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5화>
45화. 있는 그대로
『형아, 동생』시사회 당일.
안시현의 초대를 받은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 동문 및 교수들이 시사회장을 찾았다.
안시현의 부모님도 『나는 간첩입니다』 시사회 이후 모처럼 서울에 올라왔고, 『나는 간첩입니다』를 함께 촬영했던 배우들과 극단 광대들의 식구들도 안시현을 위해서 자리를 빛내 줬다.
거기에 안시현은 약속한 대로 봉사 활동을 했던 보육원의 아이들과 보육원장을 초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혜영도 초대했지만 그녀는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다.
“개봉하면 볼게요. 가십거리가 되는 건 별로라서.”
『너와 나의 시간』 식구들도 초대할까 싶었지만, 촬영을 앞두고 다들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기에 관뒀다.
시사회 당일.
가장 많은 기자들의 관심을 받은 건 손해수였다.
특유의 선 굵은 감정 표현과 카리스마로 무게감 있는 배역이나 악역 위주로 연기를 해 왔던 손해수이기에, 주지웅 역은 색다른 시도로 다가왔다.
그다음으로 많은 관심을 받은 건 안시현이었다.
데뷔 후 두 번째 작품에서 곧장 주연을 맡기도 했거니와, 남파공작원에 이어 자폐성 장애인 캐릭터를 선택하며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한 까닭이었다.
안시현은 과연 주연 배우로서 제 몫을 해냈을까?
이에 최한수 감독은 안시현을 대신해 답했다.
“안시현 배우가 없었다면 『형아, 동생』을 완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주지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최한수 감독이 극찬하긴 했지만 상당수의 기자들은 예의상 한 멘트라고 생각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 준 남파공작원 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조연과 주연은 무게감이 다르다. 게다가 자폐성 장애인을 연기해야 하지 않았던가.
필시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을 거라고 여겼다.
기자들은 계속 질문을 쏟아냈다. 결국 내내 침묵하고 있던 안시현은 마이크를 잡아야만 했다.
“주지성을 연기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건, 제 연기로 인해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였습니다. 배역을 맡고 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조차도 조심스러운 점, 양해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안시현은 이후 주지성 캐릭터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자신의 말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다.
실제로 회귀 전, 『형아, 동생』이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성 역을 맡은 배우의 인터뷰가 장애인 비하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땐 주지성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기대 이하라서, 대중들의 삐딱한 시선과 기레기의 왜곡이 더해지며 문제가 됐었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자고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는 법.
안시현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과장과 왜곡될 우려가 있는 인터뷰는 최대한 자제하고, 하더라도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려 노력했다.
결국은 연기로 평가받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약 30여 분에 달하는 무대 인사 겸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마침내 시사회가 시작됐다.
* * *
시사회를 앞두고 안시현은 긴장했다.
자신이 연기한 주지성이 어떤 모습일지, 혹시나 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선입견을 줄 만한 요소가 있었는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주지성은 안시현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그대로였다.
스크린에는 분홍색과 나비에 집착하면서도 그보다 형 주지웅을 더 좋아하며, 그림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게 된 평범한 20살 청년이 있었다.
자폐성 장애는 주지성의 결함이 되지 못했다. 그저 그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신 75.
-제, 제 동생은, 주지성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한미영 앞에서 바지에 소변을 지린 주지성이 힘겹게 자기소개를 할 때는, 관객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신 78.
-지성이 내가 키울 거예요. 장애가 있어도 내 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주지성이 주지웅이 했던 발언들을 그대로 따라 하고, 몸을 떨면서 처음으로 주지웅과 시선을 마주할 때는 훌쩍이는 소리가 제법 들렸으며.
신 85.
-형아 여기 아프다. 빨간약 라야 돼요.
-지성이 숨 막혀요.
주지성이 그린 자신의 그림을 보고, 주지성의 말을 듣고서 울컥한 주지웅이 애써 눈물을 참을 때, 관객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주지웅의 절제된 감정 표현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의 마지막.
-아, 행복하다.
주지웅의 멘트를 끝으로 OST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참 동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관객들이 반응을 보인 건.
무대 인사를 위해 최한수 감독과 출연진이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오른 직후였다.
짝! 짝! 짝!
한 관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친 것을 시작으로, 대다수의 관객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쳤다.
아무 말도, 그 어떤 감정 표현도 없었다.
1분 가까이 시사회장 안에는 박수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최한수 감독과 출연진들은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기립 박수에 화답했다.
반면 기자들은…….
“저 배우, 대박 나겠는데?”
“와. 사람이 어쩜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리수철이랑은 그냥 아예 다른 사람이잖아?”
“혹시 단독 인터뷰 딴 사람 있어요?”
“없을 걸요? 괜한 오해를 살까봐 걱정된다고 이번 작품 앞두고 단독 인터뷰 싹 다 거절했잖아요. 배우들이랑 단체 인터뷰 한 게 전부에요.”
“끄응…… 단독 인터뷰 못 딸 거면, 사진이라도 왕창 건져서 갑시다. 당분간 기사 많이 써야 할 거 같은데.”
영화가 개봉하면, 배우 한 명이 『형아, 동생』에 쏟아질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거라고 확신했다.
* * *
『형아, 동생』 시사회 이후.
다수의 언론들이 영화의 내용을 두고 극찬을 하는 기사를 냈다.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기립 박수 또한 기사의 내용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거기다 시사회에 참여했던 한 평론가의 호평이 대중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내용은 평범하다. 어쩌면 흔하디흔한 감성팔이 영화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보여 준 연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최고의 영화는 아니지만, 최고의 감동을 준 영화임은 분명하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리라 확신한다. 이 영화가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한다면, 나는 평론가를 그만두겠다. 내 눈이 잘못 봤고 내 심장이 잘못 느꼈다는 뜻일 테니.
개봉하는 영화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하며 흥행판독기로 불리는 평론가가, 근 몇 년 만에 극찬을 한 것이다.
심지어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한다면 평론가를 그만두겠다는 호언장담까지 했다.
언론들의 연이은 기사와 예상치 못했던 평론가의 극찬은,『형아, 동생』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어 주었다.
거기에 최한수 감독이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예고편 또한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결과.
[『형아, 동생』,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 점령!]
[평범함 속 잔잔한 감동, 대중을 울리다.]
[이례적인 시사회 기립박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흥행 돌풍으로 이어져.]
[『형아, 동생』 주지성의 실제 모델을 만나다.]
[최한수 감독, “안시현은 내가 본 배우 중 최고.”]
[남파공작원이 자폐성 장애인을 거쳐 백화점 사장이 되기까지.]
[연타석 홈런 안시현, 대한영화제 신인상 쐐기 박나.]
『형아, 동생』은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하며 흥행 돌풍을 예고했다.
안시현은 『너와 나의 시간』의 첫 촬영을 앞두고 박스오피스 1위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놀라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데에 그쳤다.
흥행을 확신했기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회귀 전 『형아, 동생』이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한 건 영화의 핵심인 주지성 역을 배우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주연 배우가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으니 영화가 흥행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 문제를 해결했으니 외부 요소에 의해 영화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흥행할 거라 예상했다.
『형아, 동생』은 시나리오가 좋고 연출이 준수하며, 배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영화였으니까.
박스오피스 1위보다 안시현을 기쁘게 한 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현 씨의 연기,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지성이는 원장님과 아이들이 도와줘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뵈려고 하는데, 거절하지 않으실 거죠?”
시사회가 끝난 뒤, 눈시울을 붉힌 채 수차례 감사의 인사를 건넨 보육원장과의 대화였다.
주지성 캐릭터의 완성에 도움이 준 사람의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가 그 무엇보다 안시현을 기쁘게 해 줬다. 자신이 제대로 된 연기를 한 것 같아서 벅차올랐다.
『너와 나의 시간』의 첫 촬영 몇 시간 전.
박스오피스 1위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촬영 장소로 이동하기 전, 아침 운동을 끝낸 안시현이 반바지 하나만을 입은 채 도장의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회귀 후 꾸준한 운동으로 제법 괜찮았던 몸매가, 최봉팔의 집중 케어 덕분에 근육질 몸매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탄탄한 근육과 선명한 복근이 인상적이었다.
“와…… 제 몸이지만 진짜 잘 빠졌네요.”
“내가 거들긴 했지만 진짜 제대로 조각 됐다. 복싱 신 찍을 때 이슈 엄청 되겠는데?”
“이게 다 형 덕분이에요.”
“내 덕이 아니라 네 덕이지. 이제 적절하게 관리하다가, 복싱 신 찍기 직전에 다시 한번 집중 관리하면 되겠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 몇 달 동안 고생한 만큼, 최봉팔과의 거리 또한 가까워져 있었다.
* * *
2000년 4월 20일 오전 6시.
일룡백화점 마포점 앞 도로에 트레일러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와 나의 시간』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잔뜩 싣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촬영은 10시부터지만 스태프들은 그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미리 촬영 동선을 체크하고 장비들을 세팅하려면 네 시간도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진짜 백화점에서 촬영하게 될 줄은 몰랐네. 우리 작가님 추진력이 엄청난데?”
“그러게. 듣기로는 정영빈 캐릭터 모티프가 된 재벌 3세가 주 1회 촬영을 허가해 줬다고 하더라. 백화점 홍보 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흔쾌히 받아 줬다더라고.”
“덕분에 우리는 숨 좀 돌리겠네.”
“대신 촬영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돼. 시민들하고 트러블 일으키지 말고. 긁어 부스럼 만드는 놈은 사표 쓸 각오해.”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10시가 되자마자 배우들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거 마시면서 하세요. 저희가 뭐 도와 드릴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두 사람이 분주한 스태프들을 향해 다가왔다. 키 190cm에 근육질의 사내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음료수가 가득 든 봉지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안시현과 그의 매니저 최봉팔이었다.
돕겠다는 두 사람의 말에 카메라 감독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아닙니다. 배우님은 쉬고 계십쇼.”
“괜찮아요. 준비가 빨리 되면 서로 좋은 거잖아요? 간단한 거라도 거들고 싶어요.”
“그러면…… 죄송한데 소품 옮기는 정도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봉팔 형, 저희 몸 좀 쓰죠.”
“이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안시현과 최봉팔이 거든다고 준비 시간이 대폭 단축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빨리 끝나기는 했다. 9시를 훌쩍 넘길 줄 알았는데 8시 45분 즈음에 마무리가 됐으니 말이다.
덕분에 스태프들은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숨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백화점 주차장 뒤편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스태프들이 짧은 휴식을 즐겼다.
그러는 사이.
오전 9시 이후로 배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는 9시 30분이 넘어서야 백화점 주차장에서 나왔다.
손님 한 명과 함께 말이다.
“촬영에 앞서 소개시켜 드릴 분이 있어요. 정영빈 캐릭터의 모티프가 되어 주셨고, 백화점 촬영에 도움을 주신 일룡백화점 정혜영 본부장님이세요.”
“백화점 차원에서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조할 테니, 좋은 드라마로 보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드라마가 대박이 나서 저희 백화점 홍보 공짜로 했으면 좋겠어요.”
정혜영의 농담에 몇몇 배우들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정혜영 또한 특유의 미소를 드러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김 작가님, 오늘은 오전만 촬영한다고 하셨죠?”
“네. 두 시간 안에 끝내고 촬영장으로 돌아갈 거예요. 드라마 초반부에 필요한 몇몇 장면만 따면 돼서요.”
“끝나기 전에 연락주세요. 시간 맞춰 촬영장에 출장 뷔페 보내 드릴게요. 첫 촬영이니만큼 다들 든든하게 식사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본부장님 최고입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정혜영이 배우들에게 목례를 한 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포점을 둘러보고 본점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너와 나의 시간』첫 촬영을 앞두고 대기 중이던 몇몇 기자들이 촬영했다.
정혜영이 사라진 직후.
안시현은 정혜영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가십거리가 되는 건 별로라면서요?
-시사회랑 이건 다르죠. 오늘은 공적인 업무의 연장선이거든요.
-출장 뷔페도요?
-아, 그건 친구 잘 둔 누구 덕이고요. 앞으로도 종종 보내 줄 테니 든든히 먹고 촬영 잘해요.
제작진의 골칫거리였던 백화점 촬영 허가 건부터 시작해서 출장 뷔페까지, 정혜영은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친구가 아닌,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