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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49화 (4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49화>

49화. 방금 결정했습니다

정영빈과 안수진.

1화부터 6화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요약하자면, 밀고 당기기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감정을 드러낸 건 정영빈이었지만, 막상 안수진이 마음의 문을 열자 거리를 뒀다. J백화점을 발판 삼아 J그룹까지 차지하겠다는 야심으로 인해 안수진을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안수진이 정영빈의 마음속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간다는 거였다. 밀어내려 노력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좁혀져 갔다.

결국.

안수진의 비서 아르바이트를 계기로 정영빈은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게 된다. 시청자들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만큼, 감정 표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다행히 시작은 좋았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평소와 달리 살짝 낮은 톤과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안전벨트를 매 준 정영빈과, 스킨십을 하는 줄 알고 긴장했다가 별일이 없자 민망해져서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안수진.

밀고 당기기의 끝을 알릴 서막이었다.

‘정영빈은 안수진을 비서로서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야. 안수진과 3일 내내 붙어 있다는 게 좋아서,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즐기는 거지.’

사실 비서로서 안수진이 한 거라고는 옆에 함께 있는 것과 스케줄을 알려 주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의 외부 미팅 업무는 정영빈이 혼자서 처리했다.

정영빈은 외부 미팅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와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나 고민한다.

이에 주위 상권 조사를 핑계로 안수진과 데이트를 즐기고, 짜증을 내면서도 안수진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귀걸이를 사줬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은 건 화룡점정이었다.

미팅 중에는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모습을 보이다, 단 둘이 있을 때면 그나마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은근슬쩍 챙겨 주는 게 포인트였다.

‘6화까지의 정영빈은 안수진 한정 츤데레다.’

안시현은 촬영 내내 정영빈의 캐릭터성을 되새겼다. 몰입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꾸준히 암시를 걸었다.

외부 미팅 3일 차.

백화점 지점과 관련된 모든 미팅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정영빈이 휴게소에 들렀다. 낮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안수진의 식사를 챙겨 주기 위해서였는데…….

“…….”

막상 주차를 해 놓고도 정영빈은 안수진을 깨우지 않았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곤히 자는 안수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정영빈이 손을 뻗었다. 안수진의 코끝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걷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안수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깼어요?”

정영빈이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안수진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댄 이 상황이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 오해하지 말아요. 무슨 짓 하려는 게 아니고, 머리카락이 코를 간질이는 것 같아서 걷어 주려던 거니까.”

“사장님이라면 무슨 짓 해도 되는데…….”

“안수진 씨.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 하지 마세요.”

“그럼 오해 안 하게 제대로 말할게요. 저 사장님 좋아해요. 사장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순간 정영빈의 말문이 막혔다.

안수진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단둘이 있을 때면 은연중 호감을 드러내곤 했으니까.

다만 직접적으로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장님도 알고 있잖아요. 알면서도 계속 모르는 척하고 계시잖아요. 마음은 안 받아 주면서, 왜 자꾸 잘해 주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너무 헷갈려요. 이제 그만 헷갈리게 않게 해 주세요.”

급기야.

속마음을 털어놓은 안수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영빈의 이중적 태도를 겪으며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진심을 털어놓는 순간 터져 버린 것이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사장님이 저 싫다고 하면 더 이상…….”

물기 어린 안수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영빈의 입술이 용기를 내 말을 이어 가던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으니까.

정영빈이 덜덜 떨리는 안수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안수진은 따뜻한 정영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이 상황이 끝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나저나 이게 대답은 맞는 건지, 그러고 보니 이게 첫 키스인데 등,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충동적인 키스 후.

정영빈이 안수진을 응시했다.

애써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안수진의 얼굴에 손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귓불까지 붉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첫 만남 이후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결정했습니다.”

“저랑…… 사귀기로요?”

“아뇨. 안수진 씨와 J그룹, 둘 다 내 것으로 만들기로요.”

그리고 이어진 또 한 번의 키스.

6화의 대미를 장식할 장면이 완성됐다.

*   *   *

우정태의 캐스팅으로부터 보름 후, 드디어 정영철이 출연하는 신의 촬영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우정태는 안시현이 판단한 대로 제법 괜찮은 배우였다. 원래부터 근육질 몸매였지만 보름 동안 열심히 운동했는지 더욱 보기 좋아진 상태였고, 거기에 핵심인 정영철 역 캐릭터 구축까지 잘해 왔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의 몰입도 또한 좋았다.

촬영 전에는 특유의 활달한 성격으로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며 잘 어울리다가도, 촬영을 하는 순간에는 정영철 캐릭터에 확실히 빠져들었다.

최창국 PD를 걱정시켰던 정영철 역의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모양새였다.

이대로 더 이상 문제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6월 말.

첫 방영을 보름여 남겨 둔 시점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또다시 터지고 말았다.

“아니, 선배. 상의 탈의는 또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허가 난 거였잖아요.”

“와! 나 진짜 돌겠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저희 첫 방영 보름 남았다고요. 안 그래도 스케줄 빡빡한데 다시 찍으라고요?”

“아니, 지금 몇 신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젠장. 그래요, 까라면 까야죠. 월급쟁이 새끼가 회사의 지침에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통화를 끝낸 최창국 PD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싸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안시현과 우정태를 불렀다.

새로 생긴 문제는 상의 탈의 건이었다.

제작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최창국 PD는 복싱 신에서 상의 탈의를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혹시 몰라도 몇 차례 거듭 확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9화를 촬영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난데없이 상의 탈의가 안 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한 아이돌 그룹 멤버 두 명이 음악방송에서 상의탈의를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학부모들의 단체 항의가 들어온 게 문제가 됐다. 상의 탈의를 하는 방송국을 보이콧하겠다는 학부모 단체도 있었다.

결국 MBS에서는 음악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예능과 드라마에서도 상의 탈의를 금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여파가 『너와 나의 시간』에도 미쳤다.

방영까지 고작 보름 남은 시점에서 상의 탈의와 관련된 모든 신의 재촬영과 편집이 이뤄져야 한다.

신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까지 촬영된 분량만을 놓고 보면 도합 여덟 신.

문제는 방영을 보름 앞두고 있다는 거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우정태가 합류한 후 재촬영을 했던 신이다. 특정 사유로 인해 같은 신을 세 번이나 촬영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

이 모든 상황이 최창국 PD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일단 해당 신들부터 재촬영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최창국 PD의 말을 들은 안시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신을 재촬영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당황하거나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이 정도는 변수 축에도 못 끼지.’

안시현은 촬영장에서 온갖 경험을 다 해 봤다. 심지어 방영을 한 달 앞두고 작가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서 주연 배우 중 한 명이 하차하는 것도 지켜본 적이 있다.

정영철 역을 맡은 배우의 입대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상의 탈의 이슈로 인한 재촬영 정도는 괜찮았다.

게다가 신이 많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PD님, 다이렉트로 촬영하고 끝내 버리죠. 복싱장 안에서 촬영하는 거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잖아요.”

“저야 그러면 좋지만……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얼른 끝내고 한숨 자고 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정태 형이랑 같이 나오는 신부터 먼저 촬영하죠.”

“으음. 알겠습니다. 일단 액션 스쿨 쪽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스케줄이 되는 배우가 있나 모르겠네요.”

다행히 액션 스쿨 쪽에서는 갑작스러운 요청임에도 배우 몇 명을 보내 줬다. 심지어 이전에 복싱 신을 촬영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들이었다.

덕분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스파링을 하는 신에서는 안시현의 몸치 성향을 감안해 대역을 써야 했지만, 몸을 풀거나 샌드백을 치는 장면은 안시현이 직접 몸을 썼다.

몸매를 드러내는 것 또한 문제가 없었다.

굳이 상의 탈의를 해야지만 배우의 근육질 몸매를 드러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중간에 숨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무려 여덟 신을 연속으로 촬영하는 강행군에도 안시현은 좀처럼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촬영을 거듭할수록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함께 촬영하는 배우들이 영향을 받을 정도로 매 순간 정영빈에 대한 몰입을 유지했다.

촬영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배우도 스태프도 지친 상황에서 안시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에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봉팔 형…… 저 진짜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근처 모텔에 던져 주세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못할 것 같아요.”

차에 타자마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   *

안시현은 촬영 내내 열정적으로 임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촬영장 안에서만큼은 결코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단 한 신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으며, 매 순간 자신의 최고치를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른 배우들도 그런 안시현에게 보폭을 맞춰 줬다.

몇몇 변수에도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이 순조로울 수 있었던 건, 주연 배우인 안시현이 흔들리지 않은 영향이 컸다.

그만큼 안시현은 간절했다.

회귀 전과 달리,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제작하게 된 『너와 나의 시간』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었다.

어느새 남은 보름에서 절반이 사라졌다.

2000년 7월 6일 금요일.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 발표회.

배우들과 함께 회의실에 있던 최창국 PD는, 한 스태프로부터 제작 발표회에 참여한 기자의 수를 전해 듣고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11명 왔습니다, PD님.”

“허, 이거 참…….”

“으음. 생각보다 더 적게 오긴 했네요.”

“STS 쪽에는 50명 넘게 왔었다던데 좀 너무하네.”

애석하게도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 발표회에 참여한 기자는 도합 11명, 그마저도 방송사인 MBS와 출연 배우들의 소속사에서 부른 기자들이었다.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불과 일주일 전, STS의 새 수목드라마 『사랑하고 싶어』에 엄청난 관심이 쏠린 것과는 대조됐다.

삽시간에 회의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제작발표회에 대한 관심이 예상보다 더 적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언론들이 저희 드라마에 관심 없을 거라는 거 충분히 예상했잖아요.”

기자들의 무관심에도 최창국 PD는 무덤덤했다. 제작 발표회에 기자들이 몰리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일찌감치 예상한 바였으니까.

KNC의 『거짓말』은 15화에서 시청률 40% 돌파에 성공, 50%를 향해 고공 행진 중이다.

STS에서 전날 방영을 시작한 『사랑하고 싶어』는 하이틴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운 적극적인 홍보 전략을 택했고, 7.5%의 시청률로 괜찮은 시작을 알렸다. 『거짓말』이 종영하는 10화 이후부터 도약하는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했다.

반면…….

『너와 나의 시간』은 두 작품에 비해 제작비와 출연진의 이름값 등 모든 면에서 현실적으로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내세울 거라고는 안시현뿐이다.

문제는 안시현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동시간대에 방송할 다른 두 드라마에 비해 화제성이 확연히 떨어졌다.

제작 발표회에 대한 관심이 뒤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예견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무덤덤한 최창국 PD를 바라보며 출연진 중 최연장자인 박국영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96년도였나…… 내가 출연한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온 기자가 5명이었어. 그중 4명은 방송사에서, 1명은 우리 회사에서 보낸 기자였지.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예상 못했을 거야.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드라마가 역대 최고시청률 1위를 기록할 거라고 말이지.”

“아, 선생님. 혹시 그…….”

“허허허. 자네가 생각하는 그 드라마 맞아. 내 말은, 제작 발표회에 참여한 기자의 수가 작품의 흥행을 판가름하는 게 아니란 거야. 배우가 제작 발표회로 말하는 직업은 아니잖아?”

박국영의 말에 불안해하던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비가 적고 출연진의 이름값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작품이라 해서 흥행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제작 발표회로 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전례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던가.

그제야 배우들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다들 제작 발표회에서 기죽지 말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자면서 각오를 다졌다.

그 와중에도…….

‘아…….’

배우들 중 단 한 사람.

‘저녁 뭐 먹지?’

안시현만큼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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