.
‘후우. 선입견을 버리고, 지금의 모습만 바라보자.’
한나래가 김진모의 첫사랑인 것도, 한나래의 연기력이나 성격이 180도 달라진 것도 아직은 어색하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지금의 한나래가 안시현에게 시종일관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좋은 배우로 성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다.
회귀 전 안시현과 한나래의 인연은 짧았다.
학교에서는 인연이 전무했고, 토크 쇼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게 사실상 전부다.
예의 없었던 인사?
토크 쇼 당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유독이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연예계 생활을 하며 성격이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안시현은 회귀 전 작은 악연을 잊기로 했다. 회귀 전의 한나래를 기억에서 지운 채, 회귀 후의 모습만을 보고서 판단하기로 했다.
한편 한나래는 양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첫 대본 리딩을 앞두고 과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의욕 넘치는 모습에 안시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득, 운동을 다녀온 뒤 소파에 드러누워 대본을 읽고 있을 불알친구 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모는 뭐래?”
“캐릭터 해석 잘했고, 연기도 괜찮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연습처럼만 하래요.”
“좋은 조언이네.”
안시현은 한나래의 캐스팅을 비밀로 했던 김진모에게 소소한 복수를 다짐했다. 장난기 넘치는 성격을 감안했을 때, 자신이 대본 리딩 현장에서 한나래를 보고 놀라길 바라며 일부러 말을 안 해 준 거라고 확신했다.
‘여자친구가 나랑 같은 드라마에 캐스팅됐는데 말을 안 해 줘? 넌 집에 가면 죽었다.’
* * *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 주요 출연진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남자주인공 정영빈 역을 맡은 안시현입니다. 박국영 선배님 외에는 모두 처음 호흡을 맞추는 건데, 종방연 즈음에는 가족이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여자주인공 안수진 역에 캐스팅 된 배우 차연우입니다. 제가 캐스팅 된 게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보여 준 연기력이 워낙 형편없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작정하고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이 작품, 민폐 끼치면 자진 하차한다는 각오로 준비했거든요.”
“연출을 맡은 최창국 PD입니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드라마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는 눈 없는 멍청이로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대본을 쓴 김희숙 작가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배우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제 자식들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소개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너와 나의 시간』의 대본 리딩 분위기는 좋았다.
연기력이 검증된 중견 배우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줬고, 성공에 목이 마른 젊은 배우들은 매 순간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연기를 마음껏 뽐냈다.
그중에서도 여주인공 안수진 역을 맡은 차연우의 의욕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1996년 MBS 공채 탤런트 26기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녀는, 1998년까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잠재력은 있지만 현재 가치가 낮은 배우, 청순가련한 아름다운 외모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연기력.
그게 바로 차연우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1996년 여름에 캐스팅된 영화에서는 연기력 부족으로 인해 중도 하차하며 데뷔가 미뤄졌고, 1997년 봄이 되어서야 데뷔했지만 연기력은 혹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몇 작품을 했지만 연기력에 대한 의문부호는 늘 따라붙었다.
김희숙 작가 또한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디션 전에 그녀가 나온 작품을 몇 차례 반복해서 보며 검증을 거쳤다.
그럼에도 차연우는 여주인공에 캐스팅됐다.
차연우의 이미지가 안수진 역에 가장 적합해서, 안수진 역을 맡은 배우에게 요구하는 연기력이 평균치 정도면 되기에, 1999년 그녀의 연기력이 일취월장해서 평균치에 근접한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연기가 확실히 일취월장했어. 게다가 가면 갈수록 조금씩 좋아지고 있기까지 해.’
또한 차연우의 연기는 대본 리딩을 거치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다. 중견 배우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첫 주연의 무게감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허들이 높지 않은 캐릭터를 맡았는데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적어도 차연우를 보고 우려했던 연기력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차연우를 제외하면 다른 배역에서는 연기 걱정을 하는 게 사치일 정도였다.
부족한 제작비를 만회하기 위해 이름값을 배제했다. 연기력이 좋으며 배역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을 진행했다.
덕분에 대다수의 배우들이 각자 맡은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 냈다.
심지어 한나래마저도 임진섭 교수가 칭찬을 한 이유를 연기력으로 증명했다. 회귀 전의 부족한 연기력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메소드 연기를 대본 리딩 내내 보여 줬다.
화룡점정은 단연 안시현이었다.
“크흠. 역시 우리 막둥이가 연기를 참 잘한다니까.”
“…… 너무 싸가지 없어서 몇 대 쥐어박고 싶은데요?”
“내가 직원이었다면 정강이 까고 면상에 사표 던진 다음에 그대로 나갔다에 한 표.”
“두 표요.”
“그래도 수진이 때문에 고민하는 건 조금 귀엽네.”
안수진 역과 달리 정영빈 역은 수준급 연기력이 요구된다. 싸가지 없고 오만하며 완벽주의자인 백화점 사장이 안수진과의 만남으로 인해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전 매력을 어필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결국에는 사람 자체의 성향이 바뀌는 전개다.
대본 리딩이 5화까지 예정되어 있지만, 안시현은 24화 전체를 보고서 캐릭터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연기력이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혜영 씨를 열흘 동안 지켜본 게 큰 도움이 됐어.’
정혜영.
공교롭게도 그녀를 바라보는 안시현의 시선은 김희숙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려 노력하고 강한 척하며 항상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여리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감추고 가면을 썼기에 20대에 일룡백화점의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거다. 정일룡 회장이 차려 준 먹음직스런 밥상을 받아먹을 수 있었던 거다.
다만 그 가면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사람인지라 가면을 벗거나 벗겨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김희숙 작가는 그것을 캐치해서 캐릭터성이 변화하는 정영빈을 만든 거고, 안시현은 정영빈 캐릭터의 완성을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대본 리딩을 거듭하면 할수록.
‘아, 너무 좋은데?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거야?’
안시현은 자신이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품은 배우가 선택할 수 있지만 현장 분위기는 선택하는 게 불가능하다. 특정 배우나 스태프로 인해, 혹은 어떠한 변수의 발생으로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대부분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시작으로, 『형아, 동생』을 거쳐, 『너와 나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세 작품 모두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이 분위기가 촬영장에서도 이어진다면 좋은 드라마가 완성될 거라는 확신을 품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경쟁작이 너무 막강하긴 한데…… 뭐, 초반에만 잠깐 붙을 거니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치고 오를 수 있을 거야.’
5월 중순.
평균시청률 36.1%, 최고 시청률 53.3%를 기록하는 24부작 드라마가 KNC에서 방영을 시작한다.
시청률을 지나치게 의식해 자극적인 요소들을 가미하며 엔딩이 변질됐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너와 나의 시간』의 첫 방영은 7월 중순.
공교롭게도 방영 시기가 겹친다.
똑같은 24부작이라는 걸 감안하면 방영 초기에는 시청률을 기대할 수 없다. KNC에서 최고 시청률 53.3%의 흐름을 이어 가기 위해 후속작으로 괜찮은 작품을 편성할 테니 이후에도 쉽지만은 않을 거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의 흥행을 낙관하고 있었다.
좋은 대본과 실력파 배우들과 연출의 귀재가 모였고, 심지어 분위기마저 좋다. 흥행에 실패한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제작비 정도였다.
그마저도 비교적 낮은 출연료와 협찬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제작비가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회귀 전 김희숙 작가가 MBS에서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인 CP의 간섭 또한 대본 리딩 기간 중에는 없었다.
첫날, 대본 리딩이 끝날 즈음 슬쩍 얼굴을 비추더니, 인사를 하고 간 게 만남의 전부였다.
‘대표님이 잘 말해 주셨나 보네. 기대치가 워낙 밑바닥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고.’
KNC에서 5월부터 방영 예정인 드라마에 대한 소문은 벌써부터 파다하게 퍼졌다.
역대급 출연진과 제작비를 투입했으며, 1999년부터 줄곧 시청률 경쟁에서 MBS와 STS에 참패한 KNC에서 제대로 이를 갈았다나 뭐라나.
이에 MBS에는 현재 방영 중인 40부작 드라마 이후에 『너와 나의 시간』을 편성해 버렸다.
약속대로 편성도 확정해 줬고 간섭도 없지만, 기대치마저도 없다는 걸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멀쩡히 편성해 줘도 망할 거라 생각하는 거다.
‘시청률 폭발하면 드라마국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까 궁금하네. 뭐…… 뻔한 반응이려나? 성공할 줄 알았다, 괜히 대작이랑 붙인 게 아니다, 금일봉 넉넉하게 넣었으니 회식 한번 해라, 제작비 왕창 챙겨 줄 테니 연장하자. 이런 말들이나 하겠지.’
안시현은 하루빨리 7월이 다가오기를 바랐다.
캐릭터들이 너무 튄다고 평가절하된 『너와 나의 시간』의 방영이 시작되면, 세간의 평가가 어떻게 변할지를 기대하면서.
* * *
몇 차례의 일정 변경 끝에, 『너와 나의 시간』의 첫 촬영일이 4월 20일로 확정됐다.
원래는 조금 더 빠르게 하려고 했지만 장소 섭외 문제로 인해서 며칠 늦어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홍보 일정을 전부 다 참여할 순 없어도 시사회랑 개봉 첫날 무대 인사는 할 수 있겠네.’
4월 15일에는『형아, 동생』의 시사회가, 19일에는 개봉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홍보 일정 전체를 소화할 순 없겠지만 시사회와 개봉 첫날 무대 인사 정도는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다른 배우들과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익 분기점을 넘는 건 기정사실이라 여겼지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