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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47화 (4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7화>

47화. 이거 참 큰일이네

-괜찮은 것들로만 추려 놨으니까 직원들 추천받아서 하나 골라 가요. 외부 일정이 있어서 얼굴은 못 보겠네요. 대한영화제 챙겨 볼게요.

안시현은 최봉팔과 함께 자신이 광고를 찍었던 명품 정장 매장을 방문했다.

영화제 참석을 앞두고 협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안시현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10벌의 정장을 차례대로 입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정장을 선택했다.

평소 옷에 신경 쓰지 않는 안시현이기에 직접 고르기보단 추천을 받는 쪽이 나았다.

이후에야 두 사람은 대한영화제에 참석했다.

“오~ 안시현이!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들어?”

“간만에 뵙습니다, 선배님들. 잘 지내셨죠?”

“우리야 뭐 촬영하고 술 마시고 뻔한 인생이지. 우리 막내는 못 본 사이에 유명 인사 되셨던데?”

“부끄럽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얼씨구.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놈이 겸손하기까지 해? 조금 재수 없어지려고 하는데? 안 그러냐, 영민아?”

“정수 선배 오면 그대로 말해 줍시다. 이럴 때 못생긴 사람들끼리 뭉쳐야지.”

안시현은 간만에 송강식과 황영민을 만났다. 거기에 최정수와 김진모까지 합류하며 모처럼 배우들과 기분 좋게 수다를 즐길 수 있었다.

영화제 시작 20여 분 전.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야. 우리 명품 배우님 납셨네. 아주 그냥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지셨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안시현이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던 류성웅과 마주쳤다.

『나는 간첩입니다』 홍보 일정 이후 첫 만남이었다.

심지어 촬영 당시에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첫 촬영 이후 류성웅이 의도적으로 안시현을 피했기에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왜 아는 척이지? 간만에 보니까 시비라도 걸고 싶어졌나?’

안시현은 난데없는 류성웅과의 만남이 떨떠름했지만, 먼저 아는 척을 해 오니 무시하기도 난감했다. 그저 류성웅이 시비를 걸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류성웅이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안시현 너, 7월에 방영 예정인 드라마 촬영 중이라며? 수목드라마 맞지?”

“아, 네. 4월부터 촬영하고 있어요.”

“이야. 인연 참 묘하다. 내가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도 7월에 들어가거든. 심지어 우리도 수목이야.”

“KNC입니까?”

“아니, STS. 7월 초부터 방영해. 그나저나 어떻게 하냐. KNC는 이미 대박 분위기이고, 우리 쪽 제작비도 만만치 않거든. 너희 쪽은 제작비 적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이거 괜히 고래 싸움에 애꿎은 새우 등만 터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 대신 도발을 했다.

공교롭게도 류성웅은 『너와 나의 시간』보다 정확히 일주일 빨리 방영하는 STS의 24부작 수목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것이었다.

이어진 류성웅의 발언으로 인해 그가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 중 가장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음을 알게 됐다.

‘……연기 스타일이 굳어지며 조급해지기 전까진 작품 보는 눈이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 작품을 선택한 거지?’

류성웅의 도발에도 안시현은 긴장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류성웅이 출연한 드라마는 천만 영화를 촬영할 때만큼의 연기를 보여 주더라도 흥행을 장담하기 힘든 난파선이니까.

회귀 전.

『거짓말』의 방영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7월 초에 방영을 시작한 MBS와 STS의 수목드라마는 결과적으로 좋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안시현이 STS의 드라마를 기억하고 있는 건 성적이 워낙 처참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대 드라마 중 3위를 기록했다.

앞에서 말고 뒤에서 말이다.

대본은 준수했지만 PD의 연출력이 평균 이하였고, 배우와 스태프 가리지 않고 트러블이 잦았다. 급기야 시청률이 안 나오자 PD와 배우가 실랑이를 벌이다 멱살잡이를 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결국 촬영 막바지에는 제작진과의 트러블로 주연 배우가 하차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발생하고 만다.

총체적 난국인 드라마에 류성웅이 출연하게 된 거다.

회귀 전의 류성웅은 인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지만 작품 보는 눈은 괜찮았다. 거기에 좋은 연기력이 더해졌기에 천만 배우가 될 수 있었다.

헌데 이번 생에서 보여 주는 행보는 사뭇 다르다.

2001년 개봉할 영화 중 흥행 3위에 랭크될 작품에서 인상 깊은 악역 연기를 선보이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

제아무리 비중 있는 조연이라지만 드라마가 흥행에 실패하면 아무 의미 없다. 망한 드라마에서 연기를 잘해 봐야 제대로 인정을 받기 어렵다.

보는 사람이 있어야 관심도 받는 법이다.

이대로라면 한창 필모그래피를 잘 쌓아 나가다 대차게 삽질을 하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본인이 선택했으니, 결과도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안시현은 류성웅을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깔보듯이 내려다보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동정하겠는가. 솔직히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미치겠는데 말이다.

그래도 류성웅의 말 중 한 가지만큼은 공감됐다.

안시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겠네요. 이거 참 큰일이네.”

정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것 같았다.

다만, 서로가 생각하는 새우가 다를 뿐.

*   *   *

2000년 대한영화제가 화려한 막을 올렸다.

안시현은 기분 좋게 대한영화제를 즐겼다.

리수철과 주지성 연기가 선사해 준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기에 신인상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안시현도 내심 신인상 수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내리 두 작품이 흥행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특히나 『형아, 동생』에서는 흥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주지성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까지 했다.

신인상 후보는 총 다섯 명.

그중 회귀 전 수상자는 대한민국 로맨스 영화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데뷔작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킨 유성재였다.

언론들은 신인상이 유성재와 안시현의 2파전이라 예상했다. 김진모의 이름이 종종 언급되기도 했지만, 차기작이 심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유성재와 안시현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제 22회 대한영화제 신인상 수상자는…… 축하합니다.『나는 간첩입니다』, 『형아, 동생』의 안시현 배우님!”

결국 역사가 달라졌다.

유성재가 아닌 안시현이 더 많은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받아 신인상 수장자로 호명된 것이다.

“오오! 우리 막내가 해냈다!”

“끝나고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 쏘는 거 잊지 마라!”

“크흐흐. 수상 소감 말하다 울지 마라. 영민이 신인상 받고 울어서 아직까지 술안주로 써먹고 있잖아.”

“아, 형님도 거참. 이제 좀 잊을 때도 됐잖습니까.”

안시현이 주위 배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갔다. 마이크 앞에 선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회귀 전 참여했던 대한영화제가 떠올랐다. 22살의 안시현이 아닌 41살의 안시현이 오버랩됐다.

받는 상도, 출연한 작품도, 나이와 환경도 달라졌지만 느끼는 감정만큼은 비슷했다.

‘……해냈다.’

성취감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회귀 후 죽어라 했던 노력들이, 긴 무명 시절을 지우려 했던 발악이 드디어 빛을 본 것 같았다. 회귀 후 품었던 목표에 몇 걸음이나마 다가선 기분이었다.

안시현이 벅찬 감정을 애써 숨겼다.

혹시나 눈시울이 붉어진 건 아닐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천천히 입을 땠다.

“어떤 일을 하건 무조건적으로 절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과, 항상 제게 많은 영감을 주는 영원한 친구 김진모 배우에게 감사합니다.”

안시현은 부모님과 김진모에 대한 감사 인사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리수철과 주지성은 저 혼자서 만든 게 아닙니다. 함께 연기한 배우 분들과 뒤에서 묵묵히 저희를 도와준 스태프분들이 계셨기에 살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연기만 보고 사는, 연기로 보답하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준비해 온 수상 소감은 길지 않았지만, 배우로서 안시현이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수상 소감을 마친 안시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회귀 후 처음으로 수상을 한 이날을,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한편.

남우주연상과 더불어 접전이 예상되었던 올해의 영화상 부문에서는『형아, 동생』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어찌 보면 평범할 수도 있는 시나리오를 배우들의 연기력과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명품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려됐던 흥행 또한 6월 말까지 상영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일찌감치 300만 관객을 돌파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말이다.

무대에 오른 최한수 감독은 눈시울을 붉혔다.

수상자로 호명된 그 순간부터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형아, 동생』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그 순간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몇 년 전, 파출소에서 제 아들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 이후로 『형아, 동생』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메가폰을 잡았지만,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보는 순간만큼은 머리를 비우고 웃고 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인상과 올해의 영화상.

『형아, 동생』은 2개 부분에서 수상을 하며 제22회 대한영화제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   *   *

대한영화제 이후.

안시현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너와 나의 시간』의 주연 배우가 되어 부지런히 내달렸다.

제작진은 방영 전까지 최소 8화, 최대 10화까지 촬영을 끝마치는 걸 목표로 했다. 가능하다면 그 이상 진도를 빼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촬영해 놔야 드라마 막바지에 쪽대본으로 촬영하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제작비가 부족한 것에 비해 촬영은 순조로웠다.

스태프들은 소품을 자체 제작하거나 집 혹은 지인으로부터 공수해 오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배우들은 촬영을 거듭하며 거듭할수록 호흡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 주며 최대한 NG를 적게 내 줬다. 당연하게도 한 신의 촬영 시간이 드라마 평균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방영 전에 10화 그 이상의 촬영까지도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하…….”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었다.

오전 촬영을 앞둔 8월의 어느 날.

최창국 PD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한 배우의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촬영장의 미소천사라 불릴 정도로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는 그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당장 내일 촬영인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출연료는 책임지고…….”

“지금 출연료가 문제입니까!”

매니저는 한참 동안 사과를 한 끝에야 촬영장을 떠났다. 상황을 지켜보던 몇몇 배우들이 최창국 PD에게 다가갔고, 연장자인 박국영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PD님,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선생님. 그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정영철 역을 맡은 배우가 출연을 못 하게 됐습니다.”

“어디 다쳤거나 사고라도 쳤답니까?”

“사고를 제대로 치긴 쳤죠. 어제 입대했답니다. 소속사에서도 어제 저녁에 알았다고 하네요. 부모가 연기를 반대해서 반강제로 입대를 시켰다는데…….”

“으음. 난감하군요.”

배우의 갑작스러운 군 입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최창국 PD가 골머리를 싸맸다.

정영철.

정영빈과 함께 복싱을 다니는 사촌 동생이며, 정영빈과 마찬가지로 J그룹의 후계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훗날 정영빈이 후계 구도에 참여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인물이기도 하다.

내용 전개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역이이라지만 출연 분량이 많지 않다. 배역 자체를 배제하고 대본을 수정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필연적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데…….

최선은 최대한 빠르게 대체 배우를 찾는 것이었다.

김희숙 작가와 한참 동안 통화한 뒤.

최창국 PD가 결론을 내렸다.

“정영철이 포함된 신의 촬영은 대체 배우를 찾기 전까지 모두 뒤로 미루겠습니다.”

큰 키와 적절한 근육질 몸매, 정영철 캐릭터를 빠르게 구축할 만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가 한 명 떠올랐다.

무대에만 서며 브라운관 데뷔는 아직 못 했지만…….

나쁘지 않을 선택지가 될 거라 확신했다.

연기력만큼은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는 배우이니까.

“PD님, 정영철 역에 어울릴 만한 배우를 한 명 알고 있는데 추천해도 될까요?”

안시현의 말을 들은 최창국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장에서 대체 배우를 추천받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고, 무엇보다 안시현은 연기파 배우들의 산실인 대한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좋은 연기력을 지닌 배우를 다수 알 게 분명했다.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연락해 볼게요.”

안시현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몇 분 후, 통화를 끝마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최창국 PD를 바라보았다.

“그…… 전화 받자마자 택시 탔다는데요?”

“오디션은 최대한 빨리 볼수록 좋은 거죠. 일단 정영철 출연 신 배제하고 촬영 진행하겠습니다.”

최창국 PD는 부디 안시현이 추천한 배우가 정영철 역과 잘 어울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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