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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48화 (4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8화>

48화. 달달한데?

안시현이 추천한 배우가 정영철 역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작진과 배우들은 불안함을 애써 숨긴 채 촬영에 임했다.

그로부터 1시간쯤 지났을 때.

“허억, 허억…… 늦,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 사내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장 최창국 PD에게로 달려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PD님! 정영철 역 비공개 오디션을 보러 온 우정태라고 합니다!”

그는 바로 안시현의 3학번 선배 우정태였다.

“반가워요, 정태 씨. 저희가 좀 급해서 그런데, 한 신만 보고 판단할까 하거든요. 괜찮겠어요?”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1시간 드릴 테니 이 신 연습해서 오시겠어요?”

최창국 PD가 우정태에게 대본을 건넸다.

정영빈과 정영철이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치면서 대화를 나누는 신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식사하고 30분 더 쉬었다 가겠습니다.”

때마침 점심 식사를 할 때가 됐기에, 최창국 PD는 잠시 촬영을 중단시켰다.

그사이 안시현은 우정태에게 다가가 최봉팔이 가져다준 수건을 건네줬다.

“형, 땀 좀 닦아요. 등까지 땀으로 다 젖었네. 차에 갈아입을 옷 있는데 빌려줄까요?”

“아, 응. 부탁 좀 할게. 이상하게 차가 막혀서 늦을까봐 뛰어왔더니 꼴이 이렇다.”

우정태는 안시현으로부터 티셔츠를 빌려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가 안시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시현아. 하도 오디션에서 떨어지다 보니 당분간 데뷔하는 거 포기하고 있었거든. 졸업 후에나 다시 도전하려고 했는데…….”

“에이. 캐스팅 여부는 형의 연기에 달려 있는걸요. 전 감독님께 추천해서 기회만 제공한 거죠.”

“나한테는 그 기회조차 소중해.”

우정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대본을 살펴보았다. 평소 활발하고 오버 액션을 잘하는 우정태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의 그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참 안타까워. 조금만 더 버텼으면 빛을 봤을 만한 좋은 배우인데…….’

회귀 전.

우정태는 안시현처럼 긴 무명 시절을 겪었고, 끝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배우를 그만둔 케이스였다.

연기를 잘한다고 모두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뒤늦게 빛을 보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배우들도 일부 존재하지만, 빛을 보기 전에 현실적인 이유로 꿈을 포기하는 배우들이 그보다 더 많다.

우정태의 경우 후자였다.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사귄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고, 생계를 위해 동문들의 추천을 받아 매니저 생활을 시작했으니까.

‘지금 이 시기, 내가 아는 무명 배우들 중 정태 선배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찾기 힘들다. 무엇보다 선배의 성격과 정영철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기도 하고. 평소의 반만 보여 줘도 캐스팅이 될 거야.’

안시현은 우정태를 추천한 건 단순히 사정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그가 좋은 연기력을 지녔으며, 이미지 또한 정영철과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시현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우정태가 정영철 역에 캐스팅되어 촬영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지 않길 말이다.

‘제발 정태 선배가 캐스팅되기를…….’

*   *   *

“간만에 스파링 한 번 할까?”

“오늘따라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데? 영빈이 너 무슨 일 있냐?”

“형이 조언 하나만 해도 되냐?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철저하게 숨겨. 어설프면 물어뜯길 거야. 나처럼.”

“뭐…… 그래도 난 네가 이겼으면 좋겠다. 너도 알다시피 다른 형제들은 좀 재수가 없잖냐. 흐흐.”

결과적으로 안시현의 판단은 옳았다.

평소 활달하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기로 유명한 우정태는, 밝고 오지랖 넓은 성격의 정영철 역과 이미지가 잘 어울렸다.

덕분에 우정태는 1시간 동안 급조했음에도 제법 그럴듯한 정영철 캐릭터를 보여 줄 수 있었다.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평소 성격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됐으니까.

촬영에 들어가려면 좀 더 탄탄하게 캐릭터를 구축해야겠지만, 1시간 동안 급조한 것치고는 기대 이상의 완성도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연기력 또한 제법 괜찮았다.

중학교 때부터 해온 연극부 활동과 대학교에서의 동아리 활동, 방학 때는 극단 광대들에서 단역으로 무대에 서며 착실히 내공을 쌓았다. 그 덕분에 고작 1시간 동안 그럴 듯한 캐릭터 구축을 할 수 있었던 거다.

‘약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최창국 PD는 우정태의 연기에 꽤나 높은 점수를 매겼다. 연기력만 놓고 보면 며칠 말미를 주고 바로 촬영을 해도 될 것 같았지만…….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정영철은 정영빈과 함께 복싱을 취미로 즐긴다. 때문에 탄탄한 근육질 몸매라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대본 상 상반신 노출까지 있다.

평소 운동을 즐기고 키도 큰 우정태이기에 비율이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 더 근육량을 늘리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정태 씨.”

“네, 감독님.”

“보름 드릴 테니 캐릭터 완성해 올 수 있겠습니까? 운동도 좀 했으면 좋겠고요. 시현 씨만큼은 아니라도 각이 좀 잡히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든지 해내겠습니다! 삼시세끼 단백질만 먹으면서 죽어라 운동하고, 운동하면서 대본 보며 캐릭터 구축하겠습니다!”

최창국 PD가 미소를 지었다.

촬영장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의욕 넘치는 우정태의 모습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최장국 PD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우정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보름 후부터 밀린 신 몰아서 촬영해야 하니 정신없을 겁니다. 준비 잘하고, 앞으로 잘해 봅시다.”

“감, 감사합니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한 배우의 갑작스러운 군 입대로 생긴 문제가 몇 시간 만에 봉합되는 순간이었다.

*   *   *

갑작스러운 정영철 역 비공개 오디션 이후, 우정태는 계약서를 쓰고 급한 대로 연습에 필요한 대본 일부를 받아 들고서 현장을 떠났다.

안시현은 최봉팔에게 우정태를 역 앞까지 데려다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덤으로 최봉팔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최봉팔이 촬영 현장에 복귀했다.

“지하철 타는 거 보고 왔다.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피트니스 센터 알려 줬어. 몸매 만드는 데엔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라 보름이면 그럴듯해질 거야. 기본적인 근육량은 괜찮아 보였으니까.”

“고마워요, 형.”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나저나 다행이네. 배역 펑크 때문에 촬영 스케줄 죄다 꼬일 뻔 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무리됐잖아.”

“그러게요. 딜레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배우 물색하는 시간을 줄였으니 전화위복이라 생각해야죠.”

안시현의 추천과 우정태의 좋은 연기가 더해지며 문제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정영철이 출연하는 신의 재촬영과 촬영 연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우정태에게는 캐릭터 구축과 운동을 위해서 보름의 시간이 주어졌다.

보름 후면 6월 말이다.

『너와 나의 시간』이 7월 12일부터 방영한다는 걸 감안하면 타이트한 스케줄이지만, 펑크 난 배역을 채우기 위해 시일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았다.

이 정도면 사실상 완벽에 가까운 대처였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덕분에 키스신 촬영 앞당겨졌네.’

안시현의 키스신 촬영이 앞당겨졌다는 정도였다.

정영철이 출연하는 신의 촬영이 모두 보름 이후로 밀리며 다른 신의 촬영 스케줄이 앞당겨졌다. 때문에 안시현은 이틀 후 키스신을 촬영하게 됐다.

키스신을 촬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몇 번 경험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썩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명품조연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웬만한 배역은 다 찰떡같이 소화해 본 안시현이지만, 유독 키스신만큼은 어색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정확히는 연인 간의 감정선을 연기로 표현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는 건데…….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러려고 진모의 장점을 흡수하려 노력한 거잖아.’

사실 정영빈 캐릭터는 지금껏 안시현이 맡아 왔던 배역들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관심 없고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안수진을 챙기고, 아무 사이 아닌 척 하다가도 안수진과 관련된 일에는 유독 과민반응을 보이곤 했다. 실컷 까칠하게 대해 놓고 안수진의 소개팅을 방해한 적도 있다.

그런 정영빈이 처음으로 안수진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게 이틀 후 촬영 예정된 신이다.

여기에 키스신은 덤이다.

심지어 정영빈은 드라마 후반부에 가면 무뚝뚝한 척하면서 온갖 닭살 멘트를 거리낌 없이 내뱉으며 안수진을 향한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기기까지 한다.

난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기존의 안시현이라면 자신감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영빈의 매력을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방향으로 표현하기 위해 김진모의 장점을 일부 흡수하며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준 지금은, 온갖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신들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기대됐다.

정혜영에게 연기를 보여 준 이후 좀처럼 변화를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정영빈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키스신 전후로 감정 표현이 달라지기에, 김진모로부터 흡수한 장점을 제대로 써먹는 건 사실상 키스신부터가 될 거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불 한번 질러 보자고.’

이틀 후.

안시현이 예정되어 있던 키스신의 촬영에 임했다.

*   *   *

6화의 초반.

비서 유은서가 급성 맹장염으로 인해 입원하고 만다.

백화점 지점 확장 건과 관련해 중요한 미팅이 연달아 잡혀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한 변수에 정영빈은 크게 화를 낸다.

“유 비서 해고하세요.”

“하지만 유 비서는…….”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해고 절차 밟으세요. 주요 미팅을 앞두고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비서, 제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영빈이 유은서를 해고하려고 한다. 임원들의 반대에도 단호하게 유은서를 내치기로 결심했다.

아파서 입원한 게 유은서의 잘못은 아니다. 정영빈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중요한 일정을 앞둔 상황에서 변수가 발생하자 그 대상인 유은서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유은서가 해고되기 직전.

“들어가게 해 주세요!”

“사장님 허락 없이는 안 됩니다!”

“사장님! 명품관 안수진 사원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만 들어가게 해 주세요!”

“들여보내세요.”

안수진이 정영빈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쿵!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무릎부터 꿇었다. 그 모습을 본 정영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은서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늦었습니다.”

“저 휴가 냈어요. 은서가 회복되기 전까지 제가 업무 대신할게요. 은서 어머니 병원비도 내야하고 동생 뒷바라지도 해야 돼요. 은서 해고되면 은서네 길바닥에 나앉아야 돼요. 아무 문제없도록 제가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해고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사정을 하던 안수진은 급기야 눈물까지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정영빈은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서류에 사인을 하려던 만년필을 내려놓고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실수하면 바로 해고 절차 밟을 겁니다.”

그렇게 안수진의 비서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하지만 시작부터 문제였다.

“뭐해요, 운전석에 안 타고.”

“아…… 제가 운전해야 하는 건가요?”

“그럼 제가 하겠습니까?”

정영빈은 운전기사를 쓰지 않았다.

차에서 업무와 관련된 통화를 자주하고 비서에게 스케줄을 체크하곤 하는데, 그것을 운전기사가 듣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실제로 면세점 입찰 건 당시 산업스파이가 운전기사로 위장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정영빈에게는 유은서가 비서 겸 운전기사였다. 따라서 안수진이 유은서를 대신해 비서 역할을 수행하려면 운전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안수진은 장롱 면허였다.

“운전할 줄 몰라요?”

“아, 아뇨. 면허 있습니다. 다만 면허 따고 운전을 몇 번 안 해 봐서…… 그래도 해 보겠습니다!”

안수진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운전석에 탔다.

딱 봐도 어설퍼 보이는 움직임으로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액셀이고 이게 브레이크, 이건…….”

“후우. 내려요.”

“그, 그치만 운전 못하면…….”

“됐으니까 내려요. 운전은 내가 할 테니, 안수진 씨는 비서로서의 업무에만 집중하세요. 명령입니다.”

안수진이 마지못해 조수석에 탔다. 유은서로부터 받아 온 다이어리를 살펴보며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영빈은.

“안수진 씨.”

“……네?”

안수진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얼굴을 바짝 붙인 뒤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급해도 안전벨트는 매야죠.”

손수 안수진에게 안전벨트를 매 줬다.

안전벨트 하나 매 줬을 뿐인데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안수진과, 그런 안수진을 애써 무시한 채 무덤덤하게 액셀을 밟는 정영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창국 PD는…….

‘이야. 완전 달달한데?’

6화의 분위기가 핑크빛일 것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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