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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46화 (46/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6화>

46화. 자주 해도 돼요

일룡백화점 마포점에서 진행된 2시간 동안의 촬영은 철저하게 안시현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안시현이 백화점 사장 정영빈 역을 맡았기에 당연했다. 백화점 신 대부분에 정영빈의 대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촬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촬영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NG가 몇 번 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고, 리테이크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했는데 다행이야. 생각보다 잘 풀리네.’

사실 안시현은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긴장했었다.

드라마를 수차례 출연해 봤지만 주연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너와 나의 시간』은 원래대로라면 제작이 무산됐어야 할 드라마다.

안시현의 욕심으로 인해 미래가 바뀐 상황.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이 더욱 막중해졌다.

다행히 촬영을 시작하자 긴장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정영빈 캐릭터에 몰입해 표현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긴장 풀고 연기만 생각하자. 주연 배우로서 최고의 덕목은, 사고 안 치고 연기 잘 하는 거니까.’

그렇게 20분을 남기고 시작한 마지막 촬영.

여주인공 안수진의 얼굴을 보기 위해 정영빈이 예정에도 없었던 명품관 점검을 가는 신을 찍게 됐다.

정영빈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비서 유은서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사, 사장님, 갑자기 명품관은 왜…….”

유은서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한 정영빈은 늘 하루 일과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소화했다. 심지어는 화장실마저도 특정 시간에만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가 예정에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는 건 유은서가 비서가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화점 사장이 매출의 핵심인 명품관을 불시 점검하러 가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혹시 스케줄 있어요?”

“아, 아뇨. 오후 3시까지는 없습니다.”

“그럼 문제없네요.”

정영빈의 말이 맞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서 그렇지, 백화점 사장이 매출의 상당 지분을 차지하는 명품관을 불시 점검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명품관 직원들에게 문제지.

유은서가 다급히 정영빈의 뒤를 따랐다.

명품관에서 이제 막 일하기 시작한 안수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사장님 명품관 가는 중. 지금 에스컬레이터.

문자메시지로부터 1분 뒤.

정영빈과 유은서가 명품관 앞에 도착했다. 개장을 준비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개장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정각이 되면 바로 오픈하려 합니다.”

“그래요? 확인해 봐도 되겠죠?”

“……네?”

정영빈이 명품관의 벽면, 파여 있는 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쓱 문질렀다. 손끝에 그리 많지 않은 양의 먼지가 묻어났다.

정영빈이 명품관 직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럼 이건 뭡니까?”

“그, 그건…….”

“어째서 제 눈에는 차질이 보일까요. 고객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 말끔히 청소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이런 사소한 것들이 더해져 명품관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 순간.

명품관 직원 역을 맡은 배우들의 표정이 일제히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 안시현의 연기는 애드리브였다.

대본에는 명품관 불시 점검을 하며 안수진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집무실로 돌아가는 게 전부다. 벽면의 홈 에 있는 소량의 먼지를 가지고 직원들을 질책하는 장면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안시현의 연기를 본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 PD가 짧은 시간 시선을 교환했다.

최창국 PD가 먼저, 김희숙 작가가 직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의견 교환이 끝났다.

두 사람은 안시현의 애드리브를 일단 지켜보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명품관 직원 역을 맡은 배우들이 실제로 당황하는 모습이 오히려 분위기를 살려 준다고 판단했다. 이후의 대처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차연우가 안시현의 애드리브에 화답해 줬다. 안수진이 안절부절못하며 정영빈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제가 꼼꼼히 청소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점검하겠습니다. 질책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세요, 안수진 사원님.”

명품관 곳곳을 깐깐하게 살펴본 뒤, 정영빈이 유은서와 함께 자리를 떴다.

몸을 돌린 정영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안수진의 얼굴이나 보려고 명품관 불시 점검을 결정한 건데, 예상치 못하게 대화까지 나눴다. 소기의 목적 그 이상을 달성했기에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정영빈의 머릿속에 의문이 자리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집안도 학벌도 능력도 별로인 여자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가는 거지?’

1남 2녀 중 첫째, 학창 시절 성적은 중상위권, 대학교를 졸업하고 15번의 면접 끝에 취업,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낡은 아파트 한 채와 적금 통장 두 개.

참으로 평범한 인적 사항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의 여성이다.

그런데 왜, 자꾸 눈길이 가는 걸까?

조건이 좋은 여자는 차고 넘쳤다. 재벌가의 여식들 중 안수진보다 예쁜 여성을 고르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감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정영빈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었는데…….

정영빈은 안수진이 너무 신경 쓰였다. 이제는 하다하다 업무 중에도 안수진의 얼굴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칼 같은 스케줄을 중요시하는 완벽주의자가 즉흥적으로 핑계를 대고 얼굴을 보러 갈 정도가 됐다.

고민 끝에 정영빈은…….

“유 비서.”

“네, 사장님.”

“20대 중반의 여성들은 보통 뭘 좋아합니까? 마케팅 차원에서 조사를 좀 할까 하는데. 이를 테면 퇴근하고 하는 취미생활이나,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 같은 거 말입니다.”

안수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   *   *

안시현의 마지막 멘트와 함께.

“OK.”

OK 사인이 떨어졌다.

안시현과 한나래는 스태프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명품관이 있는 6층으로 내려왔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차연우가 안시현의 옆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팔뚝을 가볍게 툭 쳤다.

“뭐야, 대본대로 안 해서 놀랐잖아.”

“미안해요, 누나. 다들 저 때문에 놀라셨죠? 즉흥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 애드리브가 완전 좋았거든. 그렇죠, PD님?”

차연우의 시선에 최창국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초반, 정영빈의 캐릭터성을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싸가지 없는 완벽주의자 백화점 사장은 안수진을 만나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조금씩 변해간다. 가면 속에 꽁꽁 숨겨 두었던 감정들을 하나둘씩 꺼내게 된다.

방금 전 안시현의 애드리브는, 조금씩 변해 가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완벽주의자 성향을 드러내 줬다. 안수진에 대한 관심과 정영빈의 본 성격을 한 신에서 함께 표현하며 신의 입체성을 더했다.

“시현 씨.”

“네, PD님.”

“인터뷰 보니까 『형아, 동생』에서 주지성 대사의 반절 가까이가 애드리브였다면서요? 이번에도 애드리브 자주 해도 돼요.”

순간 안시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애드리브가 마냥 좋은 건 아니다.

호흡을 맞추는 배우가 받아주지 못하면 NG로 직결된다. 영화에 비해 드라마는 촬영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애드리브를 질색하는 PD들도 존재한다.

때문에 안시현은 애드리브를 최대한 자제하려 했다.

마지막 신을 앞두고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쓴소리 한 번 들을 각오하고 저질러 봤는데…….

다행히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방금 전처럼 신의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 줄 수만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환영입니다.”

PD에게 마음껏 애드리브를 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다.

안시현은, 어떤 애드리브로 정영빈을 좀 더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최창국 PD는 애드리브에 후한 스타일이었다. 이는 첫 촬영 이후 현장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집필에 매진하는 김희숙 작가와도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었다.

드라마의 방향성과 캐릭터성을 무너트리지 않는 선에서라면 애드리브는 얼마든지 OK였다.

덕분에 안시현만 살판이 났다.

『형아, 동생』에서도 그러했지만 애드리브는 안시현의 장기 중 하나다. 배역에 몰입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애드리브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애드리브가 정영빈의 캐릭터성을 부각시켜 주는 요소들이기에 채택됐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배우들도 촬영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안시현의 애드리브에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애드리브를 자연스레 받아 주기까지 했다.

안시현의 애드리브를 포함해 촬영은 대체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중견 배우들이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가운데, 안시현과 차연우를 중심으로 한 젊은 배우들이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

『너와 나의 시간』에 출연한 20대 배우들 중.

연기력을 인정받고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건 안시현 정도다. 개봉 후 보름이 넘게 박스오피스 1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형아, 동생』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인해서 연기력만큼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형아, 동생』은 개봉 후 보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손익 분기점을 돌파해 버렸다. 흥행 돌풍의 중심에는 주지성을 완벽하게 연기한 안시현이 존재한다.

6월에 있을 대한영화제.

데뷔 후 연타석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안시현이,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에서 어떤 상을 받게 될지 기대하는 시선이 많았다.

『너와 나의 시간』의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대중들은 놀라지 않았다. 안시현 정도의 연기력이면 24부작 드라마의 주연을 꿰차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안시현 외 20대 배우들의 입지는 사뭇 달랐다.

당장 차연우만 하더라도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연기력이 좋아지고 있다지만, 24부작 드라마를 이끌 재목이 되는지 의심하는 시선이 많다.

한나래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다들 단역만 맡아 왔다. 조연 경험조차 전무하다.

그들에게는 『너와 나의 시간』이 연기력을 인정받을 좋은 기회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에 열성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게 당연했다.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중견 배우들과 의욕 넘치는 20대 배우들,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는 늘 좋았다.

『너와 나의 시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굳이 문제를 찾자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했다.

MBS도,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안시현 말고 볼 게 없는 드라마가 될 거고, 시청률이 애국가 수준으로 나올 거라 혹평하기까지 했다.

일부 제작진은 외부의 시선을 신경 썼다.

부족한 제작비와 열약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 외부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 터였다.

시간이 흘러 5월 17일.

『너와 나의 시간』이 3화까지의 촬영을 마쳤을 때.

평균 시청률 36.1%, 최고 시청률 53.3%를 기록할 드라마가 마침내 KNC에서 첫 방영을 시작했다.

-KNC의 기대작 『거짓말』, 1회 시청률 13.7%로 흥행 돌풍 예고.

-치열한 재벌가의 암투, 시청자들을 사로잡다.

-KNC, 연이은 수목드라마 흥행 참패 제동 거나.

-블록버스터 드라마가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

13.7%의 시청률로 쾌조의 시작을 알린 드라마는, 2회 차에 19.2%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6월 1일.

대한영화제를 당일 오전.

안시현에게는 좋은 소식과 좋지 않은 소식이 나란히 하나씩 들려왔다.

좋은 소식은 『형아, 동생』이 3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좋지 않은 소식은 『거짓말』이 고작 5회 차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경이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단 소식이었다.

기본적으로 시청률 50%를 넘는 드라마가 나오면 다른 방송사들은 머리가 아파진다.

동시간대에 어떤 드라마를 편성해도 답이 없다는 걸,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걸 아는데 그렇다고 편성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MBS에서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했던 66부작 사극이 방영했을 때가 그러했다.

동시간대 방영한 KNC와 STS의 드라마 시청률을 합쳐도 10%가 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너와 나의 시간』은 『거짓말』과 방영 시기가 일부만 겹치기에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거짓말』이 종영할 때까지는 고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안시현 또한 불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촬영도 순조롭고, 다들 연기도 잘하고 있어. 최창국 PD님의 연출력은 대한민국 톱3고.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연기에만 집중하면 돼.’

그럴 때마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과 동료 배우들의 연기를 믿고, 매 순간 최고의 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스태프들의 노고를 믿었으며, 김희숙 작가의 대본과 최창국 PD의 연출을 믿었다.

마음을 다잡은 안시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올 거예요?

-지금 출발하려고요.

대한영화제에 참석하기 전.

안시현과 최봉팔이 일룡백화점 본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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